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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8-22(762) “본 받아야 되는 욥” 2024. 12. 22.
지난 주간 중에 부산성경신학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퀴즈를 통해서 선물 추첨식이 있었는데, 사회자가“예수님이 태권도가 몇 단이냐?”라는 문제가 제출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신학생들이 모여 있지만, 전혀 들어 본 적도 없고, 성경에도 없는 것이라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 때에 학생 한 명이“예수님은 태권도가 삼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태권도 실력이 <삼단>이냐 하면, “예수님은 이단을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태권도 2단과 이단(異端)의 뜻은 전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것에 착안한 넌센스 퀴즈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목사님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승단하시어서 오단이 되신 것은 모르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태권도에서는 승단심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이 되면 승단을 합니다. 그런데 태권도를 하지 않은 예수님이 승단하셨다니요? 사람들이 어리둥절 하자, 말을 끄낸 목사님이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완벽을 완벽하게 이기셨기 때문에 오단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들 한바탕 웃었습니다만, 그러나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5단으로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태권도에서는 8단까지는 실력으로 하고, 그 이상은 단 심사를 할 수 없어서 명예로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 인간이 심사를 하는 기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힘으로 내가 이단을 이기고, 사단을 억누르게 됨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도 몇 단입니까? 다들 3단이고 5단임을 감사하십시오.
요 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이기시는 주님과 함께 하심으로 매일 매일이 승리하는 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며, 욥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욥은 사단의 시험으로 인하여 인간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최대의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승리하는 사람으로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아이라고 근심걱정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나름대로 고민이 있습니다. 대한의학협회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하여 <어린이 우울증>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합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유현이와 시현이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요.
어른이 늙는 것은 잘 모르지만 아이가 자라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어린 아이같은 유현이지만 지난주에는 한글을 막힘없이 읽었다는 말을 듣고,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상상 이상이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유현이에게 “너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잇냐?” 물어 보면,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말할 것입니다. ‘쪼그만 것이 무슨 고민이냐?’무시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고민을 가지고 있고, 장년이나 노년이나 모든 시대에 구분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은 문제와 고난이 있습니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없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문제와 고민이 있고 재벌 총수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는 분이 있는지요? 고민 속에 지내면서 한숨으로 자책하면서 보내시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말씀으로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욥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은 믿음만 인정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2-3절에 보면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마음이 매여 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오직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물질이 많으면 교만하고 방탕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말이 욥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욥이 받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덕민교회 성도들에게 풍족한 물질을 주시옵소서. 아울러 물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관리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믿음까지 허락하셔서, 어느 면으로나 부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새벽기도마다 엎드려 기도드립니다.
제가 왜 이런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릴까요? 그것은 욥의 모든 면이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모든 성도들이 본 받아야 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삼자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농사를 짓는 이 분은 어느 날 자기 논의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합니다. 알고 보니 옆에 논 주인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논물을 빼간 것입니다. 당장 찾아가서 따지고 멱살이라도 잡을까 생각하다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어서 참았고, 시비를 하고 싶지 않아 구멍이 나 있는 논둑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가보니 다시 수로가 뚫려 있습니다. 농부는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장로와 같은 높은 직책에 있었기에, 혈기로만 일을 풀 수 없었습니다.
하도 답답하여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는 중,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살겠지만,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라는 확신을 받게 됩니다.
농부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올바른 일 그 이상을 하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고민에 고민을 또 합니다.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다가 한 밤 중에 자신의 논으로 가서는 자신의 논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를 아예 이웃 논으로 돌려놓아 버립니다.
그것이 올바른 일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줄기를 돌려 놓고 나오는 농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마음에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그날 오후 이웃 논의 주인이 찾아와서 “정말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시군요. 저도 이제는 당신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으로 모범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말씀대로 행동하고, 순종하여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욥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20절,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사단의 시험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재물과 자녀와 종들을 다 잃었습니다. 한순간에 다 날려 버려야 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서 벌 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유나 잘못도 없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체, 소중히 간직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는 건강과 부인까지도 잃어버립니다. 졸지에 가장 큰 부자가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이 됩니다. 한 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처참한 신세가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 상황을 겪으면,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먼저 생각할지 모를 일입니다. 조그만 일만 닥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너무 흔한 현실입니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는 일이 조금 안된다고, 기분 나쁘고 힘들다고, 스스로 귀한 생명을 거두어 버립니다.
OECD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이 자살률 1위로 부동의 위치에 있습니다. 10만명 당 27.3명이고 하루 평균 35.4명이 자살하며, 2시간마다 3명이 자살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현상입니다. 이런 숫자 통계는 전체 사고사 중에서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슬픈 통계 수치입니다.
욥인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악의 궁지까지 몰린 욥입니다. 죽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골백번 더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스스로를 궁지로 몰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려움을 참고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힘주시고, 나에게 위기와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성도는 어려울수록 더욱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침착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반드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욥은 최악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회개하며 땅에 엎드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욥은 평소에 예배의 사람이었기에, 가장 어려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예배의 사람만이 최고의 고통의 순간에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은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요 인생의 실패자라서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때에 목사님이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①“당신은 아내가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도와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②“자식이 있습니까?” “예, 공부는 잘 못하지만 착하고 건강한 자식이 있습니다.”③ “친구들이 있습니까?” “몇 친구는 내게 참 좋은 친구입니다.” ④“건강합니까?” “건강합니다.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⑤“잠은 잘 잡니까?” “돈벌이는 못하지만 잠은 아주 잘 잡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당신은 굉장히 부자입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건강하고 잠도 잘 자는데 왜 당신이 가난합니까? 당신은 잘못된 자화상에서 벗어나 힘을 내라”고 충고 하였다고 합니다.
욥은 다 가졌을 때나 다 잃었을 때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조금 잘나가고 성공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다 받은 축복의 사람인양 어깨를 펴다가, 조금 어려움이 오면 세상 모든 짐을 다 진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 뜨리고, 교회로 출석하는 발걸음을 끊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욥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는 생명입니다. 예배에 목숨과 생명을 걸고 드려야 합니다. 적당히 해서는 결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단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훼방을 놓습니다. 예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음을 아시고,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욥은 찬송의 사람이었습니다.
21절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을 향한 사단의 시험에서 사단이 결정적으로 오판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은 가지고 있는 물질에 근거한 것이라”고 사단이 오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재산을 다 빼앗아 가고, 욥의 모든 자녀들을 다 죽이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등 돌리게 만들면, 욥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면서 원망할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탄의 완전한 착각이자 오판입니다. 욥은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면서 섬긴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욥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물질을 초월한 믿음. 이것이 바로 욥의 위대한 점이요, 본 받아야 되는 모습입니다.
21절에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 찬송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욥이 고백한 이런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울러 욥이 드리는 이런 아름다운 고백의 찬송이 우리 모두의 찬송이 되길 소망합니다. 내가 잘 나갈 때에도 하나님에게 찬송하고, 내가 힘들 때에도 하나님에게 찬송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설교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서 그 무엇을 가져 갈 때에는 반드시 더 큰 사랑과 축복을 주기 위하여 가져 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내 좋은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하여 내 것을 가져갔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평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우러러 나옵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사랑에 충만하여 등산을 같이합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가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 좀 이끌어 주라. 너무 힘들어서 그런다” 말합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남편이 “여보! 많이 힘들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입이 튀어 나와 말합니다. “그럼 무겁지! 약한 여자에게 이끌어 달라고 말하냐? 얼굴은 철판이지, 머리는 돌이지, 몸통은 장독처럼 뚱뚱하지… 나 정말 힘들어”
머쓱해진 남편이 손을 뿌리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다가 길이 험하여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기야, 나 다리가 아파 그러니 나 조금만 업어주라” 남편이 아내를 마지못해 등에 업었습니다. 숨이 헐떡거리는 남편을 보고 아내가 미안한 마음으로 “자기야! 그래도 나 가볍지? 나 몸무게 얼마 안 나가잖아”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남편은 아까 당한 것에 복수라도 하듯이 되받아 칩니다. “그럼 엄청 가볍지, 머리는 든 것이 없이 비어서 가볍지. 허파에는 헛바람이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게다가 돈도 없으니 엄청나게 가볍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백년해로하는 부부사이라도 고운 말, 사랑스러운 말, 칭찬하는 말이 오고 가야 합니다. 성도는 누구라고 할지라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이해 못하는 부모나, 나에게 섭섭하게 대하는 가족이나, 나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성도나, 그리고 교회나 하나님을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하면 모두가 다 상처 받고 죽습니다. 칭찬하고 위로합시다. 욥처럼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입술로 다른 성도들을 축복하고,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사랑의 말로 받아 주십시오. 찬송을 하면 사단을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갑절로 임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