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35~45(72) 누가 주를 따라 가려는가? 2021. 11.7.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라는 책은 흑인이 된 백인 존 하워드 그리핀 (John Howard Griffin)의 이야기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하던 미국 남부 지방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존 그리핀은 신앙을 통해 흑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느 날, 흑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당신이 우리와 같은 피부 색깔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핀은 흑인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약품과 염료, 방사선을 이용하여 피부를 검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괴롭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국 피부는 검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때는 1959년, 인종차별을 받던 흑인들의 생활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흑인이 된 그리핀은 목이 말라 물을 먹을 때 흑인들만 먹게 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 마셔야만 했고,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흑인 전용’이라는 팻말이 붙은 화장실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때도 많았지만, 그는 흑인들이 당한 차별과 편견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 후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핀은 60세가 되어 피부암으로 죽게 됩니다. 피부를 검게 하려고 사용했던 약품과 염료, 방사선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존 그리핀은, 죄인을 사랑하사 스스로 죄인이 되셨던 예수의 삶을 실제로 자신에게 적용하며 주를 따라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내용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속적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리다툼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리며 주를 따라가는 태도를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과 신앙의 성장은 언제나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되면 자연히 신앙도 성장할 것으로 알지만 반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오히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신앙이 습관적이거나 형식이 되기가 쉽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다가 나중에 신앙이 퇴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연륜에 따라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를 따르려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합니까? 주를 따르는 자는 어떤 각오를 해야 합니까?
첫째로 받으려는가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는 루마니아가 공산국가가 될 때 지하교회를 이끌다가 체포된 루터교 목사입니다. 그는 공산치하에서 고난을 받던 그리스도인의 모본을 보였습니다. ‘순교자의 소리’ 라는 선교단체를 창설하여 아내와 함께 전 세계의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리는 범브란트 목사는 복음을 증거하다 붙잡혀 많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범브란트는 자신을 고문하는 공산당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고문을 받다가 기절을 하면 다시 깨어나자마자 “조금 전에 어디까지 말했지요?” 라고 묻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미국 상원의회의 초청을 받아 증언을 할 때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습니다.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상처와 흉터가 몸에 가득하였습니다. 수 없는 채찍 자국, 불에 지진 자리가 있었습니다. 범브란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Tortured for Christ)’이라는 책에서 14년 동안 감옥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언제나 기쁘게 찬송하였던 이유를 간증하였습니다. 자신이 받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이어지는 고난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나 교리를 암송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각오하고 믿을 때 진실로 믿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를 위해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비로소 주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의 ‘잔’은 ‘포테리온’인데 ‘마시는 그릇’이란 뜻이며, ‘세례’는 원어로 ‘밥티조마’로서 ‘극심하게 당하는 재난’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잔과 세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 영광에 집착하여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여야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봉사와 수고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피하고 영광만 얻으려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받지 않는 자는 말씀을 받되 뿌리가 없어 환난이 일어나면 곧 넘어지는 자와 같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주를 따라가려면 주를 위해 고난받는 일이 영광을 얻는 과정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섬기려는가
크리스챤 월드(Christian World) 잡지의 편집장 고든 애슐리만(Gordon Aeschlimann)은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도문’을 소개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명령과 뜻을 주실 때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지 않는 순종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지위를 주지 마시고 섬길 수 있는 장소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지 마시고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맨션아파트를 주지 마시고 온 천하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디딤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좋은 직장을 주지 마시고 일할 수 있는 곳에 우리를 놓아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지 마시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자기만족을 주지 마시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놀이문화를 주지 마시고 우리들을 주님의 유능한 자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좋은 연봉을 주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주님을 즐거워하는 것인데, 이 외에 어떤 기쁨이 그것과 감히 비교될 수 있습니까?”
본문 43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여기의 ‘섬기는’은 원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입니다. 하인이나 사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고방식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섬김이 제자도의 기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섬기는 자를 ‘집사’라고 호칭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섬김의 도리야말로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섬기는 것보다 섬김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섬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섬기는 위치에 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섬김을 중히 여기셨기에 주를 따르는 자는 지위가 어떠하든지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도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누가 주를 따라가는 자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죽으려는가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순교 하기 직전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일본 경찰의 시험이었습니다. 모진 고난을 많이 받았기에 가족들을 만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사는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집이 아니라 교회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과 만난 주기철 목사는 일본 경찰들이 감시하는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섯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짧은 고난은 견딜 수 있겠지만 장기간이 되면 주를 부인할까 두렵습니다.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결국 주목사는 다시 붙잡혀 끝까지 믿음을 굽히지 않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의 ’대속물‘은 원어로 ’뤼트론‘인데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밝혔습니다. 이러한 자신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모델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과연 주를 따라 죽을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주를 위해 죽는 자만이 하늘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 죽으려는 각오 없이 상석에 앉으려고 하면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악한 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선 다싱(Sadhu Sundarsingh)이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당신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둘째, 당신은 기독교를 타락시키거나 손상시키지 말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당신은 사랑을 강조해야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을 닮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당장이라도 인도가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에 골몰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주님을 따르겠다고 서원하였지만 주님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생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실로 를 따르려면 부단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생각과 행동을 주께 맞추려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주를 따르려는가?” 타성에 빠진 신앙적 습관과 형식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비록 고난을 받는다 해도 끝까지 주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섬기며 주를 따르리라고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믿음으로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