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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산등산길에 진주소씨 소자파 소세양묘역을 탐방하다◑
-일시 : 2011-10-23
-장소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전라북도유형문화재자료 제148호 소자파 묘비(蘇自坡墓碑)와 제159호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탐방코스 : 진주소씨 묘역-서동요셋트장-용화산-선인봉-용화산-서도요세트장 하산
진주소씨 선산이 있는곳은 왕궁면 숙영지 저수지(일명 용화리저수지)윗쪽 용화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나, 평소 승용차로 왕궁을 지날때 멀리서만 스쳐 보았지만 오늘은 직접 답사하고, 약 500여년전 시공을 뛰어 넘어 전라북도에서 제일 오래된 비석이 있는 진주소씨의 묘역을 탐방하고 진주소씨의 문중산 용화산을 등산하다.
지금부터 500년전 사람이 어디에 묻히고 어떤벼슬을 하고 나라에 어떻게 이름을 날리었는지 알면 무엇하랴만 인간의 역사는 선사시대(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기원전 70만년 전)부터 진화해 오고 기록을 남기는 문명시대에 살면서 기록을 통하여 500년전 사람의 삶의 방식을 알기위함이지요.
전수부3기생 친우님!
우리들 삶이 한이 없을것 같아도 10-20년후면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자연으로 아니갈수 있겠소!
제아무리 당대에 잘나가던 사람도 변할수 없는 평범한 법칙과 같이 자연으로 돌아가지요.
괜스레 카페지기는 옛날 유적이나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면 무엇한다고 찾아다닐까...
이땅에 먼저 태어나 먼저 한줌의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이나 현세에 사는 사람이나 이땅에서 살았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도 이땅에서 살아갈것 아닌가요?
이땅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먼저 이땅을 살다 간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생각해보고, 이땅의 아름다운 산천을 여행을 하는것이지요.
500년전 이땅에 살았던 사람도 시공(時空)을 초월하면 현세의 우리와 똑같이 삶의 애증에 몸부림치며 살았음은 유적으로 남아있기에 유적탐사는 전설이 아니고 실제로 살았던 이땅의 이야기를 찾는것이다.
나도 언젠가 10-20년후 생명을 다하면 흙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고귀한 현세의 인생을 열심히 가꾸며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름처럼 흘러간 지난 시절은 다시 돌려놓고 싶어도 오지 않는 시간 새로운 삶의 발자취를 뚜벅 뚜벅 걸으며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내인생의 성찰의 시간을 갖자.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했던가....무슨꽃 열매인지 예쁜꽃나무와 친해지고 싶어 사진에 담다.>
<익산시에서 제작한 소세양신도비에 대한 설명을 적은 간판이다.옆에는 수백년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진주소씨는 고려-조선시대 대단한 명문가임을 용화산 자락 진주소씨 문중산 묘역을 통해 확인 했습니다.
묘의 크기 및 묘앞에 세워진 비로 당시 신분과 세도를 확인 할수 있었답니다.
신도비가 건립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나 진주소씨묘역에는 2개의 신도비가 건립되었더라고......
전라북도유형문화재자료 제148호 소자파묘비와 제159호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와 등이 있는 진주소씨 묘역은 용화저수지 북단인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산록,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소씨 묘역임을 알려주는 안내판 역할을 하는 진주소씨 세천비가 묘역입구부근 길가에 세워져 있다. 진주소씨 세천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용화산 정상, 이곳 용화산은 진주소씨의 선산으로 경계를 알려면 항공촬영이나 해야 알수 있을정도로 넓은 소씨문중 산입니다. 부근 전답도 물론 소씨 문중 땅입니다.>
금마에서 여산 쪽으로 약 2.5㎞를 가면 숙영지 저수지가 나오는데 이 저수지의 동북 편에 길게 늘어 서 있는 무덤 군을 만나게 된다. 누가 보아도 지세가 빼어나 명당자리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선산에 있는 진주 소씨들의 무덤은 위에서 아래로 司果 王公墓와 그 부인인 화순 최씨의 합장묘 → 蘇公 自坡와 그 부인인 개성 왕씨의 묘 쌍분 → 곤암 소선생과 그 부인인 남원 양씨의 합장묘 → 소공 세온지묘와 그 부인인 익산 임씨의 묘 쌍분 → 양곡 소세양공과 그 부인인 정부인 조씨의 묘 순으로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진주소씨 묘역은 잘 단장되고 경관이 수려하여 금방 명당자리임을 알수가 있으며 종중에서 묘역을 잘관리하고 있어 왕의 무덤처럼 보인다.소씨 선영들은 죽어서도 사이좋에 많은 봉분이 어우러져 후손들의 융성을 기원하고 있는것 같다>
<용화산 진주소씨 묘역 중앙에서 숙영저수지(용화리 저수지라고도 함)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아보다. 문화재로 등록된 유적지는 경치가 아름답다. 넓고도 넓은 진주소씨 묘역, 고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임금이 넓은 땅을 사패지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고 하니, 임금의 소자파 소세양 선생에 대한 신임이 대단했음을 알수 있제요. 문화재로 등록된 경치 좋은 유적지 탐사와 명산산행 대한민국 구석 구석 카페지기 자유인은 자연을 사랑하며 찾아 갈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진주 소씨의 무덤들인데 개성 왕씨 부부의 묘가 제일 윗 편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파공을 살펴보면 그 부인이 개성 왕씨로 그 연결관계를 짐작케 한다. 즉 외손봉사를 하는 셈이다. 이 왕씨 부부 무덤 자리의 형국은 蓮花出水形으로 알려져 있는데, 巽方으로 청룡 안산이 조공하니 外孫이 발복하여 흥왕하고, 艮方으로 청룡이 低殘하여 親孫이 흥왕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자리에 왕씨 부부가 묻히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 이 부근의 한마을에 왕씨 부부가 오직 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을 지나던 노승이 굶주림이 심하여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것을 발견했음에도 누구하나 관심을 갖지 아니하는데 이곳을 지나던 왕씨가 살펴보니 숨은 거둔 것은 아니고 간신히 맥은 뛰고 있었다. 이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성심껏 병 구완을 하니 노승은 점차 소생하게 되었고 차츰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한달 여가 지나니 기운을 찾은 노승은 왕씨 부부에게 말하기를 ' 소승이 꼼짝없이 죽을 것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니 그 재생의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이제는 소승이 움직일 만 하니 소승이 약간이나마 아는 地理로써 은공의 은혜에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합니다.' 하며 求山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이 연화출수 형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 노승은 위와 아래로 무덤을 두 자리 잡아주면서 위 자리는 公의 身後之地이며, 아랫자리는 장차 얻을 사위의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앞으로 모월 모일이 되면 더벅머리 총각이 당신 집에 찾아들 터이니 꼭 잊지 말고 그 총각을 사위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그 뒤 노승을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왕공은 그 날을 잊지 않고 기다렸다. 과연 그 날이 되니 한 총각이 찾아들었는데 성씨가 소씨였다. 그분이 자파공인 것이다. 왕씨는 노승의 말대로 그 총각을 후히 대접하고 하나밖에 없는 딸과 혼인을 시켰다. 이후 왕씨 부부가 운명하자 윗자리에 두분을 모시니 외손이 창성하여 봉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후에 사위와 딸이 세상을 떠나자 아랫자리에 모셨는데 이 자리는 發蔭이 빠르고 자손이 번창하여 익산에서 진주 소씨가 名家가 된 것이다. 노승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각기 처지에 맞도록 묘자리를 잡아 주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명당이란 아무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아 생전에 덕을 쌓아야 좋은 자리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노승을 집에 데려다가 병구완을 했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한 것이다. 즉 마음속에 선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아들이 없어 香火가 끊어질 경우에 처하였지만 외손을 통하여 그것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상속은 노비와 제사가 가장 중시되었다. 일반적으로 고려나 조선시대의 상속제도는 장자위주로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보급되기 전에는 자녀들에게 골고루 재산을 분배하였으며, 제사도 아들·딸 구별 없이 돌아가면서 지냈다. 그러나 성리학적 윤리 즉 주자가례가 일반화되면서 가부장적 사회로 변화되면서 남자의 권위가 강조되고 여성에게는 三從之道의 禮에 따른 질서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 사과 왕공의 묘의 바로 아래에 자파공 묘부터는 低殘의 흔적이 사라지고 發蔭이 빠르며, 자손이 흥왕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파공묘에서 남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 곤암공묘가 가장 화려하다고 한다.
소씨는 본관이 진주(晋州)로 시조는 慶으로 이분의 이름을 딴 진주의 蘇慶洞에 기원하며 여기서 8대까지 지내다가 고려 말기에 이르러 9대째가 되는 상호군 希哲대에 와서 진위(현재의 경기도 안성군)으로 옮겼다가 다시 자파의 증조인 遷대에 완주 이서로 이거하였다가, 자파가 선친인 效軾의 유언에 따라 익산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진주 소씨가 익산으로 이주하기 전에 거주하였던 곳이 완주임을 알 수 있다. 그곳이 완주군 이서면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서면 산정리에는 자파의 조부와 부친의 묘가 모셔져 있다. 특히 자파의 조부인 사정공 禧의 묘는 소위 '벌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진주 소씨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학문과 문장으로 또는 충효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양곡 소세양의 6대조인 乙卿은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광정대부 판도판서와 개성윤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조인 遷은 사재감 소윤으로 宗簿寺正을 증직 받았다. 증조인 禧은 조선조에 들어와 무과에 급제하여 부위 중군시정의 벼슬을 하였다. 조부인 效軾은 세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부장주부를 지내고, 외직으로 용안, 흥양, 부안 현감과 한성부 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양곡의 부친인 自坡는 자가 眉 로, 문종때(1485년)에 완주군 이서면에서 효식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그는 성종 14년에 진사과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자 못하다가 20여년 후인 중종때에 이르러 내시교관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남평현감을 거쳐 사직서령과 의빈부 도사에 기용되었다가 모친의 노쇠로 외직을 청원하여 구례현감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인이 개성 왕씨인데 고려조의 國姓으로 5대조 震이 대장군을 지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현재의 완주군 이서면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수대에 걸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였던 가문이었다. 때문에 당시 이 지역의 사대부 집안들이 혼인하기를 꺼려하는 바가 있었으나 양곡의 조부인 판서공이 부인의 현숙함을 듣고 이 혼인을 하게 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양곡의 모친은 15세에 혼인하여 54년간을 해로하였는데 한결같이 부군의 내조자로서 선비를 사랑하고 자선을 배풀었으며, 아랫사람을 덕으로 대하였고, 자녀의 교육에는 엄하게 하였다고 한다. 자녀를 7남 1녀를 낳았는데 자녀중 요절한 이가 한 분도 없었으며, 만년에 3남이 일찍 죽었으나 당시 자손 내외와 증현손이 모두 1백여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되었다고 하니 판서공의 안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진주 소씨 가문을 익산에서 빛나게 한 것은 바로 왕씨 부인 소생의 7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형제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장남인 世溫은 음사에 올라 벼슬이 임유진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며, 숙부인 起坡와 더불어 중종때의 삼포왜란에서 왜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둘째인 世良은 자는 元友요, 호는 困菴으로 성종 7년(1476)에 출생하여 나이 21세인 연산군 2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이어 중종때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검열을 거쳐 대간, 시종의 지위에 있다가 용담현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청렴으로 正道를 구하였으며 결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아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사헌부의 지평, 장령, 응교, 사간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이후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남원부사로 내려 왔다가 1528년에 작고 하였다. 그의 사후 익산지방의 유림들이 나서 1656년에 미륵사지 북서쪽 대나무 숲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華巖書院에 아우인 세양과 함께 배향되었다. 셋째가 세공(世恭)으로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老圃亭이다. 어려서 그는 중형인 곤암을 쫒아 침식을 잊고 면학에 힘썼으나 과거에 두차례나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이름을 널리 떨치지 못하였다. 후에 숙부인 기파와 더불어 왜적을 정벌하고 벼슬이 수군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넷째가 世儉으로 자는 約而며, 호는 雙峰이다. 성종때에 출생하여 중종 8년(1513)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용안, 무주, 금구, 김제, 함안등의 수령을 역임하고 73세에 벼슬을 마감하고 고향에 돌아와 詩酒로서 세월을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사후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다섯째가 세양(世讓)으로 기사년(1509, 중종 4)의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여섯째가 世得으로 자는 君直으로 중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흥양 현감을 역임하였다. 선정으로 이름이 나 縣民이 송덕하였다고 한다. 일곱째가 世臣으로 호는 恭謹으로 벼슬은 僉樞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같이 7형제중 대과 급제자가 둘이요, 무과 급제가 한명, 소과에 1명이 입격하였으니 형제들이 모두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소자파선생의 신도비는 전라북도에서 제일 모래된 비로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등록 되었으며, 아들 소세양의 벼슬이 자꾸 올라가면서 소자파 역시 가선대부 이조참판과 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를 추증 받았다.>
<소자파선생의 신도비는 건립연대가 중종 21년(1526)으로 익산지역에 전해오는 금석문으로서는 가장 빠른 것이다.>
<소자파선생과 그 부인인 개성 왕씨의 묘로 쌍분이다.>
☞소자파 묘 신도비(소세양부친)
-위치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윗쪽
-문화재자료 제148호(1999.7.9)
-건립연대 : 중종 21년 1526년
-생몰연대 : 소자파[蘇自坡, 문종 1년(1451)~중종 19년(1524)]
소자파 묘비는 용화산 동쪽 경사면의 진주(晋州) 소씨(蘇氏) 선산묘지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소자파선생의 묘비로 용화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며 인근의 들녘과 산야가 모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소자파묘비는 기단과 비신,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모습이 완전하고, 비문의 글씨도 비교적 선명하며 그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이수(螭首)와 기단부에 용무늬와 국화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남곤과 이행(李荇)이 짓고 글씨는 김희수(金希壽)와 성세창(成世昌)이 썼다. 소자파는 자가 미수(眉叟)이며, 양곡 소세양의 부친으로 성종 14년 14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빈부 도사를 거쳐, 중종 19년 1524년 구례의 임지에서 73세에 순절하였다. 그런데 아들 소세양의 벼슬이 자꾸 올라가면서 소자파 역시 가선대부 이조참판과 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를 추증 받았다.
소자파는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사도진첨절제사 소세온(蘇世溫)·대사간 소세량(蘇世良)·마량진첨절제사 소세공(蘇世恭)·소격서참봉 소세검(蘇世儉)·좌찬성 소세양(蘇世讓)·흥양현감 소세득(蘇世得)·소세신(蘇世臣)·딸은 유사 김지(金地)에게 출가하였다.
소자파는 풍채가 뛰어나고 언변이 좋았으며, 10여년에 걸쳐 조정에 등용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비리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소자파의 묘비는 전체높이가 3m, 방형묘석 위에 세워진 비신은 높이 165cm, 폭 93cm, 두께 23cm로 이수를 갖춘 통비(通碑)다. 방향묘석은 전면과 후면에 2개의 정사각형 선을 긋고 내부에 국화문으로 조각하였다. 또한 윗부분은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이수는 용 한 마리가 앞발을 치켜들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이 묘비는 중종 21년 1526년에 건립되어 인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전해진다.
용화산 자락 소씨문중의 산에 가보면 많은 묘가 있고 그에 못지않게 비석 또한 아주 많다. 가는 곳마다 오래 되어 이끼가 끼고 색상이 변한 묘비와 신도비가 있어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유교에 의해 좋은 터를 잡고 대대손손 매장을 하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가려면 구절양장의 굽은 길로 가야했던 도로변이었지만, 이제는 넓은 도로가 새로 뚫렸다. 확장된 1번국도 덕분에 좌측으로는 시야가 가리게 되었으나 앞을 전혀 못 보는 정도는 아니며, 옆으로 높게 올라선 도로가 신경쓰이는 상황이다.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만들고, 낮은 곳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고 모두가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산은 누가 뭐래도 산다워야 하고, 물은 어쨌거나 물다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럼 산에다 묘를 쓰는 것은 어디에 속할까. 죽은 후에 한줌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묘를 만들어 장사지내는 것이 맞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장이나 조장 등도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하니 누구가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소자파묘비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원래의 길로 제각에서 걸어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는 서쪽 모퉁이에서 차량으로 산위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코스다. 그런데 ‘소자파묘비’는 대략 윗부분에 있으니 차량을 이용함이 좋을 듯하나, 바로 아래에 ‘소세양신도비’가 있어 두 곳을 모두 보려면 처음부터 걸어 올라가는 것이 정석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한 벌안의 묘지에 두 가지의 문화재가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소자파는 아들인 소세양의 직급이 올라가면서 더불어 직급을 높이 받는 형국이 되었다. 거기다가 그것은 소자파 본인이 죽고 난 후의 일이라서 권력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그런데 소자파의 묘비가 문화재로 선정된 것은 그의 직급이 높아서가 아니다. 묘비의 건립연대가 인근에서 가장 빠르며, 비의 조각이나 형태 등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자파묘비의 내용을 일부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군(君)의 이름은 자파(自坡)요, 미수(眉叟)는 그의 자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효식(效軾)으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에 증직 가선대부 병조참판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희(禧)로 중군사정(中軍司正)이며 증직 통정대부형조참의며, 증조의 이름은 선(僊)이며 사재소윤(司宰少尹)인데 증직 통훈대부종부시종이다. 성화 계묘(성종14년 1483년)에 시골에서 거행하는 성균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가 되었다. 중략, 대과인 문과에 몇 번이나 응시하여 번번이 떨어졌으나 군의 학행이 출중하다고 천거해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로 옮기고 다시 남평현감으로 나갔다. 홀로 계신 장모님을 위하여 외직을 구하니 구례현감으로 나가서 있던 중 갑자기 감기로 앓다가 갑신년(중종19년 1524년) 9월초8일 기사(己巳)에 생을 마치니 향년73세였다.
아들 소세양이 황해도 관찰사로 추대되어 있었기에 자파에게 은공을 내려 증직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의 직함을 주며 11월에 익산의 탄곡리에 장사지냈다. 군의 사람됨이 너그럽고 무게가 있으며 장자의 풍도를 갖춰 사물의 이해득실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았다.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한 번도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헐벗고 굶주림을 도와주는데 충분치 못함을 걱정하였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동을 볼 때 타고난 천성이라 여겨졌다.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여러 아우들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대접하는 습성이 늙어감에 더욱 두터워지므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선을 쌓는 일이 곡식을 심는 것과 같으니 모종내고 김을 매며 곡식이 다 여물면 잔치 초대를 하기를 기다리네. 후략. 가정5년(중종21년 1526년) 5월
<전북문화제 제159호 소세양신도비에 서보다. 소세양신도비는 1564년 조선 명종19년 6월 홍섬(洪暹)이 짓고 그의 아들 수(遂)가 비문을 썼다. 그 뒤 1584년 영의정 강녕군 홍섬이 비문을 추가로 지었다.>
<양곡 소세양선생과 그 부인인 창평 조씨의 묘이다.>
<양곡 소세양선생의 시비를 후손들이 1994년 소세양묘역 우측에 세우다.>
☞소세양(蘇世讓)묘 신도비(1486~1562)
-위치 :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용화산 동쪽 산기슭
-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1998. 1. 9 지정)
-건립연대 :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숯골(炭谷) 선산에 소세양(1486∼1562)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진주소씨익산종회소유로 1998년 1월 9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1564년 조선 명종19년 6월 홍섬(洪暹)이 짓고 그의 아들 수(遂)가 비문을 썼다. 그 뒤 1584년 영의정 강녕군 홍섬이 비문을 추가로 지었는데, 소세양의 후손 이선연이 1697년 군수로 왔다가 이 내용을 종질 소세영으로 하여금 비문에 적도록 하였다. 기단, 비신,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이수와 기단부에 용문과 연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
또한 1994년 후손들이 돌거북의 등 위에 새로운 신도비를 세우니 지금은 2개가 나란히 존립하고 있다.
소세양은 연산군 10년 1504년 19세에 진사, 중종 4년 1509년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전라도 관찰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종1품 좌찬성까지 올랐다. 우찬성으로 재직시에는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에 사직을 하는 등 어려움도 있었으나, 명종 이후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에 이르렀다. 명종 17년 1562년 77세에 별세하여 익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20권 70책이 전한다.
중종9년 1514년에는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얻었으니, 이는 문관 중에서도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학업에만 열중하는 특별휴가를 주는 것을 말한다.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또는 퇴제(退齊), 퇴휴당(退休堂)이라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송설체로 유명하였는데,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
소세양의 묘가 있는 곳은 가문의 선산이다. 그래서 여러 묘와 비석이 있는데 여기 소세양의 묘에도 신도비 외에 별도의 비석을 세워두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여러 묘가 한 곳에 모여 있고 별도의 신도비가 있는 관계로, 묘비가 석상의 바로 뒤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년대(建立年代)는 비문의 말미에 "가정사십삼년갑자유월일(嘉靖四十三年甲子六月日)"이라 되어 있으므로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신도비의 해서체 비문은 강녕군 홍섬이 지었고, 경기도 관찰사겸 병마사수군절도사 심전이 두전을 썼다.
비신은 높이 218cm, 폭 103cm, 두께 25cm 의 대리석인데,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석(方形臺石)위에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을 얹어놓았다. 좌대인 방형대석은 가로 196cm, 세로 112cm, 높이 90cm의 크기로 전·후면에는 세 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양을 넣었고, 양측면에는 두 개의 정사각형 내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현재 얹혀있는 개석은 후대에 비석의 이수(?首)가 파손되어 넘어질 위험이 있어 다시 만들어 놓았는데, 그 크기는 처음보다 두 배가량이 된다.
소세양신도비의 신비(新碑)는 1994년 2월에 성백효가 번역하고 13대손 소진태가 세웠다.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명종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홍섬이 짓고 그 아들 수가 쓴 신도비가 오랜 세월에 자획(字劃)이 이해할 수가 없어 안타깝게 여기던 중 종손들이 의논한 후 원문을 번역하여 그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여 새 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제 후세들이 새 비문을 통하여 공의 업적을 소상히 알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대석의 바로 앞에 원래의 이수가 놓여있는데 석질은 화강암으로 가로 128cm, 세로 77cm, 두께 43cm이다. 한 마리의 용이 우측을 향하고, 몸통 부분이 여러 겹으로 또아리를 튼 형태인데, 힘차고 굵게 조각되어 있어 깊은 구름무늬가 있다.
신도비란 원래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다.
여기에는 사적(事蹟)을 적어 무덤의 동쪽이나 남쪽에 세우고, 비는 남향을 하도록 했다. 조선 왕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과 세종의 홍릉이 있으며, 문종이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니 더 이상 세우지 않았다. 한편 관리들에게는 2품 이상에게만 세웠으며, 3품 이하의 관리들은 조금 작은 비석을 세우고 이를 묘갈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3품 이상의 관리는 신도비가 허용되었으나 현존하는 신도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신도비는 묘소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길잡이로 진입로의 밖에 세워 여기부터가 묘역임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밋밋한 돌을 세우는 것보다는 고인의 생전 업적을 적음으로써 후세에 본이 되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기에 신도비는 선조의 불망비와도 같은 성격이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신도비기 많은 계단을 오른 후에 세워놓는 예도 있으며, 마을 어귀에 세워서 미리 알리는 곳도 있다. 아니면 여기처럼 조상의 그늘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선산의 특성 때문에 본인의 묘소 옆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묘비가 순수한 고인의 인적사항을 적는 것이라면, 신도비는 길안내를 겸한 고인의 안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세양신도비는 진주소씨 선산에 있는 소세양 묘소의 비석이다. 이 산은 아버지 소자파의 묘부터 시작하여 후대 일가의 묘가 있는 곳이다. 소자파묘는 맨 위쪽에 있으니 우백호를 거쳐 차량으로 진입도 가능하다. 그러나 소세양신도비는 중간쯤에 있으니 천상 제각의 정문에서 걸어 올라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용화산 아래의 용화리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인 서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동쪽은 1번 국도가 바지춤을 추겨 올려놓았으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름답기는 하다.
양곡은 금마의 아석정이 있는 뒷산 깃대숲에 태허정(太虛亭)을 지었다.
태허정의 절경은 중국의 사신과 주고받던 문답을 적은 익산군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익산이며 그중에서고 태허정이 그 중심인데, 편액은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양곡은 이 태허정의 아래 즉 대나무밭 위에 퇴휴당(退休堂)을 지었는데, 이곳은 소세양 노년의 은거당(隱居堂)이었다. 은거당은 그 규모가 커서 거당(居堂)과 누당(樓堂)을 따로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이 누당에 있을 때에 전라도의 수령들 모두가 한 번씩은 들러 인사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수령은 관인을 차고 방문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커다란 은행나무에 걸어두고 빈손으로 들어갔다하여 퇴휴당을 괘인정(掛印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마을의 이름을 은행나무 정자라는 뜻으로 행정(杏亭)이라 하는 것은 그때부터 연유된 것이다. 현재는 태허정과 퇴휴당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소세양이 학문에 뛰어나고 의지가 굳은 사람임은 앞에서 보아왔다. 그런데 여색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덤덤하였으나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한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그만 감동하여 자신의 뜻을 꺾고 하루를 더 머물렀다는 풍설도 전한다. 이때 황진이는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여러 남자 중에 유일하게도 소세양에게만 마음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이는 황진이가 지은 시 ‘알고 싶어요.’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소세양은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를 잘 써서 필명(筆名)도 높았다.
조선 중종 때 대제학이 6명 있었는데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 대제학을 지낸 사람은 소세양이 유일하다.
⇒명월 황진이와 소세양의 이야기
임방(任埅, 1640-1724)의 수촌만록(水籿謹錄)에 보면 평소 몸가짐을 조심하는 소세양은 “남자가 여색에 빠지면 남자가 아니지”라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재주와 인물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한다. 내가 이 계집과 30일만 지내고 30일이 지나면 즉시 헤어지겠다. 그리고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소세양이 친구들에게 황진이를 유혹해 한 달간 동숙을 하리라 약속을 하고 송도에 와서 황진이를 찾았다.
소세양이 먼저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榴 - 석류나무 류(유)”.... 편지엔 단 하나의 한자만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본 황진이 역시 하나의 글자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漁 - 고기잡을 어”였다.
“榴”의 뜻은 보면 碩(석), 儒(류), 那(나), 無(무), 游(유)가 된다.
해석을 하면..... "큰 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 "가 된다.
즉 "어서 와서 나랑 놀자" 라는 뜻이다.
황진이의 답장 “漁” 의뜻은...
高(고), 妓(기), 自(자), 不(불), 語(어)로.
해석을 하면..... "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높은 기생인 나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먼저 꼬시지 않으니 네가 먼저 직접 와서 말해라"가 된다.
둘은 어쨌든 한 달간 동숙을 하였고 이별 할 때는 황진이가 멋진 시 까지 남겼다.
奉別蘇陽谷世讓(봉별소양곡세양)
月下庭桐盡(월하정동진) 달빛아래 뜰 안의 오동은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과 한척사이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은 취하여도 술잔은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냉)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 향기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후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움은 물결처럼 끝이 없이 흐르네
황진이가 누(樓)에서 읊은 위 시를 듣고, 소세양은 “그래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하고 사흘을 더 묶었다 한다.
그리고 소세양은 황진이의 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시로 보답을 하였다고 한다.
달빛 아래 소나무만이 푸르르고
눈에 덮인 한포기 꽃들은 고개를 떨구었구나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슬픈 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술은 그저 강물에 흘러갈 뿐
흐르는 강물은 나의 마음을 실어 보내주지 않고
저 멀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한포기 꽃은
아름다운 낙화를 보여 주는구나
내일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 되어 나의 몸을 짓누르리
한 달 후 슬픈 이별을 시로써 주고받은 후 헤어졌지만,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그 뒤로도 서로 인편에 시로써 안부를 전했다고 한다.
이때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지은 시가 황진이 사후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린 그녀의 시구가 현대가요로 재탄생되어 들을 수가 있었다. 바로 이 노래가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이다. 님에 대한 내 사랑이 궁금하여 투정과 애교와 날 두고 떠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이다.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황진이 일화(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소자파선생신도비와 소세양신도비 원문 및 번역문==
★益山 蘇自坡神道碑(소세양부친)
有明朝鮮國 贈 嘉善大夫 吏曺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儀賓府都事 蘇公墓碑銘 幷序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南袞 撰嘉善大夫 行成均館大司成 金希壽 書蘇君眉叟卒曁葬袞旣未得絮酒以奠又不修吊賻之儀朋友道缺恒以永負地下爲歉適今猥以銘事見囑雖不文忍復辭諸君諱自坡眉叟其字考諱効軾漢城府判官 贈嘉善大夫兵曺參判祖諱禧中軍司正贈通政大夫刑曺參議曾祖諱遷司宰少尹 贈通訓大夫宗簿寺正成化癸卯君擧於鄕就成均試中格作上舍生風度秀偉發言有章一時名士莫不傾心願交聲聞日彰待聘十餘年屢爲有司者所擯乃歎曰吾之不得則命也仰事俯育中樂亦存焉何必矻矻求榮官爲哉遂抛其業而南歸時參判公亦自扶安任所休官而去優游鄕曲君侍奉不離側課僮力田以供酒食費佳辰今節必設壽筵務盡親懽不計有無暇則敎諸子以詩書禮義惟日不足囂囂有終焉之意正德庚午申文景公掌銓薦君學行初援內侍敎官君以父命黽勉應辟未幾遷義盈庫主簿出宰南平縣以十考皆最進一階除社稷署令尋丁內艱去服闋起爲儀賓府都事以母老丐外得求禮縣在官忽感疾數日而終甲申九月初八日己巳也享年七十三 朝廷以君子世讓曾爲黃海道觀察使推其 恩贈君嘉善大夫吏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是年十一月壬申開竁于益山治北炭谷里之原窆焉君爲人寬厚長者與物無畦畛平居口未嘗言人過失賙恤窮乏如恐不及至於孝友則其天性也凡事親遇諸第一以至誠老而愈篤鄕黨稱之君娶司果王碩珠之女生六男一女男長曰世溫蛇渡鎭僉節制使次曰世良登丁卯科司諫院大司諫次曰世恭馬梁鎭僉節制使次曰世儉昭格署參奉次卽世讓登己巳科吏曺參議次曰世得登乙亥武科興陽縣監女適儒士金地蛇渡生三男曰巡進士曰遠曰近大諫生四男曰遲曰連兼司僕曰逢登乙酉科藝文館檢閱曰逕馬梁生一男二女男曰建女長適成秀蕃次適權彭壽參奉生一男一女男曰適女適進士李若海參議生一男三女男曰遂女適尹義衡餘在室興陽生三男曰邂曰逅曰迂曾孫男女無慮數十人嗚呼一家簪紳多至八九人門戶之盛世無其比而況大諫與參議方負重望於時其擢大拜躋峻級指日可待則 贈典之及君者亦將不止於此矣君在庚辰歲嘗爲參判公乞銘不腆之文實鏡在石今而爲君又錣此銘吾尙何以爲心耶噫其銘曰積善之道 如種穀然 蒔而耨之 稔可待旃 此理之常昧者疑焉 盍觀蘇氏 餘慶之延 久矣參判 愛始爰菑 君迺是承 式克播之兩世一心 不獲不食 益自培㙲 以滋以殖 君不責報報之者天 俾錫爾類 有子皆賢 荀家八龍 馬氏五常 趾美儷休 于古有光曷其致此 惟善之積 君旣考終 煥有寵錫 錫之伊何天官是陟 維父曁子 俱爵亞卿 人所共榮 其死猶生 鬱彼炭谷 迤于南紀刻銘在玆 永示千祀嘉靖五年五月 日 立石司譯院正 朴址 篆
⇒소자파신도비 번역 해석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행통훈대부(行通訓大夫)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소공(蘇公)의 묘비명(墓碑銘)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남곤(南袞)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성균관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 김희수(金希壽)는 비문의 글씨를 쓰다.소군(蘇君) 미수(眉叟)가 사망하였으나 장례(葬禮) 때에 나 곤(袞)은 술 한 잔을 올릴 수가 없었고 또 조부(弔賻)하는 예의를 갖추지 못하여 붕우(朋友)로서 도리를 어겼으므로 항상 지하에 있는 친구를 영구히 저버렸다는 이유로 불만족스러웠다. 마침 지금 외람되게도 명문(銘文)을 짓는 일을 부탁받았으니, 비록 문장에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차마 다시 사양하겠는가. 군(君)의 이름은 자파(自坡)요, 미수(眉叟)는 그의 자(字)이다. 아버지 효식(効軾)은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할아버지 희(禧)는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추증되었다. 성화(成化) 계묘년(1483, 성종 14)에 군은 향시(鄕試)에서 합격하여 성균시(成均試)에 나가서 입격(入格)하여 상사생(上舍生)이 되었다. 풍채와 태도가 뛰어나게 훌륭하고 말을 하면 문장이 되었으니, 한때의 명사(名士)들이 마음이 군에게 쏠려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명성이 날로 드러나 초빙(招聘)되기를 기다린 10여년 동안에 여러 차례 유사(有司)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얻지 못한 것은 명(命)이다.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구부려 자녀를 기르는 중에도 즐거움도 있으니 어째서 반드시 분주하게 잘난 벼슬길을 구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그때에 참판공(參判公)도 스스로 부안(扶安)의 임소(任所)에서 벼슬을 팽개치고 떠나와서 향곡(鄕曲)에서 하는 일없이 한가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군은 모시고 받들 때에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인을 데리고 힘써 밭을 갈아서 술값과 밥값을 내어서 공양(供養)하였다. 아름다운 계절이나 명절(名節)에는 반드시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어버이가 기쁘시도록 하는 데 힘을 다하되 겨를이 있거나 없거나를 따지지 않는데, 자제(子弟)들을 시서(詩書)와 예의(禮義)로써 가르칠 때에는 오직 날이 부족한 듯 분주하게 끝맺음을 좋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중종 5)에 신문경공[申文景公 : 신용개(申用漑)]이 인재(人才)의 전형(銓衡)을 맡아 군을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하니, 처음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除授)되었다. 군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힘써 부름에 응하여 얼마 안 되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로 옮겨졌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남평현(南平縣)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열 번의 고과(考課)에서 모두 가장 뛰어났으므로 1등급 승진하여 사직서영(社稷署令)에 임명되었다. 잠시 뒤에 할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떠났다가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가 되었다.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바깥의 수령자리를 원하여 구례현감(求禮縣監)의 자리를 얻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갑자기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이날이 갑신년(1524, 중종 19) 9월 8일 기사일이었으며, 군의 향년은 73세였다. 조정에서 군의 아들 세양(世讓)이 일찍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는 것으로 추은(推恩)하여 군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하였다. 이해 11월 임신일에 익산(益山)의 관할(管轄) 북쪽 탄곡리(炭谷里)의 언덕에 묘혈(墓穴)을 파고 하관(下棺)하였다. 군의 사람됨은 너그럽고 온후하여 어른과 사물(事物)에 대해 경계가 없었고, 평상시에 입으로 일찍이 남의 허물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궁핍한 사람을 구하고 도와줌에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효도와 우애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천성(天性)이어서 무릇 어버이 섬기고 동생을 상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으며 늙을수록 더욱 돈독히 하였으므로 향당(鄕黨)에서는 그를 칭송하였다. 군(君)은 사과(司果) 왕석주(王碩珠)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세온(世溫)으로 사도진첨절제사(蛇渡鎭僉節制使)를 지냈고, 다음은 세량(世良)으로 정묘년(1507, 중종 2)의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다음은 세공(世恭)으로 마량진첨절제사(馬梁鎭僉節制使)를 지냈고, 다음은 세검(世儉)으로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을 지냈으며, 다음은 바로 세양(世讓)으로 기사년(1509, 중종 4)의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고, 다음은 세득(世得)으로 을해년(1515, 중종 10)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다. 딸은 유사(儒士) 김지(金地)에게 출가하였다. 사도(蛇渡)는 3남을 낳았는데, 진사(進士)인 순(巡)과 원(遠)과 근(近)이다. 대간(大諫)은 4남을 낳았는데, 지(遅)와 겸사복(兼司僕)을 지낸 연(連)과 을유년(1525, 중종 20)의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지낸 봉(逢)과 경(逕)이다. 마량(馬梁)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건(建)이고, 딸로 맏이는 성수번(成秀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권팽수(權彭壽)에게 출가하였다. 참봉(參奉)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적(適)이고, 딸은 진사 이약해(李若海)에게 출가하였다. 참의(參議)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遂)이고, 딸은 윤의형(尹義衡)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고 집에 있다. 흥양(興陽)은 3남을 낳았는데, 해(邂)와 후(逅)와 우(迂)이다. 증손자와 증손녀는 무려 수십명이 된다. 아! 한 집안의 벼슬아치가 많아서 8~9인에 이르니 문호(門戶)가 성대하여 세상에서 그에 비할 것이 없다. 하물며 대간과 참의는 당시에 한창 두터운 명망(名望)을 받았으니, 정승(政丞)에 발탁되고 높은 작급(爵級)에 오를 날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으니 증전(贈典)이 군(君)에게 미치는 것도 장차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군이 경진년(1520, 중종 15)에 일찍이 참판공(參判公)을 위하여 명문(銘文)을 청하여 좋지 않은 문장을 참으로 비석에 새겼는데, 지금 군을 위하여 또 이 명문을 엮으니 내가 오히려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는가? 아! 그 명문에 이르기를, 선(善)을 쌓는 도리는 마치 곡식을 기르는 듯하여 모종을 내고 김매어서익으면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네. 이것이 떳떳한 이치이나혼미한 자들은 의심을 가지니 어찌 아니 소씨(蘇氏)의 남은 경사(慶事)가 이어지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인가? 진실로 참판(參判)께서비로소 묵은 밭을 일구시니 군(君)이 곧 이 일을 계승(繼承)해서 본받아 능히 파종(播種)하였다네. 두 세대(世代)가 한 마음으로 마음 뺏기지 않아 복록(福祿) 구하지 않으며 더욱 스스로를 북돋으니 이로써 불어나 증식(增殖)되었다네. 군은 보답을 받지 못했으나 보답해 주시는 자는 하늘이시니 그대의 후손(後孫)에게 복(福)을 더해주어 자식들이 모두 어질었다네. 순숙(荀淑) 집안의 용(龍)처럼 뛰어난 여덟 아들과마씨(馬氏)의 다섯 형제처럼아름다움을 잇고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였으니 위와 같은 영광(榮光)이 있은 것이라네. 어떻게 여기에까지 이르렀던가? 오직 선(善)을 쌓았을 뿐이니 군은 이미 고종명(考終命)하였으나 환하게 은총(恩寵)을 내려줌이 있었다네. 내려주신 것은 무엇인가? 천관(天官 : 이조)에 올라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아경(亞卿 : 참판)의 관작(官爵)을 받음에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으니 그들은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있는 것 같도다. 저 탄곡리(炭谷里)가 울창해져서 남방(南方)의 형승(形勝)까지 이어지니 여기에 묘비명(墓碑銘)을 새겨 영원히 만세토록 보여주려 하노라. 가정(嘉靖) 5년(1526, 중종 21) 5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사역원정(司譯院正) 박지(朴址)는 전액(篆額)을 하다.
★益山 蘇世讓神道碑 左賛成蘇公神道碑銘(篆 題)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衞都摠府都摠管 世子貳師蘇公神道碑銘幷 序 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 提學江寧君洪暹 撰 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沈銓 篆 蘇氏出晋州有諱乙卿仕高麗官至版圖判書判書之後諱禧入我 朝爲中軍司正司正生諱効軾終於漢城判官判官生諱自坡卒儀賓都事寔娶開城王氏碩珠之女以成化丙午六月庚辰生公公諱」世讓字彦謙號陽谷生而秀異年纔七八己好學問日月將就不煩師資性於著述詩句驚人筆法亦得松雪體弘治甲子中進士乙丑燕山主以律詩取士公作居第一正德丙寅匿名書獄起公枉被逮繫不」果赴殿試是秋 中廟反正錄公原從功己巳捷別試權知承文院副正字俄選入弘文館爲正字庚午移承政院注書吏曹擬公弘文博士時南徼警急朝野多事邊報出納文書塡委政院以公敏於史才」啓仍注書陞授弘文館副修撰 中廟銳意文治遵英廟故事揀一時文學之士七人 賜長暇讀書終至典文衡者五人公其一也癸酉爲正言拜修撰 顯德王后未得祔 顯陵幾六十年士林間無」不欲請復位號不敢言公於 經筵始發其端辭氣慷慨左右聳聽 臺諫侍從隨以賛勸久乃得 允移葬 顯陵祔于大廟時論多之秋陞副校理甲戌爲吏曹正郎丙子銓曹 啓曰本曹郎官非不爲淸選」未若臺諫侍從之爲重如某當不竢官滿隨闕注擬 上允之盖以補闕備問非公莫可也歷軍器掌樂僉正吏曹欲擬公臺官以資級不逮難之 上特給一資授司憲府掌令病遞爲成均司藝司成己」卯薦拜議政府舍人以事罷未幾復入弘文館爲校理庚辰冊 仁宗爲世子高選僚屢授公侍講院輔德遷 司諫以事遞爲司僕副正又爲舍人旋拜司憲府執義移典翰三薦爲舍人辛巳陞拜直提學兼」藝文館應敎國制將主文柄者例兼此職縉紳榮之坐微事遷司成冬翰林院修撰唐皐等賫頒今 皇帝登極詔朝延遣李容齋荇迎接境上所帶從事極一時之選公與鄭湖陰士龍從而住返其所著述大」爲華使稱賞竣事還復直提學壬午日本遣詩僧大原東堂等來聘大臣及禮官擧公爲宣慰使才華之美爲遠人嘆服是冬擢陞堂上階拜承政院左副承旨癸未觀察黃海道因事罷甲申拜吏曹叅議是」歲丁內艱丙戌服除欲便養出尹全州己丑大提學李荇 啓曰如某合居文翰之職不宜久滯卑秩 上特加公嘉善階拜漢城府右尹未數日 上以禮官湏 用稽古之士特授禮曹叅判夏將如京師」賀 聖節 上曰有老親者在法勿叙三百里外某有老親可使遠赴上國乎其遞之冬爲觀察全羅道庚寅秋以事見罷辛卯叅判刑曹夏陞判禮曹論者言其驟陞遞授同知中樞秋求爲淸洪道水軍」節度使將以便於覲養大臣謂公不可外補留不果遣公卽疏丐歸養辭職南來壬辰牧洪州不卑小官修擧廢墜勞來還集吏民懷惠大夫人樂於鄕土不肯隨公之洪公棄官歸養癸巳」 上奪公志復禮曹叅判命乘馹上來夏觀察淸洪道巡至洪州民皆以手加額曰我公來矣秋陞授資憲階拜漢城府判尹冬 遞爲知中樞府如京師賀生 皇太子禮部尙書夏言名籍一時聞公有能詩聲」求見公作稱美不己贈以書冊及東還 上亦覽公行稿命題賦詩數首而進錫賚便蕃俄判工曹言者以公入中朝與學士唱和將有後獘 論執甚力竟遞復判漢城尹冬懇乞歸養 上命本道觀察使」優遺食物又給擔夫輿致母夫人于京乙未判刑曹夏移戶曹兼都摠管知春秋館丙申兼知義禁府 帝遣翰林院修撰龔用卿等頒誕太子詔以公爲遠接使至義州以病辭 上命留平壤調疾仍充迎」慰使丁酉判兵曹冬移判吏曹公以久處權地爲嫌力辭不許未幾特陞崇政階拜議政府左賛成兼知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子貳師推公貴追贈都事公議政府左賛成判官公兵曹」判書司正公吏曹叅判公以貳公典文職任俱重辭出誠懇 上曰卿有才德豈不堪處敦勉不允己亥復判吏曹旋復爲左賛成所以必欲兼貳師也春 帝冊封太子遣翰林院修撰華察等來頒詔公以」遠接使迎送于江上應接之際不但周旋中禮酬答詩篇輒爲華使所賞至於揮涕而別其後我國使臣入朝華公必來問公消息戊戌星州史閣火謄寫春秋館所藏實錄 命公奉安特賜餞宴于濟川亭以」寵之 秋公往覲大夫人悶其老甚䟽乞留養 上採廷議始許解官便養辛丑丁外憂公衰年持服柴毁己甚癸卯服闋判中樞府公欲引疾不就職 上特命判刑曹爲論者所沮甲辰」 仁宗嗣位命收叙公又遭人彈命不果行自是之後無意仕宦安於蕭散搆得凈室於竹林之下規作終老計扁其堂曰退休以示其意然愛君之念老而不衰如遇人自 王京歸者必歛袵改容先問」 上軆如何餘無一語及乎朝政壬戌十一月偶患寒疾因不起實二十二日壬寅也壽七十七公資禀明粹襟度温雅端重恬靜愼默寡言外似守拙內實果决篤於自守人自起敬不敢狎侮旣喪賛成公事母夫」人盡孝母夫人旣老公以從宦遠遊常懷憂憫上章乞養殆無虗歲出宰南邑陪繡幰奉甘旨不欲離側而顧被知遇不得久於外補平居務欲順適親意得人餽遺輒悉輸母夫人厨藏使得隨意施與親歿分」異臧獲田土必擇老而瘠者公之二兄世恭世儉年皆八十餘公年亦近八十接屋而居子 姪之居又多隣比晨夕過從以爲常頗有柳公綽昆弟之風公憫伯氏老而喪室常備衣服以進爲諸兄先辦供具輪」日遞行次及子姪肩輿要致山椒水次嘯咏徜徉老幼扶携久而不倦聞者莫不歆艶喜賑窮乏如見親戚隣里寒餓無吿者亦必賙給乃己收集前賢書籍閣諸四辟萬軸牙籤公處其下夙興梳洗整衣冠閱」書史有若嗜欲不以寒暑而廢灌花蒔木靜觀時序之換易縉紳間求得先墓碑誌遺稿序䟦及記題舘宇索筆跡爲屛障者相從於門而公不喜誇張靳於答應故人罕有得之者平昔交游或從他鄕遣人候」公則公方山冠野服據烏几揮談塵望之若神仙中人未病謝事逍遙桑榟一子兩婿俱佩左符近公致養享淸閒之福二十餘年世羨其榮焉嗚呼公之德之才之位之壽豈非天之所以厚於公而隱卒崇終」之典獨不及於身後君子惜之夫人曹氏承文判校浩之女克守內範配君子無違德先公歿生一男三女男曰遂淳昌郡守能守庭訓女長適尹義衡次適判官李壽次適主簿李殷郡守娶義盈庫令李震文」之女義衡生一女適叅奉申橃判官生二男三女男曰天裕曰天祐女幼主簿生一男三女男曰天貺女適姜大虎次適李贄側室有二子曰迹曰邇卜得癸亥正月二十七日丙午葬于益山郡北囘龍峯下子」坐午向之原與夫人同塋葬旣完郡守纍然來哭謀不朽於暹曰子盖銘諸公卽吾先君文僖公玉署舊僚因先君己聞公平生行蹟又甞從事文墨多被奬進以此知公最詳今不敢辭以不能文銘曰」 瞻彼南紀山川秀異生此國士弸于其內炳乎其外賦與者大餘事華藻演綸掌誥士林高蹈事在宗社有難言 者殆天啓我誠能悟主顯廟有祔歸功我后行莫如孝養以色笑子職是效推爲孝悌克兄克弟鄂彼常棣母曰嗟子我閭我倚早歸來只王曰咨汝久矣虗佇汝留予助王憫孝思爰命輿致事光靑史期調鼎鼎胡俾休退散逸自在丘壑忘世夢餘丹陛奄爾長逝龍囘虎顧流峙氣聚中安公墓我銘神道辭不阿好千載有考」嘉靖四十三年甲子六月 日孤哀男 遂書 陽谷之葬暹實銘之而竪石焉其平生事業昭著無餘矣第其中有曰爲論者」所沮又曰又遭人彈等數語詞意晻眜後人觀之不知其所彈論者爲何事而」抑又疑其一廢不復者有底故歟故表而出之以著其實如左」 中廟晩年尹任以外戚武夫專權自恣淫穢之行播聞中外公甞會槐院與諸」相語偶及衞俗淫亂世族在位相窃妻妾之事公曰當今之時有如此人者則」何以爲之左右相目嘿然任聞其議己驚怖憤怨凡所以爲公搆陷之謀無所」不至公慮中傷乞養南歸翌年辛丑丁外艱及其服闋除職任勢尙熾竟被論」沮時尹元衡亦以外戚共執國柄任常語元衡曰某乃力排外戚之人不可近」元衡尤忌之以是任雖敗死而元衡之權益重 公之又遭人彈職此之由而文」武之日炙熱薰天若察察記錄則慮有後禍於存歿故未得奮筆直書顯言其」實使公守正不阿之隱德不得暴白於後世其咎乃由於我每用痛惜今則元」衡亦以敗歿公論大伸紀實前後勢不容己茲故追補志銘之闕漏發明見廢」之實迹庶有以慰公於泉下而自贖其願望囘隱之咎云」 萬曆甲申原任領議政洪暹識後百有十四年歲丁丑外裔德水李善淵來守」此郡與外玄孫之居邑底者李成漢相議追刻仍使其從姪世榮書」
⇒소세양 신도비 번역 해석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貳師) 소공신도비명(蘇公神道碑銘) 병서(幷序)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行 禮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글을 짓고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京畿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심전(沈銓)이 전액(篆額)을 한다.소씨(蘇氏)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휘(諱) 을경(乙卿)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판서의 후손 휘(諱) 희(禧)가 우리 조선 조정에 들어와서 중군사정(中軍司正)이 되었고 사정이 효식(效軾)을 낳았는데 한성판관으로 벼슬을 끝마쳤다. 판관이 자파(自坡)를 낳았으니 의빈도사(儀賓都事)로 벼슬을 마쳤는데 이분이 개성 왕씨(開城王氏) 석주(碩珠)의 따님을 맞이하여 성화(成化) 병오년(1486년) 6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세양(世讓)이요, 자(字)는 언겸(彦謙)이고 호(號)는 양곡(陽谷)이다.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특이하였으며 나이 겨우 칠팔세에 이미 학문을 좋아하여 나날이 진취함이 있어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글을 짓고 쓰는데 타고 났으니 시구(詩句)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필법은 또한 송설체(松雪體)를 익혔다. 홍치(弘治) 갑자년(1504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을축년에 연산군(燕山君)이 율시(律詩)로 선비들을 선발할 때 공이 1등이 되었으나 정덕(正德) 병인년에 익명의 투서사건에 따른 옥사가 일어나자 공이 억울하게 체포되어 전시(殿試)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해 가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공은 원종공훈(原從功勳)에 책록되었다. 기사년(1509년)에 별시에 합격하여 권지(權知 : 임시직)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곧이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다. 경오년에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는데 이조에서 공을 홍문관 박사로 추천하였다. 이때 남쪽국경이 위급하여 조야에 일이 많아 국경의 보고서와 출납하는 문서가 많이 쌓였는데 승정원에서는 공이 사관(史官)의 재주가 민첩하다고 하여 임금께 아뢰어 그대로 주서로 있게 하였다. 승진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이 당시 중종이 문치에 확고한 뜻을 가지고 영묘(英廟 : 세종)의 옛 일을 본받아 당시의 문학을 잘하는 선비 7명을 선발하여 장기간의 독서휴가를 주었는데 마지막에 대제학의 평가에 도달한 사람이 5명이고 공도 그중 한명이었다. 계유년에 정언(正言)이 되고 수찬에 임명되었다. 현덕왕후(顯德王后 : 문종의 부인)를 현릉(顯陵 : 문종대왕릉)에 함께 모시지 못한 것이 거의 60년이 되었는데 사림에서는 그 작위와 호칭의 회복을 청하려고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감히 말을 못하였다. 공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는데 말하는 기상이 감정이 복받치고 격앙하니 좌우에서 두려워하며 듣다가,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뒤쫓아 함께 권하니 오래 지나서 임금의 허락을 얻어서 현릉을 이장하여 종묘에 모시니 당시의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가을에 부교리로 승진하고 갑술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병자년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본조의 낭관(郎官)이 청선(淸選 : 학식이 뛰어난 인재로서 직위는 낮으나 후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간과 시종의 중요함과는 같지 않습니다. 아무개와 같은 사람은 임기의 만료를 기다리지 말고 빈 자리가 있으면 임명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결점을 채우고 자세히 자문하는 것은 공이 아니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군기시(軍器寺)와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이조에서 공을 대관(臺官)에 추천하자 했으나 품계가 낮아서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특별히 한 품계를 더해주어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司藝)와 사성(司成)이 되었다. 기묘년에 의정부 사인(舍人)에 추천되어 임명되었다가 뜻밖의 일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 경진년에 인종(仁宗)을 세자로 책봉하여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을 세자궁의 관리로 선발하니 공이 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 사간으로 옮겼다가 뜻밖의 일로 체직되어 사복시(司僕寺) 부정(副正)이 되고 또 사인이 되었다. 다시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전한(典翰)으로 옮겼다가 추천되어 세 번이나 사인이 되었다. 신사년에 직제학에 승진 임명되어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으니 국가의 제도에 문병(文柄 : 문장을 주관하는 권한과 책임)을 맡은 사람이 의례히 이 관직을 겸하는 것이어서 벼슬아치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서 사성으로 옮겼다.겨울에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등이 명나라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자 조정에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을 보내 국경에서 영접하게 되었다. 함께 가는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히는 것은 한 시대의 지극히 영예로운 것으로 공(公)과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따라갔다가 돌아 왔는데 그들이 지은 글이 중국 사신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일이 끝나고 돌아와 다시 직제학이 되었다.임오년에 일본이 시승(詩僧) 대원동당(大原東堂)등을 파견하여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자 대신과 예관이 공을 천거하여 선위사(宣慰使)로 삼았는데 문재(文才)의 아름다움에 먼 나라 사람까지 탄복하였다.이해 겨울에 당상(堂上)의 품계에 발탁되어 승정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계미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뜻밖의 일로 파직되었다가 갑신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병술년에 탈상(脫喪)을 하고 어머니를 편하게 봉양하고자 전주부윤이 되었다. 기축년에 대제학 이행(李荇)이 임금께 아뢰기를 “ 아무개 같은 사람은 문한(文翰 : 문장)의 직책에 있는 것이 합당하니 오랫동안 낮은 자리에 머물러 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하여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하였다. 며칠 안 되어 임금께서는 예관(禮官)은 모름지기 옛일을 잘 상고할 줄 아는 선비를 기용해야 한다고 하여 특별히 예조참판에 임명하였다. 여름에 성절(聖節)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 서울로 가게 되자, 임금이 말하기를, “늙은 어버이가 있는 사람은 삼백리 밖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는 것이 법에 있다. 아무개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멀리 중국에 보내는 것이 옳겠는가? 교체하라”고 하셨다. 겨울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경인년 가을에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신묘년에 형조참판이 되고 여름에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의논하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승진한다고 말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가을에 청홍도(淸洪道 :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기를 희망하니 이는 장차 어머니를 뵙고 봉양하는데 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공을 외직에 보임할 수 없다고 하며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으니 공은 즉시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실 것을 빌고는 사직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임진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낮은 관직을 천하다 여기지 않고 황폐하고 쇠퇴한 것을 수리하여 세우고 은덕을 베풀어 백성들이 와서 모이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여 공을 따라 홍주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공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봉양하였다.계사년에 임금께서 공의 뜻을 굽히게 하여 다시 예조참판에 임명하고 말을 타고 속히 올라오도록 명하셨다. 여름에 청홍도 관찰사가 되어 고을을 순방하다가 홍주에 이르자 백성들이 모두 공경하게 이마에 손을 얹고 “우리 공(公)께서 오셨구나!”라고 하였다.가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지중추부사로 옮기고 [명나라]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 서울에 갔다. 예부상서(禮部尙書)인 하언(夏言)은 그 당시 명성이 자자했는데 공이 시(詩)에 능하다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공이 지은 것을 구해보고는 칭찬을 그치지 않으며 서책을 선물하였다.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임금께서 또 공이 사행(使行)중 지은 원고를 보시고 시 몇 수를 지어서 바치라고 명령하시고는 상을 여러 번 내리셨다. 곧 공조판서가 되었다. 대간에서 공(公)이 중국조정에 들어가 학사들과 함께 시를 주고받은 것 때문에 장차 훗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힘써 고집을 부리니 마침내 교체되어 다시 한성판윤이 되었다. 겨울에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 모시기를 간청하니 임금께서는 관찰사에게 음식물을 넉넉히 지급하고 또 짐꾼과 가마를 내어 어머니를 서울로 보내도록 명령하셨다. 을미년에 형조판서가 되고 여름에 호조로 옮겨 도총관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고 병신년에는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명나라 황제가 한림원수찬 공용경(龔用卿)등을 보내 태자의 탄생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되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의주에 도착했는데 병으로 사직하니 임금께서는 평양에 머물러 병을 조리하라고 명령하시고 이어 영위사(迎慰使)를 맡기셨다.정유년에 병조판서가 되고 겨울에 이조판서가 되자 공은 권력 있는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꺼려서 힘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고 지경연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임하였다. 공(公)이 지위가 귀해짐에 따라서 도사공(都事公 : 부친)을 의정부좌찬성으로, 판관공(判官公 : 조부)을 병서판서로, 사정공(司正公 : 증조부)을 이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공이 이공(貳公 : 삼정승을 보좌하는 자리)이 국가의 문학을 관장하는 것은 직책과 임무가 모두 무거운 것이라 하여 성의와 정성을 다해 사양하니 임금께서는 “경(卿)은 재주와 덕망이 있는데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는가?”하고 두터이 격려하시며 허락하지 않았다. 기해년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좌찬성이 되었으니 반드시 이사(貳師 : 세자의 스승)를 겸직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봄에 명나라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고 한림원수찬 화찰(華察)등을 파견하여 반포 조서를 가지고 왔다. 공이 원접사로서 압록강 가에서 사신을 맞이하고 떠나보냈는데 접대할 때에 일을 주선하는 것이 예절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시를 주고받아 화답하면 곧 중국사신이 칭찬을 하였다. 마침내 서로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후에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면 화공(華公)이 반드시 와서 공의 소식을 물었다.무술년에 성주(星州)의 사각(史閣 : 실록을 보관한 사고)이 불에 타서 춘추관에 소장된 실록을 베껴 쓰고 공에게 봉안(奉安)을 명령하였는데 특별히 제천정(濟川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은총을 내리셨다. 가을에 공이 어머니를 가서 뵙고는 그 많이 늙으신 것을 걱정하여 고향에 머물러 어머니 모시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임금께서 조정의 의논을 채택하여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 편히 봉양하도록 허락하셨다. 신축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공(公)은 늙은 나이에 상을 치르니 애통한 마음에 건강을 매우 해치게 되었다. 계묘년에 탈상을 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몸에 병이 들어 직무에 나가지 않고자 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형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논의하는 자들이 방해하였다. 갑진년에 인종(仁宗)이 왕위를 잇자 공을 등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람들의 탄핵을 당하여 명령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 이후로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롭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편안히 여기어 대나무숲 아래에 깨끗한 집을 지어 만년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그 집을 이름하기를 퇴휴(退休)라고 하여 그러한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늙어서도 없어지지 않아 서울에서 돌아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친 뒤 먼저 임금의 안부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으며 그 외에 조정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임술년(1562년) 11월에 우연히 한질(寒疾 : 추위를 무릅쓴 데서 생긴 병)을 앓다가 그 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니 실로 22일 임인일 이었다. 향년은 77세이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발고 순수하고 생각과 도량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당정하고 중후하며 평온하고 고요하였으며 삼가하고 침묵하여 말이 적었다. 외면으로는 우직함을 지키는 듯하나 내면은 실로 과단성이 있었다. 스스로 절조를 지키는 데에 독실하니 남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다.찬성공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고 어머니가 이미 늙으셨는데 공이 벼슬길을 따라 멀리 가 있으니 항상 걱정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거의 그냥 보낸 해가 없었다. 남쪽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 아름다운 수레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며 옆을 떠나려 하지 않았지만 임금의 지우(知遇 : 자기의 인품, 재능을 알고 대우해 주는 것)를 입어 외직에 오래있지 않았다. 평소 부모의 뜻에 힘써 순종하고자 하였고 남들이 음식물을 선물하면 곧바로 어머니의 부엌 창고에 다 드려서 마음대로 남에게 베풀고 줄 수 있게 하였다.부모가 돌아가시자 노비와 전답을 나누어 분가하는데 공은 반드시 늙은 노비와 척박한 땅을 골라 가겼다. 공의 두 형인 세공(世恭)과 세검(世儉)은 모두 80여세이고 공의 나이 또한 거의 80세인데 지붕을 접하고 살았으며 자식과 조카들의 거처도 또한 이웃에 많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는 것이 일상사였으니 자못 유공작(柳公綽 : 당나라때 절도사를 지낸 사람) 형제들의 습속이 있었다.공은 큰형님이 늙어서 부인을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항상 의복을 준비하여 드렸고 여러 형들을 위하여 음식그릇들을 갖추어 매월 번갈아 행하였다. 차례가 자식이나 조카에게 이르면 가마로 모시고 산마루나 물가에 가서 시를 읊고 거닐며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 서로 부축하고 이끌고 다녔는데, 이러한 일을 오랫동안 그만두지 않으니 듣는 사람마다 부러워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마치 친척을 보는 것처럼 하니 마을의 춥고 배고프고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을 또한 반드시 도와주고 나서야 그만 두었다. 옛날 어진 이의 서적을 수집하여 사방의 벽에 쌓아두고 많은 서적에 아첨(牙籤 : 책의 표제를 적은 상아로 만든 꼬리표)을 붙이고 공은 그 아래에서 거처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로하고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데 유별나게 좋아하여서 춥거나 덥거나 그만 두지 않았다. 꽃에 물을 주고 묘목을 심으며 세월이 바뀌는 것을 고요히 관찰하였다.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선조의 묘비문이나 지문(誌文), 유고(遺稿)의 서문이나 발문(跋文), 건물의 기문(記文), 제액(題額)을 얻어 구하거나 필적을 얻어 병풍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공의 집에 찾아 왔지만 공은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응답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얻어간 사람이 드물다. 평소 사귀던 사람이 혹 타향에서 사람을 보내 공의 안부를 물어오면 공은 시골 사람의 투박한 의관을 하고 검은 안석(案席)에 기대어 유창하게 언론을 펼치니(晉나라 王澄의 편지에 나오는 휘담주(揮談麈)의 고사) 바라보면 마치 신선세계의 사람 같았다.병들기 전에 벼슬을 사직하고 상재(桑梓 : 고향)에서 노닐었는데 한 아들과 두 사위가 모두 수령으로 있으며 공을 가까이에서 지극히 봉양하여 맑고 청빈한 복을 이십여 년이나 누렸으니 세상에서 그 영화로움을 부러워하였다. 아! 공의 덕과 재주와 지위와 수명은 어찌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베푼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높이는 것은 유독 공이 사후(死後)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군자들은 애석하게 여기노라.부인 조씨(曺氏)는 승문판교(承文判校) 호(浩)의 따님인데 가정의 규범을 훌륭히 지키고 군자의 배필이 되어 덕을 거스르지 않았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수(遂)는 순창군수를 지냈는데 가정의 가르침을 능히 지켰다. 장녀는 윤의형(尹義衡)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판관 이수(李壽)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주부 이은(李殷)에게 시집갔다. 군수는 의영고령(義盈庫令) 이진문(李震文)의 딸을 맞이하였고 의형(義衡)은 1녀를 낳아서 참봉 신발(申撥)에게 시집보냈다. 판관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천유(天裕)와 천우(天祐)이고 딸은 어리다. 주부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천황(天貺)이고 장녀는 강대호(姜大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이지(李贄)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 두 아들이 있으니 적(迹)과 미(邇)이다. 계해년 정월 27일 병오일로 날을 가려서 익산군(益山郡) 북쪽 회룡봉(回龍峯)아래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과 함께 모셨다. 장례가 끝난 뒤 군수(장남)가 매우 힘든 모습으로 와서 곡(哭)을 하고는 불후(不朽 : 후세에 전한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움을 가리킴)의 일을 섬(暹 : 홍섬)에게 상의하며 “그대는 어째서 명(銘)을 짓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즉 우리 아버지 문희공(文僖公)과 옥서(玉署 : 홍문관)의 옛 동료이니 아버지를 통하여 이미 공의 평생의 행적을 들었고 또 일찍이 문장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자주 칭찬하고 추천해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이로써 공을 가장 상세히 아는데 지금 감히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다. 명(銘)하노니,저 남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아름답고도 기이하여 이곳에서 나라의 선비 낳았도다.마음속은 가득하고 밖으로는 빛나게 드러나니 하늘이 부여한 것은 크구나.그 나머지 일은 아름다운 문장이니 임금을 뜻을 넓히고 임금의 문장을 담당하여선비중위 으뜸이로구나.일이 종사에 관계되어 말하기 어려웠는데 비로소 하늘이 우리를 인도하시었네.정성으로 능히 군주를 깨닫게 하여 현묘(현릉 : 문종 왕후의 능)를 함께 모시니 공이 우리 왕후에게 돌아갔구나. 행실은 효도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온화한 웃음으로 봉양하였고자식의 직분을 힘써 다하였네.형제간에 이를 미루어 형과 동생이 능히 화목하니 놀라운 저 형제들의 우애로구나.어머니가 “아! 아들아, 내가 너를 기다리니 어서 돌아오너라.”하시고왕께서는 “아! 그대여, 겸허하게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이니 너는 머물러 나를 도우라.” 하셨도다.왕께서 효도하는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이에 가마로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으니 일이 청사(靑史)에 빛나는구나. 훌륭하게 국가를 경영하기를 기대하였는데 어찌 물러가 쉬게 하였는가? 은퇴하여 한가하게 편안히 지내는구나.깊은 산골짜기에서 세상일을 잊어 버렸지만 꿈속에서도 임금 생각하더니 갑자기 영원히 가버리시네.용이 돌아들고 범이 돌아보는 곳 물 흐르고 산 있어 기운이 모인 곳그 중에 공의 묘소 편안하구나.내가 신도비에 명한 것이 아첨함이 아니니 영원히 상고함이 있으리라.가정(嘉靖) 43년 갑자(1564년) 6월 일에 아들 수(遂)는 글을 쓴다.양곡(陽谷)의 장례에 홍섬(洪暹)이 실로 명(銘)을 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평생의 사업이 밝게 드러나고 빠진 것이 없다. 다만 그중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방해하였다.’ 또 ‘사람들의 탄핵을 만났다.’는 등이 몇 가지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밝지 못하여 후세 사람들이 볼 때 그 탄핵한 의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고 또한 한번 쫓겨나 다시 기용되지 못한 것은 숨은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드러내어 그 사실을 밝힌다.중종(中宗) 만년에 윤임(尹任)이 외척의 무인으로서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방자하니 그 더럽고 음란한 행실이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공이 일찍이 괴원(槐院 : 승문원)에서 여러 정승들과 만났는데 위(衛)나라의 풍속이 음란하여 세족(世族 : 대대로 벼슬을 하는 높은 집안)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서로 부인과 첩을 간통한 일이 우연히 언급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요즘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니 좌우에서 서로 눈만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윤임이 그 의논을 듣고 놀라서 두려워하며 원한을 품었으니 이 때문에 공을 모함하여 해치려는 모략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이 남이 중상(中傷)할까 우려하여 어머니의 봉양을 청하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다음해 신축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탈상하게 되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윤임의 세력이 아직도 번창하여 마침내는 저지하는 의논을 당한 것이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또한 외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함께 잡고 있었는데 윤임이 항상 윤원형에게 말하기를 “아무개는 외척을 힘써 배척하는 사람이니 가까이 할 수 없다.”라고 하니 윤원형이 더욱 싫어하였다. 이 때문에 윤임은 비록 패배하여 죽었지만 윤원형의 권력이 더욱 무거워져서 공이 또 사람들의 탄핵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무가 날로 성해지고 기세가 하늘같으니 만일 상세히 살펴서 기록한다면 훗날 죽고 사는 데에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붓을 휘둘러 바른 대로 글을 써서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공(公)의 정도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는 숨은 덕이 후세에 밝혀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허물은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매번 원통하고 슬펐는데 지금은 윤원형도 또한 죽었고 공론(公論)이 크게 신장되어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지명(志銘)의 빠진 부분과 [공이 관직에] 기용되고 파직된 사실을 추가로 보충하니 거의 지하에 계신 공을 위로함이 있을 것이고, 그 은둔하고자 했던 허물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만력(萬曆) 갑신년(1584년)에 원임(原任) 영의정 홍섬이 기록하고 114년 뒤 정축년(1697년)에 외가의 후손 덕수(德水) 이선연(李善淵)이 이 군(郡)에 군수로 왔다가 읍에 살고 있는 외가의 현손(玄孫) 이성한(李成漢)과 함께 상의하여 추가로 글을 새기고 이어서 그 종질(從姪) 세영(世榮)에게 쓰도록 하였다.
★소세양부인조씨묘표
☞원문
貞夫人曺氏之墓嘉靖丁酉十月 日加貞敬亡妻曺氏系出昌平承文院判校浩之女生于弘治辛亥年十三歸于我歲癸未封貞夫人甲申秋我先府君違背夫人自京奔喪悲哀摧毁羸瘵日甚至今年二月忽患風痺初十日癸亥終于第越四月初九日辛酉卜兆于先府君墓南數十步許窆焉生一男五女男卽遂年甫十歲委之以纕而不克廬女長適尹義衡次適李壽皆業儒餘幼夫人心無表▨外和而內明柔嘉之德聞于宗黨以吾之昏愚不陷於罪僇而有今日實賴內助方規偕老之計而善不食報假于世纔三十有六而止天乎神乎何其忍也酷也嗚呼自甲申迄于玆歲我家無祐凶禍相仍回視炭谷之原已成纍纍之塚此吾所以日夜撫膺而長慟者也遂濡血以書志吾無窮之哀嘉靖紀元之五年五月十五日蘇世讓哭誌
⇒번역 해석
정부인(貞夫人) 조씨(曺氏)의 묘(墓)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 32) 10월 일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죽은 아내 조씨는 본관이 창평(昌平)으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조호(曺浩)의 딸이다.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 22)에 태어나 13세에 나에게 시집왔고, 계미년(1523, 중종 18)에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갑신년(1524, 중종 19) 가을에 나의 선부군(先府君)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부인은 경성(京城)에서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슬퍼하고 서러워하다 몸을 손상하여 날로 심하게 허약해져갔다. 그러다가 올해 2월에 갑자기 중풍으로 마비되어 10일 계사일에 집에서 임종하니, 달을 넘겨 4월 9일 신유일에 선부군의 묘(墓) 남쪽 수십 보쯤 되는 곳에 터를 잡아 하관(下棺)하였다.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바로 그때의 나이가 겨우 10세였으므로 상복은 입었으나 여막(廬幕)은 지키지 못했다. 딸로 장녀는 윤의형(尹義衡)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이수(李壽)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업유(業儒)이며, 나머지는 어리다.부인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겉으로는 온화하였으나 속은 분명하였다.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婦德)으로 일가친척에게서 칭송을 들었다. 내가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죄와 욕됨에 빠지지 않고 오늘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부인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다. 바야흐로 법도는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하려고 했는데, 선(善)에 대한 보답 받지 못하고 세상에 산 것이 겨우 36년에 그쳤으니, 하늘이시여! 신이시여! 어찌 차마 그리도 혹독한 것입니까? 아! 갑신년(1524, 중종 19)에서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은 천지신명의 도움이 없었고 흉악한 재화(災禍)가 서로 이어졌다. 탄곡(炭谷)의 언덕을 돌아보니 이미 다닥다닥 연달아 있는 무덤들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어루만지며 길이 통곡하는 이유이다. 마침내 피눈물을 흘리며 써서 나의 끝없는 슬픔을 기록한다.가정(嘉靖) 기원(紀元) 5년(1526, 중종 21) 5월 15일에 소세양(蘇世讓)은 곡하며 기록한다.
낙 화 유 수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이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상산에 봄날이 가네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꼬불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드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 청춘은 언재 또 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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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화친구 대단한 역사탐방이네 용화산에 가끔산행은 했지만 진주소씨의 문중은 이제야알겠군 공부잘했네...
한봉친구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잖은가?
우리가 사는 가까운곳에도 찾아보면 추억에 남을수 있는 유적지가 이곳 저곳에 있더라고............
취미를 개발하여 즐거운 삶을 여행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