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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줄요약
부처님의 말씀은 화가가 여러 색으로 형상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언어와 문자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일 뿐 진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에서는 마음과 경계가 어떻게 여러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 작용은 각각의 경계를 따라 나타나지만, 반드시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五則以顯現,無有定次第。
오칙이현현, 무유정차제.
다섯 가지 식은 경계를 따라 드러나지만, 그 나타남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순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갑자기 화가와 그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마음과 식의 작용을 설명하시던 부처님께서 왜 화가의 이야기를 꺼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경전을 읽으며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 식, 아뢰야식, 업, 경계라는 명칭도 모두 진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중생이 진실을 이해하도록 임시로 그려 놓은 하나의 그림입니다.
화가는 붓과 물감으로 산과 강과 사람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산은 실제 산이 아니며, 그림 속의 강에서는 실제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그림을 통하여 산과 강의 모습을 이해합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지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나아갑니다.
3. 한문원문
譬如工畫師,及與畫弟子。
비여공화사, 급여화제자.
布彩圖眾形,我說亦如是。
포채도중형, 아설역여시.
彩色本無文,非筆亦非素。
채색본무문, 비필역비소.
為悅眾生故,綺錯繪眾像。
위열중생고, 기착회중상.
4. 한글번역
비유하면 능숙한 화가와
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제자가,
여러 색을 펼쳐
갖가지 형상을 그리는 것과 같으니,
내가 여러 법을 설하는 것 또한
이와 같느니라.
색채 자체에는 본래 그림이 없고,
붓에도 그림이 없으며,
흰 바탕에도 그림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을 기쁘게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색을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갖가지 형상을 그려 보이는 것이니라.
5. 경전의 종지
1) 부처님의 설법은 화가의 그림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설법을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에 비유하십니다.
화가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바탕 위에 붓을 움직이고 여러 색을 조합하여 사람과 산천과 집과 나무를 그립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많은 형상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에는 물감과 붓 자국과 바탕만 있을 뿐입니다.
산이라고 부를 만한 독립된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색과 선이 인연 따라 모였을 때, 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산과 사람으로 분별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도 이와 같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팔식, 삼자성, 이제와 같은 수많은 교설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진실을 나타내기 위한 그림입니다.
그 가르침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르침의 명칭을 진실 그 자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2) 물감에도, 붓에도, 바탕에도 그림은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彩色本無文,非筆亦非素。
채색본무문, 비필역비소.
색채 자체에는 본래 그림이 없고, 붓도 그림이 아니며, 흰 바탕도 그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림은 어느 하나의 재료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감만 놓아두어도 그림이 생기지 않습니다.
붓만 놓아두어도 그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흰 천만 펼쳐 놓아도 형상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화가의 의도와 손의 움직임, 물감과 붓과 바탕,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이 서로 의지하여 하나의 형상을 성립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대상도 자기 힘만으로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조건이 모이면 하나의 모습이 나타나고, 조건이 흩어지면 그 모습도 사라집니다.
3)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그림을 그리십니다
為悅眾生故,綺錯繪眾像。
위열중생고, 기착회중상.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기쁘게 하고 이해시키기 위하여 여러 형상을 그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기쁘게 한다’는 말은 단순히 즐겁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려운 철학을 설명하려면 비유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약을 먹이려면 그 사람의 체질과 증상에 맞는 처방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도 중생의 근기와 집착과 고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방식으로만 설법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상을 말씀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공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과를 강조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분별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서로 다르게 보이는 가르침들은 모순이 아니라, 중생의 병에 맞춘 다양한 그림입니다.
6. 심층 분석
1) 그림은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습니다
능가경은 그림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그림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색도 있고 형상도 있으며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림 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산의 그림은 보이지만 실제 산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의 그림은 보이지만 실제 바닷물이 출렁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능가경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나타나지만 진실한 자성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감정과 생각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어느 것도 영원히 고정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몸은 끊임없이 변하고, 감정은 일어났다 사라지며, 생각도 매 순간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화하는 현상 가운데 고정된 나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붙잡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을 실제 사람이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2) 언어는 진실을 나타내지만 진실은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말은 마음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말도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부처’라는 글자 역시 부처님이 아닙니다.
언어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 자체가 아니듯이, 경전의 문자는 진실을 가리키지만 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손가락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손가락이 필요합니다.
다만 달을 보아야 할 때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문장과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한 개념을 붙잡고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경전의 말씀은 직접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기 위한 방편입니다.
3) 분별은 그림을 실재로 만듭니다
화가는 선과 색을 그렸을 뿐이지만, 보는 사람은 그것을 사람, 산, 강, 구름이라고 분별합니다.
이처럼 형상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용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같은 그림을 보아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쓸쓸하다고 느끼며, 누군가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합니다.
대상 자체에 하나의 고정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기억과 습기에 따라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는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은 하나지만 마음이 그 위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능가경의 수행은 외부의 그림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색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4)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을 미혹에서 건져 내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편입니다.
그러나 방편을 절대화하면 또 하나의 집착이 됩니다.
‘모든 것은 공하다’는 말을 붙잡고 선악의 인과를 무시한다면 공에 집착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말을 붙잡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마음이라는 개념에 갇힌 것입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경전 공부를 무시하는 것도 문자에 집착하는 것과 반대 방향의 또 다른 집착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가리키는 자신의 마음을 직접 관찰하는 것입니다.
7. 선종으로 보는 마음공부
1)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십시오
선종에서는 흔히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합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달의 위치를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손가락을 달이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달을 볼 수 없습니다.
경전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해한 내용을 머릿속에 쌓는 것만으로는 자기 마음을 밝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문장을 외우는 것과 실제로 화가 나는 순간 자기 마음이 분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선종의 수행은 경전의 문장을 삶의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일입니다.
2) 우리는 매일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누군가가 무심코 한 말을 듣고 하루 종일 괴로웠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몇 마디의 말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 말 위에 수많은 그림을 덧붙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처음 들은 한마디는 이미 지나갔지만, 마음은 기억과 상상을 이용해 계속 새로운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다시 화를 내고 상처받습니다.
이때 수행자는 상대방이나 사건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덧칠하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사건과 마음이 만든 이야기를 구분하여 보는 순간, 그림에 끌려가던 힘이 약해집니다.
3) 그림을 없애려 하지 말고 그림임을 아십시오
수행한다고 해서 생각과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집착입니다.
기쁨이 생기면 기쁨을 알고, 슬픔이 생기면 슬픔을 알면 됩니다.
다만 그것이 인연 따라 잠시 나타난 마음의 그림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화가 난 마음을 ‘나’라고 붙잡지 않고, 화라는 그림이 지금 마음에 그려지고 있다고 바라보십시오.
두려움이 생겼을 때도 두려움이 곧 나라고 여기지 말고, 여러 조건으로 두려움이라는 형상이 나타났음을 관찰하십시오.
그림임을 분명히 알면 그림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4) 경전을 자신의 마음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능가경을 읽으며 아뢰야식, 말나식, 의식, 오식이라는 개념만 구분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개념들이 지금 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어떤 기억을 반복해서 붙잡고 있는가?
나는 어떤 대상을 보자마자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가?
나는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고 있는가?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의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질문을 통해 경전의 문자는 살아 있는 수행이 됩니다.
경전이라는 그림을 통하여 자기 마음의 작용을 직접 보는 것이 능가경 공부의 목적입니다.
8. 용어
1) 공화사(工畫師)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는 화가를 뜻합니다.
이 비유에서 화가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르침을 설하시는 부처님을 나타냅니다.
2) 화제자(畫弟子)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제자입니다.
넓게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 중생에게 전하는 보살과 수행자를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포채(布彩)
여러 색을 펼치고 배치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교법과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중형(眾形)
여러 가지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경전에서 설하는 갖가지 법문과 분별된 현상을 상징합니다.
5) 소(素)
그림을 그리기 전의 흰 비단이나 바탕을 뜻합니다.
물감과 붓과 바탕 가운데 어느 것도 홀로 그림이 될 수 없다는 연기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6) 기착(綺錯)
여러 색과 무늬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어우러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래께서 중생의 성품과 근기에 맞추어 다양한 방편을 시설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7) 방편(方便)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그 사람의 상황과 능력에 맞게 사용하는 적절한 가르침과 방법입니다.
방편은 진실을 가리키는 수단이지만, 방편 자체를 궁극의 진실로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9. 결론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설법을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화가는 물감과 붓과 흰 바탕을 이용하여 갖가지 형상을 그립니다.
그러나 물감도 그림 그 자체가 아니고, 붓도 그림이 아니며, 바탕도 그림이 아닙니다.
여러 조건이 어우러질 때 하나의 형상이 나타날 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 식, 업, 윤회, 열반이라는 수많은 명칭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그려진 법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그 그림을 통하여 진실의 방향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림 자체를 진실이라고 붙잡으면 안 됩니다.
경전을 읽은 뒤에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에는 얼마만큼 나의 기억과 욕망과 두려움이 덧칠되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음이 그린 그림을 실제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림 속에서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이 그린 그림임을 분명히 알아차리면, 그림은 그대로 있어도 더 이상 그 그림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떠나고, 그림을 통하여 그림에 속지 않는 것.
그것이 이번 구절이 우리에게 전하는 능가경의 수행입니다.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10. 참고문헌
『능가아발다라보경』 권1, 유송 구나발타라 한역, 대정신수대장경 제16권 T670.
『능가아발다라보경주해』 권1, 대정신수대장경 제39권 T1789.
실차난타 한역, 『대승입능가경』.
보리유지 한역, 『입능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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