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처형
안토넬로 다 메시나
서양미술사에서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신앙심과,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되면서였다.
수많은 화가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초월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모습부터
예수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그렸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79)는
그림 맨 왼쪽에 부러진 십자가 위에 있는
흰 두루마리에는 ‘1475년,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렸다.’ 하고
화가의 서명이 라틴어로 적혀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배경에는 호수가 보이는 평온한 마을이 보이는데,
그 풍경은 예수님의 처형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배경은 마치 그 당시 이탈리아의 소박한 마을 같이 보인다.
화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로 옮겨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는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고요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자갈과 모래가 뒤덮여 있으며,
해골과 사람의 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골고타를 해석하면 해골 터이고,
중세의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무덤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면
예수님의 순종으로 죽음을 몰아내고 인류가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십자가의 수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인 셈이다.
그림 한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는데,
십자가 맨 꼭대기에는 ‘유다인의 임금 나자렛 예수’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평온하게 숨을 거두셨다.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에 박힌 손과 발을 재외하면 예수님의 몸은 깨끗하다.
예수님의 양옆에 두 명의 죄수는 온몸이 뒤틀린 상태로
십자가가 아닌 나무 기둥에 가죽 끈으로 묶여 있다.
예수님과 두 죄수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많이 연구된
인체 해부학에 대한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님 양옆의 두 죄수 중에 누가 ‘선한 도둑’인지 추측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발버둥치는 두 죄수의 모습은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균형 잡힌 평온한 몸의 형태와 대조를 이룬다.
죽음의 면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가 예수님을 모독하며 말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39-43)
그렇다면 누가 ‘선한 도둑’일까?
예수님께서 회개한 죄수를 낙원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머리가 향한 쪽에 있는 사람이 ‘선한 도둑’이다.
그의 양쪽 발에는 칼자국이 있다.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화가는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발목에 피를 내게 하여
그를 서서히 죽게 하는 방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늘로 시선을 향하고 평온히 죽음을 맞이한 ‘선한 도둑’의 모습에서
구원에 대한 희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평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나쁜 도둑’은 하늘을 원망하면서 몸부림치고 있다.
그는 세 명의 처형자들 중에서 가장 몸이 깨끗하다.
그는 두 팔만 가죽 끈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을 뿐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가 죽었을까?
그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지 않고,
세상만을 탓하고 남을 모독한 자기의 행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화가는 이들의 회개 여부에 따라 몸의 뒤틀림 정도를 묘사했다.
해골을 경계로 그림 아래 ‘나쁜 도둑’ 편에 있는 그루터기에는
빛을 싫어하는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가 앉아있다.
이 죄수는 올빼미처럼 진정한 믿음의 빛을 외면하여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선한 도둑’ 편의 부러진 십자가 아래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토끼가 있다.
그는 낙원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부활을 꿈꾸며 숨을 거둔 것이다.
십자가 아래에는 두 사람이 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였던 사도 요한이다.
모은 두 손을 무릎에 내려놓은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 앞에 넋을 잃었다.
무릎을 꿇은 사도 요한은
두 손을 힘껏 모은 채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며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실 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을 마친 뒤에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십자가 뒤편으로 오솔길을 따라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로마 군사 한 명의 창을 들고 되돌아오고 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할 것이다.
성경에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요한 19,34) 하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경계로 로마 군사 반대편에는
밑동이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오고 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는
이사야 예언자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의 서곡이요 우리 구원의 서막이다.
그러기에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 내리니,
귀한 나무 귀한 못들 귀한 짐이 달렸도다.”
(성 금요일 성무일도 아침기도 찬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