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마치 스승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무영은 사형과 뇌룡대주라는 말에 일단 몸을 날리며 기운을 엷게. 그리고 빠르게 퍼트렸다.
무영의 부드러운 기운이 사방을 뒤덮었다. 무영은 빠르게 강악의 기운을 찾았고, 강악 근처에 있는 강대한 기운도 발견했다.
"접객당이로군."
무영은 방향을 바꿔 더욱 빠르게 이동했다. 눈 깜짝할 새에 접객당에 도착한 무영은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접객당 안으로 들어간 무영은 금령을 발견했다. 금령 앞에는 강악과 당백형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무영의 단전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일었다. 그 기운은 접객당 안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렇게 서 계시지들 마시고 앉으십시오"
무영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금령은 살짝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무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강악과 금령 사이에 앉았다.
강악은 예전 금령과 대적한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처참히 패배했지만 지금 싸우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서는 자신 없지만 당백형과 함께라면 가능하다고 믿었다.
당백형은 처음 금령을 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
이런 강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신과 강악을 능가할 만한 사람은 무영뿐이라고 은연중에 확신했기 대문에 그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당백형 역시 강악과 함께라면 절대 두려워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펼치는 천뢰는 천하무적이라 굳게 믿었다.
금령은 금령대로 놀랐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강악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백형도 강악과 비슷한 강자였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는 못 미친다. 둘이 힘을 합해 덤벼도 마찬가지다. 아니, 십대고수가 몽땅 달려들어도 금령을 이길 수는 없다.
"어쩐 일이십니까?"
무영이 묻자, 금령은 한참동안 무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왕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느냐?"
금령의 물음에 무영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은왕과 함께하는 겁니까?"
금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일을 했지. 하지만 이제 그만두려고 한다. 부질없어졌거든."
금령은 그렇게 말한 후, 무영과 강악, 당백형을 한 번씩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 뒤에 서 있는 표중산과 소명학을 쳐다봤다.
"꽤 괜찮은 사람들과 함께하는구나."
금령의 말에 무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봤을 때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지난번의 금령이 마치 날카롭게 벼린 칼과 같았다면 지금의 금령은 그의 칼의 날을 무뎌지게 만든 듯했다.
"가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영의 말에 금령이 고개를 끄덕였고, 무영 곁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들은 새삼 무영의 마음을 확인한 것 같아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은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금령이 다시 묻자, 무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얘기했다.
은환을 만들고, 그 은환을 이용해 금제를 걸어 사람들을 이용하며, 흑사맹과 녹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것 등,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금령은 그 말을 모두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꽤 자세히 알고 있구나. 하면 그가 어떤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겠지?"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바보다. 은왕은 무림의 전복을 꿈꾸고 있다. 무림을 한바탕 뒤집어서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야망을 가진 게 분명했다.
"사실 은왕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금령은 주위의 반응을 한 번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자는 혈왕이다."
무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왕단을 만든 자로군요."
금령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혈왕단을 아느냐?"
"얼마 전에 겪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절대 해선 안 되는 방법으로 만든 것 같더군요."
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혈왕단은 사람을 압축해서 만들지. 그 사람의 피와 살, 뼈, 그리고 평생 동안 수련한 모든 것과 원념이 들어간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만든 약이 바로 혈왕단이지."
무영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금령은 그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는 피에 미친 자다. 혈왕단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다. 문제는 그런 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거다."
"사형께서는 왜 그런 자를 그냥 두셨습니까?"
금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도 미쳐 있었다. 그리고 설혹 내가 나서더라도 혈왕만큼은 막을 수 없다. 그는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금령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금령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 어찌 믿겠는가. 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질문을 계속했다.
"하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부님이다."
무영의 눈이 커졌다.
"은왕과 혈왕이 왜 지금까지 숨어서 지냈겠느냐?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왜 괜한 음모를 꾸미고 세력끼리 싸움을 붙이고 그 틈에서 어부지를 얻고자 했겠느냐?"
금령은 그렇게 말한 후, 무영 뒤에서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소명학과 표중산을 슬쩍 쳐다봤다.
"은왕이 가진 세력은 이미 정협맹과 흑사맹을 합한 것보다도 크고, 고수의 수는 혈마맹과 무림맹을 합한 것보다도 많다. 그런 사람이 왜 쥐새끼처럼 숨어서 지냈겠느냐?"
무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혈왕은 혈왕단을 만드는 것에만 미쳐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협맹주를 재료로 혈왕단을 만들 수도 있다.
한데 그런 그가 왜 은밀히 그림자를 키우고 사람을 몰래 남치해서 혈왕단을 만들겠느냐? 이미 힘은 충분한데 말이다."
금령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좌중을 둘러봤다. 이미 모두의 눈이 경악에서 차츰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금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사부님 때문이다. 그들은 사부님을 두려워해서 숨었다. 한데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나 때문이지."
금령의 말에 무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사형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영의 눈빛 깊은 곳에는 한 가닥 기대가 숨어 있었다. 금령은 무영의 눈을 바라보며 그것을 정확히 읽어냈다. 하지만 결국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난 그들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돕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형."
금령은 손을 들어 무영의 말을 중지시켰다.
"난 더 이상 사부님의 제자가 아니다. 난 이미 그 자격을 잃었다. 사부님의 제자는 이제 너뿐이다."
무영은 금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님의 제자인 것과 지금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네게는 사부님의 뒤를 이을 의무가 있다. 부디 사부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진짜 약장수가 되기를 바라마."
금령은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황한 무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무표정한 금령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다. 금령은 언제 웃었느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고, 이내 몸을 돌려 몸을 향해 걸어갔다.
"사형!"
무영의 부름에 금령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무영의 물음에 금령이 피식 웃었다. 무영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뇌룡장에서 함께 지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게도 스승님의 무공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영의 말에 금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하긴 내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긴 했지. 하지만 넌 배우기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신선단을 더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무영이 빙긋 웃었다.
"무공을 배우면 약을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금령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어 버렸다.
"좋다. 무공을 가르쳐줄 때까지만 여기서 머무르마. 하지만 난 은왕과의 싸움에 절대 끼지 않겠다."
무영이 환하게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사형께 무공을 배우면 그런 자들이야 금방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무영은 진심으로 기뻤다. 예전에 금령을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금령도 달라졌고 무영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금령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 한구석을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불편했는데 지금은 아주 편안했다. 마치......
'마치 스승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접객당에 있던 뇌룡장 식구들이 멍한 눈으로 무영과 금령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렇게 뇌룡장에 새로운 가족이 한 명 늘었다.
은왕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앞에 부복한 비천을 노려봤다.
"다시 말해봐라. 뭐라고 했느냐? 금령이 뭐가 어째?"
"곡을 떠나셨습니다."
비천은 그렇게 말하고 황급히 말을 이었다.
"금령께서 무한으로 향하셨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아마 뇌룡장으로 가신 듯합니다."
"뇌룡장? 그게 아직도 남아 있었단 말이냐? 지난번에 채금상단을 도와 그곳을 지워 버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 일은 실패했습니다."
우드득!
"크아아악!"
비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뼈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비천의 몸이 공처럼 말리기 시작했다. 그 진행 속도가 너무나 느려 비천은 죽지 못하고 고통만 점점 심해져 갔다.
"크아아아! 요, 용서를!"
은왕은 차가운 눈으로 공처럼 말려 고통을 호소하는 비천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반 각쯤 흐른 후, 손을 한 번 휘젓자, 비첨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가, 감사합니다!"
비천은 고개를 땅에 거의 박다시피 하며 외쳤다. 뼈가 뒤틀렸던 자리에서 피가 배 나오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틈도 없었다.
은왕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비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뇌룡장에 대해 자세히 보고해라."
쿵!
비천은 바닥에 이마를 강하게 부딪친 후, 살짝 고개를 들고 서둘러 보고를 시작했다.
"흑령 넷과 다섯 장로님이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곳에 있는 십대고수 셋을 장로님들이 꾀어 끌고 가고, 흑령과 흑귀가 뇌룡장을 덮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전멸입니다."
은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멸이라고? 구대흉마가 다섯이나 갔는데, 게다가 혈왕단까지 먹었는데 고작 십대고수 셋에게 당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비천은 이마를 땅에 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아직 자세한 조사가 끝나지 않아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구대흉마 중 다섯이 갔고, 흑령 넷이 함께 움직였는데도 전멸을 당했다는 것이다.
"뇌룡장은 지금 어쩌고 있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뇌룡장에 세작을 심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설마 그것조차 못했단 말은 아니겠찌?"
은왕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비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작은 충분히 침투시켰습니다. 한데 모조리 연락이 끊겼습니다."
"연락이 끊겨?"
"그, 그렇습니다."
비천은 그렇게 대답했다. 세작과의 연락이 끊겼다는 것은 그가 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세작인 사실을 들켜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특별한 일이 있어 외부로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비천은 전자로 거의 확신했다.
은왕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떨고 있는 비천을 노려봤다. 능력은 확실한데 뇌룡장이나 뇌룡장주와 연관이 되기만 하면 바보가 되어 버린다.
당장 공처럼 굴려 죽여 버릴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쓸 만한 놈이다.
"뇌룡장의 저력이 상당하구나. 일단 뇌룡장은 주시하기만 해라. 대국에 영향을 끼칠 것 같으면 내가 혈왕에게 부탁을 해보지."
혈왕이라는 말에 비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실 은왕보다 더 무서웠다. 혈왕의 핏빛 눈동자만 봐도 온몸이 피가 되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존, 존명."
비천은 간신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비천이 사라지자, 은왕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금령, 네놈이 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큭큭큭큭. 혈왕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 은환을 먹여 주지. 혈왕이 네놈을 혈왕단으로 만들기 전에 말이야."
광포한 살기가 대전에 휘몰아쳤다.
정협맹 백호단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살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는 흑사맹 무사들이 보였고, 흑사맹, 정협맹과 더불어 삼격형을 이루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은왕곡이었다.
"대체 저놈들의 목적이 무엇인란 말인가."
백호단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은왕곡이 등장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싸움이 완전히 멎어 버렸다.
그전에는 간혹 작은 규모의 전투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그조차 없었다.
백호단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무사들이 동요를 다독이기만 했다. 지금 상황에서 흑사맹과 전투를 벌인다면 은오아곡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당연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백호단주는 흑사맹 진영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 역시 달려들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긴, 저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분위기를 보니 흑사맹 역시 은왕곡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정협맹도 그렇고 흑사맹도 그렇고 한꺼번에 두 군데에 신경을 써야 하니 이만저만 골치 아픈게 아니었다.
백호단주는 한참 동안이나 흑사맹과 은왕곡을 살피다가 돌아섰다.
그렇게 흐지부지 또 하루가 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갔고, 사위가 어둠에 잠겨들었다.
밤이 들판에 내리깔렸을 때, 흑사맹 진영이 조용히 술렁였다. 잠자리를 위해 쳐놓은 천막 안에서 수많은 무사들이 미리 빼든 무기를 들고 눈을 번득였다.
그들은 천막 안에서 조용히 무기를 뽑아 그 소리를 최소화했다.
그렇게 일체의 소리도 내지 않고 모두 모인 흑사맹 무사들은 더욱 은밀히 이동을 시작했다.
삼백 명이나 되는 무사가 먼저 이동햇고, 그 몇 배가 넘는 인원이 싸울 준비를 마치고 긴장한 얼굴로 정협맹 진영을 노려봤다.
일단 선두 삼백 명이 정협맹을 기습하면 남은 수천의 무사들이 그대로 돌격해 싸움을 결정지을 계획이었다.
조양은 흑사맹 진영 안에 세워둔 높은 망루에 앉아 그렇게 검은 옷의 무사들이 움직이는 관경을 지켜봤다.
검은 옷을 입고 무기에도 검은 칠을 하고, 얼굴에도 검댕을 발라 완전히 어둠에 동화된 무사들이었다. 게다가 삼백 명밖에 되지 않아 몰래 적진에 숨어들기에도 적당했다.
한데 몰려가면 쉬이 들키겠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조용히 이동하면 절대 그럴 일이 없었다. 지금 이동하는 삼백 명은 흑사맹의 최정예 고수들이었다.
조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사방으로 흩어져 은밀히 적진에 스며드는 삼백 명의 돌격대를 지켜봤다.
그들이 아무도 들키지 않고 적진에 스며들자, 조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콰득!
"크으윽!"
"저, 적습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섬뜩한 파육음이 쏟아져 나왔다.
"막아라!"
순식간에 사방에서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기조차 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자들은 어김없이 목이 잘려 죽었다.
"적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서둘러 정리해라!"
백호단주의 외침이 울렸지만 지나치게 늦었다.
"와아아아! 한 놈도 남겨두지 마라!"
순식간에 다가오는 거친 함성에 백호단주의 안색이 새하애졌다. 흑사맹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벌써 정협맹 진지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막, 막아라!"
백호단주는 당황해서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공허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은왕곡을 앞에 두고 어찌 이리도 과감한 공격을 감행한단 말인가.
"서, 설마 한통속인가!"
백호단주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은왕곡과 흑사맹이 한편이라면 이 모든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 백호단주는 한것 일그러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정협맹 무사들이 서서히 전열을 정비해서 그럭저럭 흑사맹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초반에 너무 극심한 피해를 입어 수적으로 너무 밀렸다.
"이놈들!"
백호단주는 일단 몸을 날렸다. 그의 검이 날카롭게 움직이며 흑사맹 무사들의 목을 잘라냈다.
백호단주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흑사맹은 돌격하는 와중에 포위망까지 완성했다. 꽤 오랜 시간 치밀한 준비를 해온 것이 분명했다.
"크흑."
너무나 분했다. 절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전멸하면 더 이상 정협맹의 미래는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슥!
은밀한 움직임이 정협맹 진지를 덮쳤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은 흑사맹 무사들 뒤로 조용히 접근해 그들의 목을 따 버렸다.
"크윽!"
"컥, 대, 대체 왜......"
은왕곡 무사들, 즉 흑귀들은 이런 은밀한 움직임에 능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흑사맹의 포위망을 와해시켰다.
그렇게 흑사맹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후, 다시 돌아왔다. 그 움직임이 말 그대로 검은 귀신들 같았다.
흑귀들의 한 방은 치명적이었다. 포위망 한 쪽이 완전히 와해되자, 정협맹 무사들이 그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결국 흑사맹과 정협맹은 다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고, 정협맹은 전열을 정비하자마자 달려들었다.
흑사맹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극심한 피해를 입고서 다시 후퇴해야 했다.
결국 야밤의 기습은 서로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채 끝났다.
남궁세가의 심처, 거대한 전각 안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내려가면 넓은 연무장이 있다. 그곳은 대대로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들이 폐관수련을 할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지하 연무장 한가운데, 한 사내가 좌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옷은 헤지고 찢어졌으면, 온몸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그는 폐관수련 중인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상룡이었다.
한동안 좌정한 채 명상에 잠겨 있던 남궁상룡이 갑자기 눈을 떴다. 번득이는 안광이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숨어도 소용없으니 나와라."
남궁상룡의 말에 연무장 한쪽 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하나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온통 검은 옷으로 도배를 한 사람이었는데,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표홀한 신법으로 남궁상룡에게 다가갔다. 마치 그림자가 쭉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남궁상룡 앞에 선 그림자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고작 두 달만에 꽤 대단한 성취를 이뤘군. 일단 축하해 주지."
그림자의 말에 남궁상룡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가져온 거나 내놓고 사라져."
"흐흐흐. 뭐가 그리 급한가. 아직 폐관수련을 시작한 지 일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림자가 이죽거리자 남궁상룡이 인상을 찌푸렸다.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 없다고 또 말해줘야 하는 건가?"
남궁상룡의 말에 적의가 어리기 시작하자, 그림자가 손사래 치며 살짝 물러났다.
"아아, 흥분하지 말라고. 네가 원하는 걸 줄 테니까 말이야."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갑(匣)하나를 꺼냈다.
온통 새빨갰다. 섬뜩할 정도로.
"여전히 취향이 독특하군. 꼭 피를 칠해 놓은 것 같아."
"흐흐흐. 진짜 피를 칠했지."
남궁상룡이 피식 웃었다.
"너희는 정말로 미친놈들이다."
"혈왕단을 최고의 상태로 보관하기 위해선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잘못하면 혈왕단의 약효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그림자의 말에 그제야 남궁상룡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왕단의 약효가 망가지는 건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남궁상룡은 손을 뻗어 혈갑(血匣)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갑 안에는 혈왕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난번 것보다 훨씬 크고 투명하군."
"훨씬 좋은 거니까. 지난번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약이지. 기대해도 좋아."
그림자의 말에 남궁상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혈왕단을 단숨에 삼켰다.
비릿한 혈왕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뱃속으로 들어간 혈왕단은 순식간에 남궁상룡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림자는 남궁상룡을 차가운 눈으로 살폈다. 그 변화를 자세히 알아가는 것도 그에게 내려진 임무 중 하나였다.
'역시 남궁세가 놈들과 궁합이 잘 맞아. 지난번 남궁명이라는 놈도 그렇고 말이야.'
남궁상룡은 앉은 채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혈왕단으로부터 비롯된 쾌감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그림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혈왕단의 흡수율이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저기까지 흡수하지는 못했건만.'
혈왕단을 제대로 흡수하게 되면 성합을 할 때보다 수십 배 더 큰 열락을 얻을 수 있다. 현재 남궁상룡이 그런 상태였다. 이대로 끝까지 가면 아마 사내의 정을 토해낼 것이다.
'굉장해. 과연 거기까기 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 경지까지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남궁상룡이 최초가 될 것이다.
그림자는 문득 두려워졌다. 최고의 혈왕단을 극한까지 흡수한다면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었다. 성격은 당연히 변할 것이다. 힘도 엄청나게 강해질 것이다.
그림자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계속해서 남궁상룡을 살폈다.
마철령은 혈마맹 안으로 들어섰다.
혈마맹에 남아 있는 마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흑사맹과 정협맹의 싸움에 참여중이었다. 아니, 거기에 참여한 마인들 대부분이 죽었다.
처음에 참여했던 마인들은 강악과 당백형에게 죽었고, 나중에 참여한 자들은 무림맹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사실 혈마맹은 흑사맹으로부터 인원을 더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여력이 많이 부족했다.
마철령은 혈마맹으로 들어서며 마인들의 기척을 잡아냈다.
진짜 강한 마인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부분 그저 그런 마인들이었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강시로 다시 태어날 테니까 말이다.
마철령은 맹주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마인들에게 모두 맹주전으로 모이라고 전했다. 한꺼번에 처리하는 편이 번거롭지 않고 좋다.
"흐으으으. 하나도 놓쳐선 안 되지. 철강시와 혈강시를 만들어 봐야겠구나. 흐으으으."
마철령은 기대어린 표정으로 마인들을 기다렸다. 그들을 어떻게 강시로 만들지 차근히 계획을 세웠다.
일단 제압을 하고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훌륭한 강시가 나온다. 죽은 자를 이용해 만드는 강시는 아무래도 격이 떨어진다. 혈교의 대법은 더군다나 그렇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마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철령은 혹시 오지 않은 마인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마철령의 기감은 혈마맹 정도는 모조리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미리 명을 내린 대로 경계를 서는 인원까지 한 명도 남김없이 맹주전으로 모인 것을 확인한 마철령은 모인 사람들을 쭉 살펴봤다.
모두 예순세 명이었다. 그들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마철령을 바라봤다. 그들도 마인이었다. 어서 싸움에 뛰어들어 적의 피를 마시고 싶었다.
마철령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올렸다.
마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마철령의 손으로 향했다. 그 순간, 마철령은 들어올리지 않은 손으로 막대한 마기를 쏟아냈다.
마철령의 손을 타고 나온 마기는 정확히 예순세 가닥으로 갈라졌다. 가늘고 긴 마기의 가닥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뱀처럼 이리저리 구불대며 대전 안으로 쏘아져 나갔다.
푸슈슈슈슉!
살갗을 뚫는 미세한 소음이 연달아 울렸다. 마철령의 마기가 예순세 명 마인들의 마혈(痲穴)을 점령하는 소리였다. 마인들의 눈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매, 맹주님!"
마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철령이 들어올린 손에서 마기의 가닥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거침없이 날아가 마인들의 아혈(啞穴)을 제압했다.
"흐으으으. 간단하구나. 멍청한 것들. 앞으로 네놈들은 더 이상 멍청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내 수족이 되어 충실히 움직일 테니까 말이다. 흐으으으으."
마철령은 그렇게 말하며 맹주전에서 나가 버렸다. 마철령이 사라진 거대한 맹주전에는 불신과 당혹으로 얼룩진 예순세 마인들만 뻣뻣하게 굳은 채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온 마철령은 일단 강시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강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저들을 숙성시킬 관도 필요하고 다영한 약과 독도 필요했다. 준비하는 건 쉬웠다. 머릿속에 이미 그에 대한 지식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구할 방법까지 있었다.
며칠 만에 준비를 끝낸 마철령은 경악에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마인들의 시선을 즐기며 그들을 하나 하나 약물이 찰랑거리는 관에 산 채로 넣었다.
부글거리는 거품이 쉴 새 없이 올라오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폐 가득히 약물이 채워진 것이다. 보통은 폐에 물이 들어가면 죽지만, 특별한 시술을 거쳤기에 그들의 생명은 가느다랗게 유지되었다.
그렇게 열흘 동안 마철령은 정성을 다해 대법을 펼쳤다. 그리고 예순세 구의 철강시를 얻을 수 있었다.
"흐으으으. 아쉽구나. 혈강시를 만들 수 있을 만한 고수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흐으으으."
혈강시는 철강시와 다르게 고수의 시체가 필요하다. 살아있는 채로 만들면 훨씬 더 좋다. 하지만 지금 혈마맹에는 그 정도의 고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나중에 고수를 구해볼 수밖에. 흐으으."
혈강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로 강한 자들이 필요했다. 마철령이 원하는 수준은 십대고수였다. 십대고수를 이용해 혈강시를 만들어 낸다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마철령은 완성된 예순세 구의 철강시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서 빨리 그들을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곳도 안다.
마철령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일단 정협맹과 흑사맹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적당한 재료를 구해 혈강시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은왕을 칠 것이다.
"흐으으으. 날 이렇게 만든 놈을 가만둘 수 없지. 흐으으으."
마철령은 음산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마인으로 만든 철강시다. 이들이라면 정협맹이든 흑사맹이든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럼 슬슬 가볼까? 흐으으으."
마철령이 막 움직이려 할 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거미줄처럼 쭉 늘어나며 다가왔다.
마철령은 섬뜩한 눈으로 그림자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림자는 사람의 형체가 되어 마철령의 삼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림자는 정중히 마철령에게 허리를 숙였다.
"혈교의 교주가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그림자의 인사에 마철령이 코웃음을 쳤다.
"흐으으으. 날 그리로 안내한 것이 네놈들 아니었더냐, 뭔가 목적이 있겠지. 하지만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라. 흐으으으."
"제가 어찌 혈마맹주이자 혈교의 교주이신 마 대협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전 그저 도움이 되고자 찾아왔을 뿐입니다."
마철령의 눈에서 핏빛 광망이 뻗어 나왔다. 그림자는 그 눈빛에 휩싸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철령의 힘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고 거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사람이 혈교의 교주가 가지는 힘마저 취했으니 당연했다.
"말해 봐라. 흐으으."
그림자는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흑사맹과 정협맹의 긴 싸움이 끝났습니다."
마철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흐으으.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이미 전장의 정리까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지금 가셔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마철령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첫 날부터 게획이 이긋났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림자는 그런 마철령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혈강시 때문에 그러시다면 혈왕께서 재료를 이미 준비해두셨습니다."
그림자의 말에 마철령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름지를 노려봤다. 마치 처음부터 혈왕의 계획에 완벽하게 놀아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철령은 힘을 끌어 올렸다. 단번에 그림자를 죽일 생각이었다. 한데 힘을 모으기만 할 뿐, 쓸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그림자를 죽일 수 없었다. 지금 마철령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혈강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결국 마철령은 그림자를 노려보다가 다시 힘을 풀어 버렸다.
"안내해라."
마철령의 말에 그림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명을 따릅니다."
그림자가 그대로 흩어졌다. 마철령은 고개를 돌려 그림자의 기척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날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마철령의 뒤로 예순세 구의 체강시가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76.의미를 담아, 정성을 다해서
금령은 뇌룡장에서 약간 유리된 존재였다.
아무도 금령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금령 또한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력하지 않았다. 복잡하고 떠들썩한 걸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더 그랬다.
처음 뇌룡장에 들어온 이후 금령이 만난 사람을 첫날 접객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거처의 일을 봐주는 시비와, 무영과 여행에서 막 함께 돌아온 세 여인이 전부였다.
그나마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무영이 신경을 써 줬지만 그 이후로는 무영도 신선단을 만들기 위해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기에 금령을 만나러 갈 시간이 아예 없었다.
이래저래 금령은 오늘도 거처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곳 뇌룡장에 오기 전부터도 동굴에 박혀 상당한 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그러던 것이 뇌룡장에 오면서 더 심해졌다. 아니, 더 정확히는 동굴에서 사부의 환영을 본 순간부터 그랬다. 그때부터 명상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명상은 항상 비슷한 과정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무공을 들여다봤다. 여러 가지 초식의 근본과 그 흐름, 그리고 자신이 가진 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들이 각각의 흐름을 이루며 서로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꼬인 흐름을 생각의 손에서 놓아 버렸다.
진짜 명상은 그때부터였다. 모호하면서도 명확한 기묘한 상태가 지속되면 몰아의 경지를 맛본다.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 무공을 수련해 왔지만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오늘도 금령은 그렇게 사방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포만감에 취했다가 서서히 깨어났다.
금령은 서서히 눈을 떴다. 물아일체의 경험은 하루에 고작 한두 번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금령에게 지극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사부님은 언제나 이런 걸 느끼고 계셨던 건가?"
문득 금령은 사부가 자신이 무공을 충분히 수련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단한 사부가 자신이 신선단을 만들 생각도 없고 그저 무공만 죽어라 수련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짧기나 한가? 무려 육십 년이다. 육십 년 동안 틈만 나면 몰래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걸 사부가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은 그런 의문이 들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아니, 솔직히 사부를 원망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아예 없었기에 그랬던 거라 여겼으리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것을 확실히 깨달은 건 얼마 전 사부의 환영을 봤을 때였지만 사실 그전부터 조금씩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사부가 왜 그랬느냐는 것이다. 억지로 붙잡고 다시 신선단을 만드는 수련을 시킬 수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신선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그럴듯한 약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금령 자신도 그것에 그냥 만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부는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몰아의 경지에서 깨어나면 그런 의문이 조금씩 아주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그래서 더 명상을 즐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지."
사부는 약장수였다. 그리고 약을 통해 도를 이뤘다. 아마 제자들이 꼭 신선이 되기를 바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뤘던 뭔가를 조금이라도 맛보기를 원한 건 분명했다.
그리고 금령은 지금 무언가를 조금 맛봤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충만함이었다.
"후우우."
금령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호흡 한 번에 온몸의 활력이 채워졌다. 그렇게 힘을 채운 금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밥값을 해야겠군."
금령의 눈에 기대가 어렸다. 그가 보기에 그의 사제인 무영은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졌다.
무영이 가진 뇌기는 금령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나마 예전에 만났을 때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당시에는 무영이 뇌기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최근 금령은 그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갔다. 그렇게 됨으로써 주변에 흐르는 기운에 훨씬 민감해졌다. 그래서 무영의 몸에 뇌기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 녀석이 뇌룡이었단 뜻이로군.'
지금까지 금령은 강악이 뇌룡인 줄 알았다. 강악이 스스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강악은 나름대로 무영을 감춰 주려 한 것이다. 금령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 한 가닥이 피어났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군. 나쁘지 않아."
금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사제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또한 그 대단한 힘으로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면 얼마나 더 굉장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를 말이다.
"신선단은 다 만들었느냐?"
무영은 작업실에서 나가다가 금령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금령이 조용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방금 끝났습니다."
무영의 말에 금령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사제가 만드는 신선단이 과연 어떤지 보고 싶었다.
"내가 한 번 봐도 되겠느냐?"
무영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무영은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방금 만든 신선단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기운을 많이 응축시켰다.
보통은 길거리에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수백 개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동안의 깨달음을 제대로 확인하고 정리하게 위해 되도록 강력한 약효를 띠게 만들었다.
무영이 신선단을 내밀자 금령이 그것을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대단하군. 한데 그게 전부인가?"
무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무영이 신선단을 더 앞으로 내밀자, 금령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신선단이었다. 얼마 전 청령환을 가장한 신선단을 보긴 했지만 지금 보는 건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금령은 손바닥 위에 놓인 신선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신선단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운이 기분 좋게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이 정도면 예전 사부가 만들었던 것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 없었다.
"굉장하군. 이걸 만든 재료를 볼 수 있겠느냐?"
무영은 흔쾌히 허락했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무영이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자, 금령이 그 뒤를 따랐다.
작업실 안은 상당히 깔끔했다. 예상외의 광경에 금령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전 소주에서 들렸던 무영의 집과 너무 달랐다.
"이것이 남은 재료입니다."
무영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커다란 통이 있었고, 그 통바닥에 풀 쪼가리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본래는 모두 가루로 만들어야 하지만, 가끔 이렇게 남기도 했다. 이유는 가진 기운이 다른 풀에 비해 많이 모자라서였다.
"제가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무영의 말에 금령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가 미숙한 재료라는 건가? 정말로 대단하군. 사부님의 진전을 그대로 이었구나."
금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채취한 재료의 상태를 보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단번에 드러난다.
금령이 보기에 지금 남은 재료는 잡풀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 가득했다.
금령은 그것을 보며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열망을 느꼈다. 그 역시 신선단을 만들기 위한 수련을 했다.
그것도 무려 육십 년 동안이나. 물론 수련에 매진하진 않았지만 신선단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그 기안에 비례해 점점 커졌다. 그렇게 커진 욕망은 아직도 모두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나도 신선단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금령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무영이 빙긋 웃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금령은 고개를 돌려 미소 띤 무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끓어오르던 욕망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역시 이 길을 내게는 맞지 않아. 난 무공 쪽이 훨씬 어울려."
금령은 그렇게 말한 후, 무영의 작업실을 한 번 쭉 훑어봤다. 군데군데 사부의 흔적이 보였다. 금령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자."
금령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신선단은 다시 무영의 손에 있었다. 무영은 작업실 한쪽에 신선단을 조김스레 내려놓은 후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아무 무공도 배우지 않았느냐?"
금령의 물음에 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 배운 것은 있습니다만, 특별한 무공은 아니었씁니다. 그저 빨리 걷는 법과 좀 덜 맞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사부가 가르친 것이 특별하지 않을 리 없다.
'뭐, 일단 부딪쳐 보면 알겠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 금령은 몸을 돌렸다.
"일단 연무장으로 가자. 나도 밥값을 해야 하니까."
금령의 말에 무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금령에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금령을 뇌룡장에 잡아두려는 구실이었다.
무공을 배워서 나쁠 건 없지만, 아직 그보다는 신선단에 주력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사실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스승님이 남겨주신 무공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열심히 배우는 게 났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무영이 공손히 포권을 취하자, 금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실력을 알아봐야 하니 간단한 대련을 먼저 하는 게 좋겠군. 덤벼 봐라."
금령의 말에 무영이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내며 단전에 가득한 기운을 움직였다. 일부의 뇌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스팟!
무영의 발에서 강렬한 섬광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무영의 몸이 금령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금령은 무영이 이렇게까지 빠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펑!
금령이 손을 들어 무영의 주먹을 막았다. 폭음과 함께 섬광이 터졌다. 금령은 눈앞을 어지럽히는 뇌전 줄기들 틈으로 주먹을 질러 넣었다.
콰앙!
금령이 눈이 번득였다. 무영의 손이 자신의 주먹을 쳐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빈틈을 찔렀는데, 설마 그걸 저렇게 간단히 막아낼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우습게본 모양이군."
금령의 몸에서 숨 막힐 듯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금령의 기세는 순식간에 연무장 전체를 내리눌렀다. 무영은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퍼버벙!
방금 전 무영이 있던 자리에 권풍이 쏟아졌다. 무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단전에 잠자던 뇌기를 조금 더 깨웠다.
빠지지직!
무영의 양 주먹이 새하얗게 빛났다. 뇌전 줄기들이 주먹을 감싸며 요동쳤다.
금령은 눈을 빛내며 몸을 날렸다. 금령의 손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마구 쏟아져 나갔다.
"으라차차!"
무영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섬광과 뇌전이 중간에서 부딪쳤다.
콰과과과광!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금령은 그 틈을 타 무영에게 접근했다. 떨어져서 싸우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령이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도 무영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저 두 주먹에 맴도는 뇌전을 다스리며 전의를 불태울 뿐이었다.
쩌저저저정!
격렬한 주먹질이 오갔다. 무영의 주먹은 빠르고 매서웠다. 하지만 금령은 그 이상이었다.
대련은 그 이후로 반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두 사람 모두 한치도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웠다. 서로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만일 금령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쓰고, 무영 또한 뇌기를 모두 퍼부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콰앙!
거대한 폭음을 마지막으로 대련을 멈춘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에는 은은한 감탄이 어려 있었다.
"대단하구나."
"사형이야말로 대단하십니다."
금령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야 무공에만 미친 사람 아니냐. 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게다가 네 신선단까지 먹었으니 이 정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무영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금령이 손을 들어 무영의 말을 막았다.
"됐다. 아무튼 더 대련을 이어갈 필요는 없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그건 그렇고......"
금령은 그렇게 무영의 말을 막은 후, 잠시 뜸을 들였다. 이제 이렇게 대련을 한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한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정말로 사부님께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느냐?"
무영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빨리 걷는 법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무공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금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의 그 빨리 걷는 법이라는 건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무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술법에 더 가깝다. 축지법이었으니까. 문득 쓴웃음이 새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난 그것도 익히지 못했군.'
빨리 걷는 법도 신선단을 만드는 법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익히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정성을 다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포기해 버렸다. 그런 말은 신선단을 만들면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내가 보기에 넌 무공을 아예 안 익혔다고 하기가 어렵다. 보아하니 실전을 상당히 겪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스승님께서 산적들을 찾아다니며 싸우게 하셨습니다 . 얻어맞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익혀야 한다면서......."
"역시 그랬군."
금령은 그제야 수긍했다. 사실 사부는 자신에게는 그런 수련을 시키지 않았다. 남몰래 무공을 익히고 알아서 수련을 했으니 당연히 필요치 않은 과정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어. 그게 당연하지.'
"굳이 애써서 새로운 무공을 익힐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실전을 많이 경험한 덕분에 임기응변이 뛰어나구나.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방금 전에도 경험했다. 처음에는 대등하게 싸웠지만, 나중에 싸움이 멈출 무렵에만 거의 밀리기만 했다.
뇌기를 더 썼으면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그건 금령 또한 마찬가지이니 의미가 없었다.
"일단 넌 기초가 모자라다. 아주 기본적인 움직임이 흔들리기 때문에 결국 복잡하고 의미가 깊은 초식에 대한 대응이 힘들다.
힘의 격차와 임기응변으로 웬만큼은 메울 수 있지만 혈왕이 상대라면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혈왕이라는 말에 무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현재 무영이 가장 경각심을 갖고 있는 자가 바로 혈왕이었다. 혈왕이 만든 혈왕단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약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영이 심각한 어조로 묻자, 금령이 슬쩍 웃었다.
"네 무기가 권(拳)이니, 주먹질을 연습해야겠지. 지금의 네게는 다른 자잘한 초식 따위는 배워봐야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앞으로 매일 일어나자마자 주먹질을 천 번씩 해라. 의미 없는 주먹질은 필요 없다. 한 번 한 번에 정성을 담고 의미를 되새겨라.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에 또 천 번을 내질러라.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주먹을 내지르는 법을 깨우칠 것이다."
금령의 말에 무영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주먹질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주먹질을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된 자세가 필요하다. 무영은 그것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금령은 그런 무영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정성을 다하라고. 그리고 의미를 새겨 보라고."
그제야 무영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금령은 그런 무영을 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내 언제 그렇게 웃었느냐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뒤돌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무영은 금령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금령은 뒤돌아 보지 않아도 무영의 그런 행동을 알 수 있었다. 금령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되돌아왔다.
무영은 금령의 말대로 그날 밤부터 당장 주먹질을 시작했다. 그저 단순히 주먹을 내지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움직임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수백 번이나 휘두르면서도 만족스런 표정을 짓지 못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지금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고, 대부분 그것이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가만히 서서 주먹을 내지르다 보니 뭔가 어색한 것이 느껴졌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세에 문제가 있나 하고 여러 가지 자세로 바뀌가며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어떤 자세로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그럭저럭 괜찮은 느낌의 주먹질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마음에 아주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없었다.
"후우우."
결국 천 번을 모두 채웠다. 밤이 늦었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천 번의 주먹질이 모두 마음에 안 든다는 점이었다.
무영은 다시 몇 번 더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긴 했지만 전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대로는 천 번이 아니라 만 번을 휘둘러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해봐야겠군."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처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가상으로 휘두르는 주먹질인데도 여전히 뭔가가 모자랐다.
결국 무영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 주먹질을 했고, 그러다 잠들어 꿈에서도 주먹질을 했다.
무영이 수련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무영은 매일 거르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아침에 천 번, 밤에 천 번의 주먹질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무작정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매번 의미를 되새기며 휘둘러야 하니, 더욱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오늘도 무영은 아침 일찍 수련을 시작해서 벌써 천 번의 주먹질을 끝냈다.
"정말로 이상하군."
아무리 진전이 느리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발전이 없는 거야 그렇다 치고,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느껴지는 거북함을 도저히 없앨 수 없었다.
온갖 자세를 다 동원해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아마 자세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하긴 자세가 문제라면 지금까지 사형이 아무런 말도 안 했을 리 없지.'
그동안 금령은 꽤 자주 무영의 수련을 지켜봤다. 무영이 수련을 절반쯤 진행할 무렵 나타나 주먹질하는 모습을 반 각 정도 가만히 지켜보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사형이 중간에 와서 보고 간다.
무영은 천 번이 주먹질을 끝낸 후, 가만히 자신의 주먹을 눈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살폈다.
보통 사람의 주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양이다. 다만, 그 내부에 뇌력(雷力)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처음 사형은 한 번 한 번 의미를 되새기고......"
무영은 사형이 처음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잊고 있던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아, 정성이구나. 정성."
지금까지 무영은 정성이라는 말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무공에 들이는 정성과 자신이 신선단을 만들 때 들이는 정성이 다를 리 없지 않은가.
무영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구 주먹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신선단을 만들 때처럼 정성을 다해 천천히 주먹을 내질렀다.
후아아앙.
무영의 주먹을 중심으로 기(氣)가 휘몰아쳤다. 주먹으로 기운이 모여들었다.
꽝!
주먹이 완전히 뻗어나간 순간, 기가 폭발했다. 무영은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방금 전 그 어떤 기운도 일으키지 않았다.
한데 이런 결과가 나타나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선단을 만들 때처럼 기운을 다스렸다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던 건 이런게 아니야."
기운을 끌어들여 폭발시키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지금 무영이 원하는 것은 제대로 된 찌르기였다. 방금 한 찌르기는 비록 위력은 강력했지만 여전히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무영은 희망을 가지고 다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금령의 말을 되새겼자. 주먹질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야 한다.
'의미를 담아, 정성을 다해서.'
무영은 다시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우웅! 쾅!
기가 회오리치며 터져 나갔다. 무영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거둬들이고 내질렀다.
쉬이익! 꽝!
이번에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모여든 기운은 거의 동일했기에 파괴력도 비슷했다.
무영은 다시 주먹질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주먹을 내질렀을까. 이내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주먹을 연달아 찔러대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연무장에는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무영이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주먹질과 주먹질 사이의 간격도 점점 짧아졌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흘렀다. 무영은 그때까지 무아지경에 빠질 쉴새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영의 주먹질이 조금 변했다.
기이이잉!
쇠가 긁히는 소리가 울렸고, 무영의 주먹이 새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콰앙!
무영은 주먹을 내지른 채로 멈췄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연무장 벽이 날아가 버렸다. 무려 수십 장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벽이었다.
무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방금 전의 그 일격이 바로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무영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엇이 모자랐는지 이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기의 흐름이 보였다. 이건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는 것에 더 가까웠다. 무영은 그 흐름의 틈새로 주먹을 밀어 넣었다. 아주 가벼운 일 권이었다.
스팟!
꽝!
아무런 내력을 담지 않고 그저 슬쩍 내지르기만 했는데도 강렬한 기운이 뭉쳐 바닥에 깔린 청석을 박살냈다.
그때부터 무영은 사방으로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뻗기 시작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초식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의미 없는 움직임 안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었다.
꽈르르릉!
무영의 손끝과 발끝에서 뇌전이 일었다. 순식간에 연무장에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무영의 손발에서 흘러나온 뇌전의 그물이 연무장을 가득 뒤덮었다.
이내 무영의 움직임을 멈췄다. 가만히 서서 호흡을 골랐다. 이런 충만함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신선단을 만들 때 가끔 느끼는 것과 상당히 비슷했지만 달랐다.
"무공으로 이런 걸 느낄 수 있다니."
짝짝짝!
무영은 고개를 돌려 박수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금령이 놀란 눈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대단하군. 설마 이 정도로 성취를 이루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사제, 혹시 무공 쪽으로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 아닌가? 고작 며칠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르다니 믿을 수가 없군."
"과찬이십니다."
무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자 금령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 아니야. 앞으로는 나도 쉽지 않겠어. 하지만 혈왕에게는 아직도 모자란다. 더 열심히 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무영의 진지한 대답에 금령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몇 마디로 이렇게 성장해 버렸다. 앞으로 어떤 경지에 발을 들여놓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기대하지."
금령은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무영은 그렇게 돌아가는 금령의 등 뒤로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 했다.
금령이 연무장에서 나가자, 무영은 다시 호흡을 고른 후, 수련을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한 일격을 완성시키겠다는 결심이 눈에 가득했다.
무영이 뇌룡장에 돌아온 이후부터 뇌룡장의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다. 활기가 장원에 가득했고,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소명학과 표중산은 무영이 돌아오자마자 소소의 문제를 마무리했다. 소소와 금룡상단을 뇌룡장으로 흡수한 후, 그들을 금룡대로 만들었다. 금룡대의 대주는 당연히 소소가 맡았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무영이 훨씬 일찍 돌아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이 급물살을 탄 것처럼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표중산은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채금상단과의 일을 계속 고민했다.
정협맹이 보유한 사업체를 모조리 인수한다면 결국 무한의 상권을 몽땅 장악하게 된다. 그것은 정말로 굉장한 힘이 될 것이다.
'정협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정협맹이 만일 그 사업체들을 모조리 팔아치운다면 당장에는 숨통이 트이고 막대한 돈을 굴릴 수 있겠지만, 결국은 이곳의 기반을 송두리째 들어 바치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한을 떠날 수밖에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정협맹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 .아니면 흑사맹을 물리치고 흑사맹이 있는 장사를 장악하든지 말이다.
표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정협맹과 흑사맹의 싸움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무한을 포기할 리는 없었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표중산은 문득 채금상단이 어떤 곳인지 떠올렸다.
채금상단은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모인 상단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팔기도 하는 자들이지. 그리고......'
표중산이 눈을 빛냈다. 채금상단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 한가지가 또 떠올랐다. 그것은 사기였다.
"사기일 가능성이 있군."
표중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 생각할 가치가 없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이 나았다. 지금 정협맹의 사업체들을 무리해서 끌어안다가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강옥조는 정확히 약속한 날, 정해진 시각에 도착했다. 그녀는 뇌룡장의 접객당에 앉아서 표중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녀가 제시한 금액은 시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정도 헐값에 사업체들을 사들인다면 정말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기회를 버린다면 그건 바보였다.
강옥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접객당 문이 열렸다. 표중산이 도착한 것이다. 강옥조는 표중산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오셨군요. 기다렸답니다."
그녀는 정이 듬뿍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표중산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걸어가 강옥조 앞에 앉았다.
"생각은 충분히 해보셨나요?"
표중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소."
표중산의 말에 강옥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설마 농담은 아니시겠지요?"
"내가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오?"
"그럼 대체 왜 거절하는지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 건가요?"
표중산은 강옥조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강옥조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아무튼 난 이미 그렇게 결정을 내렸소.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오."
표중산의 축객령에 강옥조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표중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접갱당에서 나가버렸다.
강옥조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지?'
강옥조는 끊임없이 속으로 그 말을 중울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뇌룡장에서 나와 자신의 비밀스런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힘을 한 번 더 빌려야 하나? 한데 과연 힘을 빌려줄까? 나에게?"
멍하던 강옥조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먹음직스런 미끼가 있었다.
그녀는 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정협맹으로부터 받은 위임장이었다. 정협맹의 사업체를 관리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걸 꼭 뇌룡장에 팔아야 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강옥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보는 사람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만 섬뜩한 미소였다.
첫댓글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즐독...감사...꾸벅
재밌어요^^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