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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요한 칼빈은 “예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다. ‘소리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예술’로 정의되는 이 음악은 ‘진리를 표현해 주며 성도의 마음 속에 있는 신앙 감정을 전달해 주는 아름다운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길맨(F.J. Gillman)이 말한대로 ‘세대와 세대를 잇는 금 사슬’인 찬송은 우리의 삶을 말씀에 묶어주고 옛 성도와 연합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체인 것이다. 이 찬송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위대한 유산이요 특권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큰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핵심인 예배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찬송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의 예배가 그러하듯이 회중이 강조가 되는 시대이다. 온 성도가 적극적으로 찬송하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회중찬송의 부흥운동은 16세기경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들의 손에 넘어간 찬송을 다시 찾아 온 이래로 가장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부흥의 특징은 주로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를 사는 모든 성도, 교회로 말미암아 은혜 충만케 하시고 큰 능력과 권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온 세상을 정복하시길 원하신다. 이러한 찬양운동이 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현대음악적 스타일의 옷을 입고 전개되고 있으므로 찬양의 전통을 지켜오던 장년층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거부감과 염려 섞인 비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큰 변화의 고삐를 하나님이 쥐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곧 그것은 장년을 중심하여 성경적 회중찬양의 부흥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다. 물론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운동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찬양운동이 전개될 때 주의 말씀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며 주의 교회는 생명력을 되찾을 것이다. 또한 이 부흥운동은 우리의 후대인 젊은이들에게 ‘성경적 찬양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선조들을 어어 온 이 ‘찬양의 황금사슬’이 우리의 후대를 또한 이어가면서, 그 행렬이 저 영원한 산 시온에서 ‘할렐루야’를 노래할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을 소망한다. 1. 회중찬송이 걸어온 길 1) 구약성경시대 구약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음악적 기록은 창4:21에 '유발'이란 사람이 '수금과 퉁소를 잡은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세속음악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최초의 모델은 출15장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후 그 구원의 은혜를 모세와 함께 온 이스라엘 백성이 찬송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배의식은 모세 시대에 확립되었다. 그러나 예배의식에서의 찬양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한다. (대상6:31-32/B. C1000경) 그는 훌륭한 수금 연주가이며 직접 많은 시를 써서 예배에 사용하였으며 큰 규모의 찬양대와 관현악을 조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레위족으로 찬양의 모든 분야를 맡겨 연구하며 찬양의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대상9:34). 2) 신약성경. 초대교회 시대 초기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훌륭한 예배 장소를 가지지 못했다. 성전과 회당이 있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혜택 밖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한 곳일지라도 그들이 모인 곳은 경건한 예배처가 되고 말씀과 함께 찬송이 있었다. 초대교회에서 찬양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초대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였다.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성도를 단합하며 환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제공받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찬송했다(행16:25).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났고 그 땅에 복음에 문이 열려졌다. 그 당시 불려 졌던 찬송은 시편 이 외에 신. 구약 성경에 수록된 노래들을 불렀는데 그것을 송가(頌歌: Canticle/칸티클)라고 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3편의 노래가 있다. (마리아의 노래/눅1:46-55 사가랴의 노래/눅1:68-79 시므온의 노래/눅2:29-32) 바울은 교회의 노래를 시(psalm)와 찬미(hymn)와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로 구분하였다.(골3:16, 엡5:19) 「시」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며 「찬미」는 창작 찬송을 가리키며, 「신령한 노래」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靈歌)라고 생각된다. 초대 교회가 모여 예배할 때는 말씀과 찬양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전14:26). 찬양은 예배에서만 아니라 신앙교육의 중요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골3:16). 바울은 찬송을 부르는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찬송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령한 노래이며, 육체적인 흥분이 아닌 영적인 열성으로 불러야 함과 동시에 노래의 뜻을 이해하며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지성이 요구 된다. 초대교회 회당음악은 악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예배에 악기 사용이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를 한 것으로 보아 점차 악기 사용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주 절제된 형태였다. 주후 2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다른 악기를 금하였고 수금(harp)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앙양시키고 이것에 날개를 주어 지상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하는 것으로 노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였다.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Gloria)를 주로 찬양했으며.(주후 155년경 화형으로 순교당한 폴리캅이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함) 응답식(應答式, antiphonally)으로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찬송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2세기 초 소아시아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로마 행정관이었던 플리니(Pliny, c. 62-114)는 그 지방의 기독교인들의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해 뜨기 전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신으로 찬양하는 노래를 응답하며 불렀다."
3) 중세시대(410년-1517) 주후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한 후 기독교회의 찬송은 지하 카타콤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자유로이 외칠 수 있는 찬양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편승하여 이단적 교리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거짓 교리를 선전할 의도로 노래와 찬송을 사용했다. 그들의 찬송은 열광적이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불경한 것으로 판정했다. 이와 관련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요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라오디게아 종교회의(Council of Laodicea 343-381)이다. 이 회의에서 1) 시편(Psalms)과 송가(Canticles)만 부르게 하였고 새로운 찬송을 창작하는 것과 악기 사용을 금하였다. 2) 회중들이 예배에서 찬송하는 것(회중찬송)을 금하였다. 3) '교회에서는 설교단에 올라가서 책을 가지고 노래하도록 지정된 사람 외에는 노래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13번째 법령) 이것은 당시 범람하던 이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에베소교회가 진리를 고수하다가 처음 사랑을 잃은 것과 같이 중세교회는 '교회의 언어'인 찬송을 회중의 손에서 빼앗아가 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되었다. 이 규칙은 거의 천년 동안 교회를 지배하였다. 이 후에 회중찬송에 대한 약간의 관심과 시도는 있었으나 로마교회의 예배가 이미 정교한 예전적 예배로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회중의 찬송은 빼앗겼지만 교회음악은 음악전문가들에 의해 계속 발전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y 1, 590-604 재위)의 공적은 크다. 그는 교회음악의 모든 자료를 연구하고 수정, 보강하여 집대성하였고 교회에서 찬송을 하는데 필요한 규칙과 표준도 정했다. 카톨릭 교회의 예전 성가(liturgical chant)는 7세기경부터 수집되어 10세기경에는 완성된 형태로 법전화 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그레고리 1세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남긴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이 시대의 교회음악을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 혹은 찬트(Chant) 라고 이름 한다. 그러나 이미 빼앗긴 회중찬송을 회복하는 일에는 아무런 업적이 없다. 4) 종교개혁 시대(1517-1700) 종교개혁은 찬송을 회중의 찬송으로 회복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음악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었고 회중은 청중, 구경꾼에 불과하였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 번역하고, 같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원했다. 1532년 루터는 그의 친구인 스팔라틴(George Spalatin)목사에게 "예언자들과 고대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회중을 위한 독일어 찬송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들 안에 살아 있길 원하며, 이 목적을 위하여 찬송을 만들려는 것이 나의 의도입니다." 라고 썼다. 상당한 음악적 자질이 있는 루터는 스스로 작곡도 하여 '코랄'(Chorale)이라는 회중 찬송의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찬송가585장'내 주는 강한 성'은 그의 대표적인 코랄이다). 그는 회중이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노래가 쉽고 단순해야하며 또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톨릭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문제가 있는 부분만 수정하는 편이였다. 옛 음악자료를 새롭게 번역, 수정하여 채택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미 익숙한 찬송의 곡조를 이해하고 친숙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와 칼빈은 개혁교의 이상과 모델을 원시초대교회에서 찾았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아주 배제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 오기 전 파렐이 인도하는 제네바 교회는 찬송이 없었다. 쯔빙글리가 인도하던 쮜리히 교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란서어로 된 부를 만한 찬송이 없었고 대체할 만한 노래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칼빈은 독일 개신교도들이 ‘시편가’를 회중찬송으로 부른 것처럼, 시편을 불란서 운율에 맞추어 부르면 예배의식에 훌륭한 회중찬송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칼빈은 인간이 만들어 낸 노래는 경박하고 이단적인 요소가 끼어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노래, 즉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자국어로 번역하여 회중찬송( Metrical psalmody/운율 시편가)으로 부르게 하였고, 그 외에 몇 개의 송가(Canticles)를 허용하였으나 찬송을 창작하는 것은 금하였다. 이 「시편가」는 곡조가 단순하여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으면서도 세속음악과는 달리 대체로 온건하고 정중함이 넘치는 노래들이다.(예, 찬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그러나 그는 예배시 다성음악과 악기사용은 금했고 성악으로 노래하되 무반주 유니슨(unison)으로 부르게 하였다. 칼빈은 성도들에게 루터보다 극히 제한적이였으나 이 시편가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 진리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교회에 큰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제네 바 시편가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그대로 개혁사상과 함께 전파되었다. 5) 18,9세기 영미 각성시대 (1)아이작 와츠(Isaac Watts,1674-1748)의 찬송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회중찬송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영국교회에는 제네바 시편가가 유일한 교회의 노래였다. 그러나 시편가 만을 부르는 회중들이 영적 기갈을 채우는데 만족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 아이작 와츠(Isaac Watts,1674-1748)는 회중들의 찬송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시편이든지 창작된 찬송이든지 교회의 노래는 신약성서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재해석된 복음적인 내용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시편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불러야 한다는 칼빈의 규범을 반대하면서 자유롭게 창작하여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먼저 성경을 운율 있게 자국어로 번역(풀이)하기 시작했고 성귀의 뜻을 심화시키고 시의 정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성귀의 원문도 대담하게 변형시켰다. 그는 또 찬송을 창작하여 예배에 도입했다. 그의 표현은 퍽 단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신자들도 부를 수 있게 했다. 왓츠는 모든 신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사상과 감정에 기초한 "새로운 노래"(Hymn.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곧 시편가에서 찬송가에로의 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한 일이기에 찬송가 역사에 큰 의미가 있다. (2)웨슬리(John Wesley, 1707-1788)의 찬송 죤 웨슬리는 당시에 교회에서 부르던 느리고 무거운 느낌의 시편가에 불만을 가지고 회중찬송의 부흥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1735년 죤은 동생 촬스와 다른 옥스퍼드 "메소디스트"(Methodists)와 함께 미국 죠오지아주에 있는 영국 식민지를 방문하 기 위하여 항해를 하던 중, 같은 배에 탄 모라비아 교도들이 부르는 열열한 찬송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죤 웨슬리는 그들의 찬송가를 익히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했고 그 찬송가를 영어로 번역했다. 동생 촬스는 '찬송곡은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는 평이한 것이어야 하고 온건하고 경건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풍의 곡조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평범한 가사를 사용했다. 평민들에게 친밀한 대중가요, 민요, 세속음악의 곡조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운율적인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열정적인 형태로 노래할 것을 권면 했다. 그들의 목적은 두 가지,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과 '성도를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에는 죄에 묶여 있는 영혼의 영적 불안이나 회심을 통한 죄에서의 즉각적인 해방,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노래는 특별한 중생 경험에서 얻은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과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인 찬송이었다. 그는 그의 영적 체험을 모든 사람의 공통된 체험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작 왓츠가 기독교의 교리와 공통된 경험에 근거한 객관성 있는 찬송을 쓴 것과 대조가 된다. (3)대각성(The Great Awakening) 1734년 매사추세츠 노탐돈(Northampton)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 1758)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각성운동은 영국의 부흥사 회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1739년-1741년까지 미 대륙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더욱 열기를 띄게 되었다. 이 시기는 미국으로 건너 온 이민자들이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혼란한 시기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회개의 경험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고, 그들의 복음적인 설교에는 열열한 찬송이 언제나 따랐다. 이미 와츠의 찬송가의 위력을 맛본 에드워즈는 늘 '노래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도 처음에는 운율적인 시를 사용하였으나 복음적 설교에는 찬송가가 더욱 성도를 고무시키고 열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와츠와 웨슬리의 찬송가를 부르도록 하였다. (4)대 부흥운동(Great Revival) 독립 전쟁 후 경제적 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거칠은 개척생활에서 도덕적 능력은 상실되고 정신적 영적 빈곤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부응한 신앙 부흥 운동이 서부 켄터키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로교 부흥사 맥그리디 (James Megready, c.1760-1817)가 켄터키주의 로간 카운티(Logan County)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함으로 시작되었다. 설교, 기도, 찬송, 친교가 중요한 요소였다. 찬송은 설교에 응답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대부분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몸을 흔들고 열광적으로 불렀다. 책 없이 불러야 함으로 와츠나 웨슬리의 찬송 중에도 복잡한 것은 제외하고 간단한 노래들 사용하였다. 찬송의 내용은 죄인의 구원과 회심에 관한 것이 많았다. 곡의 형식은 발라드(Ballad)풍이었으며 곡조는 단순하고 민요조의 노래가 많았다, 후렴(Refrain)이나 합창(Chorus)이 반드시 붙여졌다. 또한 가사나 곡조에 반복이 많았다. (5)제2의 대각성운동(Second Great Awakening) 1857년 미국의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인한 무질서와 부패적 상황에서 신앙 부흥운동이 1858년에 다시 나타났다. 20세의 젊은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동부로부터 시카고로 가 대중 전도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그는 Y. M. C. A회원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과 주일학교를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나이 34세때부터 대중적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설교는 초기 복음주의자들이 했던 '하나님의 진노, 심판'보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설교 때마다 늘 아쉬운 일이 있었다. 음악문제이다. 그는 음악에는 별로 은사가 없지만 이미 시카고 주일학교에서 노래의 힘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 부르는 것은 적어도 설교만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음악적 재능과 가창에 뛰어난 생키(Ira D. Sankey, 1840-1908)를 붙여주셨다. 말씀과 함께 전파되는 그의 노래는 졸던 청중을 깨우며 깊은 감동의 세계로 끌고 갔다. 생키는 무디의 권유대로 대 도시에서의 대중 전도집회나 교회에서의 부흥집회에 부르기에 적합한 노래집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복음찬송'(Gospel Hymn) 혹은 '복음성가'(Gospel song)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들의 노래는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가락, 발라드풍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편가 와는 전혀 대조적이다. 쌩키는 ''Gospel Song" (복음성가, 福音聖歌)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블리스(Philip P. Bliss, 1838-1876)라고 한다. (이 'Gospel Song'을 '복음송' 혹은 '복음가'(福音歌)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음) 6)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찬양 20세기 후반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변화의 시기이다. 기독교인의 핵심인 예배에도 변화의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20세기 후반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로 분류한다. 새로운 현대, 또는 현대 이후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는 탈 권위 시대이며 개인의 가치와 자유와 다양성이 인정되며, 감정 중심의 사고와 체험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이 시기에 많은 미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생활을 하는 젊은이들, 청소년들도 그들의 삶과 전통적인 예배 사이에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경직되고 무겁고, 구경만 하는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 '축제적인'(Festival), '함께 참여'(participation)하는 예배를 기대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나타난 음악의 현상이 C. C. 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다. 빠른 템포, 강한 비트, 몰아치는 박진감 등, 미국 젊은이들이 즐기는 록음악(Rock Music)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Rock 스타일의 음악적 요소가 과연 하나님 찬양에 쓰일 수 있느냐?' 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이견(異見)이 있고 또한 세심한 연구와 성경적, 신학적 조망이 필요하겠지만, 어쨋든 이러한 스타일의 찬양이 미국이나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최근에 젊은이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나타난 Worship Song(경배송, 혹은 코러스(Chrous)라고도 함)은 C. C. M.의 범주에 속하지만 기존 C. C. M.과는 다소 다른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찬양'이다. 이 경배송은 노래하는 자들로 하여금 더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한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찬양을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 받으며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도의 회중찬양은 교회의 역사와 함께 그 필요성이 언제나 요구되어 왔으며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되어 왔다. 그러나 변천하는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많은 비판과 반대 속에서도 다양한 시도 가운데 꾸준히 변천되어 왔다.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에게는 시편을 읊조리는 식으로 노래하는 '칸틸레이션'(Cantillation), 신약성경시대, 초대교회에서는 '시편'(Psalms)에다 몇 개의 '송가'(Canticles)를, 중세시대는 '그레고리안 성가' 혹은 '챤트'(Gregorian Chant), 종교개혁시대에는 코랄(Chorale), 시편가(Metrical psalmody/ 운율 시편가), 근대에는(18세기)에는 찬송가(Hymnody), 현대(19세기)에는 복음성가(Gospel Hymn 혹은 Gospel Song). 최근(20세기 후반)에는 Worship Song(경배송)이 성령의 역사와 예배의 새로운 변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려 지고 있다. 2. 왜 회중찬송을 깨워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회중찬송’(congreational singing)은 '예배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성도의 모임에서 함께 부르는 찬송'을 말한다. ‘깨운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찬송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곧 그것은 ‘회중찬송의 부흥(Revival)운동’이다. 회중찬송을 깨워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1. 하나님은 교회에 「새노래」를 부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시 96:1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하였다. 현대 젊은이들의 ‘경배와찬양’운동은 이 ‘새 노래’에 지대한 관심 가운데서 전개되고 있다. 새로 만든 노래들, 새로운 형식, 기법의 의존한다. 그러나 여기 ‘새 노래’는 새로 지은 노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구원의 감격과 기쁨,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올려 드리는 생명이 넘치는 심령의 새 노래’를 말한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기 때문이다(고후4:17). 이「새 노래」는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며,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성도의 영혼과 인격을 성숙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롬12:2) 찬양을 드려야 한다. 지금도 저 영원한 산 시온에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어린 양 앞에서 부르는 그 위엄차고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계14:2-5) 2. 예배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예배를 간단히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발견한 새 노래로 예배에 생명과 기쁨, 환희를 맛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장년이나 노년은 아직 새로운 노래들과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전부터 불러 온 익숙한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있기에 거기에 의존해 찬송 부르기를 지속해 가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의미 없이 맥 빠진 자세로 노래 부르기가 일수다. 시대마다 교회를 사랑 하고 찬송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찬송의 개혁을 부르짖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개혁자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들에게 빼앗긴 찬송을 되찾아 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아이작 와츠는 오랜 전통 속에 억눌려 있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거룩한 감정을 ‘찬송가’라는 새로운 노래를 통하여 표출해 주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말씀과 함께 찬양의 개혁이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3. 사역자들의 설교가 살아 움직일 수 있기 위함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친히 그 전하는 사역자들의 마음과 입을 주장하셔서 성도들의 심령에 자리 잡게 하시고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거룩한 찬양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역사 하신다. 설교와 찬송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찬송은 찬송 그 자체로도 예배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말씀과의 관계에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준비시키며 또한 들은 말씀을 확증시키며 견고케 하는 능력이 있다. 전도자 무디((Dwight L. Moody)는 말하기를 “노래 부르는 것은 적어도 설교만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하나님이 최초로 나를 부르신 이후 내게 있어서 노래에 표현된 찬미의 중요성은 점차로 성장하여 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음성으로, 필요하다면 작곡도할 수 있는, 그러면서 복음전도에 열정을 가진 찬양전도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다. 그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찬양전도자 생키를 만났을 때 “나는 8년 동안 당신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씀전파자와 찬양전도자의 이 아름다운 연합은 후일 복음전도자들에게 이상(vision)이 되었다.(빌리 선데이와 호머 로드헤버. 빌리 그래함과 클맆 바로우즈. 조지 비벌리 쉐아 등). 다양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 말씀사역자들에게 음악을 비롯하여 성도들의 모든 다양한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더욱 빛내고 강화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4. 기도의 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함이다.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독수리를 생각해 보자. 그 육중한 체구를 높이 띄워 마음껏 비상하는 비결은 몸통에 붙은 두 날개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새의 몸통이라면 찬송과 기도는 양 날개와 같다. 날개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가 없다. 찬양과 기도, 기도와 찬양은 언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고 하신 것은 바로 이 균형의 문제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비취심으로 마음에 받으면 찬양하고 싶은 영적 열망이 생기고, 찬양이 나오면 기도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긴다. 기도를 더욱 뜨겁게 하도록 성도들에게 ‘아멘3창’을 시키기도 한다.(단9:19에서 그 근거를 찾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자연스럽고 깊은 기도의 세계로 인도하는 방법이 있다. 찬양을 통한 방법이다. 약간의 음악적 기술이 인도자에게 필요하겠지만 그 은혜는 확실하다.
5. 승리하는 교회로 세워지기 위함이다. 지상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다. 이 마지막 때 사단이 교회를 향하여 총공세를 퍼붓고 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영원한 영광과 상급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전투는 좋은 군사와 함께 고성능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시149;6에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갖추어야 할 고성능, 최첨단 무기가 소개되어 있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 [Let] the high praises of God [be] in their mouth, And a two-edged sword in their hand,: NASB) 여기 ‘존영’은 ‘찬양’(the high praises)이며 ‘두 날 가진 칼’은 ‘하나님의 말씀’(히4:12)이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찬양은 사단을 묶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사로잡아 온다. 비록 어린아이의 찬양일지라도 원수를 결박하고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다(시8:2). 찬양은 하나님과 성도를 기쁘게 하지만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을 두렵게 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승리의 기쁨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는 귀한 전통 안에서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찬양의 날개’에 힘을 싣자. 6. 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현대교회가 새로운 현대적 음악 스타일과 기법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얻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한 음악에 관하여는 좀 더 깊은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에 대한 더 큰 관심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양육하기 위해서 찬양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장년, 노년기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갈증을 채우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이다. 그들을 위한 찬양의 배려는 장차 장년이 될, 지금의 젊은이들을 위한 안전지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다행이도 시대를 알고 찬양의 새 바람을 갈망하는 교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도 찬양을 좀 더 많이 부르고 열성적으로 부르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어떻게 하면 회중을 좀 더 은혜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인지 기도하며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를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께 굴복하며 그를 의지하게 된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40:3)고 하였다. 전도는 언제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찬송은 이렇게 힘이 있다. 7. 성도들의 삶을 ‘찬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시다(신10:21). 마땅히 우리의 목적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 63:4). 라고 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한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찬364장). 야곱의 아내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29:35)하고 그 이름을 ‘찬송’을 의미하는 ‘유다’로 지었는데 그가 이스라엘을 영도하는 그룹인 유다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찬양하는 유다지파에서 오셨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노래로 찬양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모든 사람에게 음악의 은사를 주셨고 심지어 동.식물과 모든 피조물에게도 음악적인 요소들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죄악 된 세상은 우리의 찬양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드리기를 원하는 찬미의 제사(히13:15)가 잘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일상 부르는 찬송가가 우리의 손에 여전히 있고 현대의 매스 미디어를 통한 찬양의 노래가 늘 흘러나오지만 우리의 영혼의 날개는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청소년 때부터 이러한 문제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러나 언젠가 찬송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있은 후부터는 나의 삶이 달라졌다. 그것은 교인들이 부르는 회중찬송의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찬송을 노래하는 진정한 자세와 태도의 결핍이며 찬송을 찬송으로 부르지 못한 기술적인, 음악적인 문제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또한 찬송지도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필자가 찬양의 사역을 하게 된 동기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회중찬양을 통하여 새 시대에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받으며 후손들에게 좋은 찬양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마땅한 찬양의 모델을 발견하지 못한 체 무관심 내지는 비판 속에서 찬양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3. 회중찬송인도의 실제적인 방법 인도하는 방법을 논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찬송가」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찬송의 내용을 크게 분류하면 ‘찬송가’과 ‘복음성가’이다. 「찬송가」를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검증되고 공인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송가의 대부분은 복음성가(혹은 복음찬송)이다. 주로 100년 이전에 지은 찬송이다. 찬송가가 우리에게 거부감이 없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고전음악 형식을 따라 지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고전음악은 현대적 기법의 음악보다 음악학적으로 볼 때 ‘좋은 종류의 음악’(the right kind of music: 고대 그리스의 Ethos이론에서)임은 틀림없다. 문제는 고전형식을 취한 음악이기 때문에 현대음악에 익숙한 젊은이들에게는 사실상 약간의 거리감이 있다. 이러한 거리감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과제이다. 그러나 찬송을 찬송답게 바로 부르면 여전히 은혜롭다. 필자는 우리가 가진 귀한 찬송가를 찬송가 답게 제대로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또 다른 노래로 전향하는 일에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찬송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이 다시 전개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가진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아야 하고 또 변할 수 가 없다. 그러나 찬송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복음성가」에 대하여 현대 복음성가가 장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사용해 오던 고전음악의 형식을 따르기보다 현대음악의 기법을 취했기 때문이다. 사실 검증되거나 공인되지 않은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를 선택하는 일에 많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복음성가에는 ‘좋지 못한 음악’(the wrong kind of music)이 끼어들 가능성도 있다. 최 현대의 C.C.M에는 염려할 요소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신중한 선택과 함께. 바르게 연주하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새로운 노래들의 그 세속성에 관한 논쟁은 교회음악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제기 되었던 문제이다. 개혁자 루터는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을 도입하는 일에 관대한 편이었으나 칼빈은 그렇지 아니했다. 그러나 칼빈도 그것을 온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음악에 대하여 좀 더 넓은 안목으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하셨으니 새로운 음악을 바르게 선택하고, 바르게 사용한다면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3)악기에 대하여 지금 한국교회는 현대음악이 도입되고 찬양선교단이 조직됨과 함께 악기에 대한 논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세속적인 악기를 염려하는 소리들이다. 사실, 모든 악기는 교회 안에서 보다 세속음악 쪽에서 시작되었고 발전되었다. 창4:21에 보면 “유발”은 세상음악을 위하여 악기를 만든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던 악기들은 고대 애굽인이나 앗시리아인들, 혹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들의 신을 찬양하는데 쓰던 악기들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한 “수금”의 음향에 가장 가까운 악기는 오늘날의 기타(guitar)나 작은 하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성전예배에 가장 친숙한 악기인 피아노나 오르간 역시 처음에는 세속음악에 쓰여진 도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들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 중요한 것은 무슨 악기냐를 묻기 전에 그 악기가 목적하는 예배나 찬양하는 일에 적합하냐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주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분명히 의식을 갖춘 예배와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며 즐기는 축제적인 노래와는 악기의 선택이나 연주의 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현대적인 악기는 연주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청중에 대한 배려보다, 스스로 도취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겸손과 절제, 자기통제를 잘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러면 회중찬양 인도를 어떻게 할까? 그 방법을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나 찬양 인도자들의 사례와 필자의 사역으로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요약해 본다. 1)먼저 찬송을 잘 선택해야 한다. 찬송가에는 다양한 노래들이 있다. 경배찬송인지, 기도의 노래인지. 고백이나 간증의 찬양인지. 또는 제창(齊唱)에 맞는 곡인지, 독창에 맞는 곡인지, 등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4/4박자의 형태는 제창하기에 좋고 6/8박자의 형태 중에는 독창에 더 어울리는 것도 많다. 복음성가 중에서 선택할려면 평소에 노래들을 수집하고 분류해 놓아야 한다.(조(코드: 장조. 단조. 무슨 조인지), 속도, 박자, 내용별로) 2)찬양목록은 만들라. 설교를 준비하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골방찬양을 하면서 순서(song list 혹은 ‘콘티’(content의 준 말)라고도 함)를 짜라. 먼저 전체적인 틀을 계획하고 전체가 강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하라. 성령의 임재하심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3) 음의 높이와 속도를 적당하게 조절하라. 찬송가는 있는 그대로 부르면 좋지만 때로는 곡이 높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경우엔 적당한 높이로 이조(移調)해 부를 수 있다. 찬송가는 4성부 합창을 위하여 씌어 진 것이므로 유니슨(unison)으로 부를 때는 음 높이를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찬양을 처음 시작할 때 곡 조자 높으면 처음부터 포기해 버릴 수 있다. 그 때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높이로 찬양을 인도하면 회중들은 잘 따른다. 원조(原調)를 바꾸면 노래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지는 문제는 있으나 음이 높아서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젊은이들이 ‘경배와 찬양’집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원조(原調)보다 2도 혹은 3도 낮추어 부르기 때문에 모두가 노래하는 충실한 찬양이 된다. 음 높이를 정하는 일은 반주자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또한 상황에 따라 알맞는 속도를 정하라. 속도조절은 회중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4) 반주의 크기가 적당하고 리듬이 분명해야 한다. 반주자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독창할 때와 제창할 때의 반주의 크기와 리듬의 형태는 달라야 하다. 특히 회중찬양은 회중을 충분히 이끌어갈 수 있는 크기와 분명한 리듬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리듬은 노래를 추진시키는 동력이다. 반주자는 찬송 인도자가 요구하는 분위기를 잘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반주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찬송가에 있는 사성부의 반주만으로는 모든 찬송가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주자는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을 모두 연주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5) 얼굴을 위로 향하고 찬양하라. 특별한 경우 외에는 보좌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얼굴을 적당히 위로 향하여 찬송하면 더욱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고 영적 감각이 예민해지며 더 깊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인도자는 가능한 한 가사를 암기하고 찬양하며 회중은 스크린으로 가사를 보게 하면 좋다. 가창도 편해지고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몸의 동작도 용이해진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2). 목소리에도 표정(감정)을 담으면 더욱 은혜로운 찬양이 된다. 입과 마이크와의 간격을 적당히 하고 자신이 노래 한다는 생각보다 회중을 노래하게 하라. 6) 찬송을 연결해서 부르면 은혜가 깊어진다. 찬송을 10분 이상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몇 곡을 연결해서 부르면 은혜가 깊어진다 (예배 시작 전). 현대의 ‘경배와 찬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러 곡들을 연결해서 부르는 것이다.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기는 하나 조성(調性)과 가사의 내용과 노래의 분위기가 맞는 것끼리 연결해서 불러보라.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적절하게 연결해서 부르면 은혜롭다. 찬송의 연결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다.(주제가 있는 찬양) 7) 독창, 성가대 합창 등을 이용해보라. 성경시대.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런 방법은 사용되었다. 응답송(應答訟). 교창(交唱)등이다. 19세기 복음전도자들은 독창자와(후렴 앞부분) 회중이(후렴 부분) 교창식으로 찬송했다.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찬양 방법’을 사용해보라. 계시록 5장에는 천상 찬양의 광경이 잘 나타나 있다.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의 인을 뗄 때에 보좌 앞에는 거룩하고 장엄한 찬양이 전개 된다. 그 찬양은 보좌 앞에 있는 네 생물과 24장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거문고를 연주하며 새 노래로 경배하며 찬양할 때 보좌를 둘러선 수 많는 천사들의 큰 음성으로 찬양하니 모든 만물이 찬양하였다.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찬양의 광경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우리 모든 교회의 비전이다. 네 생물- 24장로- 천사- 성도- 만물들의 찬양은 지상교회의 ‘찬양의 모델’이다. 목사와 찬양지도자- 성가대 혹은 찬양팀- 회중이 찬양하는 모습은 천상찬양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찬양의 모습이다. 8) 몸의 동작을 사용하라. 성경에 나타난 찬양을 보면 다음 세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음성적(vocal), 청각적(audible), 시각적(visible)인데 곧 그것은 음성(노래)와 악기와 몸동작을 이용한 찬양이다. 몸동작은 언어의 연장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손을 드는 것’은 기도하거나 감사하거나 찬양할 때 일반적으로 동반되는 행위이다. 찬양의 히브리어 용어 가운데 「야다」는 “손을 들고 감사하는” 행동이 수반된 찬양의 용어이다(시63:4). 그 외에 ‘서서 찬양하는 것’ ‘엎드리는 것‘ ’무릎 꿇는 것‘ ’손뼉 치는 것‘ ’춤 추는 것‘ 등이 있다. 물론 몸의 동작으로 찬양하는 일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잘못하면 안하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따라 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찬양의 은사를 받았으나 덕을 세우며 질서를 세우는 일에 실패했기에 바울의 책망을 받았다. 또한 적절하지 못한 동작은 찬양 자체를 방해할 수 있다. 만일 거룩과 위엄으로 가득한 ‘거룩 거룩 거룩’ (찬9장)을 손뼉을 치며 기타를 울리며 빠른 속도로 노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어야 할 노래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몸동작은 분명히 찬양의 깊이를 더해준다. 지금, 영혼을 잠잠히 하고 얼굴을 보좌로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를 천천히 불러 보고 느낌을 자신에게 이야기 해보라. 9) 필요하면 일정 부분을 선택해 내어 찬양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연결해서 부르기 위한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현대의 기법을 따라 연결해서 부를려면 때로는 특정한 절이나 후렴을 따로 떼어내어 불러야 할 경우가 있다. 어떤 이들은 찬송가를 한 두절 선택해 부르는 것을 절대 불가한 일로 생각한다. 찬송가는 성경과 달리 복음의 빛에 비추어 사람이 창작한 것이고, 또한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찬송가를 접하기 이전에 이미 절을 고치거나, 가사가 수정되었거나, 번역자의 재량에 따라 형태가 바뀌어진 것들이다. 어떤 찬송은 긴 절을 요약, 편집한 것들도 있다. (예: 찬23장 ‘만입이 내게 있으면’은 원래는 10절로 되어 있음) 그러나 떼어 내어서는 안될 찬양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가령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1절만 부르고 끝낸다면 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단순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중간에 끊어 버리는 것은 바른 일이 못된다. 10) 반복하여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현대의 ‘경배와 찬양’에 사용되는 노래들은 데체로 한 절로 되어 있다. 그 짧은 노래를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반복하여 부름으로 메시지를 강화시킨다. 고대나 중세의 신자들은 많은 가사를 담은 찬송 하나를 가지고 15분을 찬송하는가 하면, 현대인들은 30초면 부를 수 있는 짧은 노래를 10분, 20분씩 부른다. 여러 번 반복하기 때문이다. 1859년 영국 웨일즈 부흥운동 때에 찬송의 마지막 두 마디를 15분간 찬양했다는 기록이 있다. 짧은 곡이라면 두 세 번 반복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반복은 지루하게 만들기 때문에 반주나 노래 기법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11) 설교와 찬양과 기도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하라. 설교는 찬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찬양은 깊은 기도의 세계로 인도한다. 찬양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시야를 하늘 보좌로 향하게 한다. 찬양은 예배를 방해하는 사단을 잠잠케 하고 성령님의 운행하심을 자유롭게 한다. 찬송을 성도의 마음속에 들은 말씀을 확증시키며 견고하게 한다. 찬송은 성도의 삶에 청량제가 되며 믿음이 자라갈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며 영양제를 공급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듣는 회중들이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찬양하게 해야 한다. 찬양과 기도를 잘 연결시키면 찬양도 뜨거워지고 기도도 살아난다. 시편에 나타난 모든 기도는 찬양의 노래로 올린 기도이다. 12) 찬양 중심의 예배나 집회를 가져 보라. 한국교회가 찬양예배란 이름으로 찬양중심의 예배를 드려 왔고 지금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경배와 찬양’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의 긴 찬양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영광의 선포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말씀하시며 치유하시며 변화시키시는 깊은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조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긴 시간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한국선교 초기에 사경회(査經會)란 이름으로 긴 시간 동안 말씀을 듣고 상고하였던 것처럼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찬양으로 충만한 예배나 주제가 있는 찬양집회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필자는 새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찬양 중심의 예배를 통해 그 분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여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기를 소망한다. 새 시대에 새 노래는 젊은이들만 위하여 주신 선물이 아니다. 우리의 찬송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찬양의 특권과 의무, 은사를 주셨다.(사43:21) 젊은이들의 ‘경배와 찬양’의 모임을 보면서 관망이나 염려 섞인 비판보다 우리 모든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곧 그것은 찬송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이해와 실천을 통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회중찬송의 변천과정, 찬송의 회복을 갈망하는 이유, 그리고 회중찬양을 인도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짧은 글을 통해 회중찬송에 관한 모든 것을 논하기는 불가능 하다. 이 중 몇 가지만이라도 이해하고 실천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신앙의 자세이다. 곧 그것은 내 자신이 진정한 경배자와 찬양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목회사역은 목사 혼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찬양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 한 분’ 에게서 ‘성도와 함께’ 나누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목회자 혼자 이 일을 할려고 하면 낙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온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기뻐하며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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