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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 지
글 / 정일상
옛날 있었던 것이 하나 둘 없어지니 그리움이 한층 짙어진다. 시골 고향동리 앞이나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마저 그리움을 채근하고 있다. 온 천지에 그리움이 자욱하다. 그리움은 아쉬움으로 싹터 놓쳐버리거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자꾸 떠오른다, 없어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손에 익고 마음에 익은 농업용 연장들, 사라진 풍습들과 놀이문화의 사라짐과 변화, 우리 몸에 지녔던 소품들, 우리 민족의 고유의상과 전통들마저 없어지고 변해 추억으로만 남은 것들 등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자꾸 떠오를 때면 진화하고 발전한 언저리의 흔적을 한번씩 생각해 보게 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언제나 방안엔 큼지막한 쇠로 된 화로가 놓여있었고 그 화로에는 불을 잘 다독거리기 위해 불 젓가락과 불손이 화로언저리에 항시 함께 놓여 있었다. 화로는 질화로와 놋쇠화로, 무쇠화로, 돌화로 등 다양한데 할아버지 방에도 커다란 돌화로가 항시 방안에 놓여있어 쇠죽을 끌이면 그 나머지의 숯덩이와 벌건 재들을 화로에 가득 담아 두고선 밤새 두세 번 다독거려 두기 때문에 아침까지 그 화로의 불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머슴이 아침에 쇠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필 땐 이 화로불이 불씨기 되었다. 옛날 온돌방은 겨울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아랫목은 제법 훈훈하고 뜨거우나 윗목의 공기는 차갑기 마련인데 그때 화로는 그 한기를 누그러뜨리는 난방장치가 되었던 셈이고, 그 구실은 요즘의 난로와도 같다.
내가 초등학교시절 할아버지는 큰집 사랑방에 거처하고 계셨는데 우리는 자주 할아버지를 찾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방엔 우리 어린것들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할아버지 곁에 가면 으레 다리를 주물러라 하시던가, 아니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쌈지에서 봉초를 담뱃대에 재워 화롯불을 헤집고 불을 붙여 긴 담뱃대를 빨아 연기를 내뿜기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만 뛰쳐나오기가 일쑤였다. 온방이 담배냄새로 찌든 데다 계속 담배를 피어대시니 방안엔 언제나 뿌연 안개가 끼듯 연기가 가득해 방공기가 탁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 화로 곁에 재떨이와 긴담뱃대와 쌈지 네 개가 준비돼 있었다. 화로 가는 이 네 개의 쌈지와 재떨이, 그리고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이 늘 화로 가에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이 네 개의 쌈지가 준비돼있는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소개하자면 하나는 부싯돌을 넣는 쌈지이고, 또 하나는 가루담배를 넣어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낱돈이나 동전을 넣어두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조금 크고 화려한 쌈지인데 어린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대추며, 밤알이나 호두알, 잣 같은 것을 항시 넣어 두는 쌈지이었다. 어쩌다 사탕 같은 귀한 것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눈깔사탕이었다. 이렇게 쌈지의 기능이 요즘으로 말하면 지갑이나 무슨 주머니역할처럼 기능을 갖는 쌈지를 가지고 계셨다. 어쩌다 심부름을 잘하고 할아버지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할아버지께서 이 쌈지들 중 잔돈인 주화가 든 쌈지를 열어 동전 한두 닢 주시곤 했는데 이 쌈지의 기능이 참으로 다양했다. 그래서 쌈지에 대한 추억과 문화와 애잔함이 묻어있고 숨어있다.
돌이켜 반추해보면 내가 살던 집도 겨울에 접어들면 방안이 깨나 차가워 식구들은 화로를 껴안다시피 하고는 삥 둘러앉는다. 불김에 손을 얹고는 녹인다. 그러면 다들 몸이 제법 훈훈해 진다. 때로는 밤에 화롯전에 쇠 그물을 걸치곤 떡을 얹거나, 아니면 숯불에 대놓고는 고구마나 밤 따위를 얹어 구워서 두루 나눠 먹는다. 무릎이 맞닿도록 둘러앉은 식솔의 마음에 정이 서린다. 그럴라치면 뜰 바깥에 부는 밤바람 소리도 꽤나 부드럽게 들리는데 이때 아버지는 예외 없이 쌈지를 열어 긴 담뱃대 꼭지에 가득 꼭꼭 눌러 봉초를 채워 벌건 숯덩이에 대고 입으로 담뱃대를 빨면 불이 붙어 연기가 입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곧바로 코와 입으로 담배연기를 토해 내신다. 그럴라치면 우리형제들은 독한 담배냄새 때문에 문을 박차고 마루로 나가곤 했는데, 우리 어린것들이 애처로운지 아버지는 몇 번 이와 같은 광경을 보시고는 우리는 화롯가에 남겨둔 채 아버지는 담뱃대를 물고선 슬그머니 마루로 나가신다. 어린것들에 대한 배려이셨다.
아마도 초등하교 갓 입학했을 무렵의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는 늘 쌈지 두 개를 쫒기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는데 어느 땐가 몇 년 후엔 쌈지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다. 그 이유는 봉초담배를 넣는 쌈지 하나이었을 뿐, 시대조류에 따라 담뱃대를 버리고 종이로 담배를 말아 피우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원래 쌈지란 담배 또는 부시 등을 담는 주머니이었다. 이 쌈지는 종이나 헝겊, 가죽 등으로 만들고 그 속에 사라지를 덧 넣기도 하는데 담배와 부싯돌을 함께 넣어두면 엉켜 불이 잘 켜 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시 자료와 담배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해서 쌈지 두 개를 꼭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일제말기와 해방이후에도 담배는 전매품이어서 담배농사도 엄격한 정부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 시기엔 시골에선 담배농사를 짓는 집에 담배부스러기를 얻으러 노인들이 작업장에 동참하거나 그 시기엔 시골인심이 후했는지라 담뱃잎 부스러기와 등외품을 이웃에 나눠주기도 하고 얻어가기도 했었다. 그럴 때엔 으레 복 주머니처럼 생긴 커다란 쌈지에 가득 넣어가서 공방 대와 함께 허리에 차고 살았다.
쌈지와 조끼는 남자용이고, 예쁜 주머니 형 쌈지는 허리에 차야함으로 여자들이 주로 긴 끈이 달린 쌈지를 애용하였다. 멋을 부리기 위해 쌈지 끈에 노리개나 수술을 달아매는 경우도 있었다. 쌈지도 사용용도에 따라 돈 쌈지, 담배쌈지, 부시쌈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쌈짓돈이 주머닛돈,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쌈지에 든 돈이나 주머니에 든 돈이 모두 다 한 가지라는 뜻으로, 그 돈이 그 돈이어서, 결국 구별 없이 마찬가지라는 말이고, 흔히 깊숙하게 몰래 감춰뒀던 돈을 쓰는 것을 보고선 ‘쌈짓돈 털어 내는 것’ 아니냐고 하는 속담들도 있다. 이렇게 쌈지에 대한 빗댄 말이 꽤나 많이 있다.
쌈지와 주머니는 오늘날 지갑과 손가방 같았다. 바지저고리를 입던 시절에 남자들 조끼 속과 여자속곳 안에 깊숙이 넣어두는 작은 소품이었다. 우리의 정서와 얼이 담겨있기에 그 옛날 지혜로운 주머니은행 역할을 했다. 한 푼 두 푼 성실히 모우면 삶의 터전도 마련할 수가 있었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쌈지 속 종자돈은 새끼를 치도록 두었으리라. 옛 속담처럼 쌈짓돈이 주머닛돈이 되어야 한다. 돈 쌈지가 둘인 남자는 불륜의 씨앗을 만든다고 했다. 반대로 여자가 두개의 주머니를 차면은 재처의 소행이라 하지 않았던가. 깨끗한 돈 쌈지를 하나만 두둑이 채우는 마음가짐이 더없는 행복한 삶으로, 정직하고 순정(純正)한 마음가짐 또한 쌈지의 바른 마음이리라.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형제들 앞앞이 하나씩 어느 세모(歲暮) 때 어머니가 고운 색동저고리 헝겊으로 돈 쌈지를 만들어 주신일이 있다. 그 쌈지에는 세 칸으로 중간에 쌈지 끈이 두개 달려있었고 잔돈을 구별해서 넣게 되어 있었다. 그 돈 쌈지에는 용돈과 정초에 받은 세뱃돈, 그리고 정성마저 담겨져 제법 두둑했던 추억이 새삼 정겹게 다가온다. 흐뭇한 감성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늙으신 할머니들이 치마 속에 쌈지를 차고 다니신다. 나는 지난 가을 고향 오일장에 들렸다가 어느 할머니 한분이 돌아서서 속치마까지 걷어 올리고 속바지주머니에서 돈 쌈지를 꺼내어 황금색 지폐를 꺼내는 모습을 봤다. 그 돈을 끄집어내는데 무척 힘들어 보였다. 옛날부터 우리 여인네들의 옷은 하후상박(下厚上薄)으로서 하체에 많이 입고 상체에는 조금 밖에 입지 않았던 습성이 여전히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여자들이 제대로 정장을 하려면 하의(下衣)에 속속곳, 바지, 여러 종류의 무지기(예: 서흡 무지기, 닷곱 무지기, 연꽃 무지기 등)와 속치마, 겉치마 등을 입는가 하면 위에는 속적삼, 속저고리, 저고리, 삼작이라 해서 삼회장저고리 두 개를 입었다. 아무리 성장(盛裝)할 때의 옷이라도 속적삼은 시집을 가서도 속 시원히 살라는 뜻에서 모시를 입었다고 한다. 아직도 쌈지는 나이 많은 여인네들이 애용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깊숙하고 음밀한 곳에 귀중품을 감추거나 큰돈을 엄밀히 간직하고픈 심정이 있기 때문이고 자기의 사금고 같은 느낌이 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에 옛날 우리나라 남자들의 복식(服飾)은 일상생활을 할 때 통상 두루마기를 걸치지 아니한 상태에서 도량출입을 했고, 백의민족이라 해서 주로 흰 베옷을 입었기에 허리춤에 꾀죄죄한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겨울이면 엷게 솜을 놓은 무명옷이었고, 여름이면 풀이 죽은 삼베옷이었다. 사시사철 이런 복색(服色)이었는데 그것도 때나 땀이나 흘린 술 방울에 절여 있거나 손때가 묻어 있기가 일쑤였다. 쌈지를 찬 주머니 두 개를 달고 다니는 경우엔 특히 그랬다. 이렇듯 쌈지는 사람들의 품위와 또한 관련이 있기도 했다.
나는 옛것은 무조건 못 버리고 나와 함께 했던 물건들을 모두 곁에 두고 있다. 오래된 쌈지도 하나 보관하고 있다. 요즘의 복주머니다. 오랫동안 촌스럽게 길들어온 내 사고 방식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거처하는 구석구석 오래된 물건들이 골동품처럼 쌓여있어 마치 고물 창고 같다. 그러나 이 보물창고에는 이 세상 어느 곳에 가서도 사올 수없는 나만의 보물로 가득 차 있다. 내 아들딸들이 집에 들를라치면 첫마디가 ‘아빠 이 물건들, 고물들 좀 정리해요’ 라고 다그친다.
비록 때 묻고 헐어빠지고 색깔마저 퇴색된 옷 이라든지 가구나 세간일수록 세월 속에 묻혀 있는 값진 추억들이 들꽃처럼 향기를 내 뿜는다. 특히 쌈지처럼 소품일수록 애착이 더 간다. 그것들은 마치 맑은 시냇물 소리와 어울려 하늘에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추억으로 살맛을 내게 전해주니 얼마나 귀하고 값진 행복을 건네주는 전령처럼 느껴지는 물건들이 아니냐? 이런 애착과 추억이 묻어 얼룩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지만 다 버리고 가야 할 무거운 나이를 이고 사는 지금의 처지로선 더더욱 귀하고 귀할 뿐이다. 추억으로 남은 쌈지라는 소품까지.
첫댓글 이 글은 '한국문학'이란 문학지에서 청탁이 와서 써준 수필입니다.
6월호에 상자한답니다. 제목을 '쌈지'라 정해 왔기에 써 준 것이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 좋은 엣날의 추억같은 이야기,
얼마전만 해도 쌈지이야기가 있는데 곰방대와 쌈지,
추억의 한토막 같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시던 쌈지가 생각 납니다,
요즘작은 밀가루 봉투 같은 봉지에 담배 그것을 신문지나 책종이등 말아서 피시는 모습을 보던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의 곰방대도 생각나고 그시절이 왜그리워지는지.,
좋은 추억이 되살아나는 소품이고
우리의 소중한 금고였지요.
쌈지 추억이 너무 많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