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시인을 만나다|김뱅상 시집리뷰
보아뱀이 삼킨 시
-‘나’와 ‘우리들’의 거리-
김종광(문학평론가)
모래밭으로 마치 나무가 쓰러지듯 조용히 쓰러졌던 어린 왕자.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던 그 고독한 이야기를 생텍쥐페리가 속삭여 주는 순간, ‘양’과 ‘장미꽃’의 존재만큼이나 세상 모든 것들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의문을 갖지 않는 소중함은 없었다.
시(詩)가 오는, 그 외롭고 고단하고 바람이 불던 길에 무수히 많은 어린 왕자들이 쓰러져 있었을지라도 시인은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부르는 언어로만 부풀어 오르는 보아뱀을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별에서 떨어진 존재처럼 외롭고 쓸쓸했던 순간, 김뱅상 시인은 그만의 보아뱀을 상상한다. 『어느 세계에 당도할 뭇별』에는 그 숱한 별들의 광량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수정체 같은 시어들이 빛나고 있기에, 산란하는 기표와 기의가 미로 장(場) 안에서 반복적으로 미끄러지게 되고 또한 그 속에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방황하기 십상이다. 다만 ‘시인의 말’에서 언급되어 있는, ‘틈’을 지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경로는 여러모로 이해의 표지석이 될 수 있다. 보아뱀처럼 시큼한 언어로 다가오는 몇 편의 시를 살피며 김뱅상 시인의 사유 세계로 따라가 보려 한다.
줌zoom을 당긴다 개나리 씀바귀 채송화 엉겅퀴
쑥부쟁이 개망초를 초대한다 사각의 창은 일인
무언극을 한다 가위표시를 하고 손가락을 귀에
대며 입술에 손을 가져간다 연극의 암호는11월
에서12월의플랫폼타고오른다
(중략)
눈만 깜빡이는 여러 개의 창
스펀지밥처럼 노랗게 떠 있는 표정들
하나의 사각 속에 또 다른 평면의 심각한 얼굴들
시들어져 가는 꽃들이 사라진다
-「2020. 일인무언극」 부분
「2020. 일인무언극」의 화자는 카메라를 들고 일인무언극을 한다. 혼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거리의 원근감이 살아 있다. “줌zoom” 기계를 이용하여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은 능력을 가지게 된 화자이지만,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의 사물과는 “연극의 암호”처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어느 들녘에서나 흔히 발견되는 다양한 식물들을 “사각의 창”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만, 시인은 외롭다. “노랗게 떠 있는 표정들”과 “평면의 심각한 얼굴들” 그리고 “시들어가는 꽃들”은 화자의 수정체에 투영된 세계의 단면들이자, 세계 속의 ‘나’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오로지 시인이 바라보는 마음 속 세계관을 경유하여 시적 언어로 발현되고 있다. 시인은 원근의 공백이자 틈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세계와의 관계를 꿈꾼다. 그리하여 시인은 “침묵을 벗어던지”거나 “창을 노크하”는 강렬한 접속 욕망의 화자를 상상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나’로서 채워지지 않는 거리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팡세가 방세로 들린다 한 달은 금세 다가오고 창문이 작은 방엔 햇살 잠깐 비췄다가 사라지고 왜 나는 창문을 열면 정원 나무들이 무성한 곳을 선택할 수 없는지 어딘가로 지랄을 떤다 파편처럼 날아가는 못, 한지랄 이지랄 박지랄 김지랄 정지랄이 받는다 똑같애 너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중략) 뛰어내릴 곳이 없네 오, 지랄 같다 오늘은 팡세가 행운의 숫자 4개라도 물어다 줄까 그런데 어디로 가져다주지 창문을 깨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삐약 삐약」 부분
「삐약 삐약」은 병아리의 울음 소리를 상징하는 제목으로 시의 시작을 알린다. “팡세”가 매달 납입해야 하는 “방세”로 둔갑되는 음성적 언어유희를 통해, 시인은 경제적 비극을 표현한다. 두 이질적인 음성적 질감은 다성적 주체들이 주고받는 “파편처럼 날아가는 못”과 같은 극적(劇的) 대화 상황으로 인해, 보다 치명적인 파국으로 치닫는다. 비속어가 난무하는 “지랄”의 세계와 “뛰어내릴 곳이 없”다는 “나”의 절박함은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고립된 현대인을 표상한다. 현대인들은 ‘우리들’의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파편화되고 소외된 각자의 자아를 발견한다. 하지만 ‘우리 별’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더디고 고정불변이어서 아주 가까운 내일의 희망조차 꿈꾸기 어렵다. 김뱅상 시인에게 “창문을 깨어야겠다”는 시도는 현대인을 옭아매는 사회적 관계의 분열선과 절편선의 ‘검은 구멍’에서 탈주하는 최후의 출구이자, 최선의 돌파구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러한 다짐은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테두리에 잘려 나간 기둥과 창문이, 다가온다
벚꽃 몇 송이 모자 끝에, 붙는다
모자에 허리 잘린 나무들, 온다
정상에 있는 바위, 머리 위에 있고
주변으로 몰려오는, 뭉게구름
눈을 깜빡이다, 멈추어진
사진을 본다, 챙 넓은 모자에서 빠져나온 나,
커다란 모자 속에 내가 있다
-「모자 속에는」 부분
시 「모자 속에는」 “나”가 있다. “챙 넓은 속”을 가진 모자의 세계는 “휘어지”고 “테두리에 잘려 나간” 그리고 “허리 잘린” 존재들이 접속하는 장(場)이 되고 있다. “다가오”기도 하고 “붙”거나 “오”기도 하는 방식을 통해, 분열되고 불구가 된 몸체는 “모자”를 기점으로 새롭게 배치되어 생성되고 있다. 과거의 순간을 “사진”이라는 절단된 단면 속에 가둬두는 이미지를 통해, “나”는 “모자”에서 탈주하는 존재의 의미인 동시에 재영토화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혼란의 세계는 ‘나’가 만들어낸 가상적인 이미지로 감각기관의 혼동을 초래하기도 한다.
귀가 잠들지 않는 밤이다
시레솔 드나들었던
서른일곱 해의 창고에는 어떤 것이 먼저 버려졌을까
안으로 굳게 잠긴 문
다시 두드린다. 문을
두르려도 열리지 않는
(중략)
침묵은 검은 구멍 움푹하게 패고
-「귀」 부분
시 「귀」에서 김뱅상 시인은 시각적 이미지인 “밤”의 시간을 “귀가 잠들지 않는”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 감각의 첨점을 끌어올리고 있다. 비교적 간단하게 명암의 밝기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지각시키는 시각적 신체 기관과 달리, 미세한 음파의 질감과 강도의 정도에 반응하게 만드는 청각적 신체 기관은 시인의 보다 예민한 심연의 사유를 끌어올리는 데에 적합하다. “침묵”과 같은 심연에는, “안으로 굳게 잠긴 문”과 같은 세계를 향한 통로의 단절과 결코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단절에 대한 절박함이 공존한다. 시인에게 “무한대의 침묵”은 벗어날 수 없는 세계 내 불안을 초래하기도 한다.
심야버스 막차 실내등 꺼진다
시간에 쫓긴 맘을 한 잔의 커피와 빵으로 토닥이려 한다
앞으로 세 번째 좌석에서 돌아보는 신이 있다
텁수룩한 수염에 허연 눈동자가 인상을 쓴다
변덕과 짜증이 곰팡이처럼 번져온다
(중략)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돌아본다
종착지까지 시체놀이를 하여야 하나
실눈 뜨고 본다
암호는 늘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고
몇 개의 열쇠를 돌려본다
정신분열 공황장애 조현증
터널이 나와야 MRI라도 찍어볼 텐데
어디쯤에 사는 신인지
-「버스 안에 신이 산다」 부분
시 「버스 안에 신이 산다」에는 현대인의 불안과 오해의 순간이 긴장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즉 “심야”라는 시각적 감각의 취약 배경과 “허연 눈동자”의 분노에 찬 타자 발견이라는 극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화자는 바빴던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는 심야 시간에 노곤한 몸을 이끌고 막차 버스를 타고 위안이 되는 음식물을 섭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화자의 모습에 대해 “변덕과 짜증”의 경계심을 갖는 타자의 눈빛은 시적 화자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극도의 공포감은 화자로 하여금 종착지까지 “시체놀이”를 하면서 갈등 상황을 안전하게 회피해야겠다는 스트레스성 판단을 유도한다. “정신분열 공황장애 조현증”과 같은 현대인의 대표적 정신질환과 그에 따른 의료 검사 도구 “MRI”를 상정하는 화자의 인지 행위는, 종국에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정된다. 그 타자는 “신”이 아닌 “바바리에 멋진 신사”였기 때문이다. 김뱅상 시인은 왜 타자를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했을까. 시인은 타자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공포감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의도하였고, 결국 그러한 타자와의 절대적 거리감으로 인해 자신의 삶조차 온전하게 영위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하였다.
극한적 불안과 파편화된 삶 속에서 아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심리적 신경증으로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김뱅상 시인은 지속적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요청한다. 이는 현대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 생성’과 ‘다양체’ 개념을 강조하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이’에 대한 사유와 닮아있다. 들뢰즈는 기존에 중요시하던 어떤 동일성을 전제하는 ‘사이’가 아니라 ‘사이’ 그 자체에 대한 생성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외적 접속을 통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있어 ‘모든 것의 고유함’을, 무한히 새로운 ‘이-것들’의 긍정적 사유가 절실함을 역설한다. 즉 거대한 논리에 흡수되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닌, 개별자 그 자체로서의 고유함과 차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개개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창문 틈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다가오는 이른 아침 풍경을 훑는다
산과 바위 닿을 듯 창문 밖에 와 있고 곡선으로 이어진 흐린 평원, 아무 곳에나 놓인 듯한 사각 읍면사무소, 희미하게 누워있는 저두 출렁다리 위 바잘 모자 쓴 개미들 오가는, 시간들
딸기 샌드위치 속에 든 검은깨 샐러드를 바라보는, 커피를 마시다가 치즈크림빵을 바라보는, 프루트칵테일 사이로 빠끔 내미는 얼굴 하나, 계란 덮어쓴 행운목이 가져 주는 꽃망울 전구가 상처처럼 다가오는, 찹쌀떡 전등 분위기 잡는, 순간들
벚나무 나목들 사이 초조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 잎들이 햇살에 막 휘날리는 순간, 흰색 티볼리 따라가는 노랑나비떼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았던 것의 간격은 어디에서 오는지
으깨진 토마토 같은 머릿속을 의심해 보는, 찰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순간,」 부분
김뱅상 시인은 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순간」에서, “평원”, “읍면사무소”, “개미들”이 공존하는 배치의 시간과 “샐러드”, “치즈크림빵”, “얼굴 하나”, “꽃망울 전구”, “찹쌀떡 전등”을 바라보는 응시의 순간들, 이 모든 시적 세계를 시인의 세계관 속에서 물리적 배치를 떠나 인지적 혹은 상상적 배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늘 “창문 틈 사이”로 다가오는 물리적 세계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던 세계와 혼융되어 감각될 때, 우리는 그간 놓치고 있던 ‘사이(간격)’의 세계에 대해 직면하게 된다. 이처럼 김뱅상 시인은 기존의 분열증적이고 파편화·관습화된 인지적 감각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것이 비단 사물과 존재와의 접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윤리적 덕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종광
201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주요 평론 「백석 시의 ‘바깥’에서 ‘밝음’으로」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