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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육십령에 대한 기억은 십여 년 전 무박으로 백두대간을 탈 때와 그 언제인가 친구와 장계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택시를 대절해 남덕유로 오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이 너무도 흐릿하지만 육십령이란 지명은 생생하다. '육십'이라는 낱말이 우리 생에서 중요한 뜻이 있기에 더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둠 속에 본 육십령을 오늘은 대낮에 보게 된 것이다. 동물이동식 터널이 뚫려있고 휴게소가 쓸쓸하게 서 있다. 오늘의 산행 구간은 육십령에서 중재까지 약 18Km다. 대간 길을 북진하고 있는 전체 여정에서 보자면 중재에서 육십령으로 향해야 맞겠지만 오르막 산세를 줄여 피로감을 덜자는 한 총대장의 생각이다.
육십령은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을 가르는, 영호남의 경계가 되는 대표적인 고개 이름이다. 고개는 지형을 가르기도 하지만 문화도 나눈다. 고개는 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있어 소설 속에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개는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고 비극의 현장이기도 한데 나는 소통의 개념에 큰 가치를 두고 싶다. 고갯마루마다 있었던 주막은 두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아닌가?
그러나 고개마다 터널이 뚫려 그 소통은 없어지고 직통의 무관심과 추억의 옛길로 남아 있다.
주막대신 여기 육십령 휴게소도 옛날 번성했던 한 때를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대로 비가 올 기미가 있더니 이내 이슬비가 오고 있다. 40여 명의 대원들은 부랴부랴 채비를 차리고 육십령 기념비 앞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10:30). 이번 구간은 지리산과 덕유산이라는 남도의 압도적인 고산 사이(지덕구간)를 걸어가기에 두 산의 위용을 원경의 아름다움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날씨의 탓에 그 생각은 접을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어제는 날씨가 좋아 반나절은 산행하고 반나절은 밭에서 봄맞이 일을 하여 나름대로 행복한 봄날을 즐겼는데 그것으로만 족해야겠다.
촉촉하게 젖은 완만한 산세를 따라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바야흐로 봄, 숲은 온갖 풀과 나무들이 새싹을 키워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길옆엔 흰 제비꽃, 노랑제비꽃 등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 꽃을 피워댔지만 햇빛이 안보이니 잔뜩 풀죽은 모습이다. 진달래 다음에 철쭉이라는 전통 순서를 거슬리고 두 꽃이 같이 피어 공존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최근의 기후는 이처럼 꽃소식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꽃이 피는 순서는 농산물을 경작하는데 큰 지침이 된다. 지역마다 다른 꽃피는 순서는 그 지역에 맞는 기후를 알려주기에 교과서대로 씨를 심는 방법보다 더 지혜로운 방법임을 촌로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봄꽃들이 올해처럼 한꺼번에 피어 버리니 그 지혜는 세월따라 사라지게 생겼다.
이제 비는 그치고 안개 속을 걷는다. 잘 만들어놓은 옹달샘 터에 도착하여 겉옷을 벗고 물 한잔 들이켰다. 낙엽이 잔뜩 쌓인 주위에는 다양한 새순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중에서 홀로 핀 홀아비꽃대를 발견했다.
첫째 봉우리인 깃대봉(1,014.8m)에 도착했다. 저 남해안에 왜군이 습격해오는 등 위기가 발생하면 고남산, 봉화산을 통해 올라오는 봉화를 보고 깃대를 흔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구시봉'이라고도 한다. 구시는 소나 말의 먹이를 담는 구유의 방언이다. 어느 풍수가가 이곳 지형이 말구유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을 바꿨다고 했는데 그냥 깃대봉이 낫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안개가 자욱하다면 어떻게 봉화를 보고 깃대를 흔들 것인가? 기대했던 조망은 없고 몽환적 분위기만 존재하고 있다. 그래도 첫 봉우리라는 상징성에 단체 사진촬영을 했다.
깃대봉에서 1시간 정도 가니 그 아래에 통영대전고속도로의 육십령터널이 지나간다고 한다.
능선은 억새밭으로 그 정갈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산발한 모습으로 맞고 있다. 그 아래는 철쭉 군락지가 펼쳐져 있는데 하얀 싸리꽃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민령(민재) 근처에서 앞서 도착한 일행들이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완만하고 작은 민령을 벗어나니 두릅밭이 나타났다. 대간길에 두릅이라니... 저 나무는 산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 자라기는 다 틀린 것 같은데 의외로 굵고 튼튼하다. 오른쪽 산비탈에는 입갈나무가 자욱하게 자라 그 풍경 또한 보기가 좋다. 원경이 사라졌으니 근경의 아름다움으로 대체해야겠다.
북바위봉이다. 삼국시대에 전투에서 승리하면 북을 쳐서 승리의 기쁨을 알렸다는데 그 보다는 전망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저 낭떠러지 앞은 오리무중이다. 아니 10m무중이다. 전망이 좋았다면 이곳에서 꼭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논개에 얽힌 이야기다.
대간길 오른쪽인 장수군 계남면 대곡리 주촌마을(주씨 집성촌)에는 논개의 생가가 있고 왼쪽에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인데 바로 논개의 묘가 있다. 백두대간 좌우로 논개의 생과 사가 존재하고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주논개(朱論介)는 장수 태생으로 천품이 영리했다고 한다. 마을 훈장이었던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었는데 작은아버지가 돈을 받고 몰래 김풍헌의 백치 아들에게 팔아 넘겼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완강하게 반대를 하자 김풍헌은 장수 현감에게 소장을 올렸고, 우여곡절 끝에 방면이 되어 관아에 머물렀는데 그만 최경회 장수현감과 논개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으로 부임하였고 논개도 간청하여 따라갔는데 그만 전란중에 최경회는 전사를 하였다. 그러자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하여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중 칠월칠석 왜적들이 촉석루에서 술잔치를 벌일 때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 푸른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훗날 그녀의 의로운 정신을 기려 그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논개를 말할 때 앞에는 항상 의암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이정표는 덕운봉을 알려주고 있다. 977봉을 넘고 나니 큰 키의 산죽 밭이 나타났다. 능선의 바람이 계속 왼쪽 뺨을 때렸는데 산죽이 방풍 역할을 하여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산죽의 원래 명칭은 조릿대인데 쌀에서 돌을 고를 때 쓰는 조리를 만드는 재료라고 해서 이름이 되었다. 조리는 그 실용에서 물러나 전통 공예품으로 반짝 빛이 나더니 이젠 그마저도 외면을 받아 옛날의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14:30, 덕운봉이다. 산행한 지 4시간 정도 되었다. 당일 산행 4시간 정도면 딱 알맞는 운동 시간인데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왼쪽으로 절벽이고 그 앞쪽으로 전망이 좋은데 발도장만 찍고 내려서야 했다. 멋지게 자란 소나무가 아름다움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
일행의 발걸음이 점점 더디고 있다. 영취산의 오르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호흡에 따라, 허벅지의 근력에 따라 발걸음의 박자가 늦어졌다. 활발한 대화도 끊기니 저 인도 설산의 순례자 같은 광경이다. 바람 소리만 귀청을 때리고 있다.
이윽고 영취산에 도착했다. 취(鷲)는 독수리나 수리를 말하는데 한자로 풀이하면 독수리산 또는 인디안이 부르는 것처럼 '영험한 독수리산'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영취산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인도의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의 산에 따온 것이다. 석가여래가 이곳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영취산의 가치는 산경표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여기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기하기 때문이다. 그 정맥은 오른쪽의 장안산을 거쳐 팔공산으로 내려가 주화산으로 끝나며 주화산에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또 분기한다. 강의 원류도 분기하여 낙동강·금강·섬진강의 분수령이다.
나도 여기선 독사진을 안 찍을 수 없다. 십 여 년전 대간 통과와 호남과 금남정맥을 가기 위해 밟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바로 무령고개다. 즉 금남호남정맥의 첫 고개인데 장안산의 들머리 노릇도 하고 있다.
영취산을 통과하여 내리막이다. 백운산을 향해 가야한다. 키 작은 산죽 밭이 나타나는데 풀이며 나무가 황량하다. 영취산 전 보다 싹이 덜 나있었고 3월초의 분위기다. 아마 고지대라 그럴 것이다. 백운산 오르막이 시작되니 이제 숨이 가쁘고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이번 구간의 첫 암봉이 나타났다. 암봉을 내려가니 휘파람새가 경쾌하게 노래를 한다. 산죽밭이 나타나고 작은 봉 언저리에서 초코바를 먹었다.
백두대간 종주라는 목적으로 하는 산행은 친목 위주의 대부분 산악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산행의 목적이 주(主)와종(從)으로 나누는 것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즉 산행이 주가 되면 친목은 종이 되어 일단 산행에 몰두하게 되는데 동네산악회 등 대부분의 산악회는 친목이 주가 되고 산행은 종이 되니 무늬만 산악회인 것이다. 그런 산악회는 구성원들이 진정 산꾼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어쩌다 한번 참가하거나 하루를 즐기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하니 산행에 진정성이 없다.
산행을 목적으로 하는 ‘산꾼’들은 그래서 이러한 일반산악회에 참가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오늘 구간에 참가한 일행은 걸음 속도나 준비 자세가 전문 산꾼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제 이들과 같이 한다는 생각이니 백두대간 산행일만 기다려질 뿐이다.
오늘 구간의 하이라이트, 백운산(白雲山 1,278.6m)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땀에 젖은 몸이 부르르 떨린다. 백운산이라는 이름은 전국에 많이 분포한다. 봉화산 다음으로 많을 것이다. 대부분 백운산은 높은 곳이라 조망이 훌륭하고 경치가 아름답다.
백운산에서 중재 방향은 오른쪽으로 90도 꺾어 헬기장을 지나 내려가야 한다. 고봉이라 급 내리막길은 아주 길었다. 뒤에 오는 일행의 음성메시지가 15키로 지점이라 들려온다. '중고개 900m'의 이정표부터 경사는 완만하다. 숲은 전형적인 오지의 호젓함을 보이고 있다. 산벚 꽃잎들이 눈처럼 내려있고 둥글레와 원추리들이 막 자라나고 있다. 구간의 종반으로 치달으니 오히려 힘이 솟는다.
중고개재에 도착했다. 여기서 헷갈리는 것이 중재는 여기서 1.6Km를 더 가야한다는 것이다.즉 중고개재와 중재(중치)는 동일 장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 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계곡이 시작되니 괭이눈 등 식물이 무성하다.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무엇을 보고해야 할 의무같은 것은 없는 자유인이다. 그야말로 기회와 가능성의 인간이요. 흘러가는 시간의 예술, 길을 따라가며 수많은 발견을 축적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의 나그네다’
<걷기예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오늘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구름처럼 생각하고 바람처럼 걷는 이 행위로 온전히 나를 돌아보고 앞을 향해가는 자유인이 되었다.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마을 계곡에 도착하여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배낭에서 꺼낸 맥주로 갈증을 해소했다. 이로써 오늘 18Km 구간을 7시간30분간 걷는 것으로 종주를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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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의 느낌을 솔직 담백하게 기록할 수 있는 자유인,
오랫만에 대해보는 산행 에필로그 감사히 탐독합니다.
발품이 생각의 주머니가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ㅎ오랜만에 아주 멋진 산행기를 봅니다~
북바위의 조망이 마이 아쉽죠
생생한 산행기를 보니 걸어왔던 길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고,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생동한 산행기 잘 읽어습니다.다시 한번 운무속을 헤가르며 신선이 댔던 느낌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멋진글 감사했습니다!
산행을 다녀온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그 길 여정이 다시 비쳐지네요. 자세하고 재미난 산행기 감사합니다. 안개로 조망이 없어 아쉬운 산행이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또다른 풍광을 얻어가니 나름 공평한게지요.
산행기 잘 읽어보았습니다. 역사,식물,동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생생한 표현으로, 그때 그때 느꼈던 심정과 감동을 고스란히 되새길수 있어서 좋았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