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②
*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에 대하여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테러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김상옥(1923,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익상(1921,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나석주(1926, 동․척과 식산은행 폭탄 투척) 등의 의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1925년 이후로 노선을 바꿔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이래로 이 학교에 포진된 공산주의 교수진의 영향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1932), 정당 조직(후일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과 군사 조직(후일 1938년 조선 의용대 결성) 형성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35년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으로 형성된 조선 민족 혁명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공산주의 정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다(1938).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 출신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국민당 군대와 함께 선전 활동, 일본군 포로 심문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대원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 후 김원봉과 남은 세력들은 임시정부(군무부장)와 한국 광복군(부사령관 겸 1지대장)에 합류하였다(1942).
이후 김원봉은 해방이 되자 임정 요인들과 남한으로 입국하였고, 통일정부를 위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우파 연합전선)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좌파 연합전선)에 합류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에 입북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연안파로 몰려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① 박용만(1881~1928)은 1914년 미주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③ 안중근(1879~1910)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다(1909.10).
④ 지청천(1888~1957)은 1930년대 초 북만주에서 한국 독립군의 사령관으로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⑤ 일제의 항복 직전 여운형(1886~1947)은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준비하였다(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