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의 추억
사랑방의 샤프하고 핸섬한 막내 규님이 ‘형님 누님들, 얼굴 좀 보고 삽시다~!’하고 11월 10일의 추억모임 예비공지를 한 게 지금으로부터 61년 전, 아니 61일 전인 금년 9월 9일이었어요. 모임의 성격상 대개 주말과 일요일이 이어지게 마련인데 미리미리 비행기표를 구해두라는 자상한 당부도 있었고요.
그런데 11월 10일이라면 좀 늦지 않은가요. 늦지요. 그래서 원래는 시월 중순경에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모임을 가지면 사랑방의 영원한 방장이신 돌님의 수명이 500년에서 499년으로 줄어든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펄쩍펄쩍 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금년도 최고의 吉日이라는 11월 10일과 11일로 정하게 된 기막힌 사연이 있었어요. 에이 참, 쩨쩨하게 500년 중의 1년 가지고....
그런데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 그렇게 날을 받아놓고 이젠 죽어도 날자 변경은 없다고 한라산 신령님께 보고까지 마쳤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서 어럽쇼, 이번엔 사랑방 큰 마담이신 연님께 문제가 생긴 거예요. 바로 우리가 모이는 11월 10일날 친지의 결혼식이 있는데 반드시 참석해야한다는 거였어요. 더구나 오전도 아니고 오후에 식이 있다니 연님이 이번 추억모임에 참석하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들 게 된 거지요.
사정이 그렇다면 뭐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어차피 모든 친구님들이 다 참석한 추억모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또 그게 어쩌면 정상인지도 몰라요. 이 심난한 세상 전국 각지에 각각 다른 삶을 살다보니 그럴 수도 있는 거지요.
연님도 마음고생이 크게 되었어요. 명색이 추억모임 창립멤버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고 사랑방의 큰 마담이고 대곡동의 조폭 두목이고, 아니 조폭 두목과 추억 모임과는 관계가 없는 거지만 우짜든동 연님이 없는 추억 모임은 없었으니 전통문화 계승차원에서도 고심이 없을 수 없는 거예요.
이럴 때의 해결사가 누구겠어요. 바로 저지요.
그래서 그러면 이번 모임엔 연님이 불참하시는 걸로 양해하자고 했어요. 연님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추억모임은 모임대로 추진해 나가자는, 저로서는 상당히 인간적이고 동포애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고심의 결론이었지요.
좋은 생각이 늘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봐요. 제가 그런 의견을 말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돌멩이가 날아왔어요. 그게 해결방법이라는 거냐면서요. 누군가는 제 머리를 의심한다는 말도 했어요. 더구나 저를 슬프게 한 건 연님이었어요. 선생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저를 째려봤어요. 아니,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연님의 마음고생을 덜어주고 유산될 뻔한 추억모임을 성사시키자는 숭고한 뜻이 뭐가 어디가 잘못이냐는 거예요.
결국 저를 왕따 시키면서 자기들끼리 만들어낸 결론이, 그날 연님이 결혼식에 참석한 후 총알택시를 타고 부산공항으로 달려가서 15:15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온 후 다시 성산포로 달려가서는 우도로 건너간다는 복잡하고 난해한 ‘작전’이 만들어졌어요. 작전이 복잡하면 실패할 확률도 높아지게 마련인 거라고 생각해요.
여하튼, 다른 친구님들은 모두 11시 반에서 12:20분까지 오는데 연님만 혼자 그렇게 늦게 온다는 거지요. 아니, 그렇게 올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번 모임의 공지를 올린 규님이 성산포항에 알아보니 우도로 가는 마지막 배가 17:30분에 있다고 하니 비행기가 연착하지 않는 한 시간은 충분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먼저 오신 친구님들이 우선 우도로 건너가서 숙소에 짐을 풀고 산호해변에서 일몰을 촬영하고 있으면 늦게 오시는 연님은 제가 차에 싣고, 아니 모시고 성산포로 달리고 마지막 배로 우도로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리고 시월 중순 어느 날 저와 열님과 훈님은 우도에 가서 우리가 있을 근사한 펜션까지 물색해두고 왔어요. 펜션 건물의 앞마당은 잔디밭이고 그 바로 앞이 산호해변이니 우도에서 이 보다 더 근사한 숙소는 없는 거지요.
이번 모임의 장소를 처음엔 우도가 아닌 사계리로 할까 했는데 모두들 우도에 다시 가자고 했어요. 우도는 그렇게 몇 번을 다시 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인가 봐요.
그렇게 두 달 전부터 분위기를 잡고 모이는 날을 기다려왔는데 모두들 달력 뜯어내며 그냥 날짜만 죽이며 기다린 건 아니었어요. 이번에 처음 추억 모임에 참여하는 훈님은 모임의 분위기를 근사하게 만들어보려고 오카리나라는 요상하게 생긴 악기를 구해서 학원에 등록까지 해서 배우기 시작했고 연님은 사랑방의 촌동네 사람들한테 관능미 넘치는 밸리춤을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저는 술을 근사하게 마시는 법을 ‘연구’하며 그날을 기다렸어요. 연구비 좀 주세요~!!
1. 반가운 만남/20071110
마침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그날이 왔어요. 구름이 약간 낀 훈훈한 날씨에 우선 안심이 되었어요. 일기예보에선 바람이 많이 불고 쌀쌀할 거라고 겁을 주었거든요.
‘시간이 돈이다’라는 말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후보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거지요.
그래서 금쪽 같은 주말의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렇게 하기로 했어요. 열님과 훈님은 아침 일찍부터 무슨무슨 오름에 가서 전부터 예약해뒀던 야생화를 촬영한 후 오후 두 시쯤 성산포에 오시고, 돌님은 12시쯤 공항에 나오시고 저는 11시 20분 쯤 공항에 나가기로 했어요. 친구님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한다면 최소한 3일 전부터 공항에서 기다려야겠지만 주차비가 너무 많이 나올까봐 규님이 서울에서 출발해서 맨 먼저 도착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정한 거예요.
11시 30분쯤 되어 서울에서 출발한 규님이 샤프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어서 대구에서 출발한 달님의 여학교 얼라 같은 모습이 나타났어요. 12시에 나온다던 돌님도 이미 공항에 나와 있어 우리 넷은 반가운 인사 후 커피를 마시며 군산공항을 출발해서 12시 20분에 도착하실 경님을 기다렸어요. 달님은 얼만 전에 새로 산 최신형 카메라를 꺼내들고 우리를 기죽이려고 얼러댔어요. 그 카메라, 정말 너무나 근사해서 제가 뺏고 싶었어요.
경님은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어요. 예의 그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웠어요. 네 분은 돌님의 차에 타고 성산포로 달려갔고 저는 연님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선 집으로 돌아왔어요.
2. “카메라, 카메라~!!”
연님은 예상시간보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했어요.
알고 보니 부산공항에서 15:15분 출발편이 아니라 15:05분편을 탔대요. 10분을 벌었으니 성산포까지 가는 시간을 좀 벌어둔 거예요.
16:10분, 사랑방 큰마담이신 연님을 ‘모시고’ 공항을 출발해 성산포로 향했어요. 17:30분까지는 1시간 20분이 남았으니 준법운전해도 10분 정도는 여유가 있었어요.
믿는 분들이 없을지는 몰라도 저는 최소한 교통법규만은 칼 같이 준수해요. 그것이 저의 생명과 우리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는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가끔 과속했다는 통지서가 날아오기도 하지만 그건 그 ‘과속방지설비’라는 이름이 붙여진 카메라가 고장 났거나 제 차의 속도계가 고장이어서지 제가 과속한 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전 과속하지 않아요.
연님과의 대화-
“마지막 배가 17:30분이니까 시간이 충분합니다.”
“어~, 선생님 저는 16:40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럴 리가요. 16:40분이면 이미 우린 그 배를 탈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겐가 분명히 17:30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럼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연님이 114로 전화해서 성산포 여객터미널로 배 시간을 물어보니 17:30분도 16:40분도 아닌 17:00이라고 해요. 틀림없이 그렇다고 해요. 그곳 직원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런 거지요. 그렇다면 공항에서 50분만에 성산포에 도착해야한다는 말인데 토요일 오후의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그 시간에 성산포에 도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제 차엔 아직 날개를 달지 않았거든요.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어요. 추억모임이 둘로 갈라질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먼저 우도에 들어간 여섯 친구님들이 한 팀을 이루고 연님과 제가 한 팀을 이루어 성산포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각각 추억모임을 갖는다...? 이건 그림도 안 되는 말이지요.
아무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마지막까지 달리고 보는 거예요.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거지요.
“연님, 안전띠 매었나요? 제가 좀 달려볼 테니 신호등은 놔두고 카메라만 알려 주세요~!!”
“걱정 마시고 달리기나 하세요. 쪽지가 날아와도 선생님한테 날아갈 거잖아요~!!”
연님은 제 우방이 아닌 것 같아요.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제가 운전을 시작해서 이렇게 달려보긴 처음이었어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전 늘 준법운전만 했었는데 이 상황에선 준법을 잠시 까먹기로 결심했어요. 우선 전조등과 비상등을 켰어요. 교차로에서 마주하며 대기하는 차가 있으면 난데없이 좌회전할까봐 상향등을 계속 깜바깜박했어요. 4년 전 출고된 제 차는 처음으로 왱왱 소리를 내며 날아갈 듯 달렸어요. 기본속도 시속 100Km, 대개는 120Km였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하니 만약 숨어있는 이동식 카메라에 걸렸다면 전 앞으로 운전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통지서 날아올지 어떨지 며칠 두고 봐야겠어요.
북촌을 지난 외곽도로를 120Km/h의 속도로 달리는데 연님이 갑자기 “카메라, 카메라~!!”하고 소리를 치세요.
그런데 참 웃기는 건 그럴 때 전 왜 그리 멍청해지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전방에 과속단속용 카메라가 있으니 감속하라는 말인데 전 그 순간 난데없이 ‘어엉...? 뒤좌석에서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졌나...?“하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카메라가 왜 떨어졌을까 하는 생각만 하다가 좀 지나서야 ’아차, 바로 그 카메라~!!‘하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곤 힘껏 브레이크 페달을 밝았어요. 단속 카메라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바로 앞에서 급감속을 하니 차는 죽는 소리를 냈고 체중의 급쏠림으로 안전띠의 성능은 제대로 테스트를 하게 되었어요.
겨우 정신을 차린 연님이 진지하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은 원래 이렇게 운전하세요?”
“연님은 대구에서 어떻게 운전하시는데요...?”
50Km나 80Km의 표지가 곳곳에 서 있었지만 그리고 카메라와 빨간 불을 켠 신호등이 교차로마다 있었지만 그게 눈에 보일 리가 없었어요. 우리 동네에선 빨간등이 켜졌을 때 그냥 직진을 해요. 그럼 파란등에서는 어떻게 하느냐고요? 예...? 그걸 아직 모르시나요? 파란등이면 앞으로 가는 거예요.
“우도 가는 배의 표를 미리 끊어놓아 달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군요. 그 시간도 2,3분이나 걸리니까요.”
연님이 다시 여객터미널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표를 미리 끊어주면 좋겠습니다 하니 거기가 어니냐고 물어요. 제가 ‘세화’라고 소리치니 거기서 하는 말이 지금 세화라면 마지막 배를 탈 수 없다는 대답이에요. 연님이 터미널에 전화를 하는 동안 저는 세화에서 종달리 사이의 좁은 구도로로 접어들었어요. 그 도로는 길이 좁은 규정속도 50Km인 왕복 2차선 도로고 노면도 좋지 않지만 거리상 더 빠르기 때문이에요. 그 길을 시속 110~120Km로 달렸어요. 도중 전경부대가 있기 전 카메라가 있어 급감속을 하니 연님의 몸이 튀었다가 떨어지는 게 보였어요.
연님이 아직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는데 제가 ‘이젠 종달리예요!’ 하니 거기서도 감을 잡았는지 대합실로 오지 말고 막바로 배가 있는 선착장으로 오면 직원이 나가서 표를 끊어주겠다는 대답이었어요. 일출봉이 보이는 종달리에 왔는데 시간은 이제 꼭 5분이 남았어요. 5분만에 성산포 항에 도착하지 못하면 정말 힘든 일을 피할 수 없게 된 거예요. 핸들을 꽉 쥔 양손에 땀이 나고 머리칼이 설 정도였어요.
3.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공항에서부터 시내를 벗어난 후 천만 다행스런 일은 마침 오후 시간이 되어 시내로 들어오는 차들은 많아도 시외로 나가는 차가 별로 없어 앞에서 얼쩡거리는 차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종달리에서 성산항까지도 ‘하늘이 내린 식당’ 앞에서 만난 어리버리한 차 한 대를 빼고는 전혀 앞길이 막히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런 속도를 낼 수가 있었던 거지요.
차를 우도행 마지막 배에 몰고 들어가니 16:59분, 불과 출발 1분 전에 도착한 거예요. 아니, 1분이나 남은 거지요. 매표소 여직원이 달려와서 체크를 해줬어요. 휴~ 소리가 절로 나오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어요. 만일 연님이 부산에서 15:05분이 아니라 원래대로 10분 후인 15:15분 비행기를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그런 가정은 생각조차 해선 안 돼요.
그런데 긴장을 풀고 있는 저를 더 힘 빠지게 하는 건 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연님이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혼자 늦게 오신 연님은 배편의 시간착오까지 더해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켰지만 이런 해프닝도 모두 근사한 추억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저 참고 넘어가기로 했어요. 참지 않아도 별 수가 없거든요.
내항을 벗어나자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배가 출발했으니 우도에 도착하는 건 틀림없는 일이지요. 이제 모든 악몽은 사라진 걸까요. 그래서인지 행복한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들었어요. 그럼요, 행복하고 말고요~!!
12분 만에 우도항에 도착해서 서빈백사로 달려가니 규님과 경님이 해변에 있다가 뒤늦게 도착한 우릴 반갑게 맞아줬어요. 마치 남북 이산가족 만나듯이요. 돌님과 달님 훈님과 열님은 해국을 보러 검멀래 부근으로 갔다고 해요.
배낭을 메고 2층 숙소로 올라가보니 말 그대로 궁전 같았어요. 너른 거실 양쪽에 욕실이 달린 방이 각각 있었고 발코니에 나갈 것도 없이 거실에서 서빈백사의 해변이 그대로 내려다 보였어요..
노트북을 꺼내 미리 준비한 음악을 틀어놓고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데 검멀래에 갔던 친구님들이 돌아와서 비로소 모두 함께 하게 되었어요. 돌님이 정말 근사하게 만들어 온 현수막을 벽에 거는데 어쩌면 벽의 폭과 그렇게 꼭 맞는지 참 별일이네요.
4. 소주를 마셔도 취하더군요.
이번 모임에서 여자분들이라고 특별히 할 일은 애초부터 없앴어요. 말하자면 여자들을 힘들게 할 일들은 원천봉쇄한 거예요. 여자 친구님들이 수퍼에 가서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걸 사오자고 하길래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펜션 주인에게 식사까지 모두 준비해달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2층 거실에서는 바로 앞의 잔디밭과 그 앞의 해변, 그리고 멀리 지미봉이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냥 발코니에서 사진을 찍어도 근사할 정도였어요.
모두들 현수막 앞에 앉아 기념사진도 찍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제가 공항에서 연님고 달려 온 이야길 하면서 도대체 마지막 배가 17:30분이라는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규님이 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때 전화를 걸어서 분명히 확인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왜 마지막 배를 30분이나 더 당겨 출항했을까요. 맞아요. 규님이 전화했을 때는 10월이었고 그때는 하절기에 해당해서 17:30분이었지만 11월부터는 동절기에 해당해서 30분 일찍 마지막 배를 띄우는 게 틀림없어요. 한라산 입산 시간도 11월부터는 그렇게 바뀌잖아요.
저녁 식사는 제주산 흑돼지 삼겹살과 소주 한 잔이에요. 물론 밥도 있고요. 바람이 좀 불었지만 밖의 잔디밭 한 켠에 바베큐 설비가 있어 거기서도 고기를 굽고 식당에서 휴대용 버너에 돌판을 올려놓고 구워 먹기도 했는데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정말 기가 막혔어요. 저는 며칠 만에 맛보는 소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살맛이 났고요. 그런데 소주가 맛있기만 한 게 아니라 취하기도 하더군요.
식사 후 다음 코스에 가는데 저는 술을 마셨다는 죄로 운전석에서 쫓겨났어요. 저를 운전석에서 쫓아낸 사람이 연님이라는 걸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소주 두 병 마신 걸 가지고 음주운전한다는 트집을 잡으니 어쩌겠어요. 할 수 없이 뒷좌석으로 밀려나고 비주류파인 훈님이 제 자리를 차지했어요. 순 짜고들 그러는 거 같았어요. 그러나 쫓겨난 주제에도 해변도로를 타기도 하고 돌담을 끼고 천천히 가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가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요. 마치 동화의 나라를 찾아가는 것 처럼요.
5. 환락가에서
우린 전과 다름없이 ‘우도 최대의 환락가’를 향했어요. 우리가 향하는 환락가란 우체국 부근에 있는 우도 유일의 노래방을 말해요. 이 날도 우리가 아니면 아무 손님도 없을 뻔한 그 노래방은 우리 일행이 그날의 유일무이한 손님이었을 거예요.
노래방을 전세 낸 우리들은 그중 제일 큰 방을 차지하고는 모두들 우선 의자에 앉았어요. 방장이신 돌님이 새로 처음 참가한 친구님들을 위해 1회부터 10회까지의 추억만들기 모임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했어요. 그리고는 제가 연님의 홈에 올렸다가 다시 연님이 목 선생님의 홈으로 이전한 영화 ‘셴’의 주제가에 대한 목 선생님의 글을 돌님이 직접 낭독했어요. 분위기가 숙연해졌어요. 그 분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우리들에게 있어 목 선생님은 그런 분이지요. 목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추억만들기가 있을 수 없고 가신 지 이미 3년 반이나 되지만 선생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고 있어요. 좋은 준비를 해오고 근사한 진행을 하는 돌님이 진심으로 고맙고 고마웠어요.
먼저 목 선생님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애창곡 ‘선창’을 불렀어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목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이곤 했으나 이젠 그런 슬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목 선생님을 생각한다면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 시간 동안 돌아가며 노래를 했는데 제가 제일 노래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제가 노래를 정말 잘하는지 노래가 끝날 때마다 ‘아주 소질이 있습니다’, ‘좋은 가수가 되겠어요’, ‘참 잘했어요’ 등등의 글이 모니터에 나왔어요. 제가 연예계에 데뷔를 하는 게 어떨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겠어요.
노래방을 나왔는데 그냥 숙소로 가지 말고 우도의 해변도로를 일주하자고 해서 다시 차에 타고는 우도의 동쪽 해변으로 내려가서는 천천히 북쪽을 향해 갔어요. 검은 바다엔 하얀 파도가 일고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격정적인 음악처럼 밀려왔어요. 참 근사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하고수동의 비양도에 들어가서 등대와 바다에 전조등을 비춰놓고 음악 몇 곡을 듣고 싶었어요.
예보보다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밤바람이 차지 않고 달콤하기만 했어요.
6. 훈님의 오카리나 연주와 연님의 밸리춤의 만남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맥주와 음료수를 마시며 ‘1분 스피치’를 했어요. 이번 모임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저는 노트북에 녹음을 했어요. 목 선생님의 음성을 지금 들을 수 있는 것도 추억만들기에서 녹음한 1분 스피치 덕분이지요.
1분 스피치가 끝나고 아주 근사하고도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번 모임을 위해 돌님이 준비한 현수막은 이런 타이틀로 만들어졌어요. ‘우도의 추억-밸리와 오카리나의 만남’이라고 되어 있어요.
먼저 훈님의 오카리나 연주가 있었는데 훈님은 이번 모임을 위해 정말 ‘입술이 부르트도록’ 연주연습을 했어요. 훈님의 오카리나 연주곡명은 다음과 같아요.
대니보이, 섬집 아기, 엄마야 누나야, 스와니강, 아침이슬, The Salley Gardens, 철새는 날아가고 등이었어요. 불과 한 달 동안 일곱 번 학원에 나가 연습한 솜씨 치고는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근사했어요.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학창시절에 클라리넷 등 악기를 연주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정도 연주가 가능 한 거지 저 같으면 아마 동요 하나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을 거예요. 친구님들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어요. 하모니카를 가져간 저도 몇 곡인가를 불었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해 무슨 노래를 불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연님의 밸리춤 시범이 있었어요. 물론 모두들 거기서는 제대로 밸리춤을 출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어요. 우선 복장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지요. 그래도 연님은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밸리춤 시범과 몇 가지 동작을 가르쳐 줬어요. 지금 생각나는 건, 어떻게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목만 좌우로 움직이냐는 거였어요. 밸리는 제겐 동작불가능한 춤이었어요.
밤 한 시 반쯤 되었는데 돌님이 난데없이 전복죽을 먹자고 해서 웬일인가 했더니 미리 프린트해 온 달님의 수필 ‘전복죽을 끓이면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어요. 정말 돌님은 근사한 친구님이지요. 돌님에 이어 모두들 순서대로 한 귀절씩을 낭독했어요. 전복죽을 고루고루 먹어야한다고 해서요. 그 글에 대한 목 선생님의 평까지 프린트해 와서 읽었어요. 돌님의 자상함이 돋보였어요.
바다쪽 발코니의 창을 닫았는데도 파도소리가 은은한 음악처럼 밀려들었어요. 밤은 깊어 가는데 모두들 눈이 초롱초롱해서 잠을 잘 생각들을 안 했어요. 저는 웬 맥주 맛이 그렇게 좋은지 혼자서 거의 열 통은 마신 것 같아요. 노트북에 담아온 ‘흘러간 노래’를 조용하게 틀어놨어요. 친구님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세 시쯤 규님이 김밥을 가져와서 모두들 맛있게 먹었어요. 또 달님이 뭔가를 하고 있길래 뭘하냐고 물어보니 라면을 끓인다고 해요. 저는 술을 마셔서 배고픈 줄을 모르겠는데 아마 시간이 늦어 약간 출출하긴 할 거예요. 조금 있다가 달님이 ‘라면 먹어요!’ 하고 소리 치길래 모두들 우우 몰려갔는데 글쎄 큼직한 냄비에 달랑 라면 한 개를 삶아 놓은 거예요. 에구, 정말 사람 크기대로예요. 여하튼 라면 한 개 삶아서 넷이 먹긴 처음이었어요.
세 시 반이 넘어서 이젠 눈 좀 붙이자고 하며 모두들 자기로 했어요. 양쪽 방의 침대에서 자는 사람, 거실의 따뜻한 곳에서 찜질하면서 자는 사람, 소파에서 자는 사람 등등 잠자는 데는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게 없었어요.
파도소리와 함께 우도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어요.
7. 해국과 쑥부쟁이/20071111
대개 추억만들기를 하는 중 맞이하는 아침엔 새벽 같이 카메라를 들고 여명부터 일출을 촬영해왔어요. 전에도 하고수동 앞의 비양도에서 등대를 넣고 일출을 촬영했었지요. 그런데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어요. 아침이 오건 말건 잠도 실컷 자고 배고프면 일어나기로 한 거예요. 하긴 지난 밤 늦게, 아니 오늘 새벽녘에 자기 시작했으니 일찍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요. 좀 일찍 일어나 새벽의 산호해변에 나가보는 사람도 없었어요. 발코니 바로 앞이 바다이니 구태어 나갈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기상~!!”하고 꽥 소리 지르지 않아도 하나 둘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요.
연님이 화장품을 가지고 오더니 훈님에게 얼굴 맛사지를 해주겠다면서 거실 바닥에 누우라고 하니 총각인 훈님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어요. 연님이 훈님을 지목한 건 이번 모임에서 훈님이 제일 못 생겨서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가죽에 맛사지한다고 피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아주 원론적인 말을 했을 뿐이에요.
여하튼 연님은 정성을 다해 가죽을 피부로 만드는 작업을 했고 그래서 그런지 훈님은 피부 비스무리한 얼굴이 되었어요. 아마도, 훈님이 여인으로부터 얼굴 맛사지를 받은 건 이번이 난생처음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 훈님은 한 달 동안 세수를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우리 집에 올 때 유심히 살펴봐야겠어요.
아침 식사는 모두 식당에 내려가서 했어요. 반찬이 모두 맛있는데 특히 금방 구운 고등어가 아주 맛있어요. 더구나 누릉지 삶은 것과 함께 나온 숭늉은 일품이었어요.
10시쯤 되어 모두 잔디마당에 나와 기념촬영을 하고는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어요. 그리고는 우도 일주도로를 따라가면서 쑥부쟁이를 촬영했어요. 예년 같으면 이미 다 지고 없을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는데 특히 비양도엔 꽃밭을 이루고 있었어요. 꽃밭 바로 옆에 차를 세우고는 쑥부쟁이도 촬영하고 사람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어디서 온 강아지도 만나고 그랬어요. 저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고 그냥 어슬렁거리기만 했어요. 그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괜찮았거든요.
검멀래 가까이의 해국 군락지에 갔더니 지난해보다 훨씬 더 많은 해국이 피어 있었어요. 이렇게 늦은 계절에 이 무슨 복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우리 친구님들은 복이 있나 봐요.
8. 우도를 떠나며
12시에 우도를 떠났어요. 어제 우도로 들어올 때 배편의 시간 때문에 기겁을 했었는데 우도를 떠날 때도 평범하게 넘어가진 않았어요. 검멀래 방향에서 우도항으로 먼저 들어오니 막 배 한 대가 성산포항을 향해 출항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음 배는 서빈백사쪽의 항구에서 떠날 거라는 짐작으로 달려갔는데 뒤 따라오던 돌님의 차가 오지 않더니 우도항에서 먼저 출발하니 되돌아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시간이 어떻게 되느냐니까 2분 후인 12시라고 해서 그 시간엔 도저히 거기까지 가지 못한다고 하니 배 붙잡아 둘테니 빨리 달려오라고 해요. 좁은 해변도로를 또 질주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렇게 달려도 우도항에 도착하니 12시 3분, 우리가 타자마자 배는 입을 닫고 출항했어요. 배에서 일하는 분들이 다음 배를 타라고 했으나 돌님 곧 도착하니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사정을 했다고 해요. 에휴, 비행기편에 배편에 왜 이리 힘들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일이 또 벌어졌어요. 우도항 주차장에 뒀던 훈님의 차에 연님이 동승을 하고 제 차와 돌님의 차를 따라와야 하는데 점심식사하기로 예정한 ‘오조 해녀의 집’에서 전북죽을 주문하고 죽이 나와서 먹고 있어도 훈님의 차가 오지 않는 거예요. 연락을 해보니 엉뚱한 다른 전복죽집으로 간 거예요. 경님이 탑승할 14:20분 비행기에 타려면 훈님의 차가 최소한 12:40분엔 출발해야하는데 그런 일이 생겨버리니 모두들 마음이 바빠지는 거지만 다행히 충분히 식사 할 수 있는 시간은 되었어요. 오후 근무에 출근할 훈님은 경님을 공항까지 태워다 드리고 출근하기로 해서 거기서 이별을 하고는 12:45분 먼저 출발했어요. 만남을 위해 전주에서 군산으로, 다시 제주까지 오신 경님 감사합니다!
9. 배가 있는 동산 앞의 섬에서
해변도로를 조금 가다가 노랗게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감국이 있어 차를 세우고 촬영을 했어요. 바닷물빛도 좋고 하늘의 구름도 좋고 감국의 노란 빛깔도 근사해서 규님도 열님도 연님도 달님도 모두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요.
바닷바람에 새도 날리고 친구님들의 머리칼도 날리고 감국의 짙은 향도 함께 날렸어요.
우린 거기서 더 달린 후 종달리의 ‘배가 있는 동산’ 앞에 내려서는 그 앞의 섬에 들어갔어요. 아직도 그 섬엔 해국이 ‘개락’이었어요. 모두들 해국을 열심히 촬영했어요. 역시 해국은 그렇게 현무암과 함께 있어야 제격이지요. 지난해엔 시월 말에 이미 해국이 모습을 감췄었는데 금년엔 늦은 개화 덕분에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10. 마지막까지...
제주시로 가는 도중 길가에 ‘커피하우스’라는 데가 들어가서 커피 한 잔 하고 나오니 4시 5분, 5시에 출발하는 달님이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해서 난 마음이 급해져 빨리 차를 타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리고 거기서 돌님과 열님은 공항으로 가는 우리들과 헤어졌어요.
제 차엔 달님과 연님과 규님이 탔고 저는 다시 어제 성산포 갈 때처럼 달려야 했어요. 그러나 일요일 오후 관광차량들이 시내로 돌아오는 시간이어서 그렇게 달릴 수가 없었어요.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차량들의 흐름이 원활했고 함덕부터는 신호등에 한 번도 걸리지도 않고 계속 달릴 수가 있었어요.
“신호등이 웬일일까, 이렇게 안 걸리고 달려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함덕에서 공항 안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신호등에 걸리지 않고 왔어요. 그러다보니 시간도 넉넉하게 남아서 26분이나 남은 4시 34분에 도착한 거예요. 그 시간이면 서둘 일도 아니었지만 연님과 달님의 짐이 있어 막바로 2층 대합실 앞에 내려주고는 저는 차를 주차장에 갖다 두고 2층으로 가서 다시 연님과 규님을 만났어요. 달님은 좌석배정 받으러 갔다고 해서 우린 개찰구 앞에서 기다렸는데 일요일 오후라 대합실은 시장터와 같이 사람들로 북적거렸어요.
비행기가 출발하기 15분 전에 탑승을 하는데 달님은 10분 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요. 보안검색대를 거쳐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촉박한데 달님이 나타나지 않아 연님이 전화를 하니 뭔가 잘못되었는지 안색이 변해요. 5분 전, 이젠 탑승이 불가능해요. 전화를 끊은 연님이 전하는 말이, 20분 전에 좌석배정을 받으려고 했는데 항공사에서 달님의 표를 대기자에게 줘 버렸다는 거예요. 연님이 공항으로 오면서 대한항공의 17시 비행기를 달님과 함께 타려고 계속 전화를 했으나 만석이어서 불가능했는데 이제 달님은 오늘 중으로 대구에 갈 수가 없게 된 거예요.
대한항공 키운터로 가서 달님을 만났어요. 달님은 화가 잔뜩 나 있었어요. 그러면서 15분 후인 17:1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의 대기자 1순위에 올려놨으니 조금만 기다려보란다고 해요. 그리고 잠시 후 정말 달님은 표를 가지고 왔어요. 일요일 하루에 불과 네 번 밖에 없는 제주발 대구행 비행기편이 불과 15분 간격으로 있다는 것도 희안하지요. 제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연님은 분명 속으로 이러셨을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대구에서 오신 연님과 달님은 어제 도착해서부터 오늘 떠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이렇게 사람 애를 태우곤 훌쩍 대구로 날아가 버렸어요.
* ‘우도의 추억’에 함께 하신 친구님들 고맙습니다. 이번의 모임 어느 추억모임보다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사진 정리 되는대로 근사한 편집을 하겠습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