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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간문
서간(書簡)은 편지다. 편지는 하고 싶은 말을 만날 수 없으니까 글로 써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편지를 어렵게 쓰고 무서워한 데는 고금동서에 드물 것이다. 자기 말과 자기 글이 있는데도, 자기 말과 자기 글로 쓰는 것은 부녀자들이나 할 것으로 돌리고, 서로 체면을 볼 만한 데서는 으레 한문으로 썼다. 한문은 우리말로 변한 얼마의 단어 외에는 전적으로 외국문자요 외국문장이다. 이 외국문장은 특별히 배우지 않으면 읽을 수 없고 쓸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다 이 외국문으로 쓰니까 그것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은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문을 잘 쓰는 사람은 어려운 문장으로 상대편을 은연히 압박하였고, 나아가서는 난해한 문장이 개인 간에는 물론,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일종의 외교술이 된 예도 얼마든지 있다.
편지는 우선 할 말이 있어 쓰는 것이다. 그 사람을 곧 만날 수 있다면 편지를 쓸 것 없이 만나가지고 말로 하면 그만이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좀처럼 만날 수가 없으니까 할 말을 글로 대신 써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편지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만나서 말로 하듯 할 말을 쓰면 그만일 것이다. 이쪽에서 먼저 알릴 내용이니까 이쪽에서 먼저 써 보낸다. 이쪽에서 알리고 싶은 대로,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알려지는 것이 성공이다. 문장이 어려워서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되면 결국 이쪽이 손해다.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뜻을 전하는 것이 편지뿐 아니라 모든 문장의 정도(正道)다.
모스끄바서 셀프 호프까지 오는 데는 퍽 지루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란 밀가루 시세밖에는 말할 줄 모르는, 참 강한 실제적인 성격자들이었다. 열두시에 나는 구우르스에 닿았다.
-『체호프 서간집』에서
문호(文豪) 체호프가 여행 중에 그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다. 얼마나 쉬운가? 서양의 편지만 이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편지도 외국문자인 한문으로 쓴 것이 어렵지 한글로 쓴 것은 얼마든지 쉬운 것이 있었다.
그리 간 후의 안부 몰라 하노라 어찌들 있는다 서울 각별한 기별 없고도 적은 물러가니 기꺼하노라 나도 무사히 있노라 다시곰 좋이 있거라.
정유(丁酉) 9월 20일
-선조대왕의 친서, 이병기 소장
이것은 난리로 궁궐을 떠나 계시던 선조(宣祖)대왕께서 역시 다른 피난처에 있던 셋째따님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보내신 편지다. 얼마나 마주 보고 말한 듯 씌어진 문장인가. 말하듯 쉽게 씌어졌다 해서 품(品)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어떤 문자로 쓰든 이렇게 간략하면서도 이만큼 품이 높기도 드문 것이다.
편지는. 다른 글보다도 더욱, 말하듯 쓰면 그만이다. 아랫사람에겐 아랫사람을 만나서 물을 것은 묻고 이를 것은 이르듯이 쓰면 되고, 윗사람에겐 윗사람을 뵙고 여쭤볼 것은 여쭤보고, 아뢸 것은 아뢰듯 쓰면 된다. 첫머리와 끝에서만 상서(上書)니 상백시(上白是)니,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이니, 여불비상서(不不備上書)니 쓰면 무얼하는가? 정말 사연에 들어가선 꼼짝 못하고 말한 듯 쓰고 말지 않는가. 한문은 영어보다도 훨씬 어려운 문자다. 그것 한 가지만 방학도 없이 공부하기를 20년이나 해야 무슨 사연이든지 써낼 수 있을지 말지 한, 공리적으로 보면 세계 최악성(最惡性)의 문자다. 그런 한문을 요즘 학교에서 배우는 정도로는 대학을 졸업한대도, 한문으로 엽서 한 장을 써내지 못할 것이다. 한문체로 통일해 못 쓸 바에는 ‘상백시’니 ‘복모구구불임하성지지(伏慕區區不任下誠之至)’의 문구를 외울 필요가 전혀 없다.
‘아버님 보옵소서.’
‘어머님께 올립니다.’
하면, 원만하다.
‘안녕히 계신지 알고자 합니다.’
하면, 훌륭히 안부를 여쭙는 것이 되고
‘오늘은 이만 그치나이다.’
하면, 끝맺음으로 나무랄 것 없다.
아버님 보옵소서
아버님께서와 어머님 안녕하시오며 집안이 다 무고하십니까? 제가 입학된 것은 라디오로 들으셨을 줄 아옵니다. 방이 붙을 때까지는 입격(入格)이 됐으면 하는 욕망뿐이더니, 입격된 그 순간부터는 벌써 집 생각이 나 어떻게 견디나?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 고향서 온 아이들이 모두 다섯이나 들었으니까 이제 자주 한자리에 모일 것 같습니다. 울도록 외롭진 않을 것이며 고향 학교와 달라 반 동무들이 전 조선적으로 모인 데라 공부로나 무얼로나 남보다 한번 뛰어나고 싶은 욕망이 더욱 불탑니다. 힘써 공부하겠습니다. 학교는 건물도 훌륭하고 선생님들도 유명하신 분이 많습니다. 너무 좋아서 어제저녁엔 잠이 안 와 혼났습니다. 동봉하옵는 입학수속 서류에 아버님 도장을 찍어 곧 보내주옵소서. 오늘은 이만 그치나이다.
4월 X일 소자 ㅇㅇ 드림
어느 전문학교에 처음 온 학생의 편지다. ‘상백시’ ‘일향만강’ ‘여불비상서’ 따위가 없어도 얼마나 말하고 싶은 사연이 뚜렷이 드러났는가? 뜻도 잘 모르는 한자어로 쓴 것보다 도리어 얼마나 어울리고, 자신 있게 쓴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는가?
○ 숙에게 (결혼축하 편지)
오늘 내 편지통에서 나온 건 네 결혼 청첩(請牒), 암만 들여다봐도 네 이름이 틀리지 않는 것을 알고, 또 그 옆에 찍힌 남자의 이름이 낯선 걸 느낄 때, 나는 손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려 그만 기숙사를 나와 산으로 올라갔다. 멀리 외국으로 떠나는 너를 바라보기나 하는 것처럼 하늘가를 바라보고 한참이나 울었다. 동무의 행복을 울었다는 것이 예의가 아닐지 모르나 나로는 솔직한 고백이다. 네가 날 떠나는 것만 같고, 널 한 번도 보도 듣도 못한 남자에게 빼앗기는 것만 같아서, 울어도 시원치 않은 안타까움을 누를 수 없는 것이다. 결코 너의 행복을 슬퍼하는 눈물이 아닌 것은 너도 이해해줄 줄 안다.
네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한다!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도 이상스럽기만 하다. 어떤 남자일까? 키는? 얼굴은? 학식은? 그리고 널 정말 나만큼 사랑할까? 나만큼 알까? 그이가 가까이만 있다면 곧 찾아가 이런 걸 따지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네 훌륭한 여러 가지를 더 설명해주고도 싶다. 아무튼 옷감 한 가지를 끊어도 누구보다도 선택을 잘하던 너니까 일생을 같이할 그이의 선택을 범연히 하였을 리 없을 것이다. 물론 어디 나서든 인망(人望)이 훌륭한 남자일 줄 믿는다.
네가 신부가 된다! 크리스마스 때 네가 하아얀 비단에 싸여 천사놀이를 할 때, 네가 제일 곱던 것이 생각난다. 그 고운 모양에 백합을 안고, 제비같이 새까만 연미복 옆에 선 네 전체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하는 이 동무이나 혼례사진이 되는 대로 나한테부터 한 장 보내다오. 그리고 결혼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 한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어디까지 자유의지에서 신성한 사랑으로 결합되는 너의 가정이야말로 지상의 천국일 것이다. 그 천국이 어서 실현되기를 너와 그이를 아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도 진심으로 축원한다. 그리고 변변치 못한 물건이나 정표로 한 가지 부치니 너의 아름다운 천국의 가구 중에 하나로 끼일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일지 모르겠다.
멀리 너 있는 곳을 향해 합장하며
X월 X일 동무 0순
어떤 여학생이 먼저 결혼하는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다. 진정이 뚝뚝 흐른다. 그의 신랑 될 남자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그가 평소에 옷감 한 가지라도 선택을 잘하던 것을 비쳐 그 남자가 훌륭한 사람일 것을 믿는다는 말, 묘한 생각 묘한 말이다. 시집가는 동무를 정말 즐겁게, 희망에 차게 해주었다. 흔히 보면 이런 편지에서 결혼은 인륜대사라는 둥, 현모양처가 되라는 둥, 사회에 모범이 되라는 둥, 동무로서는 더구나 자기보다 먼저 어른이 되는 사람에게 도리어 결혼의 정의와 훈계를 내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 것은 부질없는 지식의 나열만 된다. 저쪽은 당사자로 이쪽보다 그런 정도의 생각은 각오한지가 벌써 오랜 것으로 아는 것이 예의요 현명한 일이다.
생일초대 편지
벌써 여름이야.
명이 참말 오래간만이지.
그래. 그동안 잘 있었구 또 심심하지는 않았어. 난 꽤 심심하구먼. 글쎄 난 석 달 남짓한데 벌써 이렇게 심심하니 큰일 났어.
요전번에 남숙이를 길에서 만났구먼. 아주 새색시 티가 나던데, 그러니까 벌써 미씨즈가 셋이지. 그리고 영희도 약혼을 하였대. 남자는 명대(明大) 법학사라고. 아주 ‘케이끼(景氣)’들이 좋은데 우리들만 납작꽁이야.
오늘 목요일이 내 생일날야. 좀 와요. 모두 모여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구. 순경이한테도 알려주고 옥순이, 희영이, 순남이한테도 기별을 했으니까 오래간만에 모두 모일 거야.
어머니께 특청을 맡아서 이날은 아주 맘껏 놀기로 하였으니 떠들 준비를 맘껏 해가지고 꼭 와요.
그럼 그동안 싸두었던 이야기는 모두 그날 하기로 하고 이만 총총.
7월 초6일 길순
-백철이 『여성』에 편지형식으로 쓴것
어감을 그대로 낸, 짤막짤막한 말마디들은 전화로나 서로 주고받는 것처럼 실감이 난다. 거의 표정이 보일 듯하다. 편지도 표현이니 쓰는 사람이 더 잘 드러날수록 좋은 편지임에 틀림없다.
구조(久阻)하였습니다. 우리는 숭이동(崇二洞)으로 이사했습니다. 안해는 쌀 씻고, 나는 불 피우고……이게 마치 어린애들 소꿉질 같습니다. 인산(因山) 때 상경하십니까. 상경하시거든 꼭 들르셔서 우리가 지은 진지 좀 잡수시오. 그러나 단 술과 안주는 지참해야 됩니다. 하하하. 너무 오래되어 수자(數字)로 문안합니다.
-최재서가 조규원에게 보낸 엽서
수일 못 뵈었읍니다 가람 선생께서 난초를 보여주시겠다고 22일(수)오후 5시에 그 댁으로 형을 오시게 알려드리라 하십니다. 그날 그시에 모든 일 제쳐놓고 오시오. 청향복욱(淸香馥郁)한 망년회가 될 듯하니 즐겁지 않으리까.
20일 지용 弟
-정지용이 필자에게 보낸 엽서
이제 편지 쓰는 요령을 요약해 말하면
(1) 쓰는 목적을 분명히 따져볼 것. 앞의 결혼축하 편지 같은 데서도, 저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인가? 무슨 교훈이나 충고를 주기 위함인가? 똑똑히 그 경우와 자기의 분수에 맞추어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쓸 것이다.
(2) 편지 받을 사람을 잠깐이라도 생각해서 그와 지금 마주 앉은 듯한 기분부터 얻어가지고 펜을 들 것.
(3) 한문식 문구를 무시하고 말하듯 쓸 것.
(4) 예의를 갖출 것. 말하듯 쓰랬다고 품이 없는 말을 쓴다든지, 문안을 잊어버리고 제 말부터 내세운다든지 해선 안 된다.
(5) 감정을 상하지 않게 쓸 것. 마주 대해서 말로 할 때는 얼굴표정이 있어 말은 비록 날카롭더라도 표정으로 중화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글에는 표정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쪽에선 심한 말이 아닐 줄로 믿고 쓴 것도 저편에선 오해하는 수가 있다. 그러기에 중대한 일에는 편지로 하지 않고 만나러 가는 것이다.
(6) 저편을 움직여놓을 것. 무슨 편지든 저편을 움직여놓아야 한다. 문안편지라도 저쪽에서 받고 무슨 자극이 있어야지, 그냥 왔나보다 하고 접어놓게 되면 헛한 편지다. 더구나 무슨 청이 있어 한 편지인데 저쪽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편지는 완전히 실패다. 써가지고 그 사연이 넉넉히 자기가 필요한 만치 저쪽을 움직일 힘이 있나 없나 읽어보고, 없으면 얼마든지 그런 힘이 생기도록 고쳐 써야 한다.
편지는 누구나 가져보기 쉬운 자기표현의 한 형식이다. 실용적인 말만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실용적인 편지를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문화적으로 유치한 사람이라도 비실용적 감정, 비실용적 시간은 있다. 비록 유치한 문장으로라도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친구끼리는 인생을 논하고, 자연을, 운명을 논하는 문장을 곧잘 서로 주고받는다. 표현욕은 본능이어서 자기가 느낀 바를 그냥 묻어두면 갑갑하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편지는 문학적 표현의 첫 무대가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말하고 운명을 말하는 것은, 벌써 편지가 아니요 감상문이나 서정문일 것이다. 한 사람을 상대로 한 감상문이요 서정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유의 편지는 따로 감상문과 서정문을 다룬 곳에서 참고하라.
그 외에 역시 편지에 속할 청첩(請牒)이 있다. 청첩은 편지로는 가장의식적인 것이라 아무래도 속어로만 쓰면 품을 잃기 쉽고, 너무 상투적으로 써도 신선치 못하다. 내가 받아본 청첩 가운데 제일 품도 있고 신선키도 하고 간곡하기도 했던 것을 여기 소개한다.
이일주(李逸州)씨 장남 위패(爲佩) 군
안여백(安汝伯)씨 차녀 추란(秋蘭) 양
어버이 가리신 바이요, 서로 백년을 함께할 뜻이 서서, 이제 어른과 벗을 모신 앞에 화촉(花燭)을 밝히겠사오니 부디 오시어 양가(兩家)에 빛을 베푸시옵소서.
시일: 3월 15일 오후 1시
장소: 경성 부민관 중강당
1939년 3월 8일 주례 김용화 재배(再)
예필(禮畢) 후에 곽의정 명월관에서 다과로 다시 모실까 하와 나오시는 길로 차를 등대시키겠나이다.
-어떤 결혼청첩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외로운 행인(行人) 고(故) 김유정(金裕貞), 이상(李箱) 양 군(兩君)이 저같이 조서(早逝)함을 볼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차탄(嗟歎)하였습니다. 그러나 정(情) 사랑을 가진 우리는 그들에 대(對)한 아깝고 그리운 생각을 금(禁)할 수가 없습니다. 동도(同道)의 전배후계(前輩後繼)가 조촉(弔燭) 아래 같이 모여서 혹은 이야기하고 혹은 묵상(默想!)하여 고인(故人)의 망령(亡靈)을 위로(慰勞)하고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세사(世事)에 분망(奔忙)하신 몸일지라도 고인(故人)을 위한 마지막 한 시간(時間)이오니 부디 오셔서 분향(焚香)의 성의(盛儀)에 자리를 같이해주시면 참으로 감사(感謝)하겠습니다.
시일: 5월 15일(토) 오후 7시 반
장소: 시내 부민관 소회의실
발기인(생략)
-고 김유정·이상 추도회의 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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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하다 마음속으로 기뻐하다.
상서(上書) ‘글을 올립니다.’
상백시(上白是) ‘사뢰어 올립니다.’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몸과 마음이 언제나처럼 평안하신지요.’
여불비상서(不不備上書) ‘예를 다 갖추지 못하여 올립니다.’
복모구구불임하성지지(伏慕區區不任下誠之至)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구조(久阻) 소식이 오랫동안 막힘.
인산(因山) 태상황, 임금,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妃)들의 장례.
청향복욱(淸香馥郁) 맑은 향기가 그윽함.
재배(再拜) 웃어른에게 쓰는 편지에서, 사연을 끝낸 뒤 자기 이름 뒤에 쓰는 말. 두 번 절을 한다는 뜻으로, 상대편을 높이는 표현.
예필(禮畢) 인사를 끝마침.
행인(行人) 죽은 사람.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2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