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죽기 전에 부를 노래로…….
이원우
지난 10월 26일은 어쩐지 약간 어수선한 마음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저녁 7시쯤 명지 대학교 앞 대중음식점 ‘시골 밥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문득 오늘이 10 ․ 26 사태가 일어난 지 32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게 머리에 떠올랐다.
1978년 그 날 비슷한 시각에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관한 뉴스를 시청하다가 텔레비전을 끄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하는 말.
“이제 그만 노래나 듣지.”
명지대 재학 학생 가수이기도 한 심수봉(본명 심민경)이 대기실로 나가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먼저 그가 자신이 작사 작사 작곡한 ‘그때 그 사람’을 선보였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 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말 한 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 번쯤은 생각해 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내 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도 감싸주던 다정한 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 되겠지/ 다시는 생각해도 안 되겠지/ 철없이 사랑인 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 할 그때 그 사람♭♬♪
그러나 박 대통령은 MBC 대학 가요제 본선 진출곡인 이 ‘그때 그 사람’에 별 흥미가 없었던 듯 흘러간 옛 노래를 주문한다. 심수봉은 다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의 내 임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임이여 그리운 내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임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임이여 그리운 내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동석(同席)했었던 다른 이들은 과연 이 노래의 역사를 알기나 했을까? 1939년 발매/ 전사한 독립군 아내/ 두만강 유역 도문 여관/ 이시우 작사 등등…….어쨌든 그 순간의 ‘눈물 젖은 두만강’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 친일이 어쩌니 하여 시달림을 받던 박 대통령에게 이 항일 노래 한 곡을 던진 것은 의미가 크다 하겠다. 내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이야기의 계속. 박 대통령은 박수를 많이 보냈다. 그러곤 그에게 말한다. 누굴 시켜 보라고. 심수봉이 보기에 김재규와 김계원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차지철을 지명하게 되는데…….차지철은 그 자리에서 하필이면 ‘도라지’였을까?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가 철철철 넘는다/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이요 어어려난다 지화자 좋다/ 니가 내 간장 스리 사알살 다 녹인다 ♪♬♫
김계원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말했다. 차 실장(室長)이 저런 노래도 부른다며. 사실 ‘도라지’가 남녀 간의 정사(情事)를 상징한다는 이론이 있는데, 김계원이 그 정도를 알 턱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일까? 사람이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느냐는 속담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은가.
차지철은 ‘각하’에게 바통을 넘기지 않고 한 곡에 더 입을 댔다. 바로 친일 가수로 유명(?)하지만, 백년설 그를 통해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애창하는 ‘나그네 설움’. 1939년 발매/ 고려성 작사 ․ 이재호 작곡. 그런데 이 노래가 실은 일제에 억압 받는 조선인의 심정을 노래한 거라 한다. 고려성(본명 조경환)은 백년설과 함께 경기도 경찰서 고등과에 호출을 받고 혹독하게 취조를 당한다. 남인수도 그랬다.
그들은 시말서를 쓰고 나와 선술집에서 홧술로 울분을 토해낼 수밖에. 몸은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나라를 빼앗긴 나그네였다. 그래서 담뱃갑 뒤에 가사를 쓰고 뒷날 이재호가 곡을 붙였으며 백년설이 노래했다는 ‘나그네 설움’. 레코드는 발매되기 무섭게 10만 장이나 팔렸다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를 짐작이 가게 한다. 차지철이 그런 역사를 알기야 하랴만 3절까진 못 불렀다.
김재규가 자리를 자꾸 뜨는 등 이상한 낌새를 차지철이 차리고 있었다는 가정을 하고 여기서 내가 한 번 불러 본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라/ 가야 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가야할쏘냐♬♪ 참, 백년설 후원회장 남백송은 내 콘서트에 우정 출연한 바 있는 고향 선배다.
다시 궁정동 안가, 차지철과 김계원이 상의를 벗으러 잠시 밖으로 나간다. 연회장에는 박 대통령, 심수봉, 모델 신재순 등만 남아 있었다.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사랑해’를 열창한다. 거기에 박 대통령이 끼어든(?) 것이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예예♬♫…거기쯤이 끝이었다. 둘의 노래가 너무 맞지 않아 심수봉만 애를 먹고 있는데, 어느 새 다들 들어와 앉은 자리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을 보고 버러지 같은 Ⅹ이라고 대갈일성. 이어 김 부장은 당황해하는 차 실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박 대통령의 무슨 짓들이냐는 호통이 터지고. 김재규는 바로 박 대통령에게 2탄을 발사한다. 다음 상황은 역사가 증명하는 그대로다.
당일 권력 최 핵심에 있는 사나이(?) 넷과, 여자 둘이 모인 최후의 만찬에서 노래라고는 겨우 다섯 곡, 남녀 비율 3:3. 더구나 대통령은 끝까지 따라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다. 노래를 안 부른 한 사나이는 목숨을 건졌으며, 여자 둘은 어쨌든 건재하다. 가해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나는 가끔씩 이 전말을 하나의 ‘해괴(駭怪)한’ 실체라 보아왔다.
10 ․ 26 32주년이 되는 날 같은 시각, 심수봉이 졸업한 명지대 입구 식당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우연의 일치치곤 너무 내게는 가혹하다고나 할까? 부산을 떠나 여기 용인에 사는 나는 완전 나그네다.
내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일찍이 엄마 몸을 빌어 사내아이로 태어났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내답게 살아오지 못했다. 회한이 휘몰아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게다가 늙었으니 사내 소리도 듣기 어렵다, 어디에서도. 잠자리에 들기 무섭게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지친 나그네가 허름한 여인숙에 누워 객창(客窓)을 통해 밤하늘을 쳐다보며 수많은 별들을 헤는 심사, 그와 비길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에서의 의미 한 톨이라도 남기려면 말이다. 오늘 밤도, 잠들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손 치자. 나는 신앙인으로서 ‘나그네’를 화두로 삼아 이 흑인 영가 ‘방황하는 나그네’는 부르리라.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이 세상 슬픈 나그네/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내가 가는 그 밝은 곳/ 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더 이상 방황 없는 곳/ 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주님 품에 돌아가네♬♫♭……
잠자리에서의 노래? 이 기상천외의 몸부림은 몇 년 전부터의 버릇이다. 타인이 왈가왈부할 일 외연에서부터 이미 벗어났으리라. 참, 차지철은 가톨릭 신자였는다는 설도 있던데, 아직 확인은 못했다. 다만 그가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믿었던 것만은 사실인데, 그게 뭐 대순가. ‘나그네 설움’과 ‘방황하는 나그네’의 공통분모이자 상수(常數) ‘나그네’에만 매달려도 버거운 것을. 여덟 시 반을 넘어서 식당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