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 허수아비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기섭
가을 들녘은 평온했다. 누런 벼이삭으로 출렁이는 하동 평사리, 논두렁을 빙빙 돌며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 허수아비도 함께 춤춘다. 토지 문학제, 축제를 위한 몸단장일까. 갖가지 색깔로 치장한 허수아비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평사리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문인 일행을 태운 버스가 고샅길을 지날 때마다 그들은 발돋움하여 일어서서 반가움으로 외객을 반긴다. 화사한 그들의 얼굴에서 넉넉한 가을을 읽을 수 있다. 희망과 여유를 가진 그들을 보며 뜨거운 전율로 다가오는, 유년 시절 벼논의 허수아비를 만난다.
윗골의 작은 논배미 가운데서 허름한 옷을 걸치고 서 있던 너는 그 당시의 가난과 절망의 표상이었다. 기구한 운명의 굴레에서 누대를 이어온 주인의 일그러진 표정을 어떻게든 바꾸어 보려고 온갖 애를 썼지. 밤이슬을 온몸에 머금은 채 새벽녘부터 주인을 기다릴 때 철없이 앞서 날아든 참새 떼로 너는 곤욕을 치르곤 했지. 하지만 비록 혼자 들판을 지키고 있어도 너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가진 건 적어도 넉넉한 인심의 주인과 얄밉지만 때로는 무료함을 달래주는 참새들의 율동으로 조용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결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던 허수아비,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실로 오랜만에 그날의 토지에서 느꼈던 정감을 맛보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름 모를 이들에게도 넉넉한 웃음을 보내주는 그들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낳게 한 진원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토지와 함께 비바람을 맞으며, 때론 칼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허수아비는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을을 예찬하는 풍악이 가슴을 훈훈히 달구기 때문이다. 풍작을 노래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그들의 주인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의 운명을 숙명처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하여 흘린 피눈물의 사연을 허수아비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입이 있어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속내를 한번 변변히 토해내지 못한 질곡의 세월을 그들은 묵묵히 바라보며 애간장을 태웠으리라. 언제쯤 주인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허수아비의 서럽던 나날들을 오늘 목전에서 보고 있다.
차는 마을 입구를 지나 평사리 최참판댁 가까이 다다랐다. 서슬 퍼런 주인마님의 표정 속에서 읽을 수 있었던, 토지를 지키기 위한 애끓는 아픔이 마당 가득 서려 있다. 땅과 더불어 아픈 세월을 살아온 평사리 허수아비는 또 다른 감회 속에서 우리를 맞고 있을 것이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농심에 불을 밝혀온 평사리 사람들과 하나 되었던 허수아비. 그때는 혼자라서 앞날이 아득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비록 자주 찾아오지는 못하는 길손들이지만 가슴 깊이 파고든 허수아비에 대한 사랑은 고이 간직하고 떠날 것이다.
깊어 가는 가을밤 높이 떠있는 별들이 하나 둘 시야에 들어오며 음악이 흐르고 문인들의 작품 낭송이 뜨락을 곱게 적신다. 들녘에 우뚝 선 허수아비들이 굳건히 땅을 지키고 있는 한 평사리엔 슬픔이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한 가문을 지키고, 농심을 북돋우고, 토지를 지켜나가기 위해 참아야했던 인고의 세월을 허수아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밤이 가고, 모두 떠난 뒤에도 우리의 젖줄인 토지를 지키고 가꾸기 위한 피나는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관심이 아닌,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기를 그들은 말없이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