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육원은 1950.12월부터 1955년 11월 만5년간 전란이라는 핑계로 제농 교실과 운동장 등 시설을 점령했다.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12월 북진(北進)의 승전 소식이 속속 전해지던 중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의 후퇴소식이 전해졌다. 12월16일 서울시는 종로국민학교에 수용중인 서울시립아동양육원 소속 고아 1000여명을 한강이남으로 피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고아원의 구호물자 보관책임자인 배학복(裵學福. 영락교회 女전도부장. 후에 제6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崔承萬지사와 결혼)과 장복순(張福順)의 긴급 피난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안양으로 일단 옮기려던 이기붕 서울시장은 전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고아들을 제주도로 후송할 계획을 세우고 수송은 미군과 협의중이니 일단 인천항으로 가서 기다려달라고 전했다.
이때 고아원 고문에는 최승만(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대학교 교수)으로 임명되어 이들의 수송을 도우면서 고아원 운영과 감독을 맡고 있는 미군 군목(軍牧) 부라이젤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최승만은 피난을 서둘던 중 서울시 사회국장 박학전(朴鶴田)을 만나 우연히 고문직에 임명됐는데 피난 전까지 연희대학교 도서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고아원 구호물자책임자 배학복 등은 고아들을 섬으로 옮기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식량이 있어야 함으로 석달 열흘 분의 식량을 확보해달라고 고집했다.
고아들에 대한 수송작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시민에 대한 피난 명령이 발표되기 하루 전인 12월23일 새벽5시에 시작됐다. 어린이는 어린이들대로, 구호물자는 구호물자대로 트럭에 나눠졌다. 이들 수송에는 미군트럭 37대가 동원됐으며 고아들과 물자는 모두 동인천역에 있는 축현국민학교로 옮겨졌다.
구호물자는 3개의 창고 속에 보관됐다. 고아들은 난방이 안된 국민학교 2층 강당에 밤을 보내야 했다. 막상 도착한 뒤의 더 큰 문제는 목적지인 제주도까지의 수송이었다. 서울시는 마침 제주지방의 구호물자인 시멘트 1000천 포대를 싣고 제주도로 가기로 돼있는 화물선 1척을 주선하고 이 화물선을 통해 고아들을 수송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아원측은 어린아이들을 시멘트와 함께 승선을 반대했다. 사실 1000여명의 고아들과 화물을 동시에 선박으로 수송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으로 보였다.
결국 선박수송계획은 비행기로 바뀌었다. 비행기 수송작전에는 UN군 소속 미군 제5공군 제61수송대가 참여했으며 헤스 공군대령이 총지휘를 맡았다. 이때 인천에 잇는 명진보육원생 60명도 합류하게 됐다.
전쟁고아 제1진이 도착한 것은 1951년 새해를 닷새 앞둔 12월27일 저녁이었다. 고아 수송에는 수송기 16대가 동원되었고 제주도의 저녁 하늘을 수놓으면서 장관을 이루었다. 이날 비행장에는 김충희 지사를 비롯한 도청 간부진과 도내 주요 기관장들이 모두 제주비행장에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이에 앞서 정부로부터 전쟁 고아 수송계획을 직접 전해들은 김 지사는 무려 1000여명에 이르는 고아들을 수용할 장소부터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거나 직접 둘러본 김 지사는 제주농업중학교가 가장 적당하다고 보고 최광식(崔光植) 교장을 찾아 고아수용문제를 논의했다. 최 교장은 학교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일이나 전국민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당에 서로 참고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승낙했다. 김 지사는 군대의 협조를 얻어 농업중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설치하는 등 임시 수용소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고아들은 도착즉시 수용장소인 제주농업중학교까지 미군트럭에 나눠 수송됐다. 이들은 연령에 따라 천막과 교실 등에 분산 수용됐으며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 등이 임시 마련됐다. 제주농업중학교는 엄청나게 몰려든 고아들로 교실은 물론 서무과까지 내줘야 할 형편이었다. 후에 겨울방학을 끝낸 학생들은 학교시설의 대부분이 전쟁고아원으로 변해버린 모습에 놀랐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교실을 고아들에게 내준 학생들은 야외수업으로 대부분의 수업을 이어갔다.
이로써 당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한국보육원이 탄생했다. 그때가 1951년 2월8일이었다.
제주도민들은 한국보육원을 가리켜 UN의 지원으로 설립됐다고 해서 'UN고아원'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보육원의 전신인 서울시립아동양육원의 운영기관인 서울시는 원장에 김재호, 부원장에 배학복을 발령했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고아원 운영권을 놓고 서울시립아동양육원과 고아원 수송중에 함께 피난 온 인천 명진보육원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고아원에 지원되고 있는 풍부한 구호물자와 의약품에 있었다. 양측의 갖은 마찰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전해지면서 진상조사를 위해 박학전 서울시 사회국장이 제주도에 내려오기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은 이의 수습과 고아원의 정상적인 운영 등을 위해 마침 영국에서 사회사업의 전문교육을 받고 돌아온 황온순(黃溫順)에게 보육원의 운영책임을 맡겼다. 황온순은 처음 순수한 일반 고아원이 아니고 전쟁고아원이라는 점에서 맡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이 대통령과 이 서울시장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원장직을 수락했다. 한국보육원 고문은 최승만 지사를 추대했다.
당시 미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한국공군 고문관으로 전쟁고아 907명을 1950년 12월 제주도로 공수한 뒤 황온순 원장을 도와 헌신적으로 보살핀 예비역 미공군 대령 딘 헤스(DEAN ELMER HESS 당시 소령) 대령은 황온순 원장과 계원철 박사(당시 소령. 공군의무감 준장전역)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10개월여동안 고아원을 직접 운영, 고아들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 그는 참전기간 중 한국 공군 제18호 F-51전투기에 「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라는 글귀를 쓰고 250회에 걸쳐 출격,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무공훈장을, 미공군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또한 헤스 대령은 한국전쟁의 참전수기인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를 펴냈고, 1956년 미국 헐리우드의 유니버설영화사가 이를 영화로 제작해 한국보육원과 황온순 여사를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우리나라 고아원의 효시인 한국보육원은 1955년 11월 제주도에서 서울로 이전되었다가, 1970년 1월 경기도 양주 현 위치로 이전했다. 부지 1만3천여평에 450여평의 건물을 갖춘 한국보육원에는 현재 원생 47명(남25·여22)이 생활하고 있다. 새싹회로부터 1984년 제28회 소파상을 받은 황온순 여사는 1982년에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昌弼財團)」을 설립, 한국보육원을 이에 귀속시켜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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