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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表忠寺)의 표충사(表忠祠) 영역
사당영역은 사명대사.서산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시고있는 표충사(表忠祠) 좌우에 표충서원과 유물관이 있다.
표충사(表忠祠)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기허대사
본관 : 밀양
속성 : 박(朴)
속명 : 영규(靈圭)
법호 : 기허당(騎虛堂)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豊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
서산대사 휴정 [休靜, 1520-1604.1.23]
본관 :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
속성 : 최(崔)
자 : 현응(玄應)
법호 : 청허(淸虛), 서산(西山)
아명 : 여신(汝信)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하여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지만 1594년(선조27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표충사(表忠 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담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표충서원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절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37년)에 사명대사가 강화사절로 일본에 갈 때 그 호송문제와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포로의 송환문제를 다툰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을 새긴목판, 서산대사의 사적을 새긴 목판, 다라니경목판, 금강반야바라밀경, 불설아미타경 등과 같은 불경등이 포함되어있다. 특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과 그 이후 강화사절로서 사명당의 역할을 살필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밀양표충사소장유품 (密陽表忠寺所藏遺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3호)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나라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는 절이다. 이 사당을 당시 서원처럼 보아 표충서원이라 했는데, 사찰에서 관리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때 폐허가 됐던 것을 숙종 40년(1714)에 다시 세우면서,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절의 유품 전시관에는 선조 38년(1604) 일본에 갔다오면서 선물로 받은, 대형 목탁과 북을 포함하여 200여점의 전시물이 있는데, 대부분 사명대사가 사용하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表忠寺 靑銅銀入絲香垸.국보 제75호.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31-2 표충사)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화재청 자료)
사명대사의금란가사와장삼 (泗溟大師의錦란袈裟와長衫.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
조선시대의 유명한 승려 사명대사(1544∼1610)가 입던 가사와 장삼으로, 사명대사는 나이 16세 때 승려가 되어, 임진왜란(1592) 때에는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가사란 승려들이 입던 법의로, 장삼을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던 옷이다. 그의 유물 가운데 금란가사는 황금색의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가로 270cm, 세로 80cm이다. 지금은 색이 담황색으로 변색되고 훼손도 심하여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장삼이란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만든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승려의 옷을 말하는데, 이 옷은 흰색의 무명으로 만들었다.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으며, 군데 군데 훼손은 되었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길이 144cm, 품 55cm이고, 등솔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43cm이며, 짧은 고름이 달려 있다. 이 유물들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승려들의 옷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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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루(酬忠樓)
표충사의 정문으로써 밀양시 교동에 소재한 "밀양향교의 정문인 풍화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의 정문인 독서루"와 양식이 같다.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서원 정문 형태의 누각입니다. 이는 表忠祠를 밀양시 무안면에서 옮겨오면서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위패를 같이 모신 표충서원이 表忠寺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재약산 표충사 (載藥山表忠寺.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竹林寺)이다.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5년(1839)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신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적진에 들어가 회담을 했고, 그 성과로 포로로 잡혀간 3003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고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주위의 뛰어난 경관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통합되어 있는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는 곳이다.(문화재청 자료)
영사각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외가람각으로써 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떼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람각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종교적 건물로, 전남 순천 송광사에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인 세월각(洗月閣)과 척주각(滌珠閣)과 같은 용도의 건물입니다.
봉청필추가람신위(奉請苾芻伽藍神位)
봉청(奉請) : 奉(받을봉) 請(청할청)
필추(苾:향내(향기)-필. 芻:꼴(건초)-추. 필추苾芻:승려 비구)는 인도말로 스님을 뜻하는 비구(比丘).
가람(伽藍)은 절
필추가람 신위(苾芻伽藍神位)가????
말 그대로 하면 비구 곧 「남자스님절」 지키는 신위(神位)
필추가람(苾芻伽藍)이- 먼저 가신(영가) (남)스님(들)이 지켜준다는 뜻인가^^???
가람각(伽藍閣)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가람각으로써 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떼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람각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종교적 건물로, 전남 순천 송광사에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인 세월각(洗月閣)과 척주각(滌珠閣)과 같은 용도의 건물입니다.
나무가람수호신위(南無伽藍守護神位)
나무(南無) :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믿고 받들며 순종함을 이르는 말. 부처나 보살들의 이름 앞에 붙인다.
가람(伽藍)은 절
그러면
봉청필추가람신위(奉請苾芻伽藍神位)와 나무가람수호신위(南無伽藍守護神位)는 같은 뜻 ??? ^^^
사당 영역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 서산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신 유교식 사당
표충서원
표충사(表忠祠)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사당영역
사천왕문
삼층석탑 영역
사당영역을 지나 사천왕문(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는 세변째 관문)을 지나면 비로소 사찰 공간이 나온다.
삼층석탑 영역
대광전 영역
영정약수 옆 계단을 지나면 규모가 크고 연륜이 가득한 여러 동의 전각이 있는 대광전 영역
영정약수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 명약을 찾던 중 황발선인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친히 선사를 찾아와 크게 칭송하나 황발선인이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였다. 왕은 그말에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키고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하고, 사명 또한 영정약수의 이름 따서 영정사라 하였다. 지금도 이 영정약수를 찾는 발길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
대광전 영역
대광전 영역
승탑 영역
효봉대종사 천진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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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豊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보물 제1505호.대구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ㅇ 규격(세로x가로) : 122.9 x 78.8cm
압곡사선사영정(鴨谷寺禪師影幀.대각등계홍제존자사명당. 경북문화재자료 제239호.경북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674)
사명당의 초상화로, 액자의 크기는 가로 82.5㎝, 세로 126㎝이다. 승복을 입고 얼굴과 몸을 오른쪽으로 향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불자를 쥐고 있다. 화폭의 오른쪽 윗부분에 사명당의 상임을 밝히는 글과 함께 지운영이 쓴 3줄의 찬이 실려있다.(문화재청 자료)
사명당영정 (泗溟堂影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2호.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조선시대 승장이었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의 영정으로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방형격자문이 장식된 녹색 상단부 벽면과 돗자리로 구성된 이단구도이며 녹색 장삼에 적색 가사를 수하고 왼손에는 용머리가 장식된 불자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팔걸이 위에 얹고 있다. 불자의 머리장식과 가사의 연결고리(環)는 금분으로 채색하고 화려함을 부각시키고 주조색인 녹색과 적색의 대비효과를 살리면서 승장으로서의 기상을 잘 표현하였다. 화면 상단 향좌측에는 주지백서(朱紙白書)의 ‘대광보국숭록대부홍제존자사명당대선사지진(大匡輔國崇祿大夫弘濟尊者泗溟堂大禪師之眞)’의 화제와 풍원군 조현명(1690-1752)의 영찬이 있다. 화면크기는 가로 81.2cm, 세로 124.0cm이며 세 폭의 비단으로 이어져 있다.(문화재청 자료)
함양용추사송운대사영정(咸陽龍湫寺松雲大師影幀.경남 문화재자료 제326-3호.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962)
조선 중기의 고승인 송운대사(1544∼1610)의 초상화이다. 송운대사의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종봉(鍾峯)이고, 다른 이름은 사명대사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순안(順安)에 가서 휴정과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아왔다.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족좌대(足座臺)를 하고 있다. 왼손에는 불장자를 어깨에 걸친 채 쥐고 있고, 오른손은 의자 손잡이 부분을 살짝 쥐고 있다. 얼굴부분은 황백토를 칠했으며, 윤곽선은 가는 먹선을 사용하였다. 머리부분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하고, 그 위에 가는 먹선과 백선으로 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승복은 남색과 먹색을 혼합한 어두운 회색이며, 그 위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雲寶文)을 장식하였다. 입고 있는 옷과 의자는 대체적으로 엷게 채색되어 밑그림선이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화문석을 배치하여 바닥과 배경을 구분하였는데, 화문석은 바탕에 호분을 바른 뒤 가로로 옅은 갈색 혹은 죽도(竹刀)로 세선을 그어 결을 나타내고 있다. 배경은 녹청색 바탕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을 가득 메워 장식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정조 5년(1781)에 조성된 함양용추사무학대사영정과 인체비례·채색법·선묘처리·귀의 묘사·화문석과 배경처리 등의 표현기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 혹은 적어도 18세기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양 용추사 송운대사 영정은 18세기 조사영정을 연구하는데 학술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
영은사사명당대선사진영(靈隱寺四溟堂大禪師眞影.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1호.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성보박물관)
합천홍제암임난삼화상영정 (陜川弘濟庵壬亂三和尙影幀.경남 유형문화재 제359호.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21)
홍제암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 청허당 서산대사를 비롯한 세 분의 선사 영정이다. 세 분의 선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 특히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이곳에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정을 중심으로 왼쪽에 기허당대선사영정이 있고, 오른쪽에 사명당대선사의 영정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은 녹색 장삼에 홍색가사를 입고 있는데, 안정감있는 자세와 당당한 풍채 및 위엄있는 얼굴에서 승병장으로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기허당의 영정은 짙은 갈색 배경에 붉은 색의 등받이에 녹색의 장삼만을 입고 있는데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다리는 세우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활약을 한 삼화상의 영정은 전체적으로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장식적인 면을 배제하고 인물 각각의 개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뛰어난 색감으로 화면의 품격을 높여 주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