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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로 변한 카니쉬카대탑터> |
탁실라 불교유적을 둘러본 뒤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2002년 4월22일 옛 간다라국 중심인 푸루샤푸라(현재의 페샤와르. 쿠샨왕조 수도)로 향했다. 페샤와르는 예부터 이란이나 그리스 등 서방문화와 동방의 인도문화가 마주치는 무대였다. 사카족(스키타이)이나 쿠샨족(한역 貴霜) 같은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또한 카이버 고개(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있는 험한 산길) 넘어 페샤와르에 진입, 인도 대륙 중앙부로 진출했다. 때문에 페샤와르는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국제적 분위기를 자아낸 지역이자, 상업교역로의 중계지점이기도 했다.
아쇼카왕 이후 인도불교 발전에 최대 공헌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는 중국 측 문헌에도 자주 나온다. 〈한서〉 〈후한서〉 등에는 보이지 않지만 ‘계빈국’이 아마 간다라 주변 소국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다라가 정식으로 등장하는 중국 측 역사서는 위진남북조시대 저술된 〈북사(北史)〉. 여기에 ‘건타국’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간다라다. 이후 법현스님, 송운(宋雲), 현장스님, 혜초스님 등은 반드시 간다라를 거쳤고, 간다라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들의 여행기에 기록돼 있다. 이들의 여행기나 경전 등에 나오는 ‘간다라’라는 명칭은 다양하다. 건타위(불국기), 건타라(乾陀羅. 송운행기), 건타라(健馱羅. 대당서역기), 향행국(香行國. 속고승전), 향편국(香遍國. 일체경음의) 등이 그것이다.
<페샤와르 위치도> |
돈황 출신인 송운은 혜생(惠生)스님과 함께 신귀(神龜) 원년(518) 11월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타클라마칸 사막 남단(사막남로)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오장국 등을 지나 520년 건타라국에 당도했다. “토지는 오장국과 비슷하였다. 본래 이름은 업파리국으로 갈달국에 멸망당하자 이내 칙근(勅懃)을 왕으로 세웠다.…(중략)…다시 서남쪽으로 60리 걸어 건타라성에 이르렀다. 동남쪽으로 7리를 가면 작리탑(雀離塔. 카니쉬카대탑)이 있다”며 〈송운행기〉에 간다라 관련 사항을 기록해 놓았다.
<페샤와르 시내를 달리는 버스와 여승객.> |
다음날(지난해 4월23일). 옛 페샤와르의 영광을 보기 위해 페샤와르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박물관엔 수많은 간다라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불상 등 불교유적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물들 가운데 단연 돋보인 것은 ‘카니쉬카왕 사리용기’였다. 스리나가르와 탁실라에서 만난 적이 있던 카니쉬카대왕을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간다라 지방이나 캐시미르 지방(스리나가르가 있는 곳)을 포함한 북서인도 불교는 쿠샨왕조 성립과 동시에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쿠샨족은 대월지족으로 중앙아시아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다.
<페샤와르 샤지키델리에서 발굴된 카니쉬카 사리용기> |
카니쉬카대왕의 보호를 받은 불교는 간다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당서역기〉엔 이렇게 나온다. “예로부터 인도의 국토에는 여러 논사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나라천연보살·무착보살·세친보살·법구보살·여의보살·협존자 등의 본향이 바로 건타라국이다. 승가람은 천여 곳 있지만 부서지고 황폐해졌다.” 쟁쟁한 보살들이 간다라에서 태어나 그들의 재량을 마음껏 발휘했고, 그들을 외호해준 인물이 바로 카니쉬카대왕이다. 그러나 현장스님이 방문할 7세기 당시 불교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카니쉬카王 동전에 부처님 새겨
보호막 안에 있는 ‘카니쉬카왕 사리용기’를 보았다. 카니쉬카왕이 페샤와르 샤지키델리에 세운 불탑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송운행기〉에 나오는 작리탑이 바로 샤지키델리의 카니쉬카대탑. 유부 교단에 바친 카니쉬카대탑에서 발굴된 사리용기의 뚜껑에는 연꽃대좌에 앉은 불상이 있고, 불상 좌우엔 범천과 제석천이 시자로 배치됐다. 소위 ‘3존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양식상 간다라 초기불상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분석한다. 사리용기 자체 면에는 카니쉬카대왕으로 보이는 인물이 태양과 달을 좌우에 거느린 채 앉아있다.
박물관 2층에 올라가 카니쉬카대왕이 만든 동전을 살폈다. 불상을 새겨 넣고, 옆에 그리스 문자로 ‘Boddo’(붓다)라고 적어놓은 동전이었다. “동전에 부처님을 넣을 정도로 카니쉬카왕은 독실한 불교도였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그러나 다음날(4월24일) 취재팀은 경악하고 말았다. 일은 샤지키델리에서 벌어졌다. 그렇게 불교를 보호한 왕이 사라진지 2000년이 지나서 그런지 샤지키델리는 이슬람 공동묘지로 변한 상태였다.
묻고 물어 어렵게 찾아갔는데 묘지들만 따가운 태양 아래 자욱했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엔 “‘내가 입적한 후 400년 지나면 어떤 왕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이름을 가니색가(카니쉬카)라 할 것이다. 그는 이 곳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스투파를 세우리니.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사리들 대부분이 그 안에 모일 것이다’고 부처님이 아난존자에게 말했다. 비발라수 남쪽에 스투파가 있는데 가니색가왕이 세운 것이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그 스투파가 건립된 곳이 샤지키델리며, 샤지키델리에서 발견된 사리용기가 어제 박물관에서 본 그 사리용기다. 그런데 그곳이 이슬람 공동묘지로 변하고 말다니. 안내인에게 몇 번이고 “여기가 정말 샤지키델리가 맞느냐”고 물었지만 “맞다”는 답만 들려왔다. 씁쓸했다. 발걸음을 돌려 나오는데, 멀리 묘지들 사이로 보리수가 한 그루 보였다. 바람에 파란 잎을 나풀거리는 보리수가 그나마 위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