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18:18~19:20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 어려움도 있었음. 이후 예루살렘을 가기 전에 에베소에 잠시 머물다가 떠남. 성도들은 원했지만...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브루기아, 갈라디아, 그리고는 에베소에 다시 감. 이것이 18장 18절이후 말씀.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남. 언변이 뛰어나고 학식이 있는 사람. 알렉산드리아(학식으로 유명한) 출신.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가르침. 아굴라과 브리스빌라는 아볼로에 대한 불만족이 어딘가 모르게 있음. 아굴라와 브리스빌라가 아볼로를 가르치는 일이 발생. 그 대단한 교사를... 아볼로의 겸손함. 그래서 온전한 복음이 장착됨. 그리고 고린도를 가고 싶음. 그 부부가 섬긴 교회에 대한 궁금증. 파송되어 고린도로 간 아볼로. 바울이 떠난 공허감이 있는 아볼로가 가게 됨. 그리고 탁월한 논리로 그 곳 유대인을 압도. 그래서 아볼로파가 생김. 그가 고린도에 가 있는 동안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
19장 1절, 에베소에 바울이 도착하자 새로운 양상이 발생. 성령세례에 대한 것.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성령을 모를 수 없음. 복음을 충분히 몰랐던 부부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바울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이유는 모르지만, 에베소 제자들 중에 성령세례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문의 사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먼저 해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성령세례를 잘 알고 있나?" 그래서 성령세례에 대한 개략적 의견을 보면 대략 3가지.
1) 전통적 입장 : 존 스토트,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다는 의견. 다만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이후에 임재, 그것은 이 입장에서 *예외적 사례로 간주함. 성령님께 내 삶의 영역을 모두 맡겨드리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인격의 변화는 성령의 열매..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입장임.
2) 로이 존스의 입장 : 구원은 성령 때문. 그러나 그것을 '중생의 세례'로 부르자. 그러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별도의 성령의 역사가 있다.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하자. 성령과 성령의 세례의 구분
3) 오순절 성령 : 첫 번째 축복, 두 번째 축복(2nd blessing). 여기까지는 2)번과 같음. 그러나 두 번째 축복에는 반드시 방언이 따른다.
목사인 나는 어떤 것이 옳은 지 모른다. 짧은 인생 속에서 어머어마한 성령에 대해서 무엇을 알까? 그리고 그런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따른다는 사실임. 성령충만, 성령세례를 말한 두 사람은 상호 매우 친화적이었다. 주의할 것은 서로의 의견이 우월하다는 의식임. 하나님은 교만하라고 은사를 주시지 않으심. 성령에 대해서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 뿐.
우리 교회에서도 성령체험을 갈망함. 나는 그렇지 않음. 사는 데 지장 없음. 어떤 성도님 우리 교회가 너무 맹숭맹숭해서 순복음으로 가 버린. 며느리는 조용한 것이 좋아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모두 다양하고 다름. 성장 속도도 다름. 급격하게 변하는 이도 있고 자신이 변하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음.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이들이 함께 주님을 바라본다는 사실. 크신 성령님은 다양한 기질을 가진 우리를 모두 수용하고 계시다는 것. 마치 성숙한 사람일수록, 아이에게는 아이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처럼, 그런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처럼 대하는 것. 성령님을 자신의 스타일로 구속하려면 안 됨. 전 세계에서 오순절이 가장 부흥하고 있음. 반면 폐해도 많음. 그것을 질타하기보다 왜 성령님이 부흥을 주시고 일하시고 계시는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함. 예수전도단 어떤 분,
목사님 보수 꼴통 합동 측이지만...만족스럽지 않지만 떠날 필요성도 느끼지 않음. 커밍아웃. 전통적인 성령관이 편안함. 꿈과 깨어남 사이에 선명한 어떤 현상. 깜깜한 칠흙같은 배경에서 얼굴이 나타남. 매우 싫어하는 존재의 얼굴이었음. 무서웠음. 소름이 돋았음. 기도했음. 도와주세요. 갑자기 빛, 불이 양쪽에서 와서 섞여 그 싫은 존재가 없어졌음. 그리고 환해졌음. 그런 경험을 했지만, 그런 현상이 또 없으면 어때.
성령님은 만물을 회복하시는 크신 존재.
어쨌든, 내 입장만 맞다는 것을 주의하면 됨. 다다음주 기독교 논쟁에 대한 논제 발표. '잘라라 선악과를 향한 그 손을..' 내가 무엇이 옳은 지를 판단하려함. 칼을 내가 주려함.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이 아볼로의 영향이 옳지 않다고 하지 않음에 주의. 예전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지금은 반대 '아볼로는 심었고, 나는 물을 주었다.' 아볼로에 대한 존중.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한 교육만 한 것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음. 이것이 오히려 새시대에 대한 전조라고 평가함. 성령세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설명, 해석함. 4~7절, 에베소에서는 성령의 특별한 기사가 많았음. 왜? 에베소는 우상과 귀신의 도시였기에, 그것에 맞서기 위해. 그런데 그런 것보다 앞선 것이 말씀 사역. 8절)
마음이 굳은 사람은 변하지 않음. 상대의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려고 듣는다. 오히려 내 의견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태도로 듣는다. 그래서 떠난다. 변하지 않는다. 9~10절). 두란노로 떠난다. 두란노는 작업장이나 강의실일 수도 있는 곳. 원문은 티라노스임. 티라노스의 뜻은 '폭군'. 뭔가 스토리가 있는 공간. 중요한 것은 바울이 2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 폭군이 아닌 가장 겸손하신 왕인 예수님을 가르쳤음. 아이러니.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두란노는 선교의 플랫폼. 이렇게 말씀이 부요하게 쌓인 끝에..... 매일같이 가르쳤다. 2년 내내. 이렇게 말씀이 쌓이니까 성령의 가시적 역사가. 11~12절) 병이 떠난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회복. 악한 귀신의 통제를 받던 이가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찾는 것임.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하시는 일. 병이 낫는 일. 그런데 사람들은 치유 사역에 사용한 '수건'을 찾으러 다님.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수건은 그저 수건.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바울은 그저 '대머리 아저씨.' 우리는 현상을 쫓는 경향. 이런 극적인 현상 속에서 우리는.... 현상을 쫓는 이가 발생. 욕심을 쫓는 것임. 나도 이런 자극적인 일을 하고 싶은 것임. 유대인 사교 마술사, 공명심으로 사람의 인기를 얻으려는 사람들. 이들이 선포하는 형식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식으로. 귀신이 나가지 않음. 악귀에게 오히려 봉변을 당함. '귀신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지 마라. '귀신이 긴장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나? 악귀가 마술사들을 '너희는 누구냐?' 예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17~19절)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예수님을 따르려하는 곳에는 반드시 3가지가 따른다. 1)찬양, 2)고백, 3)결단
찬양(바로 당신이었군요, 스크루테이프), 고백(그동안의 것), 결단(마술책을 불태움. 은 500냥, 40~50억 싯가).
결국 성령님께서 알고, 깨닫고 선포하시게 하는 일을 하셨다. 말씀이야말로 진짜 권력임. 20절)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에스겔서 3장 2~4.(쉬운 말 성경). 말씀이 내 창자로 채웠다, 말씀이 스며들면 우리는 입을 벌리고, 먹여 주시면, 꿀처럼 맛있고... 성령으로 살고 전한다. 그리고 위대한 역사로 남긴다. 이런 설레고 복된 여정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고스란히 증거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