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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스크랩 바라문교와 불교의 출현 및 사상적 배경
햇살 추천 0 조회 85 12.06.07 22:3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바라문교와 불교의 출현 및 사상적 배경

 

 

바라문교는 인도에서 불교 등 신흥종교 및 사상들이 형성되기 전,  기원전 1,500년경 코카사스 북쪽에 거주해 있던 인도-아리아인들(줄여 아리아인들이라 함.)이 인더스강 유역의 펀잡지방으로 대이동 정착하여 <베다>성전을 집대성하면서 형성된 종교입니다.

 

바라문교는 다신교여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합니다. 주로 자연계의 구성요소, 여러 현상과 배후에서 존재하는 지배력을 신격화하여 숭배하였습니다. 하늘, 땅, 허공 삼계(三界)에 33신(神)이 있다고 설정하였습니다. <베다>는 바로 이 신들에 대한 찬가, 기도 등을 만트라를 집대성한 것입니다.

 

바라문교의 종교의식은 제단을 설치하고 공물을 바치고 33신 중 하나의 신을 청하여 제를 올리는 형식입니다. 바라문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 의존적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찬탄과 공물을 바치면 신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요청을 받아 준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한편 신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벌을 주고 참회하면 사면을 해주는 관대함과 은총을 베푸는 존재입니다. 신들 사이에는 상하 구별이 없고, 최고의 신도 없습니다. 이러한 바라문교 신들의 평등적인 성격은 당시 16대국으로 독립되었던 아리아인들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4개의 베다

 

인도-아리안 족의 조상들은 B.C. 3000년경 카스피아 해(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다가 B.C. 2000년경부터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무리는 서방으로 향해 오늘날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동방으로 향해 서(西) 투르키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수세기 거주했던 듯합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어와 산스크리트어의 모어(母語)인 인도-이란어를 사용했던 페르시아인과 인도-아리안인의 조상입니다. 그 후 이들 중 한 무리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이란 땅에 들어가 아리안계 이란인의 선조가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 B.C. 1500년경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의 펀잡(Punjab, 五河) 지방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바로 베다 문화의 주역인 인도-아리안족입니다.

 

초기 인도-아리안 족의 종교는 하늘, 태양, 바람, 폭풍, 비, 불, 번개 등 자연현상이 갖는 힘을 상징하는 자연신들(天, deva)에게 제화(祭火, 아그니)를 피우고 우유,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찬가(리트)를 부르고, 신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드리거나 신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은혜를 빌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 역시 무병장수, 가축의 번식, 자손의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 등 매우 현실적이고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찬가들은 기원전 1200∼1000년 사이에 점차로 『리그 베다』의 형태로 편집되었습니다. 1,017개의 찬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원전 1000~800년 사이에『사마 베다』『야주르 베다』『아타르바 베다』등 3개의 베다가 더 편찬되었습니다.

 

『사마 베다』란,『리그 베다』가운데서 선정된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써 신을 찬미하는 가영승(歌詠僧)이 있으며, 그 노래의 모음들을 말합니다.

 

 『야주르 베다』란,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의 절차와 형식이 점차 복잡해졌고, 제사의 의미나 성격도 크게 달라져 갔다. 제사가 복잡해짐에 따라 여러 명의 사제가 역할을 분담했다. 『리그 베다』의 찬가는 신을 제단에 초청하는 권청승(勸請僧)에게 속했고, 제구를 다루고 제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행제승(行祭僧)이 제행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사(祭詞)를 읊었으며, 그 제사를 모은 것이 <야주르베다>가 되었습니다.

 

 『아타르바 베다』란, 차츰 민간 사이에서 행해졌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여러 가지 주문들을 모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제사를 총감독하는 '브라흐마나'승(僧)이 주관했습니다.

 

* 4베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아쥬르베다, 아타르바베다

* 베다를 구성하는 4요소: 본집,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 (각각은 독립된 문헌)


이상의 4베다는 제사행위에 직접 사용되는 찬가, 노래, 제문, 주문들의 ‘집록’이라는 의미로 상히타(본집: 本集, sam.hita)라고 합니다.

 

'브라흐마나'는 B.C. 1500년경부터 수세기간 인도 서북부에 머무르면서 『리그 베다』을 편집했던 아리안족이 B.C. 1000년경엔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델리 부근 즉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평원으로 내려온 후에 제작된 문헌입니다. 이때는 바라문(사제계급), 크샤트리아(귀족계급), 바이샤(생산자)의 세 계급과 주로 아리안에게 정복된 원주민으로 구성된 수드라(노예계급)가 첨가된 사성제(四姓制)가 확립되었고, ‘사성제’의 정점을 차지하는 바라문 사제들에 의해 제작된 제사의식에 관한 문헌이 브라흐마나입니다.

'아란야카'는 힌두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네 단계, 즉 학습기(學習期), 가장기(家長期), 삼림기(森林期), 유행기(遊行期) 가운데 삼림기에 있는 바라문들이 만든 문헌으로서, 실제의 제의 대신 제의를 상징화하고 내면화시켜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한 문헌입니다. 이것은 브라흐마나에서 우파니샤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중간단계를 점합니다.

 

2. 우파니샤드

 

베다문헌의 철학적 사유의 극치는 우파니샤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의서(奧義書)라고도 하며, 베다의 마지막 부분(anta)을 차지하며, 또 베다의 궁극적 취지라는 의미에서 ‘베단타(Vedanta)’라고도 불리는 우파니샤드는 어원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자가 스승 가까이(upa-ni) 앉음(sad)을 의미하여, 우주와 인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16세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편집되어 많은 철인(哲人)과 신비가들에 의해 형성된 이 문헌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일관된 것이 아니지만 이후의 인도 종교인  힌두교와 철학사상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약 200종에 가까운 문헌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된 사상전개의 산물이어서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고대 우파니샤드는 상고(上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경), 중고(中古, 기원전 55년부터 200년경), 중세(中世, 기원전 200년경)의 세 시기로 구분되며, 그 이후의 문헌은 신우파니샤드(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1,600까지)라고 합니다. 상고 우파니샤드는 고대 베다문화의 최고 정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철학적 통일원리의 탐구는 이미 베다의 삼히타나 브라흐마나에서도 시도되었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우주의 근원을 브라흐만(brahman, 梵)이라고 보고, 이것이 개인에게 내재한 통일의 원리인 아트만(Atman, 我)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바라문교는 이 범아일여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윤회의 삶와 해탈의 자유를 가르칩니다.

 

인도 바라문교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요청에 의하여 규정하고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의 과보를 만들고, 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윤회설이 오화이도(五火二道)입니다.

 

오화이도(五火二道)는 오화설과 이도설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사상으로 윤회와 해탈을 설명합니다.

 

오화설은 사람이 죽어 화장하면 달에가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곡식이 됩니다. 이 곡식을 섭취함으로써 남자의 육체에 들어가 정자가 되고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는 설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강우현상과 화장관습이 결합하여 연기를 타고 천계에 오른 아트만이 비가 되어 다시 지상에 내려온다는 순환의 논법에 의거해 윤회를 설명하려는 소박한 사상입니다.

 

이도설은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를 말합니다. 신도란 수행자가 오화설을 알고 산림속에서 고행하여 범계에 태어나 다시는 이 지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에 반해 조도란 제사와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오화설에 의거해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우파니샤드에 바탕하여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베단타’ 철학이며, 그중에서도 샹카라(A.D. 8세기경)의 아드와이타(不二) 베단타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문헌은 250여 종류가 있는데 비교적 고대에 속하는 우파니샤드에는 현존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14종류가 있습니다.

리그베다 소속 :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카우쉬타키 우파니샤드
삼마베다 소속 : 챤도갸 우파니샤드 

                        케나 우파니샤드
아쥬르베다 소속 : 브리하드아라니냐카 우파니샤드
                           카타 우파니샤드
                           타이티리아 우파니샤드
                           이사 우파니샤드
                           스베타스바라타 우파니샤드
                           마하나라야나 우파니샤드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아타르바베다 소속 : 문다카 우파니샤드
                              프라스나 우파니샤드
                              만두캬 우파니샤드

 

3. 베다 사상과 불교

B.C. 1500년경부터 시작된 베다 문화는 불교가 발생할 무렵인B.C. 500년경엔 이미 천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비록 불교가 베다나 바라문, 그리고 제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문화 운동이기는 하나 베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인과응보 사상이나 윤회의 관념, 그리고 무지와 고(苦), 지(知)와 해탈, 요가와 명상(선정)의 방법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형성되었고, 비록 불교적으로 재해석되었을지라도 불교 특유의 관념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규범 등을 뜻하는 다르마(dharma, 法)도 『리그 베다』에서 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통제력인 르타(r.ta, 天則)에서 발전된, 힌두와 불교가 공유하는 관념이다. 또 『리그 베다』의 신(데바)들은 범천(梵天, 브라흐마), 제석천(帝釋天, 인드라) 등으로 불교 신화 속에 흡수되었다.

베다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처럼 불교가 우파니샤드적 전통을 이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유사한 사상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적 전통과 불교는 유아적(有我的) 전통과 무아적(無我的) 전통으로 전혀 대립되는 사상이라고 하는 견해다.

앞에서 든 몇 가지 예가 시사하듯이 불교는 베다적 전통으로부터 적지 않은 덕을 입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불교를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우파니샤드의 한 갈래로 볼 수는 없다.

우선 드러나는 차이는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이라고 적극적으로 내걸고 출발하는 데 반하여 불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체험해야 할 것(自內證法)은 말을 아끼고 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無記)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영역만을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불러 그것을 5온, 12처, 18계, 12연기 등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도 비록 ‘아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는 유명한 문구가 가리키듯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를 우파니샤드적 전통의 일부로 보는 것도 극단적 견해이지만, 양자를 유아론(有我論) 대 무아론(無我論)으로 대립관계에서 해석하는 것도 극단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우선 불교에서 ‘무아’(無我, ana tman)라고 할 때 부정되는 ‘아’(我, 아트만)의 의미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전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약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적(無記的) 입장에 모순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무아’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체법인 현상적, 경험적 차원에서의 인간을 이루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 즉5온에 독립적이고 영구불변한 실재성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아집과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도에서의 무아설은 불교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의4위설이나5장설도 유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 5장설은 신체나 생기(生氣), 마음, 의식 등이 아트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덮개(藏)라고 가르침으로써 나 아닌 것과의 그릇된 동일화와 그로 인한 집착을 소멸하고자 의도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와 불교를 유아론 대 무아론으로 일반화하기 이전에 두 사상체계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의 특징은 우파니샤드의 유아론을 부정한 무아론이라기보다 무아론에 바탕하여 현상계(一切法)를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무아 → 연기 → 공 → 유식(唯識)으로 이어지는 불교적 개념들은 인도와 세계사상계에 대한 불교의 위대한 기여다.

 

4. 불교 사상의 형성과 발생 과정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여 활동했던B.C. 6세기경의 인도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와 전환의 시대였다. B.C. 1000년경 갠지스 강 상류지역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와 제식주의적 세계관에 바탕한 바라문 문화가 확립되었지만, B.C. 800년경엔 철제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갠지스 강 주변의 원시림을 개간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B.C. 6세기 무렵엔 갠지스 강의 중류, 하류 지역까지 개간되었다. B.C. 1000년 무렵엔 인도 문화의 중심이 갠지스 강 상류, 지금의 델리 부근이었다면, 불교가 발생했던B.C. 6세기경엔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인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발달한 철제 농기구와 갠지스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은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을 가능케 했고 잉여 농산물에 바탕하여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농촌 중심 사회에서 새로운 지역으로 개척해 들어가면서 원주민과의 혼혈도 빈번해졌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형성에 따라 바라문 중심의 사성계급 제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바라문의 절대적 권위, 제식만능주의, 베다의 절대적 신성성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치적으로는 종전의 촌락을 바탕으로 한 부족장 중심제에서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 혹은 공화제로 바뀌어 갔다. 라자(Raja)라고 불리는 군주들끼리의 영토와 권력 확대를 위한 싸움이 빈번해졌고 그 결과 군소의 부족들이 강대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초기불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중부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16대국 가운데서도 국력이 강했던 나라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의 네 군주국이었고, 주변의 군소 국가들은 점차로 이들에게 합병되어 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 왕국도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코살라 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 대국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당시 특히 번성했던 대도시로서 참파, 라자가하(왕사성), 사바티(사위성), 코삼비, 사케타, 바라나시의6대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종래의 바라문을 정점으로 한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식만능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농촌 중심 사회에선 브라흐마나(바라문, 사제), 크샤트리야(찰제리, 정치가, 군인), 바이샤(서민, 생산자), 수드라(노비)의 순서로 위계질서가 이루어졌으나, 새로운 시대에선 막대한 권력을 쥔 왕과 커다란 재산을 소유한 부호(長者)가 사회의 실권을 가진 가장 높은 신분으로 부상했다. 그만큼 새시대에선 바라문과 베다, 그리고 제사의 절대적 권위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전에선 종래의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가 크샤트리야, 바라문,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로 바뀌어 기술되어 있다.

이미 우파니샤드기(期)에 오면 철학적, 종교적 탐구가 바라문의 전유물이 아니고 크샤트리야나 여성들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B.C. 6세기경엔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이미 계급적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계층에서나 철학자나 구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리와 지혜는 계급을 초월한 가치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바라문이 아닌 크샤트리야 출신의 ‘고타마 사문’이 붓다(Buddha, 覺者)로서 인정받고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타(혹은 마하비라)도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제사 행위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인 브라흐만을 통제하고 획득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제사행위를 독점한 바라문만이 그 힘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신념에 대한 회의는B.C. 8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우파니샤드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으며,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그 절대적 힘과 지고의 가치인 브라흐만(梵)이 외적인 제사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실재하는 참 나(眞我), 즉 아트만에 대한 인식(智), 즉 자각에 의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베다 문화 자체에서도 낡은 가치와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B.C. 6세기경의 중부 인도는 베다 문화의 흐름에 대립되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이기도 했다. 전통과 정통적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反)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을 사문(沙門, raman.a)이라고 부른다.

불전에서도 바라문과 사문을 나란히 열거하고 있는데 당시 사문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시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진보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일상적, 세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벗어버리고 재가자들의 시여(施輿, 탁발)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논쟁하면서 돌아다니는 출가유행자(파리브라자카)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일화 가운데 마지막 성문 밖에서 목격한 광경이 바로 생사의 고(苦)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유행하는 사문이었고,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그 후 세속을 등지고 사문이 되어6년간의 탐구 끝에 붓다가 되었다.

당시의 인도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수많은 사문들에 의해 각양각색의 사상들이 주장되었다. 불전(梵網經)에서는 그것을 62견(見)으로 자이나 문헌에선 363견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내용엔 윤회와 업을 인정하는 견해, 윤회와 업을 부정하는 견해,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대한 문제, 회의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62견, 363견의 경우는 그 견해를 주장한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사문과경(沙門果經)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의 다른 여섯 사문들의 사상을 기술해 주고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며, 모두 특색 있는 주장을 표명한 자유사상가들이다. 이들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각자의 교단을 이끌었고,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에 이들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① 도덕부정론 :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 카사파는 인과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행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니고 악의 과보도 발생하지 않으며, 반대로 보시를 하고 제사드리고 감관(感關)을 제어하고 진실을 말해도 선행이 아니고, 또 선의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부정론은 그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했으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숙명론 : 아지비카(A jv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의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도, 또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며, 다만 자연의 결정과 상황과 천성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살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영혼, 득(得), 실(失), 고, 낙(樂), 생, 사의 열두 가지 요소를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영혼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원자(原子)와 같은 것이라고 본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그가 속한 교단의 명칭인 ‘아지비카’는 원래 생활법을 의미하지만 교단의 명칭으로서는 ‘생활법에 관한 규정을 엄밀히 준수하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교파에서는 ‘생계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역 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번역했다.

이 교파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서도 불교나 자이나교도와 나란히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였고,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교세를 유지했으나 그 뒤엔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③ 유물론 :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모든 것이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와 그리고 이들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오직 현세뿐이고 내세는 없으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존재론적으론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 쾌락주의인 아지타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야타(Loka yata), 혹은 차르와카(Ca rva ka)파로 불리는 이 파는 한역 불전에선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번역한다.

④ 7요소설 : 파쿠다 카차야나는 지, 수, 화, 풍의 네 요소 외에 고, 낙, 영혼을 더해7요소를 인정했으나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만들어진 것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 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⑤ 회의론 :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진리 주장을 하는 독단론에 대해 산자야는 ‘내세가 있는가?’ ‘선악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답변을 하므로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하여 잡히지 않는 설’이라고 불렸다. 불교의 62견 가운데는 네 가지 견해, 그리고 자이나교의 363견에서는 67종이 불가지론임을 미루어 당시 인식능력에 대해 회의한 사상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엔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경험의 범위를 넘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은 산자야로 대표되는 회의설에 바탕하여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⑥ 자이나교 :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다의 본명은 와르다마나이고, 깨달음을 얻은 후엔 마하비라(큰 영웅) 혹은 지나(승리자)라고 존칭되었다. 그의 생애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대에 밧지 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고,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그 후30년간 교화활동을 펴다가 72세에 입적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활동무대도 같고, 교리용어나 교단구성에서도 공통점이 많으며 경전도 빨리 어와 같은 계통의 속어(프라크리트 어)인 아르다 마가디 어로 씌어졌다.

그러나 사상적으론 다른 점이 많다. 모든 존재를 영혼(지바)과 비영혼(아지바)으로 나누고 비영혼은 다시 다르마(운동의 조건), 아다르마(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달리 상주변재하는 단일자가 아니라 다수이며 업에 따라 신체에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업(카르마)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됨으로써 그것을 윤회에 속박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미세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 방법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 진실어, 불투도, 불사음, 무소유의 다섯 가지 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 결과로 자이나교 특유의 종교적 관습이 생겨났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마셔서 죽이지 않도록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도 있다. 이 때문에 불전에선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흰 옷을 입는 백의파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로 갈라져 있다. 자이나교는 인식론적으로 상대주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판단이나 견해는 특정한 관점에서의 일면적 진리이므로 반드시 ‘한 점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자야의 회의론에 대한 자이나교적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고살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영혼, 득(得), 실(失), 고, 낙(樂), 생, 사의 열두 가지 요소를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영혼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원자(原子)와 같은 것이라고 본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그가 속한 교단의 명칭인 ‘아지비카’는 원래 생활법을 의미하지만 교단의 명칭으로서는 ‘생활법에 관한 규정을 엄밀히 준수하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교파에서는 ‘생계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역 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번역했다.

이 교파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서도 불교나 자이나교도와 나란히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였고,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교세를 유지했으나 그 뒤엔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③ 유물론 :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모든 것이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와 그리고 이들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오직 현세뿐이고 내세는 없으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존재론적으론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 쾌락주의인 아지타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야타(Loka yata), 혹은 차르와카(Ca rva ka)파로 불리는 이 파는 한역 불전에선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번역한다.

④ 7요소설 : 파쿠다 카차야나는 지, 수, 화, 풍의 네 요소 외에 고, 낙, 영혼을 더해7요소를 인정했으나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만들어진 것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 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⑤ 회의론 :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진리 주장을 하는 독단론에 대해 산자야는 ‘내세가 있는가?’ ‘선악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답변을 하므로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하여 잡히지 않는 설’이라고 불렸다. 불교의 62견 가운데는 네 가지 견해, 그리고 자이나교의 363견에서는 67종이 불가지론임을 미루어 당시 인식능력에 대해 회의한 사상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엔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자이나교는 이미 마하비라 재세시 튼튼한 교단을 형성했고, 그 후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3대 종교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인도에는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으며, 비록 소수이긴 하나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신도들이 농업을 버리고 일찍부터 상업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이상에서 육사외도의 사상을 간략히 조망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몇 가지 사상적 경향이 있다. 먼저 이들은 세계와 인간이 다수의 요소나 원리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브라흐만이라는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 세계가 전개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전변설(轉變說)에 대해 다양한 요소가 결합하여 세계를 구성한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하였다.

구성요소 가운데는 심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도 원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유물론적인 색체가 짙다. 유물론에 바탕하여 인과업보나 내세, 윤회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적 경향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인식론적으로 희의론과 상대주의도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사상이다.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대립되는 태도가 공존하였다. 유물론과 연계되는 쾌락주의는 추종자가 많지는 않지만 도시 중심적인 당시 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육사외도의 사상과 비교해 보면 양자가 베다와 바라문과 제사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여러 점에서 입장의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적취설에 대해 불교는 실체가 없는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여 생멸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불교는 인과업보와 내세와 윤회, 그리고 윤회로부터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런 점에선 베다에 속하는 우파니샤드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 불교는 회의론이나 상대주의에 대해 극히 실제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무기설(無記說), 즉 형이상학적 논쟁의 무용성을 주장한다. 또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지양한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바라문에 대립되는 사문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지만, 다른 사문들의 사고나 가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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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08 08:41

    첫댓글 불교적 개념 및 이론서는 인쇄하여 다시보기 할게요.
    이해를 돕기 위한 저만의 방법 이옵니다. ㅎㅎ

  • 작성자 12.06.08 16:01

    많이 까다롭고 이해하기 복잡해서 저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데요...
    열심히 반복하고 학습해서 익히는 모습~~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 12.06.08 22:34

    화면상으로 보면 , 연결이 잘 안돼서요. ㅠ

  • 12.06.13 22:13

    맞아요 줄치고 체크하고 이런 식으로 보면 조금 이해 되는부분도 있는데,
    화면상에서는 이처럼 긴 문장들은 조금 딴 생각하면 다른 줄 에가서 해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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