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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라] 스틸컷
8월 7일 오전 11시, 강남 삼성역 근처 포스코센터 앞마당에 현수막과 팻말을 든 사람들이 모였다. “포스코는 A등급이 아니라”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한 그들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노동권과 인권을 침해해 왔으며 국내 11%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도 모자라 삼척에 거대한 화력발전소를 세우는 포스코를 규탄하는 집회를 연 것이다. 어떤 로비가 주효했는지, 국내의 ‘지속가능성대회’에서 수상했다는 걸 포스코는 자화자찬하지만, 국제사회는 달랐다. 미얀마 군부정권을 지원하면서 온실가스를 마구 배출하기에 낙제점을 받았다. 그 사실을 발언과 성명서 낭독으로 시민에게 전하는 자리였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포스코센터 앞에서 참여단체의 발언이 이어지는 도중에 한 무리의 외국인 청년들이 지나갔다. 차림새를 보니 스카우트 대원이었다. 새만금 야영지를 중도에 빠져나갔다는 영국 단원의 일부로 보였다. 밝고 생글생글한 청년들은 재잘거리며 무언가 수첩에 적고 스마트폰으로 고층빌딩이 즐비한 주변 풍경을 연신 사진으로 담았다. 시위하는 모습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간혹 손을 흔드는 청년들은 서울에서 어떤 꿈을 그릴까? 8월 1일부터 12일까지 예정된 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의 주제는 “네 꿈을 그려라.”라고 했다. 질척질척하고 뜨거웠으며 벌레가 많은 새만금보다 훨씬 쾌적한 서울에 왔는데.
이번 세계스카우트잼버리는 150여 개 회원국에서 참가한 수만 명의 청소년과 지도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화를 교류하고 우애를 나누면서 청소년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는 목표를 세웠다. 관련 홈페이지는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를 배우고 지역사회의 평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행동에 청소년들이 참여한다고 홍보한다. 그를 위해 새만금 벌판의 야영장과 주변 변산반도국립공원, 그리고 인근 송광사를 비롯한 사찰과 숲에서 여러 체험 행사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태풍이 예보되었다. 행사를 책임진 우리 정부는 새만금과 주변에서 예정된 모든 행사를 조기 종료하고 모든 참여자를 긴급 철수하기로 했다.
어쩌면 잼버리 조직위원회는 태풍이 은근히 고마워할지 모른다. 무더운 날씨와 참기 어려운 뙤약볕, 그리고 달려드는 벌레와 모자라는 의약품으로 영국과 미국의 스카우트 대원은 이미 철수한 뒤였고 남은 국가의 참가자들도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부색, 종교, 언어를 초월하여 세계잼버리의 행사와 활동에 참여하여 개척정신과 호연지기를 기르고, 심신의 조화있는 발달을 꾀함으로써 자아실현을 도모하여 국가 발전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지만, 자신의 의지로 먼 나라까지 방문한 청년을 고생문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척정신과 호연지기는 막무가내 고역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잼버리 본부는 야영장과 행사 예정지가 태풍 영향권에 들어 운영이 어려워졌기에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태풍 영향이 적고 안전한 수도권으로 대피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철수해 수도권 여기저기에서 체험 행사에 참여하면서 개척정신과 호연지기를 기르던 영국과 미국의 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3만 6천 참여자들은 이런 조치를 환영할까? 언론은 아쉬움과 다행이라는 청소년의 반응을 전하던데, 이번 행사에서 언론은 취재가 자유롭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했다. 뜨겁고 질척질척한 매립지에서 세계 청소년들은 어떤 개척정신을 배양하고 호연지기를 연마했을까? 그들은 새만금이 얼마 전까지 갯벌이었고, 갯벌은 기후위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예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럴 기회는 있었을까? 미덥지 않다.
잼버리에 참가한 외국 청소년은 어떤 기억을 안고 돌아갈까? 야영지의 고통은 젊은 시절 사서 고생한 통과의례로 치부하고 말까? 대한민국의 산과 들의 수려함, 수도권의 높고 빠르며 화려함을 보고 감탄할까? 예정보다 빨리 퇴영한 청소년에게 K-문화와 K-관광을 안내하라는 대통령의 당부가 있었다는데, 남은 4박 5일 동안 만날 시민의 환대에 감사할까? 알 수 없는데, 말과 탈이 많던 새만금 야영지를 서둘러 탈출했든, 조직위원회의 철수 계획에 따라 빠져나왔든, 수도권 어디에서 펼칠 k-팝 콘서트에 높은 기대를 하는 건 아닐까? 그건 아무래도 좋다. 한국을 찾은 해외 청소년들이 즐겁고 의미 있는 기억을 담고 떠나길 바란다. 하지만 기후위기 현장을 체험한 청소년들이 새만금의 원래 모습을 모르고 떠나는 건 아쉬운 노릇이다. 나무 하나 없이 질척질척하고 더럽고 벌레 많은 공간으로 기억하다니.
이맘때 한계를 모르지 않을 사람들이 하필 새만금 벌판에서 야영하도록 고집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이 자리에서 따지려는 건 아닌데, 은근히 탐욕 냄새가 풍기는 건 사실 아닐까? 만일 매립되지 않은 새만금 일원을 청소년들이 보고 체험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간직할 수 있었을까? 전통 채취로 어패류를 잡고 맛보면서 갯벌과 해양생태계의 풍요로움과 가치를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드넓던 갯벌은 사라졌다. 불과 20여 년 전이지만, 돌이킬 수 없다. 회상은 호연지기와 관계없다. 안타까워도 희망이 있다. 새만금 갯벌이 되살아나는 곳이 있다. 전과 다른 모습이라도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면서 수많은 해양 동식물과 새들이 고맙고 장엄하게 모여든다. 물론 안쓰럽다. 하필 군사용일 가능성이 높은 비행장 개발이 예정된 곳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을 다시 전파할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면 생태계를 살려야만 한다. 생태계의 동식물 다양성이 살아나야 재난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광활한 갯벌이던 새만금은 바닷물이 다시 흘러들어야 생태계가 회복된다. 그 분명한 모습을 영화 <수라>가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새만금의 역사, 풍경, 사람의 애환을 잔잔하게 펼쳐놓은 <수라>를 이번 잼버리에 참가한 청소년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체험 행사의 일환으로 <수라>를 단체로 관람한다면 세계스카우트연맹이 지향하는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내일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회복되는 생태계를 떠올리며, 평화를 해치고 기후위기를 촉발하는 비행장으로 이곳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세계스카우트연맹은 물론, <수라>를 만든 황윤 감독, 그리고 <수라>를 보고 감동한 대한민국 시민에게 이번 잼버리 목표는 충분히 성취할 게 틀림없다. 그래야 새만금 벌판에서 조기 퇴영한 청소년에게 덜 미안할 것 같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60플러스기후행동 공동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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