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손권을 중심으로 오나라는 착실히 기반을 다져 나간다. 한편, 관도의 조조군과 대치한 원소는 토산을 쌓고 땅굴도 판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조군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이때 원소로부터 배척당한 모사 허유가 조조를 찾아와 한 가지 계책을 알려 준다. 손책이 젊은 나이로 죽자 오나라는 온통 슬픔에 잠겼다. 하늘에는 애처로운 새 소리만 들릴 뿐, 풍악 소리가 들리는 곳은 없었다. 장소는 손권의 종중 어른인 숙부 손정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손권은 손책의 침상 앞에 쓰러져 곡을 하며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손권에게 있어 형 손책은 아버지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장소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손권을 달래며 깨우쳤다.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울고만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승냥이와 이리의 야심을 품은 자들이 이 땅에 득실거리고 있는 마당입니다. 어서 형님의 유언을 받들어 군국의 큰일을 다스려야 하며 밖으로는 이전 국주에 못지않은 주군임을 보여야 합니다." 장소가 이처럼 간곡히 말하니 손권은 애써 눈물을 거두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대사를 잊고 슬픔에만 잠겨 있을 손권 또한 아니었다. 장소는 손권을 부당으로 모시어 문무의 관원들을 불러들여 하례를 올리게 했다. 손권이 주군으로서 신하를 대하는 첫 의식인 셈이기도 했다. 그때 파구로부터 주유가 달려왔다. 주유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손권을 기뻐하며 말했다. "공근이 돌아왔으니, 이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원래 주유는 손책이 자객에게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을 드리러 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오는 도중에 손책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주유는 먼저 손책의 영구 앞에 엎드려 절하며 통곡을 했다. 오 태부인과 손책의 아내도 함께 곡을 한 후에 손책이 남긴 말을 전했다. 주유는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비록 제 힘이 미약하나 맹세코 견마의 힘을 아끼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기의 유언을 받들겠습니다." 이때 손권이 들어오자 주유는 당장 그 자리에서 주공을 향한 예로 절하여 맞았다. "공께선 부디 돌아가신 형님이 남기신 명을 잊지 않도록 해 주시오." 주유가 다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간과 뇌를 땅에 쏟으며 죽을지라도 나를 그토록 헤아려 주신 은혜 기필코 보답하겠습니다." 손권은 주유를 딴 곳으로 청한 뒤 마주 앉았다. "이제 어리석은 이 몸이 동오를 맡아 아버지와 형의 뜻을 잇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데 그 대책을 일러 주시오." 손권이 주유에게 의논하자 주유가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무릇 무슨 일이든 그 바탕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망한다 했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덕이 높고 지혜가 밝으면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선비를 널리 구하십시오. 그런 이들이 많이 모이면 강동은 절로 튼튼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가형께서도 돌아가실 때 이르시기를 안의 일은 자포에게 묻고, 바깥일은 공근에게 의논하라 하시었소. 그 말씀을 깊이 새겨 반드시 지키려고 하오." 손권이 더 많은 선비를 불러들이라는 주유의 말에 이같이 대답하자 주유는 고개를 저었다. "장자포는 어질고 재주가 많은 선비이니 능히 큰일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는 우둔하니 고인께서 기탁하신 무거운 일을 감당해 낼지 두렵습니다. 원컨대 저보다 나은 자를 한 사람 천거하여 주공을 보필토록 하고 싶습니다." "공근만한 인재가 또 있다는 말이오? 그게 누구요?" "그의 이름은 노숙이요, 자는 자경이라고 합니다." "아직 들어 보지는 못했소. 그렇게 유능한 인재가 어떻게 세상에 파묻혀 있소?" "초야에서 현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지만 어느 시대건 반드시 숨어 있는 현인이 있는 법입니다. 다만 현임을 볼 줄 모르고 또 그 현인을 찾더라도 잘 쓰지를 못할 뿐입니다." "그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소?" "임회 땅의 동성현에 살고 있습니다. 가슴에는 육도삼략을 간직하고 지모가 출중한 인재입니다. 어릴 때부터 기지가 풍부한데 평소에는 참으로 온후하여 만나면 봄바람을 대하는 듯 합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성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집안이 넉넉하여 항상 재물을 나눠 가난한 이를 돌보는 데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영하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을 몰랐소." "제가 거소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인데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임회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양식이 떨어져 어려운 지경에 빠졌는데 우연히 노숙의 두 곳간에 곡식이 3천 석이나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노숙은 그 중 창고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마음대로 양식을 갖다 먹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인품의 됨됨이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검술과 말을 타고 활 쏘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벼슬을 마다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는 그의 할머니가 죽어 동성 땅으로 장사지내러 갔다가 그의 친구 유자양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소호의 정보에게로 가서 출사(벼슬을 하여 출근함)하기를 간곡히 권하였습니다만 그는 선뜻 나서고 있지 않습니다." "공근, 그가 다른 곳으로 가도록 그냥 둘 순 없는 일이오. 공이 가서 모셔 오도록 하지 않겠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인재도 그를 잘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가서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가문을 위해, 현인을 구하고도 어찌 유용하게 쓰지 않겠소? 공은 어서 다녀오시오." 손권이 기뻐하며 주유를 재촉하자 주유는 기쁜 마음으로 동성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노숙의 동네에 가서는 일부러 종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말을 타고 그 문전에 이르렀다. 그의 집은 시골의 호농(대규모의 농사를 짓는 지구)답게 마당이 넓었다. 대문 안에서는 한가로이 맷돌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가 문 안으로 들어섰으나 만류하는 사람도 없고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주인 어른 계신가?" 주유가 조용히 사람을 부르니 한 동자가 나왔다. 종자의 안내를 받으며 노숙이 있는 곳을 행해 가는데, 문득 풍채 좋은 무인이 종자를 데리고 거만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노숙의 손님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길을 조금 비켜 섰으나 그 무인은 목례도 하지 않고 우쭐대며 지나갔다. 주유가 종자를 따라 서당에 이르니 그곳에는 방금 손님을 배웅한 주인이 사립문을 연 채 서 있었다. 주유는 노숙에게 예를 올리고 말했다. "오성의 주공이신 손권의 뜻을 받들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노숙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하찮은 몸을 그토록 높여 주시니 감사하오만 이미 친구 유자양과 소호에 가기로 약조하였습니다." 주유는 조금 전에 나간 자가 유자양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주유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날 마원(후한의 맹장) 장군이 광무제께 말하기를 이제는 임금이 신하를 가려 뽑을 뿐만 아니라 신하도 임금을 가려 섬긴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손 장군께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 대하고 예로써 선비를 대접하며 각기 그 재주에 따라 녹과 벼슬을 내리니 세상에 보기드문 영걸이십니다. 일찍이 공의 이름을 흠모하여 이렇게 저를 보내셨으니 바라건대 천하의 시류를 헤아리시어 정보에 출사하심을 거두시고 동오를 위해 저와 함께 가심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유가 간곡히 설복하자 노숙은 조용히 웃었다. "지금 여기서 나간 손님을 만나셨지요?" "예, 역시 공을 모시고자 하는 유자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두 번 세 번 이곳에 와서 정보에게 출사하라고 권합니다만......" "공은 마음을 정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새는 좋은 나뭇가지를 골라 앉는 법입니다. 저와 함께 동오로 가십시다." 그제야 노숙은 주유의 말에 좇을 뜻을 밝혔다. 주유는 노숙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동오로 돌아와 주공인 손권을 알현하게 했다. 손권은 예를 다해 노숙을 맞은 후 극진히 공경하며 정무와 군사일에 대한 노숙의 고견을 물었다. 어느 날은 노숙과 단둘이서 술을 마셨다. 술잔이 오가고 흥이 오르자 서로가 군신의 예도 잊고 자리를 나란히 하여 누운 채 촛불을 켜 놓고 국사를 논하였다. 손권이 노숙에게 물었다. "이제 한실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고 천하는 어지러울 뿐이오. 나는 아버님과 형님의 뒤를 이었으나, 제환 공이나 진문 공처럼 천하의 패업을 이루려 하오. 그러나 그 길을 알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하면 그 같은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지 공이 깨우쳐 주시오." 젊은 주공 손권이 눈동자를 빛내며 묻자 노숙도 정색을 하여 입을 열었다. "지난날 한의 고조는 초의 의제(항우가 세웠다가 후에 죽임)를 받들고자 했으나 항우에게 의지하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조조는 그 항우에 비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이제 조조의 손에 들어 있거늘 장군께서는 어찌 제환 공이나 진문 공과 같은 패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실을 관망하시며 강동의 요해를 견고히 지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단 때가 오면 먼저 황조를 정벌하여 장강을 취합시시오. 때마침 조조와 원소는 하북의 공방에 여념이 없어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한실이 기울면 조정은 어떻게 될 것 같소?" "다시 한의 고조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 제왕의 업이 시작되겠지요. 장군께서는 한의 조묘를 구하심보다 새로이 제호를 창하고 나아가 천하를 도모하십시오. 이는 옛 한나라 고조의 창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노숙의 뜻밖의 말에 손권은 놀라기는커녕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옷깃을 단정히 여민 후 노숙에게 고마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노숙에게 많은 예물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 후 며칠간은 노숙이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 그의 노모에게도 의복과 재물을 보냈다. 노숙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돌아올 때, 또 한사람을 데리고 와 손권에게 천거했다. 그 사람은 한나라 사람들에게는 드문 두 자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가문을 알고 있었다. 성은 제갈 이름은 근, 자는 자유였다. 손권이 그의 집안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고향은 낭야의 남양입니다. 선친은 제갈규라고 하며, 태산의 군승을 지냈는데 제가 낙양의 대학 유학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하북은 전란이 계속되어 계모가 안주할 곳이 없어 강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동생과 누이는 저와 헤어져 형주의 백부가 부양하게 되었습니다. 백부는 형주의 자사 유표를 섬겨 중용되었으나 5년 전 전란으로 돌아가시었습니다." 손권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숙이 그이 사람됨을 말했다. "제갈 형은 아직 젊습니다만 낙양에서 수재라고 이름 났으며, 시문 경서에 이르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특히 제가 탄복하고 있는 것은 계모 섬기기를 친어머니 모시듯 하여 그 가정만 보아도 온화한 인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권은 기뻐하며 그를 상빈으로 중했다. 이 제갈근은 제갈공명의 친형이었다. 딴 나라에 흘러나와 무엇 하나 배경이 없었던 제갈근은 이로써 손귄에게 높이 중용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그의 지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인품이 휼륭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략은 동생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덕이 높고 검소하며 언행이 흐트러짐이 없으니 당대의 큰 그릇으로 숭앙받을만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앞일을 물었다. "공께서는 동오를 위해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장군께서는 하북의 원소와는 손을 끊으십시오. 원소가 조조와 대처하고 있으나 그는 군사가 많다는 것만 믿을 뿐 결단력과 지모가 부족합니다. 또한 그 조직은 내분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조조에게 패망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조조를 따르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제갈근은 오랫동안 하북에 있었으므로 원소 진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손권은 그 말을 좇기로 하고, 하북에서 사자로 와 오랫동안 머물고 있던 진진에게 글을 써 주어 돌려 보내고 원소와는 절연했다. 한편 조조도 이때 이미 손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지금은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다. 즉각 군사를 일으켜 동오를 치도록 하자!" 조조는 여러 중신들을 모아 이 일은 의논했다. 나이 어린 손권이 오의 주인이 되었을 때 일찌감치 그 싹을 자르고 강동을 차지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때 손책의 사자로 허도에 왔다가 이곳에서 벼슬을 받아 머무르고 있던 시어사(검찰관) 장굉이 아뢰었다. "남의 불행한 일이 있을 때를 틈타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승상답지 못한 일입니다. 만약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한다면 적만 만들고 숭상에 대한 민심만 잃게 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때 그를 잘 대우해 차라리 두터운 사이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장굉의 말에 조조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손책이 죽었다는 소리에 얼핏 동오를 칠 생각에 들었으나 가만히 헤아려 보니 이는 원소를 염두에 두지 않은 처사였다. 조조는 천자께 아뢰어 손권에게 은명을 전하게 했다. 즉 손권을 장군으로 봉하는 동시에 회계의 태수도 겸하게 했다. 장굉에게는 회계의 도위를 명하여 그를 사자로 보냈다. 손권은 뜻밖에도 태수인을 받게 되고 또 장굉까지 돌아왔는지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은 장소와 함께 정사를 돌보며 이 몸을 깨우쳐 주시오." 장굉은 오랜만에 돌아온 자기를 반겨 주는 손권을 위해 한 사람의 인재를 천거했다. 그는 고옹이라는 사람으로 자는 원탄인데, 지난날 왕윤에게 목숨을 잃은 채옹의 제자였다. 그는 말수가 적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근엄하고 곧은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손권은 곧 사람을 보내 그를 부르게 하였다. 그의 인품이 소문대로라는 것을 안 손권은 고옹을 승으로 삼아 회계태수의 일을 돌보게 했다. 그렇게 되자 손책을 잃고 일시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던 오는 오히려 젊은 손권을 중심으로 보좌하는 인재가 속속 모여들었다. 인재가 모여드니 자연 군사는 강해지고 내치는 더욱 강화되어 흥성해 갔다. 손권의 위엄은 강도에 더높이 떨쳤고 백성들의 신임도 두터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강동이 이렇게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가자 이를 가장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원소였다. 동오에서 하북으로 쫓겨온 진진은 원소에게 손권의 동태를 알렸다. "손책의 아우 손권이 뒤를 이어 동오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조가 손권에게 벼슬을 내리고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이 역적놈이 또 간교한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원소는 대로했다. 오는 사자를 쫓아내고 자청해서 조조에게 추파를 던지며, 조조는 또 오의 손권에게 벼슬을 내려 제휴를 맺었다. 고립된 원소의 초조와 분노는 가눌 길이 없었다. "먼저 큰 화근을 없애야 한다. 조조부터 타도해야겠다." 원소는 즉각 명을 내렸다. 이에 기주, 청주, 병주, 유주 등 하북의 대군 70만은 관도의 싸움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조조의 상장 하후돈은 첩자로부터 원소가 출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보고를 전해 받았다. 하후돈은 즉시 이 사실을 허도에 알렸다. 조조는 급보를 받고 지체없이 군사 7만을 수습하여 모사 순욱에게 허도를 지키게 한 후 자신이 군사를 이끌었다. 원소도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몸소 기북성에서 출진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옥에 갇혀 있는 전풍으로부터 글이 왔다. 이처럼 안을 텅 비우고 함부로 서두르면 반드시 큰 화를 초래합니다. 오히려 관도의 병력을 물리고 방비를 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전풍의 글을 보고 있는 원소의 곁에는 봉기가 있었다. 봉기는 전풍과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봉기가 가만히 원소에게 속삭였다. "주공께서는 조조를 치기 위해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전풍이 출진에 앞서 어찌하여 이토록 불길한 말을 하다는 것입니까?" 출진 날에는 작은 일에도 길흉을 따지며 매사를 조심하여 행하게 된다. 그런 판국에 상서롭지 못한 언사를, 그것도 중신이 글까지 올려 출진을 반대하고 이에 봉기가 간언하는 소리를 듣자 원소는 화를 내며 그의 목을 베려 했다. 그러나 전풍의 충성심을 알고 있는 많은 관원들이 원소를 말렸다. 원소도 여러 관원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풍의 목을 베는 대신 한 마디 내뱉았다. "내가 개선한 뒤에 반드시 그 죄를 다스리리라!" 원소군은 관도를 향해 출발했다. 백만에 가까운 대군이 출동을 하니 기치는 들을 메웠고, 수십 리에 걸쳐 칼과 창의 숲이 이어지는 듯했다. 원소군은 양무에 이르러 영채를 세웠다. 모사인 저수가 원소에게 아뢰었다. "조조는 속전속결을 노리고 있습니다. 군량과 마초가 넉넉지 못하므로 가려 뽑은 날랜 군사로 이 싸움을 단번에 끝낼 심상입니다. 우리는 대군이지만 그 용맹과 의기로는 조조군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군은 군량과 마초가 넉넉하니 지키면서 천천히 싸우는 것이 이롭습니다. 적의 마초와 군량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면 적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닥쳐라. 그대도 전풍처럼 군심을 흐려 놓을 작정이냐!" 원소가 크게 노해 소리쳤다. 원소는 저수의 목에도 큰칼을 씌워 가두도록 했다. "조조를 무너뜨린 후 저 자도 전풍과 함께 그 죄를 다스리리라." 저수를 옥에 가둔 후 원소는 관도의 산과 들 사방 90리에 걸쳐 하북의 군세 70여 만으로 진영을 펼쳐 세워 조조와 대치했다. 조조군의 세작은 원소군의 동태를 지체하지 않고 관도로 전했다. 엄청난 원소의 대군에 군사들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조조가 모사를 불러 원소의 대군과 맞설 계책을 의논했다. 그러자 순유가 입을 열었다. "우리 군사는 원소군에 비해 일당 십의 정예병입니다. 다만 유의할 것은 빨리 싸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일을 끌수록 우리의 양초가 줄어드니 헛되이 날을 보내다가는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조조가 순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의 말은 바로 내가 생각하던 바요. 이제 적을 알고 아군을 아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소. 바로 진군합시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군사들에게 진군의 영을 내렸다. 군사들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원소군을 향해 나아갔다. 원소군은 조조군이 진격해 오자 마주 군사를 내었다. 원소군은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진을 벌이게 했다. 심배는 노수 1만을 좌우에 매복시킨 후 다시 문기 안에도 궁수 5천을 숨겨 주었다. 날래고 용맹스런 조조군을 끌어들여 섬멸시키기 위함이었다. "포향이 울리거든 일제히 활을 쏘아라!" 심배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다. 양군이 마주 군사를 움직이니 흙먼지는 하늘을 덮고 양군의 기치와 북소리는 땅을 메웠다. 어느 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원소군은 매복병의 배치가 끝나자 크게 세 번의 북소리가 울렸다. 자세히 보니 원소가 문기를 날리며 진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금 투구와 갑옷, 비단 전포에 옥대를 두른 모습으로 명마에 앉은 원소는 과연 강북의 명문답게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원소가 진 앞에 나서자 그의 좌우에는 장합, 고람, 한맹, 순우경 등의 장수가 늘어섰다. 조조 진영에서도 문기가 열리더니 조조가 말을 타고 나왔다. 그의 앞뒤로는 허저, 장요, 이전, 악진, 우금 등의 장수들이 호위했다. 조조가 말 채찍으로 원소를 가리키며 외쳤다. "내가 일찍이 천자께 상주하여 너를 기북대장군으로 봉하여 하북의 치안을 맡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반란군을 일으키는가?" 원소도 성난 얼굴로 조조를 꾸짖었다. "닥쳐라 천하의 조직을 마음대로 하고 조정을 유린하고 있는 너야말로 바로 한의 역적이 아니더냐. 나로 말하면 한실 제일의 신하이다. 하늘을 대신하여 왕망이나 동탁보다 더한 역적을 징벌하러 왔다. 이는 만민이 소망하는 뜻이니 너의 목을 바쳐라." 서로 주고받는 외침은 아무래도 원소쪽이 유리했다. 한나라 대대로 높은 벼슬을 받은 명문의 자손이 하는 말이니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에 조조는 황급히 그의 말을 맞받았다. "나는 천자의 어명을 받들어 너를 치러 왔다." 조조가 천자의 어명임을 내세우자 원소도 지지 않고 조조의 약점을 긁었다. "네가 천자의 명을 받았다면 나는 천자께서 내리신 의대 속의 비밀 조서를 받들고 왔다. 어서 네 목을 내놓아라." 원소가 지난번 동승에게 내린 천자의 비밀 조서를 들먹이자 조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문원은 나가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이에 동시에 원소도 장합에게 명했다. "가서 저 역적놈을 사로잡아라!" 노궁과 포향이 일시에 울리고 화살이 빗발치는 사이로 장요가 말을 달려갔다. 마주 나온 하북의 용장 장합도 창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두 사람이 불꽃은 튀기며 부딪기를 50여 합, 그래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칼과 창이 부딪힐 때마다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들판에 쩌렁 쩌렁 울렸다. 장요는 조조가 자랑하는 상장이었다. "도대체 저 괴물 같은 장수는 누구인가?" 조조는 두 장수의 솜씨를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허저가 참다못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장합은 게 있거라!" 허저가 달려나오자 원소군에서는 고람이 달려나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감히 어디를 나서느냐?" 네 장수가 한동안 어우러져 찌르고 베는데 이를 지켜 보는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일 정도로 마음을 졸였다. 조조는 네 장수가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을 틈타 군사를 내어 기습을 가하기로 결정을 했다. 하후돈과 조흥에게 명해 각기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원소의 진영으로 쳐들어가도록 했다. 그때 높은 대 위에 서서 싸움의 대세를 지켜보던 원소군의 심배는 하후돈, 조흥이 아군의 측면을 협객해 오는 것을 보았다. "자, 이때다. 포를 쏘아라!" 심배의 말과 함께 일제히 포문이 열렸다. 이와 함께 양쪽에 매복해 있던 궁수가 일제히 진격해 오는 적군에게 빗발치듯 쇠뇌를 퍼부었다. 뿐만 아니라 중군에 매복했던 군수들도 진영 앞으로 공격해 오는 조조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아무리 용맹스럽고 날랜 조조의 군사라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군사를 되돌릴 사이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화살에 쓰러지는 군사가 수백이었다. 하후돈, 조흥은 황망히 군사를 돌려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때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로잡아라!" 원소가 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는 군사를 뒤쫓았다. 이미 선두가 무너진 형세인지라 조조군의 후진을 원소군에게 이리 저리 짓밟혔다. 조조가 싸움을 독려했으나 원래 원소의 대군에 비해 중과부적인데다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군사들이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찢긴 채 조조는 수십 리를 쫓겨 관도에 이르러서야 군사를 수습했다. 그러는 동안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본디 하남 북방에 있는 관도 땅은 자연이 주는 요새를 형성하고 있었다. 뒤로는 큰산이 솟아 있고, 그 기슭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30여 리 강의 흐름은 해자 구실을 해 주었다. 강줄기를 건어 관도에 진을 편 조조는 이 강줄기에다 다시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 방비를 단단히 했다. 한편 원소군도 조조군을 추격해 와 관도 근처에 이르러 진을 쳤다. 양군은 강의 흐름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게 되었다. 원소가 관도에 이르렀으나 강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화살 하나 쏘지 못한 채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심배가 원소에게 다시 계책을 내놓았다. "군사 10만을 풀어 조조 진영 앞에 흙을 쌓아올려 언덕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그 위에서 조조 진영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조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강줄기만 건너면 허창을 무너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심배의 말을 들으니 원소도 이제 조조군을 깨뜨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즉시 힘이 세고 날랜 군사들을 뽑아 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서 져 나르게 했다. 원소군은 원래가 많은 군사들이었다. 하루 이틀 지나자 조조 진영 앞쪽에는 흙더미가 높이 쌓아져 갔다. 원소의 속셈을 알아챈 조조가 군사를 내어 그들을 무찌르게 했다. 그러나 심배가 조조군이 나오기를 기다려 길목에다 이미 궁수들을 매복시켜 두었기 때문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원소군은 조조 진영앞에 50여 개의 토산을 만들었다. 그 토산 위에다 다시 망대를 세워 거기에서 궁노수들이 활과 쇠뇌를 쏠 수 있게 만들었다. 원소군은 한 망대에 50여 명의 궁노수들을 배치시켜 활과 쇠뇌를 조조군에게 퍼부었다. 높은 곳으로부터 활과 쇠뇌가 빗발처럼 떨어지니 조조군은 머리에 화살 막는 방패를 쓰고 몸을 움츠리고 다녔다. 원소군은 딱따기 소리를 신호로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그때마다 조조군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땅에 엎드렸다. 원소군은 조조군이 땅에 엎드릴 때마다 놀리며 비웃어댔으나 조조군은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몸을 사릴 뿐이었다. 조조군이 이렇게 무력해지자 원소군은 강을 건너갈 준비를 했다. 밤마다 조조군이 쌓아놓은 가시나무 울타리를 조금씩 잘라 버렸다. "관도의 수비도 이 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조조도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모사 유엽이 계책을 내 놓았다. "우선 적의 망대를 부수지 않으면 아군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발석거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조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발석거란 무엇인가?" "제 고향에 사는 이름 없는 늙은 대장장이가 고안해 낸 수레인데, 수레의 통에 큰 돌을 집어 넣고 화약을 터트리면 그 돌이 겨냥했던 곳에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유엽은 발석거의 그림을 그려 보였다. 조조도 이 무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기뻐하며 즉시 발석거를 만들도록 하였다. 유엽은 곧 늙은 대장장이를 부르고 목수, 석공, 화약 만드는 사람들 수천 명을 불러모아 그들을 독려하며 수백 대의 발석거를 만들었다. 만들어진 발석거는 원소군의 망대를 겨냥하여 배치되었다. 조조군이 진영 안에 발석거를 숨겨 둔 다음 날이었다. 원소군의 궁노수들이 일제히 딱따기 소리를 신호로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조군도 일제히 발석거에서 큰 돌을 쏘아댔다. 큰 돌은 허공을 날아 강 건너 토산 위의 망대 위에 떨어졌다. 수많은 포석이 공중에서 쏟아져 망대를 쳤다. 원소의 궁노수들은 피하지도 못한 채 망대에서 떨어져 죽고 돌덩이에 맞아 죽으니 그 수가 부지기수였으며, 망대는 풍비박산이 났다. 원래 조조군의 발석거는 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였다. 날아오는 돌의 속도가 느리고 눈에 보이기 때문에 땅 위의 군사들은 피할 수가 있었으나 망대에서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원소군은 발석거에 어찌나 혼이 났던지 '벽력거'라 외치며 겨우 목숨을 건진 자라도 달아나기에 바빴다. 발석거로 토산의 망대가 무너지고 박살이 나자 그 이후로는 원소군이 감히 토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토산을 이용한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심배는 궁리 끝에 새로운 방책을 세웠다. 굴자군을 편성한 것이었다. "군사들로 하여금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게 하여 조조의 진영으로 길을 내는 것입니다. 관도의 강이 양군 사이에 있으나 수심이 얕아 파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원소는 심배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과연 명안이오. 그렇게 되면 발석거도 무용지물일 뿐이오." 하북군은 이전에 북평성의 공손찬을 무너뜨릴 때도 이 전법으로 성 안에 들어갔던 사례가 있었다. 원소는 곧 2만 여의 두더지군을 뽑아 순식간에 한 줄기의 땅굴을 조조군의 언덕까지 파 나갔다. 그런데 조조군이 원소군의 땅굴을 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굴 속으로 부터 파낸 흙더미가 개미둑처럼 여기저기에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흙더미를 본 군사들이 이 사실을 조조에게 알렸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조조가 유엽에게 묻자 유엽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수법은 이미 잘 알려진 낡은 것입니다. 우리 편의 진지 앞에 옆으로 긴 해자를 파놓으면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관도의 물을 끌어들여 놓으면 굴 속에서 나오자마자 물 속에 수장될 것입니다." 조조는 유엽의 말대로 곧 긴 해자를 파게 하고 관도의 물을 끌어들였다. 원소군은 땅굴을 파서 강을 건넜으나 땅속에서 나오는 군사는 곧바로 해자에 빠지게 되었다. 원소군의 땅굴 작전은 이번에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헛된 힘만 쏟은 셈이 되고 말았다. 원소군은 달리 공격할 길을 찾지 못한 채 날만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8월과 9월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조조군이었다. 계속된 진전없는 싸움으로 인해 지쳐 있는데다 군량과 마초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몇 번인가 관도에서 물러나 일시 허도로 군사를 물릴까 했으나 결정을 짓지 못하고 허도로 사자를 보냈다. 사자에게 서신을 주어 순욱에게 의견을 묻기 위함이었다. '허도로 철수하여 그곳으로 원소를 유인하고자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조조의 글은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내용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것인지라 순욱 또한 지체하지 않고 회신을 보냈다. 조조는 회신이 오자 급히 뜯어 읽어 보았다. 군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으시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지난날 한 고조가 형양, 성고 땅에서 싸울 때 겪었던 고초보다 덜할 것입니다. 그때 향우나 유방은 서로 먼저 철수하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먼저 철수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열세임을 증명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원소가 모든 군력을 관도로 이끈 것은 명공과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군사를 불린다면 우리가 스스로 열세임을 드러내는 격이 됩니다. 이는 곧 천하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원소가 이끄는 무리가 많다 하나 그는 무리를 이끄는 힘이 미약하고 사람 씀에 어둡습니다. 명공의 신무하심과 밝은 헤아림으로 어찌 그들을 꺾지 못하겠습니까? 굳게 진을 쳐서 더욱 방비를 단단히 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을 지키면서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머지않아 원소군에게 반드시 의외로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계락을 써서 원소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결코 관도 땅을 그들에게 내어 주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순욱의 글을 읽자 새롭게 의기가 치솟았다. 모든 휘하들은 불러 철수를 보류하는 대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명했다. 조조가 진영을 굳게 지키면서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원소군은 진을 30여 리 밖으로 물렸다. 조조는 서황에게 진영 밖의 부근 일대에까지 초병으로 하여금 널리 돌아보게 하였다. 그러자 서황의 부하 사환이라는 자가 어느 날 한 명의 적을 포로로 사로잡아 왔다. 서황이 그 포로를 구슬러 원소군의 사정을 물었는데 뜻밖의 자백을 듣게 되었다. 순욱이 예측한 대로 생각지도 않는 좋은 계기를 얻게 된 셈이었다. "원소의 진에서도 사실은 군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대장 한맹이 각지에서 많은 군량을 모아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서황은 곧 그 사실을 조조에게 보고 했다. 조조가 그 말을 듣더니 무릎을 쳤다. "그 군량이야말로 하늘이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것이 아니냐!" 순유가 조조의 말을 거들었다. "한맹은 뛰어난 장수가 아니니 기병 수천만 이끌어 가면 능히 그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원소군에게 갈 군량과 마초를 뺏으면 손 하나 쓰지 않고도 원소군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제가 사환을 데리고 갔다 오겠습니다." 서황이 나섰다. 조조는 서황으로 하여금 거느린 군사를 이끌어 떠나도록 명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지 부근으로 가는 길이라 만약을 염려하여 장요와 허저에게 군사 5천을 주어 뒤따르게 했다. 그만큼 군량을 뺏느냐 못 뺏느냐 하는 것은 이번 싸움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칠 중대한 일이었다. 그날 밤, 하북의 군량 총책인 한맹은 수천 량의 곡식과 마초를 싣고 마소를 채찍질해 가며 구비구비 긴 행렬을 재촉하고 있었다. 물론 한맹은 조조군이 이 사실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 리가 없었다. 한맹이 산기슭에 이르자 한 떼의 군마가 산 속에서 달려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한맹은 뜻하지 않은 기습에 당황했다. 한맹은 서황을 맞아 일대 혼전을 벌였다. 그럴 동안 사환은 군사 일부를 거느리고 곡식과 마초를 실은 수레를 덮쳤다. 그런 다음 곡식과 마초 몇 량만 본진으로 이끌어 가게 했다. 나머지 수레는 모두 불에 지르게 했다. 그 많은 양을 끌고 가다 언제 달려올지 모르는 원소군에게 화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맹은 서황을 맞아 싸웠으나 원래부터 서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서황의 군사는 날랜 자들만 가려 뽑은 정예군이었다.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은 산골길인데다 날은 어둡고 마소는 난동하니 서황의 기습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곡식과 마초까지 불타자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서황은 그를 뒤쫓는 대신 수레를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 소와 말은 수레에 불이 불자 울부짖었고, 한맹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수천 대 수레에서 곡식과 마초가 타는 불길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한밤중에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본 원소는 깜짝 놀랐다. "저게 웬 불길인가?" 그때 도망쳐온 한맹의 부하들이 달려와 알렸다. "적이 기습해 군량과 마초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원소는 놀랄 겨를도 없이 한맹의 패퇴에 울화가 치밀었다. "장합, 고람은 어디 있느냐?" 원소는 급히 두 장수를 소리쳐 불렀다. 장합과 고람이 달려왔다. "그대들은 군량을 급습한 적을 섬멸하라!" 장합과 고람은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군량과 마초가 불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수레를 태우고 본진으로 돌아가던 서황과 맞부딪쳤다. 장합, 고람은 적이 의외로 적은 군사라는 걸 알자 서황을 에워싸며 덮쳐 들었다. 서황의 군사는 두 장수의 기습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난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서황의 군사는 점점 몰리기 시작했다. 서황이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장합, 고람의 뒤쪽에서 홀연 함성이 크게 일었다. 허저와 장요가 이끄는 군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장합, 고람의 후진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허저와 장요는 도망치는 군사들을 베며 장합과 고람을 향해 달여 들었다. 앞과 뒤에서 협공을 받게 된 장합과 고람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달아날 길을 급히 찾아 말을 달렸다. 서황은 구원온 허저, 장요와 합류하여 유유히 관도의 하류를 넘어 조조의 진지로 돌아왔다. 적의 군량과 마초를 불태우고 네 장수가 돌아오자 조조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네 장수에게 상을 내린 후 본영 앞에 또 하나의 진을 구축했다. 군량을 잃은 원소군이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여 앞과 뒤에서 호응하기 위함이었다. 원소는 기다렸던 막대한 양의 군량과 마초를 잃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온 한맹을 보자 대로하여 소리쳤다. "한맹의 목을 쳐 진문에 걸어라!" 그러자 여러 관원들이 간곡히 말렸다. 전군의 사기를 내세우며 한결같이 그의 구명을 호소하자 원소는 한맹을 일개 군졸로 강등시키는 대신 그의 목숨만은 살려 두었다. 이런 일이 있자 심배가 원소에게 고했다. "오소(하북성)를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곳은 군사를 움직이는데 가장 중요한 양곡을 쌓아 둔 곳입니다.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오소와 업도는 하북군의 양곡을 쌓아둔 곡창이었다. 원소도 이미 그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에 심배에게 명해 업도를 지키게 했다. 이어 오소는 순우경을 대장으로 하여 약 2만여 군사를 주고 지키게 했다. 그의 부장으로는 목원진, 한거자, 여위황, 조예를 딸려 보냈는데 그들은 내심 대장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대장 순우경은 본래 호주가였다. 거기다가 성격이 거칠어 부하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오소 땅은 주위의 지세가 험했다, 순우경은 오소가 천험의 요새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는지 부하들이 염려한 대로 날마다 술만 마시고 있었다. 원소의 휘하에는 허유라는 모사가 있었다. 나이는 원소보다 연배였으나 원소에게 높이 중용되지 못하고 전공도 올리지 못한 불우한 인물이었다. 허유가 원소에게 배척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조조와 동향이라는 점이었다. 원소는 그를 모사로 쓰기는 했으나 정사에 너무 깊이 관여시키면 위험하다고 여겼다. 허유가 이전에 한번 술을 마시고 자랑삼아 술김에 지껄인 것이 화가 되어 항상 백안시당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조와는 잘 아는 사이이지. 고향에서 함께 지낼 때는 날마다 여자를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며 동네 술집이란 술집은 무상 출입하였으니, 글세 불량배들의 대장 같았다고나 할까......, 나도 그와 함께 망나니 짓을 많이 했다구." 허유가 조조의 임협시절을 들먹이며 너스레를 떨자 원소가 이를 못마땅히 여긴 것이다. 원소가 이런 눈치를 보이자 사람들도 자연히 그를 피하며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 무렵 조조는 진주에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급히 허도로 사자를 보냈다. 순욱에게 군량을 재촉하는 글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조조의 서신을 받아든 사자가 급히 허도로 말을 몰았다. 이때 허유가 부하를 이끌고 순시하던 중 그 사자를 생포하게 되었다. 틀림없는 조조의 사자인지라 허유가 문초를 해 보니 그의 품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보내는 글이 나왔다. 허유는 이 글을 보자 얼핏 딴 생각이 생겼다. 허유는 원소에게 나아가 양곡을 재촉하는 조조의 글을 보여 주며 청했다. "제게 기미 5천은 인솔하게 해 주십시오." 허유는 이때야말로 평소 원소의 자신에 대한 불신을 깨끗이 씻고 또 공을 세워 불운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여겼다. "그대에게 군사를 준다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 원소가 심드렁하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밤을 틈타 산길을 이용해 허창을 치는 것입니다. 지금 조조는 우리와 맞서고 있으니 허창은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주공께서 관도를 공략하신다면 군량이가 바닥난 조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군사를 이끌어 허창을 급습한다면 허창과 관도가 한꺼번에 떨어질 것입니다." 허유의 말 원소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리석은 소리. 그런 일이 그리 쉽사리 이루어 질 수 있다면 나를 비롯한 상장들이 왜 이 고생을 하겠나? 뿐만 아니라 그건 조조를 모르고 하는 말일세. 그는 꾀가 많은 놈이니 이 글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계교일지도 모르는 일일세." 원소가 쾌히 응락하리라 기대했던 허유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우선 급했다. "허창이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조조가 듣게 된다면 그는 진을 거두어 허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주공께서 그들을 친다면 조조를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유가 단념하지 않고 계속하여 간청했으나 원소는 도중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심배에게서 사자가 왔지 때문이다. 원소가 그 사자를 만나고 있는 틈을 타 한 시신이 원소에게 귀엣말로 간했다. 시신은 자기 나름대로 허유를 잘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허유의 말을 결코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말장인 푼수에 탄원을 하다니 주제넘은 짓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 사나이는 기주에 있을 때부터 항상 행실이 좋지 않았으며, 농민을 협박하여 뇌물을 옭아 내거나, 금은을 빌려 주색에 빠지거나 하여 모두 그를 멀리 하였습니다. 주공께서는 그의 말을 헤아려 들어 주십시오." 시신의 말을 들은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는 허유가 낸 계책의 옳고 그름을 헤아리기 전에 우선 화부터 냈다. "필부놈이 감히 그따위 짓을 하고도 계책을 내놓다니......" 원소는 다시 허유가 있는 자리로 돌아와 오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며 꾸짖었다. "너 같은 탐관오리가 감히 내게 얼굴을 들고 계책을 논한다는 말이냐? 너는 사사로운 욕심이 많은데다 젊었을 때는 조조와 친구였다. 필시 그에게 뇌물을 받고 그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우리 군사를 해치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냐? 당장 네놈의 목을 벨 것이나 네 머리를 잠시 목에다 맡겨 둔다. 그러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조조와 싸우고 있는 원소로서는 한 번쯤 허유의 말을 되씹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시신의 말을 듣고는 허유가 한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의 지난 행실만을 꾸짖었다. 이 기회에 공을 세워 보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허유였다. 그러나 원소에게 질책만 당하고 물러 나오자 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어 탄식했다.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구나. 저런 애송이하고 어찌 큰일을 꾀할 수 있으랴!" 허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의 목에다 갖다 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놀라 칼을 빼앗으며 말했다. "공은 어찌하여 이토록 목숨을 가볍게 여기시오? 원소는 바른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결국 조조에게 패망하고 말 것이오. 공은 조조와는 잘 아는 사이이니 그리로 가 보시오. 어찌하여 어두운 곳에 머물러 밝은 곳을 찾지 않습니까?" 허유와 가까운 사람이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한 말이었다. 그러나 원소의 진중에서 그 같은 말이 나왔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유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본때를 보여 주리라. 머지않아 그가 후회하도록 만들 테다.' 허유는 순간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슬그머니 진중을 빠져 나와 조조의 진으로 향했다. 불과 대여섯의 부하를 이끌고 어둠을 틈타 관도의 얕은 내를 건너 조조의 진영으로 향한 허유였다. 허유는 내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매복해 있던 조조의 군사에게 붙들리는 몸이 되고 말았다. 허유가 조조의 군사에게 말했다. "나는 조 숭상의 옛 친구다. 남양의 허유라고 하면 기억하리라." 그때 조조는 본진에서 옷을 벗고 막 쉬려던 참이었다. 군사가 달려와 허유가 찾아온 사실을 전했다." "남양의 허유라고 하는 분이 숭상님을 찾아왔습니다." "무엇이? 허유가?" 조조는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들여보내도록 했다. 조조가 그를 보니 소년 시절과는 달리 많이 변한 모습이었으나 분명 허유가 틀림없었다. "오오, 자넨가? 그대는 원소에게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조조가 허유를 반기자 그는 땅에 엎드려 절했다. 조조는 황망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자네와 나는 어릴 적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의례적인 인사는 그만두게나." 그러자 허유가 송구해하며 말했다. "그대는 한의 숭상이요, 나는 아직 벼슬길에도 나서지 못한 흰 옷 입은 필부일 뿐이오." 허유의 말에 조조는 그의 손바닥까지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친구 사이에 관작의 높고 낮음을 들먹이다니 자네답지 않으이." 원소의 냉대 속에 지내온 허유는 조조의 흉허물 없는 따뜻한 영접에 감격했다. 허유는 더욱 송구해하며 말했다. "나는 반생을 헛되이 살아왔소. 주인을 식별하는 눈이 없어 원소 같은 놈에게 몸을 굽히며 지내왔소. 충언을 간해도 듣지 않고 계책을 말해도 헤아림이 없었소. 이제 그에게 쫓겨난 후 이렇게 찾아와 면목이 없소만 나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시오." 바로 조조가 바라던 말이었다. 조조가 여전히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자원이 이렇게 찾아왔으니 내 어찌 반갑지 않겠나. 자네는 그 동안 원소에게 있었으니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을 터인즉 그를 무너뜨릴 계책이 있으면 말해 주게." 조조가 허유에게 물었다. 그러나 허유는 조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사실 내가 원소에게 권한 것은 내가 기병 5천을 이끌어 허도를 치는 동안 원소로 하여금 관도를 치라는 것이었소. 그런데 원소는 들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에게 필부의 주제에 계책을 낸다고 내쫓았소." 허유의 말에 조조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만약 원소가 자네의 계책을 들어 주었다면 나는 반드시 결딴나고 말았을 걸세.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었네. 그런데 자네는 지금 나의 진에 와서 그 반대로 그를 무찔러야 한다면 어떤 계책을 세우겠나?" 조조의 집요한 물음에 허유는 다시 엉뚱한 소리만 했다. "그 계략을 세우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있소. 도대체 숭상의 진지에는 지금 어느 정도의 군량이 확보되어 있소?" "한 1년은 지탱할 만하네." 조조가 대답하자 허유는 얼굴을 찡그리며 가만히 조조를 노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모처럼 내가 옛 정을 되살려 참된 말을 하려는데 숭상은 오히려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소? 나를 속이려는 사람에게 어찌 참을 말할 수 있겠소?" 허유가 그렇게 말하자 조조는 뜨끔했다. 조조가 얼른 바꾸어 말했다. "반 년 정도일세." 허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한탄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옛 친구를 찾았는데 이렇듯 나를 속이니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바라겠소?" 조조가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아닐세. 지금 한 말을 농담일세. 정직하게 말하면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네." 허유는 여전히 빈정대듯 웃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그렇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맹덕은 간옹이요, 약삭빠른 귀재라고 하더니 소문대로군. 숭상은 끝내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허유의 말에 조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히 속삭였다. "하지만 자네는 '병불염사(군사에 있어서는 간사한 꾀를 꺼리지 아니함)'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실은 군량이 한 달치밖에 남아 있지 않네." 그러자 허유는 분연히 조조의 입에서 귀를 떼어 내며 성난 기색으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만두시오. 숭상의 진영에는 이미 한 톨의 군량도 없지 않소. 말을 잡아먹고 풀을 뜯어먹는 것을 어찌 군량이라 할 수 있겠소?" 조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가?" 조조가 얼굴빛이 달리하며 묻자 허유는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봉함이 뜯긴 서한을 꺼내 조조의 코앞에 내밀었다. "이것은 누가 쓴 것이오?" 허유가 조조에게 되물었다. 조조가 보니 틀림없이 자기가 순욱에게 군량의 궁박함을 알리며 재촉한 그 서한이었다. "아니, 어떻게 나의 서한을 자네가 갖고 있는가?" 조조는 어이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제야 허유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유는 자신의 손으로 밀사를 생포한 일을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조조는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가닥 경계심을 풀고 허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원이 옛 친구를 잊지 않고 찾아왔는데 서운하게 대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게. 자네가 나를 찾아온 데에는 필시 무엇인가 깨우쳐 줄 곳이 있어 왔을 걸세. 부디 가르침을 주기 바라네." 조조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정중히 묻자 허유는 그제야 정색을 하고 주인을 섬기는 신하의 예로 입을 열었다. "명공께서는 적의 군대에 비해서 적은 군사로 맞서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는데 어찌하여 속전속결의 방도를 찾지 않으십니까? 지구전으로 간다면 패배를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게 한 계책이 있는데 명공께서 이 계책을 쓰면 원소군은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다만 명공께서 이 계책을 들어 주실지 그것이 걱정될 따름입니다." 조조가 허유의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자원이 내는 계책이라면 내 어찌 듣지 않겠나? 어서 말해 보게나." "이곳에서 40여 리 떨어진 곳에 오소라는 요새가 있습니다. 오소는 곧 원소의 군대를 먹여 살리는 양곡을 비축해 둔 창고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지키는 순우경이라는 자가 술을 좋아하여 부하들을 잘 단속하지 못하니 방비가 허술할 것이외다. 불시에 기습을 가하면 능히 무너뜨리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오소에 접근하려면 적지를 돌파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그곳을 지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명공께서는 계교를 써야 합니다. 먼저 날래고 용맹스런 군사를 뽑아 모두 북군으로 위장시키고 관문을 지날 때마다 원소의 직속 장군이 장기의 부하로 사칭하는 것입니다. 군량 수비에 파견되어 오소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소의 성 안에 들어가 순우경의 군사를 격퇴시킨 뒤 군량미와 무기를 태워 버리면 원소의 군대는 필경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막다른 지경에 이르른 조조는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생사를 걸고 오소 공격을 감행하기로 작정했다. "오소를 소탕해 버리면 원소의 군대는 무너진 것과 다름없다."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허유를 후히 대접하여 진영에 머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