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 황금갑옷을 입다
최 화 웅
해마다 전어가 나올 때면 무더위가 한풀 꺾인다. 갯마을 포구마다 전어가 파시를 이루면 계절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어는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입맛을 되살리고 기운을 북돋운다. 소식이 뜸하고 서먹서먹하던 사이도 전어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이면 묵은 감정의 앙금도 깨끗이 씻어내고 만사형통이다. 전어회를 한입 가득 넣고 씹어보라! 씹을수록 바다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무더위 끝에 한차례 태풍이 지나자 물 만난 전어가 어판장에 올라 파시를 이룬다. 소설 같은 세상은 항상 반전을 꾀한다. “가을 전어 대가리 참깨가 서 말”이라는 말과 “전어 굽는 냄새 맡고 집나간 며느리 돌아온다.”는 말은 이제 진부하다. 그러나 전어회를 입에 넣는 순간 “그래, 너로구나!”하고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그만큼 전어맛은 혀를 감치고도 남는다. 전어는 회로 구이로 무침으로 스시로 젓갈로 무엇이든 그만이다. 비린내 나지 않는 전어회 무침으로 이름난 온천장의 육일횟집은 금정산성을 오르는 길목에 자리 잡아 산꾼들에게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참새방앗간 이다. 감칠맛 나는 회무침은 물기가 묻어나지 않게 다듬는 일이 첫째다. 그 일이 전어회무침의 맛을 내는 비결이다. 전어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箭魚, 錢魚, 全魚, 典魚 등 다양하다. 신유박해 때 정약전 형제가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다산 정약용은 당진에 그의 형 손암 정약전을 흑산도에 떼어놓았다. 정약전은 귀양살이 중에도 흑산도 주변 물속을 샅샅이 뒤져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생태연구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그 때 화살 箭자와 고기 魚자로 전어(箭魚)를 소개하면서 쏜살같이 빠른 몸짓과 배에 오르면 금방 죽는 성깔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큰 것은 1척 가량이고 몸이 높고 좁다. 빛깔은 황금빛 비늘에 배 부분은 희다. 기름이 많고 맛이 좋고 짙다. 흑산도에 간혹 있는데 육지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고 썼다. 동시대인 실학자 서유구는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생선의 종류와 특징을 기록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돈 錢 자를 써서 전어(錢魚)라했다. 그는 전어를 두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 좋아하므로 사먹는 사람들이 돈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예부터 전어는 그 맛 때문에 값을 생각하지 않고 누구나 사 먹는다고 했다. 값싼 전어는 서민의 먹거리로 모자람이 없고 요즘에는 전어가 다른 고기에 비해 칼로리가 낮고 필수적인 단백질이 풍부해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각광받는다.
가을이라 제철을 맞은 전어는 황금갑옷을 온몸에 두른 개선장군처럼 당당하다. 물을 떠나는 순간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지는 기개로 횟집 수조와 석쇠, 도마 위에서도 두고 온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며 발버둥 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전어를 보고 자랐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숙제를 마무리하면 꼬치친구들과 어울려 전어낚시를 나갔다. 초보 낚시꾼에게 전어낚시는 가장 손쉬운 낚시입문과정이다. 전어는 급한 성질만큼이나 입질이 분명해 낚시를 통 채로 삼키는 바람에 물었다하면 놓칠 위험이 전혀 없다. 낚시를 문 뒤 버둥대다 끌려올 때까지의 당김과 버팀이 낚시꾼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때로는 동네 형들이 투망질을 하는 날이면 귀찮은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뒤풀이 때 말석에서 얻어먹는 그 꿀맛 같은 전어회가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그리운 내 고향 명지에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전어축제가 열려 흥겹다.
지난여름 친구들과 통영 소매물도에 갔을 때는 어느 해보다 일찍 전어맛을 볼 수 있었다. 강구안을 껴안은 어느 자연산 횟집의 후덕한 주모가 “시장에 나가보이 벌씨러 전어가 올라왔디이라. 맛이 들었는강 한문 잡사 보소.”하며 술상에 올려준 전어회를 주모의 인정과 함께 맛볼 수 있었다. 황금갑옷을 입은 전어가 지천에 깔린 해변의 한 점 소묘(素描)가 눈길을 끈다. 해운대의 마천루, 마린시티의 웅장한 빌딩숲을 배경으로 명물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 늦여름 ‘민락어민활어직판장’ 주차타워 벽면에 그려진 ‘늙은 어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독일의 그래피티 작가 헨드릭 바이키르히는 올해 76살 난 현지어민 박남세 옹을 모델로 초상을 그리고 그 아래 “역경이 없으면 삶의 의지도 없다”는 메시지를 화두로 던졌다.
평생 험한 바다를 누비며 살아온 늙은 어부는 오늘도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초저녁부터 백열등을 내다 건 민락동 어시장 주변의 포장마차횟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어와 소주에 취한 사람들의 콧노래가 흥겹다. 전어회는 번지르르한 고급 횟집에 앉아 먹는 것보다 개숫물이 길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왁자지껄한 난장(亂場)에서 목을 빼고 차례를 기다리다 얻어먹어야 제 격이다. 요즘 어시장에 즐비한 이른바 간이수족관, ‘괴기다라이’에는 kg 당 2만원 하는 씨알 좋은 전어가 넘쳐난다. 밤이 깊어 전어 굽는 연기 낮게 잦아드는 포장마차에 취기어린 술꾼들이 하나 둘 일어선다. 밤이 깊었다. 밤하늘에는 아스라이 먼 별빛 다가와 황금 갑옷을 갈아입은 전어가 가을을 맞은 사람들의 마음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역경이 없으면 삶의 의지도 없다.”는 헨드릭 바이키르히의 말을 마음에 되새긴다.
첫댓글 전어의 유래며 얽힌 얘기들이 전어구이만큼이나 구수합니다.
다만 때맞춰 심술로 등장한 그놈의 콜레라!! 아니 놀래라! -- 참 고민스럽네요. 잘 읽었습니다.
전어의 계절이 되었나봅니다. 전어 생각이 나는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