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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하는 걱정
조금 늦은 오후, 키큰아저씨와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날씨와 마을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했고 평화롭기까지 했습니다. 문득,
"이런 바람을, 소포로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낸다면 좋겠네요......" 하고 내가 말했더니,
"그렁게나 말여. 여기 공기는 참 깨끗혀..." 하셨습니다.
정말 이렇게 맑은 공기 속에서, 더구나 호숫가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평상 위에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풍경이, 내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내가 바로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느낌으로 만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 때, 산장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뒤에 산장아저씨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둘이서 뭐 그리 재밌는 얘길 허고 있대요? 배가 아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며 웃음 가득이셨습니다.
우리 둘이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끼고 싶어... 하던 일손을 멈추고 찾아오셨던 겁니다.
그렇게 셋이 평상에 앉게 되어,
나는 지난번에 친구 처형이 가져왔다가 나한테 마시라고 남겨두었던 '머루주'를 냉장고 안에서 꺼내왔습니다.
안주로는 군산의 형수님이 가져왔던 멸치조림이 있을 뿐이었지만, 맛있는 김치와 꺼내왔더니... 그런대로 모자람이 없는 안주였지요.
"참 좋네!" 산장아저씨가 새삼스럽게 말을 꺼내면서, "근디, 장씨, 꼭... 내년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혀?" 하고 나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서는,
"우리, 이렇게... 여기서 함께 살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어제도 그러시더니, 내가 '1 년만 살다가 떠날 거'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십니다.
"그려, 이거... 안 좋은가? 웬만허믄 이렇게 살지..." 키큰 아저씨도 맞장구를 치십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글쎄요... 저도 여기가 좋긴 합니다만, 가긴 해야 할 겁니다." 하자,
"꼭 먹고 사는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믄, 여기서 살어. 혼자 살믄서 먹는 문제가 그리 큰 건 아닐 거 아녀? 요즘 세상, 누구... 굶고 사는 거 아닝 게... 저기 H 교수나, 당신 친구(상범)처럼 여기다 집만 사 놓고 살지도 않을 거라믄, 뭣 땜시 남의 동네 한 가운데에다 빈집만 덜렁 남겨 놓고... 이빠진 거 마냥 마을을 보기 싫게 만드느냔 말여?" 하시는데, 옆에 계시던 키큰 아저씨도,
"그 건 그려. 그렇잖여도 빈집이 늘어가서 동네가 꼴보기 싫었는디, 이렇게 장씨 같이 부지런헌 사람이 와서 산게... 참 좋아." 하면서 키큰 아저씨도 다시 맞장구를 치셨습니다.
"안 그렇습데여, 형님? 장씨가 이렇게 와서 살응 게 얼마나 좋아요. 이 동네 한 가운데에 턱 자리 잡고, 깨끗이 혀 놓고 살응게요. 마을도 좋고... 그렁게 우리, 이렇게 살드라고..." 산장아저씨는 다시 강조하십니다.
"글쎄요, 두 분 말씀은 고맙지만요... 그 때 가봐야 알겠지만, 저도 다른 할 일이 있어서......" 하자,
"허기야, 다 사람마다 자기 일이 있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면서도 산장 아저씨의 얼굴엔 아쉬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여기 살아야 할 기간의 3 분의 1이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마을 분들은 내가 떠날 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겁니다. 앞으로도 두어 계절을 더 보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더구나 한 여름이 지나고 나면, 수확의 계절 가을(나는 지금, 올 가을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이 올 텐데......
그리고 조금 전, 키큰 아저씨하고 둘 만 있었을 때,
"가을이 되면, 호수 건너 저기에 배를 타고 가서... 밤도 줍자고..." 하기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나는 가끔 산장 아저씨께,
"흰 눈 내리는 겨울 밤에, 제가 산장 집에 마실을 가면... 고구마며 곶감 같은 걸 내 놓으셔야 합니다." 하고, 어거지 떼를 쓰면서 엄포(?)를 놓곤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산장아저씨는,
"그려, 맘대로 혀..." 하시거든요.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부터 헤어질 걱정이라니요......
하늘의 구름은 조금씩 짙어져 갔고, 호숫가 풍경도 고즈넉해집니다.
두어 잔 더 마신 뒤 산장아저씨는, 할 일을 마저 끝내야 한다며 가셨고,
나는 그 술병을 비우도록 평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따라 몸이 별로 안 좋다고, 술을 마다하시던... 키큰 아저씨도 가셨구요.
평상에 홀로 앉아있던 나는, 쟁반을 옆으로 비켜 놓고... 그냥 벌러덩 누웠습니다.
잿빛 하늘이 은행나무 잎 사이로 펼쳐지고, 나는 바람처럼 기분이 상큼해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내 남아 있는 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과일 따서 술 담그고, 꽃과 채소를 가꾸고, 호수에서 노도 저어가면서 말입니다.
오늘 같은 날, 누군가 날 찾아와 준다면... 밤새도록 술이라도 마셔가며 인생 얘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뭔가 조금은 아쉬운 듯하면서도, 야릇한 행복이 온 몸을 파고듭니다.
아, 이럴 땐... 정말, 인생이 아름답기만 한 것 같습니다......
6 . 18
오늘도 기로는 정신없이 바빴다.
아침에 뒷밭에 올라가 토마토 겹순을 따주다가 그 옆에 있는 상추와 쑥갓을 조금 뜯었다. 그런데 토마토가 더 이상 크지 않는 것 같아 보니,
잘은 모르되, 아마 그 아래 언덕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 그늘 때문에, 햇볕의 양이 충분치 못해 그럴 것 같았다.
무릇 많은 식물들이 충분한 햇볕을 봐야 제대로 클 수 있을 테고, 토마토라면 더욱 그럴 것이니까......
그러면서 그 옆의 풋고추도 몇 개 따려고 했는데, 아직은 매운 맛이 없을 것 같아... 조금 더 키운 뒤에 따기로 하고 내려왔다.
그런데 상추와 쑥갓을 씻다 보니 기로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옆집에 들러 할머니한테 먹을 것인지를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기로는 다시 돌아와 반절 쯤을 덜어다 주고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사다리를 가지고 오디를 따러 갔다.
요즘 산장 집을 오가다 보면, 그 폐허가 된 집 옆에 탐스러운 오디가 새카맣게 열려 있어서,
'아무리 남의 것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그냥 두면 아무도 따먹지 않을 것인데......' 하면서,
도무지 아까워서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였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사다리까지 들고 가, 한 이틀 사이에 더 익어있던 오디를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빈집이라 지붕이 낡은데다가, 이미 떨어져있던 오디가 많아... 여차하면 미끄러져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도 없지 않자,
'참내, 내가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했다.
그렇게 따기 시작한 오디가 어느새 빈 병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는데,
전주에 약을 타러 다녀온다는 반장이 그 옆을 지나갔다.
늘 얘기하길 좋아하는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전주에 갔다오는 얘기를, 마치 보고하듯 기로에게 지껄이더니, 급기야는 '전화세'에 관한 얘기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두 번째 병의 반절도 넘게 오디를 땄던 기로가,
"반장님, 조금 기다리슈. 이제, 거의 땄으니... 같이 갑시다." 하고는,
그와 천천히 걸어 '夢想?'에 돌아왔다. 그러면서는,
"반장님은, 평상에서 좀 기다리슈." 하면서 통나무집에 들어가,
냉장고 안에 있던 수박 4분의 1 통을 칼로 잘랐다.
그런 뒤 나오면서는, 그 중 제일 가운데 부분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옆집 할머니께 갖다 드리고,
다시 평상에 돌아와 반장과 함께 수박을 먹었다.
점심을 해 먹고 있는데, 호수에서 발동기 소리가 났다.
그래서 보니, 박 만석이 시동을 걸고 있었는데... 기로와 눈이 마주친 박 만석이,
"장씨, 나... 저기 가!" 하고 호수 위쪽을 가리키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나도 따라갈까요?" 하고 묻자,
"맘대로 혀!" 했고,
"잠깐만요!" 하면서 기로는 배를 타고, 위의 '붕어섬'까지 갈 경우를 대비해서 카메라를 챙겼다.
자신이 노를 저어서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박 만석의 모터 배로 가는 걸 이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 산장 둔덕으로 사람들 한 패가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박 만석 혼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닌, 손님들 유람을 시켜주러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따라가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박 만석은 자기네 식당에 오는 손님 중에 배 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 번 나가는데 5 만 원씩을 받고... 그 돈은, '본인의 용돈으로만 쓴다'는 얘기를 기로에게 해 준 적이 있었기에... 지금 언덕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박 만석의 손님들이라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말 수가 없었던 기로는, 대신 격을 데리고 둔덕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산장 아저씨, 저는 작은 배를 타겠습니다." 하자,
상황파악을 했던 박 만석이,
"그려? 그럼, 맘대로 혀..." 하고 배에 발동을 걸었다.
그렇게 박 만석은 사람들을 태우고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고,
기로는 노 젖는 배에 격을 태우고 반대편으로 노를 저어 갔다.
태풍이 온다더니, 비가 오려는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은 상태였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아직까지는 쾌적한 기온이었다.
반대편 둔덕에 내린 기로는, 격을 풀어주었는데,
개는 스스로 물속에 제 몸을 담그다 뛰노는 등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로는, 천천히 걸어 양떼바위로 가서 앉아...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오려는데, 격이 기로의 애를 태우게 하는 것이었다.
배에 오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기로가 몇 번을 불러서야 겨우 배 있는 곳까지 오긴 했는데,
그러다가 다시 도망가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격! 너, 그랬다가는... 다시는 배에 안 태운다!" 하고 큰 소리로 화를 내자,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돌아왔는데...
기로는 다시 뭍에 내려, 격의 목줄을 잡고... 주둥이 부분을 두어 번 쥐어박았다.
그러자 개는 눈만 깜박이며 뒤집어진 채로 겁에 질려있었는데,
"격! 알아서 해! 앞으로 다시 그랬다간... 배 못 탈 줄 알아!" 하면서, 다시 개를 끌고 배에 태운 뒤... 호수를 건너 돌아왔다.
한 바탕 뛰놀아서 배가 고팠는지, 격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로는,
"이건, 잘 하는 짓이네......" 혼잣말을 하면서, "그래야, 파리도 안 꾀고... 좋잖아?" 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기로는, 어떻게 해서 잠이 들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눈을 뜨니 깜깜한 밤이었고, 밖엔 가로등도 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불을 켜니, 8 시 반이 되고 있었다.
'아침인데 왜 이렇게 어두워?' 하던 기로는,
"시계가 고장이 났구나." 하고 혼잣말까지 하면서 컴퓨터를 켰는데,
웬걸?
꺼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 다시 컴퓨터를 켜니,
이제 밤이 시작되는... 그러니까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 밤 8시로... 정상적인 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멀뚱멀뚱 밤을 맞았다.
그래서였을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터넷 검색 등으로 컴퓨터만 하고는 11시가 넘어서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만으로도, 적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잠을 청했는데, 밖에서 격이 낑낑대는 것이었다.
아마 용변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어나기는 싫었지만, 일어나 불을 켜니 3시 반이었다.
그 사이에 비가 조금 누구러진 상태였고, 기로는 격을 데리고 나가 용변을 보게 했는데,
요즘... 격이 산만한 편이었다.
전에는 밖에 데리고 나가자마자 똥과 오줌을 누웠는데, 요즘엔...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겨우 일을 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집 주위의 다람쥐(요즘엔 다람쥐들이 집 주위에도 제법 많이 눈에 띈다.)들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사냥이라도 하려는 듯(?지가 어떻게 다람쥐를 잡겠다고) 몸을 사리면서 기어가는 둥... 사냥의 본능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벽
요즘의 잦은 술 때문인지, 오늘은... 몸이 썩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오늘은 또, LG 배 바둑대회 2 차전이 있는 날이라서...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 중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다 보니, 저녁 무렵엔... 눈이 침침하도록 피곤하기까지 하드라구요.
근데요, 나도 걱정인 게...
내가 직접 두는 것도 아닌, 남들의 바둑 두는 것을 보면서... 머리가 띵하도록 피곤하고 눈이 침침해지도록 열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가 겨우 저녁을 챙겨 먹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장씨!"
웬일인지(밤에), 밖에서 산장아저씨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 하고 문을 여니,
"근디, 오늘은 왜 아무 기척도 없디야?" 하며, '夢想?'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웬일이십니까? 이 밤에..." 하고 내가 묻자,
"하도 심심혀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러 왔어."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이 양반이 무슨 일이람?' 하면서도 나는,
"여기 앉으세요." 하고 그 분을 맞았는데요,
그 양반이 심심할 리는 없었습니다.
늘, 본인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까지... 그 일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니까요.
물론, 그런 와중에... 잠깐 짬을 내 이웃인 나를 보러 올 수는 있을 것이었지만요.
그렇게 몇 마디 날씨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불쑥,
"근디, 장씨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 판여?" 하고 묻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예? 무슨 말씀인데요?" 하고 내가 놀라자,
"오해는 말어! 그냥 물어보는 말잉게..." 하던 산장 아저씨는, "어쩠등간 장씨는 시방, 혼자 사는디 말여... '이혼' 같은 거야, 사람마다 그 형편이 다 다릉 게, 내가... 그런 것짜장 뭐라고 헐까만... 좌우지간, 가정을 갖고 사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디... 돈도 벌지 못 험서,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인지 궁금혀서 물어보는 말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예......" 하고 대답은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것 같으면서도, 퍽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여태까진 내가 스스로 그 양반한테 내 '이혼 문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런 거야 이미... 내 친구를 통해서 알았을 테지만, 여태까진 서로가 마치 약속이나 해왔던 것처럼 그 말을 꺼내지조차 않아왔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 얘기까지를 해오며... 나에게 뭔가 충고거나 조언을 해오려는 듯한 그 양반의 자세를 보면서,
"맞는 말씀이긴 한데요......" 하기까지는 했지만, 그렇다고 또 마땅한 대답을 할 수도(뭐라고 해봤자 '이 양반이 이해나 할까?'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할 것도 없드라구요.
그러자,
"내가 가만 봉게... 형제들이 자주 오고가는 것 같은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형제들헌티 폐를 끼치믄서 언제까지 살 판여?"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나는 더욱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그 양반은 이제, 자신이 한 말을 내가 다 수긍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착각(?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예에?" 하고 놀라면서 나는, "그건 산장아저씨가 약간 오해하신 면이 있는데요, 저는요... 우리 형제들 한테, 뭔가... 커다랗게 피해를 주면서 살고 있지는 않거든요?" 하자,
"그려? 근디, 맨날 성수(형수)들이 반찬도 맹글어 오고... 허든디, 빚은... 지지 않았디야?"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묻기까지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서 어쩌겠냐는 투였지요.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구요.
그렇다고 내가, '어느 일정 기간이 되면 형수들에게 반찬값의 일부도 지불하고 있다' 거나, 또는, '우리 집안은 형수님들이 나에게 퍽 잘해주기 때문에, 커다랗게 부담을 느끼며 그렇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얘기를 한다고 해봤자, 정말 그 양반이 이해해 줄 것 같지도 않드라구요.
왜냐면, 그 양반은 자신의 처지와 경험이 매우 중하게 여기는 분으로... 자기들 집안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인데, 내가 아무리 떠들고 변명을 해 봐도... 믿으려 하지 않을 거라서요.
내가 그랬던 이유는,
여태까지 여기에 와 살면서 보니, 그 양반네도... 형제가 몇은 되지만(넷인가?), 그리 친밀한 왕래가 있어 보이지 않아서,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내가 그런 데까지 참견할 영역은 아니라서, 결코 물어보지도 않고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그런 식으로 얘길 하니, 하는 수 없이,
"산장 아저씨, 없이는 살아도 저는... 우리 형제들에게 금전적인 빚을 지지 않았거든요."하기만 해줬지요. 그러자,
"정말여?" 하고, 역시... 못 믿어하는 듯한 표정이던데,(그런 걸로 보면, '그 집 형제들은 그런 금전문제로 얽혀 있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런 문제로 그 양반을 이해시킨다는 게 여간 복잡해질 것 같지 않았고, 또,
커다란 벽 하나가 그 양반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허기야 그 양반의 입장에서는 내가 안쓰럽게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찾아와서까지, 그런... 은밀한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내 말은 사실이고(나는 우리 형제들에게 공식적으로(?) 금전적인 빚을 진 건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빚은, 가장 최근의 전시를 하면서, 그것도 제 3자의 호의로(그쪽에서 자청해서 나를 도와줬던) 짊어지게 된 거 말고는, 빚이 없는 사람인데, 산장아저씨는... 내가 큰 빚을 짊어진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던가 봅니다.
허긴, 여기 와서 내가 몇 달을 살면서... 눈에 띌(그 분이 인정할?) 수입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걸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만요......
그러니,
'아, 이 양반은 어쩌면... 지금 나에게, 뭔가 중요한 충고를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면서, '이런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서, 내가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답니다.
"그려? 그러믄... 우리가(아마 산장 아주머니와 내 얘기를 했던가 봅니다.) 잘못 짚은 게비네? 그렇다믄, 미안혀..." 하고는,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허지는 말어..." 하고 몇 마디 다른 얘기를 하고는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 분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그리고 나에게 뭔가 조언이거나 충고 같은 걸 하러 왔을 거라는 걸......
그런데 내가, '나는 빚이 없다. 우리 형제들간의 관계는 깨끗하다.' 그런 대답을 하니,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돌아가긴 했는데요,
나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양반이 굳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일부러 찾아온 건 아닐 것이기에... 내 쪽에서,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답답했던 건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답니다.
그 양반과는, 그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정을 나눌 뿐이지, 마음의 공유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양반의 삶을 인정하는 건 하면서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만, '그 분의 굳어있는 마음엔... 내 삶을 이해할 공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더라구요......
6 . 19
그렇게 편지를 써놓고 기로는 다음 날 새벽 홈페이지에 올리면서는 앞 부분의
('이혼' 같은 거야, 사람마다 다 그 형편이 다릉 게, 내가... 그런 것짜장 뭐라고 헐까만...) 부분과,
(더구나 여태까진 내가 스스로 그 양반한테 내 '이혼 문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런 거야 이미... 내 친구를 통해서 알았을 테지만, 서로가 마치 약속이나 해왔던 것처럼 그 말을 꺼내지조차 않아왔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 얘기까지를 해오며... 나에게 뭔가 충고거나 조언을 해오려는 듯한 그 양반의 자세를 보면서,)
는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그렇지만 내 말은 사실이고(나는 우리 형제들에게 공식적으로(?) 금전적인 빚을 진 건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빚은, 가장 최근의 전시를 하면서, 그것도 제 3자의 호의로(그쪽에서 자청해서 나를 도와줬던) 짊어지게 된 빚 말고는, 빚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산장아저씨는 내가 빚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가 봅니다.)
부분도 삭제하는 등,
실제 대화는 그랬지만, 홈페이지에까지 '이혼문제'와 '부채문제'를 감추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의 홈페이지 회원들 중 오래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이혼 사실을 짐작으로 알기도 하겠지만... 굳이 자기 자신이 자청해서 그 문제를 떠들어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밤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듯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무거웠던 내 몸을 성가시게 했지만, 비몽사몽 일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여..."
김 선생님이셨습니다.
"잠 자고 있었어?"
"아, 예... 너무 피곤해서요......"
"내가 괜히 전화해서 깨었나보네?"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 몇 신가요?"
"응, 열 시 반 조금 넘어 가."
그렇게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림이라도 한 두어 점 팔려야, 기로도... 살어갈 틴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되나요?"
"그렁게나 말여..."하시는데,
선생님께선 술을 한 잔 하신 모양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음성이었거든요.
어느덧 나도 잠이 달아나, 얘기를 하다 보니... 전화로 거의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고도 멍-하고 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리드라구요.
그래서 나는 뭔가 할 말을 빠트린 김선생님께서 다시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사람은... 이 집 주인인 친구 아니었겠습니까?
사업차 인천에 갔다가, 거기 아는 형님 내외(여기도 몇 번 왔다간)와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는데,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고 있었냐?"
"아니, 조금 전까지... 다른 전화를 받고 있었어......"
그도 기분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 술자리에서 여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내 얘기로 이어져... 급기야 전화까지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야, 그나저나... 내려올 때 차 조심해서 몰고 와."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나는 멍- 하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무슨 일로 한 밤중에 두 통의 긴 전화가 걸려왔는지... 어리벙벙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켰는데, 별로 재미도 없었고...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작업을 한다고 앉아있기도 싫었습니다.
비록 정신은 초롱초롱한 상태였지만,
'이럴 바엔, 내일을 위해 자자.' 며 다시 불을 껐습니다.
그렇게 뒤척이다 얼마 뒤에 언뜻 잠이 들었나 본데, 개 짖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깨었습니다.
그런데 뒷집 아들 차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술을 마신 건지 집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계속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개도 계속 짖어댈 밖에요...
내가,
"시끄러워!" 하며 말려도, 잠깐 주춤할 뿐... 개는 계속 짖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격은, 평소엔 짖지 않는 개지만... 밤에는 짖거든요. 그런데 사람 소리가 나서인지 온 동네 개들이 다 짖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개들의 짖는 소리야 거리가 있어서 그리 시끄럽지 않았지만, 우리 집 개는... 바로 코 앞에서 짖어대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지는 않았고,
"조용해!" 라는 말도 한두 번 했을 뿐, 일어나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니,
개가 미운 게 아니라, 개를 짖게 만드는 사람들이 야속했습니다만... 나도 손님들이 오면, 밤을 새우기도 하는 사람이라... 그들에게 항의하기도 뭐해서, 그렇게 온 밤을... 잠을 설치고 말았답니다.
오래지 않아, 창호지 문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동이 텄던 것입니다.
비쩍비쩍 일어나, 자동적으로 개를 데리고 나갔고... 집에 돌아오긴 했는데,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보니, 오늘이 6 월 20일인가 보았습니다.
'아, 내 6월 19일 하룻밤은 어디로 가버렸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치 구멍난 것처럼, 휑- 한 기분이기만 했답니다.
6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