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市는 마쓰모토가와(松本川)와 하시모토가와(橋本川)에 둘러싸인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사진 상단 돌출된 돌출부에 조슈번주의 성터가 있다. |
아베 신조의 조부 安倍寬의 정치노선
8월31일 오전 8시16분 시모노세키驛에서 山陰本線(산음본선) 기차를 타고 하기市를 향해 출발했다. 거리는 105.3km에 불과한데 소요시간이 무려 3시간31분이 걸린다고 한다. 경유하는 모든 역에서 정차할 뿐만 아니라 코구고驛과 나가도(長門)市驛에서 기차를 바꿔 타야 하기 때문이다.
기차는 서쪽의 響灘(향탄·히비나다)을 끼고 북상한다. 響灘이라면 「울부짖는 거친 바다」라는 뜻이다. 27km쯤 달려 코구고驛에 하차했다. 이 역에서 21분을 기다려 다른 기차에 환승한 후 50여km를 달려 「나가도 市驛」에 내렸다. 나가도市역에서 무려 43분간 기다려야 하기行 기차를 탈 수 있다.
驛舍 바깥으로 나가 나가도市의 평범한 역전 동네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가도市는 일본 수상 아베 신조의 고향이다. 이력서上 아베 신조의 본적지는 「大津郡 日置村」으로 되어 있다. 大津郡은 현재의 나가도市다. 그렇다면 이제 신조의 뿌리를 살펴볼 차례다.
신조의 아버지 신타로(晉太郞)의 비서를 지냈던 屋田齊씨에 의하면, 신조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 DNA를 계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祖父 아베 칸(安倍寬)의 정치 DNA도 계승하고 있다(大木英治 著 「安倍家-3代 아베 신조」에서).
칸은 1921년 東京帝大를 졸업하고 자영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아베家는 素封家(소봉가: 벼슬은 없으나 재산가)였다. 원래 大庄屋(대장옥: 창고업)과 술·醬油(장유)의 양조업을 겸했다. 논밭 18정보와 산림 100여 정보도 보유했다. 하지만 칸의 사업자금을 염출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칸은 그의 처가를 찾아가 사업자금을 확보했다. 그의 처 시즈코(靜子)는 하기 출신의 육군대장 오시마(大島義昌)의 외손녀이다. 칸은 東京으로 올라가 긴자(銀座)에다 三平商會를 열었다. 업종은 外製 자전거의 수입·판매였다. 요즘의 고급 외제 승용차 수입·판매업에 상당한 것이다.
값비싼 외제 자전거는 잘 팔리지 않았다. 경영은 금세 악화되었다. 칸은 또다시 처가인 오시마家에다 사업자금을 차용했다. 칸은 차금을 갚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1921년 東京대지진 이후의 불경기로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얼마 후 시즈코의 친정인 오시마家에서 차금을 갚으라는 연락이 왔다. 이것이 뜻밖에 파문을 일으켰다. 早失父母(조실부모)한 칸을 양육했던 伯母(백모) 「요시」가 발끈한 것이다.
『아베家의 사람이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남편의 일을 의심하는 집안의 딸은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백모 「요시」는 시즈코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그때 시즈코는 아들 신타로를 회임하고 있었다. 신타로는 1924년 4월 東京 신주쿠(新宿) 日赤병원에서 태어났다. 백모 요시는 上京해 병원에서 신타로를 품에 안고 日置村으로 데려갔다. 시즈코는 이혼을 당한 후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 후 시즈코는 금융인인 니시무라 겐조(西村謙三)와 재혼해 아들 마사오(正雄)를 낳았다. 니시무라 마사오는 일본흥업은행 頭取(두취: 행장)를 역임한 재계의 거물로서, 2006 8월1일 심부전증으로 급서했다(향년 73세).
아베家 3代의 직업은 政治
아베 칸-신타로 父子는 日置村에서 살았다. 칸은 1919년 日置村의 촌장이 되었다. 「農村塾(농촌숙)」을 개설해 마을 청년들을 가르쳐 「지금의 쇼인(松陰)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35년에는 야마구치 縣의회의원으로, 2년 후인 1937년에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중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1년 12월8일, 일본 해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1942년 4월, 소위 「翼贊(익찬)선거」가 시행되었다.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大政翼贊會(대정익찬회)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칸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군벌에 대한 비판의 표현으로서 무소속·非추천으로 입후보해 중의원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45년 8월15일, 日帝가 패망했다. 군벌주의를 비판해 온 아베 칸으로선 得意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日本進步黨을 결성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아베 칸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아베 신타로는 고향 日置村의 이시하라(石原)소학교-야마구치中-오카야마(岡山) 소재 6高를 거쳐 東京帝大에 합격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인 1944년 10월, 신타로는 학도동원으로 해군 사가(滋賀)항공대(제15기 예비학생)에 입대했다. 少尉(소위) 후보생 신타로는 특공대에 지원했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신타로는 항복을 고하는 이른바 「천황의 玉音방송」을 나고야(名古屋)의 東海해군항공대 明治基地에서 청취했다. 신타로는 日置村으로 귀향했다. 1946년의 戰後 첫 총선거에 출마한 부친 칸의 선거운동을 하고, 東京大 법학부에 복학했다.
1949년 4월, 신타로는 마이니치(每日)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1년 후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기시 노부스케의 장녀 요우코(洋子)를 만났다. 신타로와 요우코는 1951년 5월 결혼했다. 1년 후인 1952년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는 「공직추방」에서 풀려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요우코와 신타로는 기시의 선거구인 야마구치縣의 이와쿠니(岩國)市로 내려가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기시는 1953년 중의원 총선에서 당선했다. 1955년 「보수합동」의 성립으로 自民黨이 결성되었다. 하토야마(鳩山) 수상의 퇴진으로 自民黨 총재 선출 전당대회가 열렸다.
총재경선에서 기시는 불과 7표 차로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에게 석패했다. 신타로는 마이니치신문사에서 퇴사해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기시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시바시 수상은 지병으로 재임 겨우 65일 만에 쓰러졌다. 1957년 2월25일 기시 내각이 성립되었다. 기시 총리는 1958년 정초부터 정권 안정을 위한 「解散(해산)총선거)」를 기도했다. 그해 5·22총선에서 신타로는 自民黨 공천으로 시모노세키 선거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신타로와 요우코의 차남 신조는 1954년 東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시 수상의 사택에 자주 놀러 다녔다.
기시 노부스케는 기시家를 이을 親손자를 두지 못했다. 1959년 4월 아베 신타로의 셋째 아들 노부오(信夫)가 태어났다. 노부오는 노부스케의 소원에 따라 기시家의 양자로 들어갔다. 훗날의 얘기지만 노부오는 2004년 참의원 선거 自民黨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아베 신조(위 맨왼쪽)에게「정치 DNA」를 물려준 3人. 오른쪽부터 신조의 조부 安倍寬, 외조부 岸信介, 부친 安倍晉太郞. 아래쪽 사진은「뉴스위크」誌 표지인물로 등장했던 아베 신조. 신조의 지구당 사무실 벽에 붙어 있다. |
아베 신조의 교육적 배경과 政治入門
아베 신조는 1961년 4월 私立 세이케이(成蹊·성혜)소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신조는 세이케이中-세이케이高를 거쳐 역시 同系인 세이케이大에 진학했다. 당시 세이케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소학교 A급, 중학교 B급, 고교 C급, 대학 B급이었다.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은 부지에 있는 세이케이 학원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살리고, 인격을 연마시킨다는 교육방침을 내걸고 있다. 체험 및 실적을 중시하는 校風(교풍)이다.
고교 시절 여름방학 때 신조는 친구 6명과 함께 야마구치縣을 여행했다. 신조 일행은 야마구치의 명소와 공장을 둘러보았지만, 친구들은 큰 감명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자 신조는 『좋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墓다』라며 친구들을 이끌고 자동차 편으로 시모노세키市 요시다町에 위치한 淸水山 東行庵을 향해 달렸다고 한다.
1977년 세이케이大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신조는 어학연수를 위해 도미해 캘리포니아大 헤이워드校와 롱비치校에 다녔다. 합계 9개월의 어학연수 후 신조는 南캘리포니아大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애당초 학위를 취득할 계획은 아니었다고 한다.
신조는 1979년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신조는 부친 신타로의 권유와 추천에 의해 고베(神戶)제강 산하 조후(長府)제조소에 입사했다.
신조는 아버지 신타로가 왜 시모노세키市 조후에 소재한 고베철강 長府제조소에 입사시켰는지, 그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선거에 플러스가 되고, 훗날 신조가 부친의 뒤를 이을 때 고베製鋼 사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布石이었다.
1982년 11월27일, 아베 신타로는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그 무렵엔 아베家에서는 이미 신조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신조는 그해 12월 외무대신 비서관이 되었다. 그것은 신조의 정계 진출을 위해 마련된 디딤돌이었다.
1987년, 「포스트 나카소네」를 놓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와 아베 신조가 경쟁했다. 이때 총재 경합자 3인을 만나 擇一의 전권을 위임받은 나카소네 수상은 다케시타를 지명했다. 이로써 다케시타 내각 탄생하게 되었다. 신타로는 黨3役 인사에서 간사장에 취임했고, 신조는 간사장 비서가 되었다. 아베 신타로는 1991년 5월 정차자금 스캔들인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궁지로 몰린 가운데 肝(간)부전증으로 사망했다(향년 67세).
부친의 선거구를 물려받은 아베 신조는 1993년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빠른 속도로 출세했다. 2000년 7월, 모리 요시로(森喜郞)내각의 관방 副장관에 취임, 2002년 9월에는 日·北 정상회담을 위해 고이즈미 수상을 수행해 평양에 들어가 치밀한 사전준비와 임기응변으로 金正日로부터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사과를 받고 납북자를 일본으로 귀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후 아베 신조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2003년, 自民黨은 다음해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 신조를 간사장으로 내세웠다. 2005년 10월에는 제3차 고이즈미(小泉)내각의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지난 9월1일, 아베 신조는 자민당 총재선거에 후보로 공식출마선언을 했다. 그 전날인 8월31일 현재의 여론조사에서 아베 신조는 50% 안팎의 지지율을 얻어 경쟁 후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슈 남자는 강하다』
安倍晉太郞(오른쪽) 외무대신 비서관 시절의 晉三. |
―아베 신조를 지지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왜, 아베 신조씨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일본을 자존심 있는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를 포함해 8명의 수상을 배출하는 縣입니다.(공동 2위는 東京都와 이와테(岩手)현의 4명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슈(야마구치의 옛 이름) 남자는 원래 강합니다』
기다리는 마쓰다(益田: 시마네縣 소재)행 기차가 들어왔다. 이 기차를 타고 가다 중도인 東하기驛에서 내리면 된다. 28km를 36분 만에 달려 다섯 번째 역인 東하기에서 내렸다. 조그마한 역사에는 「잘 오셨습니다, 明治維新의 고향 하기(萩)」라 쓰인 홍보간판이 큼직하게 붙어 있다. 역전의 플라자 빌딩 1층에 소재한 관광안내소에 들러 유적지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을 얻었다.
아베 신조와 부인 아키에. |
하기市는 마쓰모토가와(松本川)와 하시모토가와(橋本川)에 둘러싸인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요시다 쇼인이 태어난 집과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松本川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택시를 타면 松下村塾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기서 조슈번의 뿌리와 역사를 조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조슈번의 번주는 모리家이다. 戰國시대 초기에 毛利元就(모리 모토나리)란 무장이 戰國大名(전국대명: 센고쿠다이묘)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戰國大名은 자신의 능력으로 大名(다이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을 의미한다. 모토나리는 中國지방(히로시마 일대)로부터 北규슈에 걸친 지역을 세력범위로 삼은 守護大名 大內(오우치)家의 部將이었다. 守護大名은 막부가 임명한 大名이다.
1551년 오우치家의 重臣 스에 하루다카(陶晴賢)가 主君 오우치 요시다카(大內義隆)를 쳐서 멸망시키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모토나리는 1555년 10월 安藝의 이츠쿠시마(嚴島) 전투에서 하루다카를 멸망시키고, 戰國大名으로 대두했다.
조슈번이 도쿠가와 幕府를 증오한 까닭
모리家가 200여 년간 조슈번 36만 石을 지배했던 하기城 터.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시대에 모리家는 모토나리의 손자 테루모토(輝元)가 藩主였다. 테루모토의 두 숙부인 키쓰가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名將으로서 「毛利의 兩川」이라고 불렸다.
처음에 모리家는 오다 노부나가를 적대시했지만, 오다의 死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화해해 히데요시 정권 아래 安藝·備後·周防·長門·出雲·石見·오키 등 7개國과 伯耆(호키)의 3개 郡 및 備中의 절반 등 120石을 지배하는 西일본 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처음에 모리家는 오다 노부나가를 적대시했지만, 오다의 死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화해해 히데요시 정권 아래 安藝·備後·周防·長門·出雲·石見·오키 등 7개國과 伯耆(호키)의 3개 郡 및 備中의 절반 등 120石을 지배하는 西일본 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1592년 4월, 히데요시가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할 때 모리 테루모토는 제3군의 대장으로서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조슈번은 최대 병력을 파견한 藩이었다. 특히 모리 테루모토의 叔父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1593년 1월 벽제관 전투에서 李如松이 거느린 明지원군을 대파했다.
히데요시 시대에 잘 나가던 모리家는 히데요시 死後에는 기세가 꺾였다. 일본사상 최대 규모였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테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적인 西軍의 총대장이 되었기 때문에 패전 후 이에야스로부터 엄청난 불이익 처분을 받았다. 모리家의 영지는「7개국+α」로부터 「防長 2개국」으로, 石高는 120만 석으로부터 36만 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조슈번 開府(1604년) 400주년을 맞았던 2004년의 하기市 모습. 숲으로 둘러싸인 사진 상단 돌출부에 조슈 번주의 居城 터가 있다. |
녹고 100석이었던 家臣은 이로부터 20석으로 살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를 증오하는 藩風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傳說이긴 하지만, 조슈번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일화이다.
조슈의 번주와 그 家臣들은 1월1일 新正 의식 때 반드시 家臣 대표와 번주 사이에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
『금년에는 도쿠가와를 치실 것입니까?』
『아니, 금년엔 보류해 두지』
「언젠가는 친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는 主從(주종) 간의 수작이다. 이럴 만큼 모리家에 있어 反도쿠가와 감정은 뿌리가 깊었다. 그러나 조슈번의 反幕은 막부의 힘이 강할 때는 표면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幕末의 변혁기에 접어들자 조슈의 反幕 감정이 화산의 마그마처럼 폭발했던 것이다.
필자가 대절한 택시는 「幕末志士의 스승」이란 요시다 쇼인이 설립했던 松下村塾 앞에 정차했다. 그렇다면 도막의 이론을 정립한 쇼인의 출신성분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의 到幕 논리
吉田松陰이 제자들을 가르쳤던「松下村塾」. |
1849년, 20세 때 藩命에 의해 조슈藩領의 해안방어의 실상을 조사하고부터 쇼인은 조슈번이 기대하는 인재가 되었다. 쇼인의 특징 중 하나는 적극적으로 선배 학자들을 만나러 가서 견문을 넓히는 점이었다. 학자들의 저서가 요즘처럼 쉽게 입수되지 않았고, 더구나 藩 밖으로 나가기가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의 지식욕은 대단했다. 점차 그는 조슈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둬 둘 수 없는 사람으로 변모해 갔다. 쇼인은 1851년 4월부터 6개월간 에도에서 유학했지만, 같은해 12월에는 번의 허가도 없이 도후쿠(東北) 지방을 여행했다.
東北 나들이는 단순한 병학자로부터 尊王攘夷 사상가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脫藩, 즉 망명행위였다. 쇼인은 사무라이籍(적)이 삭제되어 祿(녹)이 몰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藩主 모리 다카치카는 쇼인의 직선적인 성격과 배움에의 열정을 기특하게 보았다. 1853년 1월, 쇼인은 10년간 전국 遊歷(유력)을 허가받고 재차 에도로 올라갔다. 그 5개월 후에 발생한 사건이 미국의 東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의 우라가(浦賀) 내항이었다.
쇼인은 「黑船(흑선)」을 관찰하기 위해 우라가로 달려갔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6월12일, 페리는 지참했던 미국 대통령의 국서에 대한 회답을 다음해에 받겠다고 막부에 통고한 후 오카나와로 출항해 버렸던 것이다.
우라가로 달려온 쇼인은 충격을 받았다. 막부의 경비병이 사기가 낮은 弱兵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쇼인은 내년에 페리가 다시 오면 막부는 궤멸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쇼인은 절박한 심경으로 「將及私言(장급사언)」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써서 藩主 다카치카에게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인재등용, 병력충실 등의 구체적 대책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 중 다음 구절은 그의 존왕양이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天下는 天朝의 天下이다. 天下는 天下의 天下이지 막부의 私有가 아니다」
이것은 幕藩체제의 전면적 부정이었다. 조슈번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독자적 대책을 수립해 그것에 의해 日本이라는 국가를 지도하는 입장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外夷를 제압하려면 먼저 外夷를 알아야 한다』
「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그러나 조슈 藩廳은 이 의견을 채용하지 않았다. 쇼인은 크게 실망했다. 페리함대는 1854년 1월 재차 에도灣(지금의 東京灣)의 시모다(下田) 앞바다에 침입해 대포를 펑펑 쏘면서 막부의 「회답」을 요구했다. 이른바 砲艦外交(포함외교)였다. 그해 3월, 쇼인은 동지 가네코(金子重之輔)와 함께 소형 나룻배를 저어 가 페리 함대의 미시시피號 갑판에 올라갔다.
『무릇 外夷(외이)를 제압하려는 者는 먼저 夷情(이정)을 살펴야 한다』라는 말을 신봉한 그는 적을 알기 위해 해외로 밀항하려고 작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쇼인은 현실을 몰랐다.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하는 페리함대가 일본정부의 허가 없이 떠돌이 사무라이를 승선시킬 리 만무했다. 이런 면으로 보면 쇼인은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로맨티스트였다.
미국 함대에서 쫓겨나 美 해군 보트를 타고 시모다로 돌아온 쇼인과 가네코는 막부의 官憲에 자수했다. 4월15일 에도의 傳馬町 감옥에 수감된 둘의 신병은 그 후(10월24일) 조슈번에 인계되었다.
해가 바뀌어 1855년 1월, 가네코는 결핵을 앓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쇼인은 그해 12월 그의 본가인 스기家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조치되었다.
幕藩체제에 회의적이었던 쇼인은 막부는 쇄국을 관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講孟餘話(강맹여화)」라는 저술을 통해 막부의 무능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쇼군의 정식명칭)이라는 것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이기 때문에 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즉각 폐지돼야 한다」●(계속)
『무릇 外夷(외이)를 제압하려는 者는 먼저 夷情(이정)을 살펴야 한다』라는 말을 신봉한 그는 적을 알기 위해 해외로 밀항하려고 작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쇼인은 현실을 몰랐다.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하는 페리함대가 일본정부의 허가 없이 떠돌이 사무라이를 승선시킬 리 만무했다. 이런 면으로 보면 쇼인은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로맨티스트였다.
미국 함대에서 쫓겨나 美 해군 보트를 타고 시모다로 돌아온 쇼인과 가네코는 막부의 官憲에 자수했다. 4월15일 에도의 傳馬町 감옥에 수감된 둘의 신병은 그 후(10월24일) 조슈번에 인계되었다.
해가 바뀌어 1855년 1월, 가네코는 결핵을 앓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쇼인은 그해 12월 그의 본가인 스기家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조치되었다.
幕藩체제에 회의적이었던 쇼인은 막부는 쇄국을 관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講孟餘話(강맹여화)」라는 저술을 통해 막부의 무능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쇼군의 정식명칭)이라는 것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이기 때문에 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즉각 폐지돼야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