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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2코스
양매리 삼강공원-만풍리 간척지-송석리 해안-도리포항-봉대지맥-유월리무안황토갯벌
20230111
1.어둠 속의 해제반도 도리포해안과 함해만 해돋이
새해 첫 서해랑길 탐방에 나섰다. 1월 11일 새벽 3시 30분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 입구에 버스가 멈추었다. 매곡마을회관을 거쳐 지난해 12월 28일 31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 삼강공원에 도착하였다. 연거푸 2번 서해랑길 32코스 시작지점인 양매리 삼강공원에 도착하지만 새벽의 어둠 속이다. 두 번의 탐방을 한 곳에서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모두 출발하니 그곳을 어둠 속에서만 보게 된다. 꼬리를 물고 차례대로 탐방하면 무박이라 하더라도 한 지역을 어둠과 밝음 속에서 한 번씩 살필 수 있을텐데, 그러지 않고 식사를 핑계로 제 멋대로 진행하니 그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살피고자 하는 탐방객의 마음은 불편하다.
서해랑길 32코스는 17.5km, 5시간 30분이 주어져 있다. 그렇지만 도리포 포구와 칠산대교를 돌아보고, 도리포항을 지나 송계산-망대봉-범바위산-신풍고개-삼복산-신만마을에 이르는 산줄기가 5km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다.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삼강공원 앞에서 32코스 출발 인증샷을 추억으로 남기고 새벽 3시 42분 검은 토끼의 해 서해랑길 첫 탐방을 힘차게 출발한다.
서해랑길 32코스는 무안군 해제반도 해제면의 양매리에서 해제반도 서쪽 해안을 걸어 북쪽 끝 도리포까지 올라간 뒤 이번에는 해제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 끝 유월리 지역에 이르는 코스이다. 그러니까 이번 탐방은 곶(串)의 형상을 하고 동북쪽으로 돌출한 해제반도를 도리포항까지 북진하였다가 산줄기를 타고 남진하는 탐방이다. 그러기에 낮에 탐방한다면 탐방지역을 동그랗게 돌아가면서 왕복하는 감각을 지니게 되어, 탐방할 곳을 미리 살피고 탐방한 곳을 되돌아보는 감흥에 젖을 수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이 모든 것은 무화되어 지리적 위치 확인이 아주 어려웠다.
탐방 행정 구역은 무안군 해제면의 양매리-만풍리-송석리-만풍리-유월리이다. 송석리는 해제반도 북쪽 끝을, 만풍리는 해제반도 중앙을, 유월리는 해제반도 남쪽 끝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32코스는 만풍리 지역의 해제반도 서쪽과 동쪽 해안을 거쳐 유월리 용산마을에서 끝난다. 해제면 유월리는 해제반도 남쪽 끝에서 현경면 가입리와 이어져 있다.
어둠 속에서 걸어간 들길과 마을을 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았다. 해제면 양매리 간척농지 '토치(兎峙)들', 만풍리 '신만들', '심양들', 염전 2곳, '진목들'과 방조제, 신풍마을과 '신풍앞들', 송석리의 입석마을, '당산들', 삼봉마을로 이어와서 송석리 송계 해안의 그윽한 해송림으로 들어와 송석정을 거쳐 송계 해변으로 나아갔다. 칠산바다 건너 영광군 염산면 일대는 까만 어둠 속에서 불빛 몇 개 깜빡거렸다. 송계 해안을 밝음 속에 걸어야 제 풍경과 멋을 볼 수 있는데 그냥 스쳐간다. 어느 날 다시 탐방할 기회를 마련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함해만은 무안군 현경면과 해제면, 함평군 함평읍과 손불면, 영광군 염산면 사이에 있는 내만이며, 칠산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칠산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함해만 도리포항으로 들어갔다. 아, 도리포가 김 생산 유명지역임을 이제사 알게 되었군. 도리포 갯벌이 품질 좋은 김 양식지임을 도리포항 입구의 김 공장과 판매장을 통해 확인했다. 도리포항에서 도리포까지 나가서 도리포 고려청자매장해역, 칠산대교 아래까지 가보아야 하는데 그냥 통과한다. '항상바우'라고도 불리는 도리포의 명물 '還船(환선)바위'를 그리움으로 가슴에 묻으며 도리포항을 떠난다. 되돌아온다는 도리포의 의미처럼 길손 또한 도리포에 되돌아올 것을 믿는다.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처럼 끝없는 기다림의 바위 '항상바위'의 애처로움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도리포에 되돌아올 것이다.
송계산과 망대봉, 범바위산(부엉산), 삼복산 산줄기를 어둠 속에서 땀 흘리며 걸었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지리적 감각의 혼돈 속에서 오직 빠르게, 시간에 맞춰 일행을 따라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허걱거렸다. 5km가 넘는 산줄기 산행을 마치고 해제면 만풍리 신만마을로 내려가는 언덕에 이르니 날이 밝아온다. 어둠이 너울너울 물러나며 아침빛이 살며시 퍼져온다. 신만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함해만의 엄도 섬, 니성산을 바라보며 도착해야 할 유월리 용산 지역을 가늠한다. 분명한 지역을 몰라도 밝음 속에서는 그 위치 감각이 생긴다. 함해만 엄섬 뒤로 불그스레한 기운이 퍼진다.
해제반도 남쪽 끝머리 동쪽 해안 해제면 유월리 용산방조제로 올라섰다. 엄섬 뒤에서 태양이 이마를 내밀기 시작한다. 새해 들어 일출의 장관을 함해만 해제반도에서 첫 대면한다. 철새 떼가 날아가며 솟아오르는 태양을 반기며 붉은 기운을 얻는다. 태양의 붉은 이마는 불타오르듯 얼굴을 태우며 세상을 새롭게 밝힌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어제의 아침과 다르다. 함해만 엄섬 위에 솟아오른 태양이 황홀하게 이글거리며 어둠 속 물상을 새 존재로 창조한다. 길손 또한 함해만의 해돋이 장관으로 새로이 탄생한 감각을 느꼈다. 어둠의 긴 터널 속에서 길손은 불안과 무지의 상태였다. 함해만 하늘에 솟은 태양이 붉은 빛을 내뿜어 길손의 불안과 무지몽매를 씻어준다. 신생한 길손은 서해랑길 32코스 탐방의 큰 아쉬움을 씻으며 무안황토갯벌랜드로 향하였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8.37km
전체 탐방 시간 : 5시간 6분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삼강공원, 광산 김씨와 파평 윤씨의 효행비들이 세워져 있다. 자세한 것은 31코스에 기록되어 있다.
오랜 연륜의 느티나무 옆에 서해랑길 무안 32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거리/ 17.5km, 소요 시간/ 5시간 30분, 난도/ 보통. 주요지점/ 송계어촌체험마을·도리포항·칠산대교·무안황토갯벌랜드.
상세한 내용은 서해랑길 31코스에 기록되어 있다.
양매리 외분마을의 감동샘을 통과한다. 외분마을은 외분(큰마을), 甘洞(재너머), 금성(새터) 마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감동(甘洞)샘을 지나 외분마을 갈림목에서 멀구슬나무가 있는 감동저수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감동(甘洞)저수지를 왼쪽으로 돌아나간다.
감동저수지 건너편에 양매리 외분마을이 보인다. 감동저수지는 양매들의 간척지에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서 1945년에 축조하였는데, 저수지 축조 후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특히 남자들이 단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또 감동저수지 보수공사 때 마을에 있던 고인돌들을 전부 깨어 제방 보수에 사용해 현재는 해제중학교 뒤와 상감산에 각각 1기의 고인돌만 남아있다고 한다.
오른쪽에 해제면 양매리 토치(兎峙)마을을 두고 간척농지 '토치들' 농로를 따라간다. 토치(兎峙)마을은 마을 지형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玉免望月)'의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제면 만풍리로 넘어왔다. 32코스 시작점에서 2.1km 지점으로, 이 들녘을 신만마을 앞의 들녘이라고 하여 '신만들'이라 이른는 듯. 이정목 안내판에 '만풍리 1210-2'라고 적혀 있다.
"만풍리(萬豊里)는 해제면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고려청자가 발견되어 사적지로 지정된 도리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또한 만풍리 곳곳에서 도굴꾼들의 도굴 흔적을 발견할 만큼 고총과 유물산포지가 많이 있다. 니성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한복산, 부엉산, 죽방산, 천마산을 거느리고 있다. 동북쪽이 함해만에 접해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인 영향으로 염전이 많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를 합하여 신만동과 신풍리의 이름을 따서 만풍리라 하였다. 원래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4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심양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외진목, 내진목리, 동정리, 신풍리 등으로 나온다. 1912년에는 해제면 신만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만풍리,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에는 만풍리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로 표기되었다. 신만에 공적비1기가 있고 신풍에 6기의 각종 비가 있다. 교회가 두 곳이 있으며 폐교가 된 해제북초등학교가 있다." - 무안문화원
해제면 만풍리 심양마을 앞 심양들의 만송로를 따라간다. 만송로 왼쪽에 불 켜진 곳은 염전이라고 가늠한다.
해제면 만풍리 진목마을 앞의 '진목들' 방조제에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염전 앞에 염전창고와 염전사무실이 있는데 염전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염전의 이름이 무엇일까? 만풍염전이라 이르는지 진목염전이라 이르는지?
오른쪽 불빛 비치는 곳은 만풍리 신풍마을, 정면 뒤 불빛 있는 곳은 입석마을이라 가늠한다. 이 들녘을 신풍마을 앞에 있다고 하여 '신풍앞들'이라 이르는 것 같다. 서해랑길은 바로 앞에 있는 이정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만풍리 1157' 지역, 32코스 시작점에서 4.5km 지점이다. 이 지역의 들녘을 신풍앞들이라 이르는 것 같다.
무안군 해제면 만풍리에서 송석리로 이어지는 해제반도 서쪽 해안 방조제를 따라 송석리 삼봉마을로 이어간다.
해제면 만풍리에서 송석리 입석마을 앞으로 넘어왔다.
"입석마을은 송석2리에 속하는 마을로 세 개의 선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죽산 안씨다. 죽산 안씨는 기러기가 떨어진 명당이라는 지금의 재모실이라 부르는 곳에 ‘안락동(雁落洞)’이라는 이름으로 터를 잡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연산군 代에는 남양 홍씨(풍산 홍씨라고 보는 사람도 있음)가 들어왔으나 이 또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거론되는 성씨는 洪, 羅, 姜으로 불려지는 남양 홍씨, 금성 나씨, 진주 강씨 등 三姓이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는 홍, 나, 강, 三姓을 받드는 당골이 살고 있었다. 궂은 일이나 좋은 일에 늘 뒤치다꺼리를 해온 사람인데 주민들은 門下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 성씨가 들어오면서 그 사람은 종적을 감췄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삼봉마을 앞을 거쳐 간다.
"송석리(松石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7㎞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함해만을 사이에 두고 함평군 손불면과 마주하고 있다. 서쪽은 평야지대로서 5개의 저수지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삼면이 바다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해태와 어패류 등의 수산물이 많아 소득이 높은 지역이다. 본래 해제면의 지역인데 1914년 송계동, 삼봉리, 입석리, 도리를 병합하여 송계와 입석의 이름을 따 송석리라 하였다. 도리포와 닥섬이 있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立石리 松溪里, 道里浦里, 저도리’가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입석리, 삼봉리, 송계동, 도리’로 표기되었다.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송석리, 송계동, 삼봉리, 입석리, 도리’로 나온다. 1987년에는 현재와 같이 해제면 송석리 송계와 입석으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앞의 들녘은 족산들, 오른쪽 건너편 불빛 반짝이는 곳은 송계마을, 중앙 맨 뒤에 도리포항의 칠산대교가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도리포항에서 송계마을 뒤 송계산 산줄기를 이어 신풍마을, 신만마을을 거쳐 해제반도 끝 유월리 용산마을로 이어간다.
"송계마을은 해제면소재지에서 7㎞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해제면 송석1리인데 송계, 삼봉, 도리포, 저동(楮洞- 닥섬 또는 딱섬. 닭섬이 아니라 닥나무가 나는 섬이라는 뜻. 두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비어 있음)을 합하여 송계마을이라 부른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지명의 유래를 마을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에서 ‘송(松)’을, 마을 뒷산의 이름인 성계동(成溪洞, 성적동이라고도 함)에서 ‘계(溪)’를 합하여 ‘松溪’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마을 앞 숲의 소나무가 마치 시내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해서 송계라 했다 하나 송계라는 지명은 이미 조선시대에 있었던 이름이다." - 무안문화원
산수가 빛나는 삼봉은 약 오백 년 전 한 자연마을로 정착되어 육해양면의 천혜를 받으며 진전해 왔다. 이곳은 본시 인가가 드물어 회관 마련이 절실하던 중 별기의 지원과 협찬으로 어렵게 준공을 보았다. 우리는 이에 즈음하여 옛날 남녀가 서로 믿고 존중하던 미풍을 되찾아 애친경장을 기본으로 삼고, 나아가 향토의 번영을 위해 대동단결할 것을 다짐하며 수시로 이 회관에 모여 어제를 자성하고 내일을 계획하면서 희망찬 내 고장의 복지향상과 선진형 농어촌을 건설하는 등 이 모든 소원을 이루려는 온 주민의 정열을 한데 모아 이 비에 새기나니, 삼봉을 감싸고 가득히 반짝이는 서해의 푸른 물빛과 함께 삼봉은 길이 태평하리라.
서기 2002년 12월 24일 조형원 짓고 주민일동 세우다
왼쪽으로 가면 해제반도 서쪽 끝 돌멍재,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송계어촌체험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 끝까지 올라갔다가 송계산-망대봉-범바위산-삼복산 산줄기를 이어 만풍리 노문마을로 내려온다.
송석리 송계 해송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송계 해안으로 나간다. 끝에 불빛 비치는 곳은 송계어촌체험마을인 듯.
송계 해송길에서 송석정(松石亭)을 지나서 송계 해안으로 나간다.
송림(松林)이 우거지듯 송계(松溪)는 창성하리. 낙엽이 귀근(歸根)이면 애향(愛鄕)도 귀근이라. 부모형제 일가친척 그리는 마음 송석정(松石亭)에 모았으니 신선도 유숙(留宿)하며 과객(過客)은 휴식하고 동민(洞民)에겐 안식처라. 명사들의 방함(芳啣이 천추토록 빛나리.
1991년 7월 20일, 안국(安國) 글 짓고 씀
건너편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일대라고 가늠한다. 칠산바다의 섬들은 새벽의 어둠 속에 꼭꼭 숨어 있다.
어둠 속에서 해송림이 늘어선 송계해안길을 걸어 송계어촌체험관광안내소 앞으로 이어간다.
송계해안에서 국도77호선 만송로 도리포어촌체험마을쉼터로 나왔다.
송계어촌체험관광안내소, 카페, 특산물판매장, 휴게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들 뒤쪽이 아름다운 송계 해안이다.
서해랑길은 국도77호선 만송로에서 오른쪽 도리포항 방향으로 이어간다. 곧바로 가면 칠산대교를 건넌다.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 입구에 김공장 '담미소'와 '곱창돌김' 판매장이 있다. 해제 김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을 알았다.
도리포항 입구의 '담미소(淡味所)'는 김공장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32코스 시작점에서 8.7km, 종점까지는 8.8km, 도리포항은 32코스 중간 지점이다.
도리포항에서 도리포까지 나가서 도리포 고려청자매장해역, 칠산대교 아래까지 가보아야 하는데 그냥 통과한다. 아쉽다.
"영광군과 함평군을 경계로 하는 칠산 바다와 인접되어 있는 도리포(道理浦)는 일출과 일몰을 같은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매년 1월 1일에는 이곳에서 해맞이 행사가 개최되기도 한다. 또한 포구 앞 바다에서 14세기 경 고려청자 639점이 인양되어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무안에서 가장 큰 포구로 예전에는 100여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었다.
도리포에는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바위가 있다. 바위의 이름이 항상바위 (港上, 항상 같은 바위로, 또는 항구에 떠 있는 바위라 해서), 황상바위(皇上, 중국황제의 가족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해서), 환생바위(還生, 살아서 돌아오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해서), 환선바위(還仙, 신선이 돌아온다 해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바위는 현재의 방파제가 만들어지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빠져야 건널 수 있었다. 또한 얼마 전까지 군의 초소가 있어 가려있었으나 현재는 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현재 이 바위에 망부석과 詩碑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바위 위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어 여러 가지 전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함평 손불이나 현경 월두 마을 주민들이 큰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반드시 이 바위에 고사를 지내고 갔다." - 무안문화원
도리포항은 '한국의 아름다운 어촌 100'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갯벌보호지역 1호, 람사르 습지 1732호 무안 황토갯벌랜드, 전방 10km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만송로에서 오른쪽 임도로 진입한다.
임도에서 송계산 등산로 출입구로 진입한다.
신풍마을까지 2.8km이다.
송계산을 거쳐 신축 중인 뎈 계단을 내려가 만송로와 재회한다.
송계산 산줄기를 오르지 않고 만송로를 따라오는 일행들이 올라오고 있다.
만송로 산넘어재에서 맞은편의 남쪽 망대봉 능선으로 진입한다.
산넘어재 망대봉 등산 출입로에 뎈 계단을 신축하고 있다. 공사 때문에 이정목이 쓰러져 있다. 신풍마을 1.7km 지점이다.
신우대와 이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못된다. 신우대가 곧 이대일까? 키가 높은 전죽(箭竹) 지대를 통과한다.
범바위산(부엉산) 중턱에 나주(錦城) 나씨 세장산비가 세워져 있다.
만송로 산넘어재에서 1.2km를 걸어온 지점이다.
오른쪽은 해제면 만풍리 들녘으로 새벽에 오른쪽 아래 북쪽으로 올라가 도리포항에 도착하여, 도리포항에서 송계산, 망대봉, 범바위산을 거쳐 무안군 해제면 만풍리 신풍마을 입구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앞산을 넘어 삼복산으로 이어진다.
해제면 만풍리 13-2, 서해랑길 32코스 시작점에서 11.8km 지점이다. 어둠 속에서 신풍마을을 어림한다.
서해랑길은 신풍마을로 이어지지 않고 왼쪽 북쪽으로 꺾어 삼복산과 신만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신풍(新豊)마을은 만풍3리에 속한 마을로 아래덤, 윗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덤은 민머리, 신덕으로 불렸으며 윗덤은 신풍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신풍으로 불린다. 신풍(新豊)의 유래는 여러 물산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실지로 예전부터 이 마을은 소금, 쌀, 나무 등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생산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자리 잡은 성씨는 남양 홍씨이나 지금은 한 세대도 없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홍씨들의 흔적인 묘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없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아래덤은 함평 대동에서 온 광산 김씨 김태열(자 - 열지, 1738 -1776)이 들어왔고, 윗덤은 나주 다시 동당에서 온 하동 정씨 정달득(자 - 통여, 1752-1793)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자료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 신풍리가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도 무안군 해제면 신풍리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해제면 만풍리 신풍으로 나온다.
마을은 부엉산(봉산, 부흥산으로도 불림)을 주산으로 하고 죽방산(쭉방산)을 안산으로 하며 앞은 둔대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부엉산은 하동 정씨의 산으로 예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현재는 조그만 나무들과 잡목이 자라고 있다. 부엉산 정상에는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 범바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 산에는 지네머리와 누에머리의 지형이 있어 명당 터를 안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산의 모양이 부엉이를 닮았을 뿐 아니라 꼭 이 산에서만 부엉이가 앉아서 울거나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있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은 신만마을 방향으로 가다가 만송 등산로 출입구로 들어선다.
평택 임씨 세장산비 오른쪽으로 직진하여 만송 등산로 출입구로 진입한다.
왼쪽 만송 등산로로 진입한다. 이정목에는 신만마을 2.3km라고 적혀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24' 이정목 지점으로 신만마을까지 1.9km가 남아 있다.
왼쪽에 함해만, 오른쪽 아래에 해제면 만풍리 신만마을이 보인다.
오른쪽 마을이 신만마을, 중앙에 솟은 봉이 해제면 유월리 용산, 그 아래 용산마을이 있다. 맨 왼쪽 섬은 함해만의 엄도인 듯.
"신만(新萬)마을은 만풍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유래지에는 ‘처음 마을이 이루어질 때는 마을 북쪽에 있는 심양과 함께 형성되어 ‘시만동’이라 부르다가 이후 자연 마을인 심양, 비성굴, 염전마을을 합하여 ‘신만’이라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만이란 지명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대신 외진목, 내진목과 신풍리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 처음으로 신만이란 지명이 나온다. 주민들은 ‘신만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장래에 십만 석의 부자가 나올 수 있는 마을, 또는 앞으로 십만 호의 인구가 살 수 있을 정도의 마을이다.’ 라는 등의 의미를 가졌다고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 마을은 니성산(尼城山, 김해 김씨 족보에는 移成山, 移城山으로 나온다)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있다. 또한 뒤에는 마을 뒤에서 심양을 거쳐 진목마을로 연결되는 한복산(삼복지산)이 있다. 니성산은 해제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일제강점기 때 금광이 개설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강원도의 삼중광업소에서 금을 10㎏ 정도 채취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지금도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또한 이 산기슭에 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불타 없어졌지만 그 절터에는 금동좌불상이 묻혀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당시 채굴되었던 굴 터가 4-5개 정도 남아 있는데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는 굴도 있다. 또한 1963년에 마을 앞 뻘을 막아 간척지를 조성해 염전을 비롯한 넓은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해서 이 마을은 소금도 나오고 황금도 나오는 마을이다." - 무안문화원
만송로로 내려와 노문래마을 앞을 거쳐 만송로를 따라간다. 앞에 이성산이 보인다.
"노문래(老文來)마을은 만풍4리에 속하는 마을로 1986년에 신만마을과 분리되었다. 해서 입향조나 마을 유래 등 상당 부분이 신만마을과 같다. 신만마을에서 잔등을 넘어 남쪽에 자리한 노문래는 처음에는 ‘너머내’라고 불렀다. 그러다 한자로 옮기면서 현재의 노문래가 되었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동으로 한복산은 문필봉이요, 남에는 매가 있어 일자문이 분명하니 이런 데는 고서에 노문성이 비쳤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노문마을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 뒤편의 산 모양이 병풍형이고 마을 앞 새길이 一字로 되어 있어 이런 지역을 老門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사람이 지명을 노문래라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현재까지 노문래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주민들은 예전에 이 마을을 문헌방이라 부를 정도로 학문이 있어서 노문래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 무안문화원
만송로를 걷다가 뒤돌아서 삼복산과 그 아래 자리한 중앙 오른쪽의 노문래마을과 왼쪽 위의 신만마을을 살폈다.
왼쪽이 해제면 만풍리 신만마을 비성골이 맞을까? 서해랑길은 만송로를 따라 이어간다.
저 지역이 비성골이 맞을까?
만송로는 왼쪽으로 꺾어 무안황토갯벌랜드 방향으로 이어진다. 직진하는 해제오류길은 신축된 지 얼마 안 된 도로인 듯.
만송로에 이정목이 쓰러져 있다. 이 이정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잠시 직진하였다가 되돌아왔다.
서해랑길은 만송로에서 해안으로 나가는 농로로 진입해야 한다.
만송로를 따라가면 무안황토갯벌랜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농로로 진입하여 용산방조제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새창들 농로를 따라 용산방조제로 나간다.
무안 해제반도 동쪽 바다의 갯벌이 드넓다. 함해만 동쪽 엄도 위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오른쪽에 무안생태갯벌과학관이 있다.
함해만 엄도 위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철새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날아가고 있다.
해제면 만풍리에서 유월리로 넘어왔다. 엄도 위로 태양이 더 솟아오르고 언덕에 무안생태갯벌과학관 건물이 있다.
만송로에서 새창들 농로로 들어와 방조제로 올라왔다. 하늘에는 음력 섣달 열아흐렛날의 달이 서쪽으로 지고 있다.
오른쪽에 어둠 속에서 걸었던 삼복산이 가늠된다.
삼복산과 그 오른쪽 뒤 범바위산(부엉산)을 가늠한다. 중앙 뒤쪽에 도리포항이 있을 것이다.
엄도 위로 태양이 완전히 솟았다. 오른쪽 언덕 위에 무안생태갯벌과학관 건물이 있다. 무안생태갯벌은 해제반도를 굽이돈다.
함해만에 떠오른 태양을 보며 용산방조제를 건너 무안생태갯벌센터로 향한다.
왼쪽에 이성산, 오른쪽에 삼복산, 그 아래 만풍리 노문래마을과 신만마을, 안부 뒤쪽에 진목마을과 심양마을이 있을 것이다.
왼쪽은 무안생태갯벌과학관이다.
용산방조제 조성으로 형성된 간척농지 새창들이 펼쳐져 있고, 이성산이 솟아 있다. 오른쪽 뒤에 만풍리 신만마을이 보인다.
용산길을 따라 용산마을을 통과한다.
"龍山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뒤 산의 이름인 용산에서 비롯되었다. 니성산의 한 줄기인 용산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소유자의 이름을 따 구본산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의 동편에 있는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떨어졌다는 산이 있다는 설에 의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을 이름을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지역에는 무안읍의 용산, 복룡, 일로읍의 복룡리, 청계면의 복룡마을처럼 마을 이름에 ‘龍’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다. 이는 대체로 지형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강이나 바다를 향해 산의 맥이 흐르고 있으면 붙여지는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의 주민들도 마을 뒷산의 맥이 용의 형상을 하고 함해만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용꼬리는 물암 쪽이며 용머리는 니성산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사기점, 작은용산, 큰용산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용산 뒤에는 가마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서 구운 가마를 사기점으로 옮겨서 배로 운송했다고 한다. 지금도 가마골 주변에서는 가마터가 있었으며 백자와 접시 등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엄섬과 대섬이 있다." - 무안문화원
"용산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1870년에 들어온 고성 이씨 李在燮(1838-1918, 初諱-재삼, 자-경춘)이다.(내 고향 해제고을에는 1904년에 입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先代는 강원도 고성에서 세거하였으나 이괄의 난을 피해 함평으로 내려 와 살게 되었다. 이후 흉년이 들어 살기 어려워지자 입향조가 식솔을 데리고 살 곳을 물색하던 중 해제 천장리 보천을 거쳐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재섭 공은 고성 이씨 족보에 의하면 임인년에 당상관 통정대부에 올랐던 사람이다." - 무안문화원
진원 박씨 문중 땅에 진원 박씨 세장비(世庄碑)가 세워져 있다. 언덕 왼쪽에 용산마을회관과 쉼터정자가 있다.
용산마을은 동, 서, 남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으며, 동편(백두)의 인접된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떨어졌던 산이 있다는 설에 의해서 용산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큰용산 서북쪽으로는 해발 백여 미터 가량의 산이 있는데 이는 용머리이며, 동과 서남쪽으로 오백여 미터 거리에 펼쳐진 부분이 용날개이며, 서남쪽으로 약 칠백여 미터 가량 인접부분 지역이 용꼬리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용산의 서쪽 약 이백여 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가마골이라는 곳은 옛 선조들이 사기(도자기, 백자기) 등을 빚어서 생업을 이루었던 곳이며 큰용산마을 북쪽으로 백오십여 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샘너머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고개를 너머 물(식수)을 먹어야 병이 없고 건강하게 산다고 하여 샘너머로 불리웠다 하나 지금은 우물이 없어지고 농토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 형성은 큰용산, 사그점, 작은용산 등 3개반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약 35호의 여러 성씨들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입향조 : 豊山 洪氏(자세한 연도는 알수없음), 固城 李氏 1870년(이재섭)
용골 : 산구릉상에 위치하였다고하나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음
지명 : 가마골, 사그점, 갯골(샘너머 바다골)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해제반도의 끝이다. 오른쪽 1/3 전봇대 뒤에 무안황토갯벌랜드 정문 입구가 32코스 종점이다.
이곳에서 30분 동안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용산마을은 사기점, 작은용산, 큰용산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옆에 서해랑길 무안 32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나 그 앞에 대형 급수트럭차가 세워져 있어 사진 찍기가 어렵다.
예상 소요 시간 5시간 30분에 비해 23분 정도 단축했다.
무안황토갯벌랜드 입구 오른쪽 전봇대에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