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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45) /
"배신자 가롯 유다에게 주신 회개의 기회!”
☞ 말 씀 : 요 한 복 음 13장 18절 - 30절 (신약성경 p.171)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아멘!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활짝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습니다. 개구리가 독수리에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말합니다.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을 꼭대기를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 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절벽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선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어떤 분의 간증 같은 이야기입니다.
학창시절에 니코스카찬차스키의 책 “최후의 유혹” 을 각색한 연극 마라나타에 출연했는데,
그가 맡은 배역이 가롯 유다였는데, 그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고 정말 노력했답니다.
그리고 제법 좋은 연기를 보여 주위의 칭찬을 들었답니다. 그러나 그 가롯 유다의 역은,
멋지게 소화를 하면 할수록 예수님과는 멀어지고 관중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배역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서 이런 배역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멋지게 소화하면 할수록 지옥에는 가까워지고, 예수님으로부터는 아주 멀어지는,
멀어지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비극적인 삶이겠습니까?
유명한 소설가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롯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 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롯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기에 성자가 될,
기회를 예수님을 베신하므로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2천년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롯 유다라 지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가롯 유다와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멘” 합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모세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와,
“우리 모두가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아멘!”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가 말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든 나 자신도 가롯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가롯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다” 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영예로운 몫을 차지하였던,
유다 지파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찬양”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대에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 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그 훨씬 이상으로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이 만큼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다라는 이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엔 유다라는 이름이 아주 흔했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타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직분이었던, 사도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삼년 동안이나 같이 살며, 함께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좋은 이름, 좋은 조건, 내세울게 없습니다.
내가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많은 곳이 부서져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닙니다. 여러 날이 지나 음식과 물이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가 고픕니다. 그 중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배 한척이 있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를 좀 살려주세요.
그리고 우리에게 물 한통만 건네주세요.“ 그때 그 배에서 말합니다. ”배 밑에 있는 물을,
떠서 마시세요. 여러분들은 지금 강 하구에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를 찾아 헤매다가,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바다에 떠 있는 줄 알고, 저들은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고,
목말라 물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물위에 떠 있으면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바다에 떠 있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로운 공동체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구원의 영광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인정하십니까?
지금 우리는 구원의 바다에 떠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 주님을 영접했다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바다에 떠 있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구원을 못받은 사람입니다.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가롯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을 구원자 - 메시야로 믿고 따랐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의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말하는 사람들 중에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신인데,
자기만 갈릴리 출신이 아닌 가롯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에,
다른 제자들을 시기 질투하게 되었고, 마침내 스승까지 팔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극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유다 민족을 독립시킬 아무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단 생각에,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이 신비한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 마음에 있는,
애국심이 발동되어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시던 그 예수님께서 너무 허망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설득력 있는 또 다른 한 주장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영특한 사람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습니다.
예수가 죽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협적이고,
외적인 문제가 전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불쑥불쑥 나타나더랍니다.
그런가 하면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 로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에게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밖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입니다.
어떤 이는 “가롯 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장로교 신학 가운데 귀한 진리들이 많습니다만 "성도의 견인" 이라는 진리가 있습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가면, 이 자녀 관계는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한 번씩 타락할 수도 있고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다시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면서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생활 속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신앙과 구원받음이 담겨져 있는가?”
이 땅에 교회를 떠나고만 “가나안 교인” - “교회 안나가 교인” 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예배에 참석했다면, 출발점부터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이며.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 니라."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못한 비극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는 다만 당시 예수님 공동체라는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전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전혀 다릅니다. 지금 우리교회라는 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예수님의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귀한 섬김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섬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고,
잔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씻는다." 는 단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 영혼이 적셔져서 우리 죄가 씻김 받는 사건,
흘리신 물과 피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거듭나고 중생을 얻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려 주님 전에 나와서 예수님의 보혈을 거절하면, 예수님께서,
날 찾아온 구원과 중생의 사건을 내가 거절하면, 예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롯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그 내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깨끗하게 소제해 두었어요. 품위가 있어요.
그러나 주인이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예배드려요. 직분도 있어요. 착하다고도 얘기해요.
때로는 사람들에게 칭찬도 들어요.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내 마음 중심 자리에 예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들은, 사탄이 침투하기가 딱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이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냥 지나치는 생각 하나,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생각 하나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찾아옵니다.
이 생각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을,
물리쳐 줄 예수님의 영이 안 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탄의 공격 앞에 자기 마음의 문을,
계속 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팔 생각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에 파는 행동으로 옮겨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감,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마음에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그리고 성령님은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계속,
불어 넣어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내 안에 들어 옵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십니까? 우리는 이 생각관리에 실패하기 시작할 때,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 준다는 사실을 가롯 유다를 통해서 교훈받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첫째, 그는 아예 불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지배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탄을 향하여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13장 2절의 말씀은 오늘 본문 27절 말씀으로 정확하게 연결이 됩니다.
27절입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가롯 유다에게 떼어 주셨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못된 일 가운데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을 향하여 내 심령이, 내 영혼이 끌려가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절대 안 됩니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해 지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 라는 생각 정도로 사탄은 생각만 집어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이 사탄의 생각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생각만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통째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집어넣고, 나중에는 사탄이 들어갑니다. 아예 그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가롯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 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가롯 유다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여러분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서로를 의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보기 흉한 광경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은 아닙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주님께 매달려야 옳았습니다.
정히 자신감이 있었다면 그 놈이 누구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훈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그 말씀들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고 하는 데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가롯 유다의 비극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줄 때,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쳐다만 봤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내가 영적인 소경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안보입니다. 영안을 열어 주세요.”
엎드려 기도했어야 옳았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 내 영혼을 썩어 문들어지게 만드는,
내 심령 속에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병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했어야 옳았습니다.
“주님! 내 영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고백해야만 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무엇을 깰까요. 주님께 묻고 그것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진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여! 내 손과 발목에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어야만 합니다.
한국교회에 전해오는 고전적인 예화가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며느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믿었고, 시어머니는 뒤늦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세례공부를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세요.“ 라고 가르쳤습니다. 문답하는 날, 목사님께서,
이것저것 묻는 가운데 드디어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그거야. 예수님께서 우리 며느리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했답니다.
이 설교는 우리 며느리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이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모든 말씀들이,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그 귀가 성령으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복 받은 귀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부르는 찬송가 가사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 음성으로 들으셔야 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그 말씀이, 내게도 들려지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목사인 내가 지금 여기 설교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나 설교하고 나 자신에게 들려지는,
설교가 되지 못한다면, 목사인 나는 지금 이 설교시간에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대원들이 은혜를 끼치도록 멋있게 노래를 해야지 하면,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가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을 때, 하늘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 삼았을까요?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느냐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 안에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 안에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을 때에,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우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알이 차지 못한 껍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이 시간,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지금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여러분을 지배하여 영원히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리기 전,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엄숙한 하나님 말씀 앞에 가면을 벗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 집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나를 바로 발견합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아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인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롯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이라도 마음속에 예수님이 아니 계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인할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들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만지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 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누가 가롯 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수많은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가롯 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다!”
오늘 본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맺어 보십시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인 30절입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오늘 본문 30절 말씀을 여러분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갔던 밤의 길,
멸망의 길, 실패의 길, 영원한, 영원한 지옥의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 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30절 말씀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이 달라지고, 마지막 영원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던 모든 의지를 다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진실하게 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마음을 활짝 열어 제키고,
예수님 앞에 드러낼 때, 예수님이 아니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주권 앞에,
여러분들이 항복한 경험이 없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내 안에 지금 오시옵소서.” 입으로 아멘하며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가 다스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