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교량 제작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중생 위한 자비·공덕으로 공공사업에 적극 나서
홍수에 취약했던 중랑천에서 재산·인명 피해 끊이지 않자
성종 때 이름 모를 스님에 의해 ‘살곶이다리’ 어렵게 완성
불교 승단이 국가 공무 대리해 노동력 제공했을 가능성도
서울 성동구에 살곶이라는 곳이 있다.
사근동 남쪽 일대로서 종로에서부터 흘러온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지점이다.
현재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지명이 몹시 특이한데 ‘화살이 꽂힌 곳’이라는 유래를 지닌다.
한자로는 ‘箭串’으로 표기하고 ‘전천’ 또는 ‘전관’이라고 읽는다.
조선 초 왕자의 난으로 실각한 이성계가 난을 일으키고 왕위를 차지한 아들
이방원을 미워하여 그에게 쏜 화살이 날아가 꽂힌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야사에 전해지는 내용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지역이 화살과 관련이 있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실록에는 살곶이가 왕실의 매사냥터로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태종이 이곳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내친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이곳에서 중랑천 맞은편으로 위치한 곳이 뚝섬이다.
뚝섬의 한자 이름은 독도(纛島). 조선시대 군대의 제사인 독제(纛祭)에서 유래한다.
또 살곶이에서 청계천을 거슬러 5리 정도를 올라가면 마장동이다.
지금은 축산시장이 들어서 있지만, 본래 말목장이 있던 곳이라 이름이 마장이다.
그렇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수도 한양을 외호하는 군사시설 지대였다.
조선의 임금들은 이곳에서 열병식을 가졌다.
문제는 이곳이 홍수에 취약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중랑천은 연관검색어로 ‘수위’ ‘범람’ ‘통제’ 등의 단어가 뜰 정도로
장마 때마다 큰물이 지고 사고도 잦다. 몇 백 년 전이라고 달랐으랴.
비만 오면 이 일대의 물이 범람하여 경작지가 훼손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등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잇달았다.
임금이 행차했다가 냇물이 불어 넘쳐 배로 건너갔다가
날이 저문 뒤에 환궁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세종실록’ 4권)
이에 나라에서도 살곶이와 뚝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지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완공되더라도 물살이 세 쉽게 무너지곤 했다.(‘세종실록’ 8권)
결국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14년(1483)에 어렵사리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살곶이다리’이다.
오늘날에도 한양대학교 담장 밖에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교량을 이루는 돌들을 보면 대부분이 새로 조성된 것이지만,
한양대학교 쪽 30여m의 상부구조와 교각은
돌의 색깔이나 마모된 정도로 보아 오래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바로 성종 때 지어진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살곶이다리는 그 유물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7년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12월에는 사적에서 해제된 뒤 보물 제1738호로 재지정되었다.
그런데 살곶이다리의 내력을 전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흥인문(興仁門) 밖의 전관(箭串)과 왕심리평(往尋里坪)에 두 다리[橋]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임금이 직접 이름을 내린 것들이다.
상고하건대, 성종 14년(계묘)에 승려들이
이 흥인문 밖의 전관과 왕심리평에 각기 다리를 하나씩 놓았으므로,
임금이 전관에 있는 다리를 제반교(濟盤橋),
왕심리평에 있는 다리를 영도교(永渡橋)라 명명하였다.
이 두 다리는 모두 돌로 쌓은 것으로 다 서울[京師]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은 이규경(李圭景, 1788~?)은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살곶이다리가 지어진 당대에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가 있다.
바로 성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성현(成俔, 1439~1504)으로,
그가 쓴 ‘용재총화’ 9권에는 살곶이다리의 제작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승려가 일찍이 전천교(箭串橋)를 구축하였다.
많은 돌[萬石]을 채벌하여 대천(大川)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의 길이가 300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성종이 그 승려를 유능하다고 여겨 구축하도록 명하였다.’
살곶이다리를 제작한 스님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돌을 채벌했다는 데에서 재원과 인력이 적지 않은 규모로 동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재총화’에는 이어서 “(임금이) 관력(官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미포(米布)를 많이 급여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교량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국가에서 온전히 지원하였다는 뜻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즉 재원 마련에 스님의 모연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원된 인력 또한 그 스님을 따르는 이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이 사람들을 위해 교량을 제작한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앞서 4화에서도 소개한바 있는 자비(慈悲) 스님은 산에 들어가 수행하기보다는
매양 다리를 짓거나 우물을 고치고 다녀 세간의 의구심을 사곤 했는데,
그에 대하여 “…나는 달리 나라에 보탬 될 만한 일이 없고,
다만 교량이나 길가의 우물을 고쳐 이로써 사람들에게 공덕을 쌓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용재총화’ 7권.)
이로 보아 조선 전기의 스님들은 민간을 위한 공공사업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하였으며, 그 취지는 중생을 위한 자비와 공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조선시대의 불교 승단이
국가의 공무를 대리하며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사정을 에둘러 전하는 것은 아닐까?
살곶이다리 제작을 선도했던 것은 그 어떤 스님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능력을 신임한 성종은 새삼스레 스님에게 교량의 구축을 ‘명령’하였다.
태종과 세종 때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양 도성의 민가에 얹을 기와를 제작하는 일에 해선(海宣)이라는 스님이 등장하여
국가와 사업에 관한 논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주고받았던 것이다.
2022년 4월27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