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3월 30일(토) / 고난주간 특별새벽예배 설교 6 +
♬ 새벽기도회를 여는 묵상 찬양 (05:00 - 05:30)
●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 / 다 함 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다함께 찬양 / 305장 “예수 나를 위하여!”
♥ 말씀선포 :
+ 제 목 : “십자가의 은혜(6) : 날마다 죽는 십자가!”
+ 본 문 : 고린도전서 15장 29절 - 31절 (신약성경 283쪽)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멘!
오늘 고난주간 마지막 날을 맞이하면서, 주님 때문에 죽고 주님 때문에 살게 된,
사도 바울의 고백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신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세 단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나는 - 날마다 - 죽노라.”
첫째는 '나' 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나’ 는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없이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세상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있기 때문에 너를 볼 수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라는 사람은 자기생각과 자기지식과 자기경험과 자기가 자라나온 환경과,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내가 남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유일한 존재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알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기 시작할 때부터 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를 찾습니다.
인간상실, 자아 상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나를 중심으로 향하여 가려고 하는 이기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은 떠난 결과로 가져온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결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차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이지 않으세요? 경이롭지 않으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타나기 위해서,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처럼 '나' 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신비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라는 오늘, 또 오늘, 또 오늘이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오늘 더 많은 돈을 벌기를 기대하며, 오늘 더 높아지고, 더욱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대의 결과는 날마다 전쟁하는 삶과 같습니다. 아침 먹을 틈도 얻지 못하여,
출근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아침입니다.
밤늦게 들어와서는 가족과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오늘도 끝나고 맙니다.
‘오늘’ 이라고 주어진 날이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날, 기쁘고 즐거운 희망에 찬 날이,
되지 못하고 피곤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이 계속 되어 ‘날마다’ 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대와는 전혀 다른, 힘든 나날의 삶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
오늘, 또 오늘, 또 오늘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찬송합니다. 시편 68편 19절 말씀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멘!
주님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오늘, 또 오늘, 또 오늘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라는 오늘, 또 오늘, 또 오늘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죽노라.' 라는 고백을 자랑스럽게 선포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죽는다.’ 는 말을 자랑하였습니다.
이 죽음은 이기적인 나의 욕망의 죽음이요. 전쟁과 같은 오늘이라는 날마다의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다시 살기 위해서,
새롭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10장 17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뿐만 아닙니다. “죽노라.”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사노라.” 하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5절 말씀입니다. “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아멘! -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간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도 바울은 자기도 날마다 다시 사는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바울처럼 자랑해보세요.
‘나 0 0 0 는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죽노라.“ ‘나 0 0 0 는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고백하는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는 영광과 축복이,
날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때문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다같이 “♪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라는 찬양으로 고백하겠습니다.
♪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아멘!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 강복기도로 마무리.
주여! 세 번 크게 부르고 각자 기도하다 돌아가십시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고 결단하며 기도합시다.
그래서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