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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1. 현대 한국 교회 배경
한국 현대사의 기점은 1945년 8.15 해방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민족은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국제 냉전 체제의 성립과 이에 편승한 국내의 분단 지향적 세력들에 의해 남북한의 분단 시대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민족의 해방은 한국 천주교회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으나, 민족의 분단으로 교회도 분단되었으며, 교회는 남북한 당국의 종교 정책들이 드러내고 있던 특성에 따라 각각 위축과 발전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교회는 6.25 동란이라는 동족 상잔의 전쟁 과정에서 고통 받은 남북한의 민족과 더불어 큰 피해를 받았으며, 휴전 이후 남북한의 교회도 서로 상이한 길을 걸어왔다. 북한 교회는 시달리며 이른바 “침묵의 교회”로 전락했고, 남한의 교회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갔다.
한편, 해방 이후부터 서구 문물의 무분별한 수입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전쟁은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휴전 이후 남한 사회에서는 전쟁 피해의 복구와 민주주의의 신장이 최대의 과제였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쳐, 군사 정권이 수립되어 개발 독재론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주류는 1960년대 말엽부터 권위주의 정권과 대치하는 가운데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의 보장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정부 당국의 탄압을 받아야 했지만, 한국 천주교회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1962년에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종전의 대목구들이 교구로 승격되었고, 교구장 주교들은 공의회 등에 참석하여 세계 교회의 주요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화”(Aggiornamento)를 기치로 내걸었던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쇄신과 선교적 역할 그리고 민족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해방 이후 개발 독재를 통한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안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 등 많은 사회 문제들이 쌓여가고 있었으며, 교회는 사회 정의의 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979년의 10·26 사건과 12.12 쿠데타를 거쳐 제5공화국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게 되었으며, 다시 1987년 6월의 민주 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5, 6공화국의 정치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한국 교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1981년)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1984년)을 기념하고,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성식을 바로 한국에서 거행하게 되었으며,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년)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세계 교회에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 분단 시대의 개막과 한국 교회(1945∼1962)
8.15 해방은 한국 천주교회에도 감격적인 기쁨을 안겨주었다. 민족 해방으로 인하여 이제는 금지된 성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우리말로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족 해방이 성취된 날이 바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으므로 당시 우리 나라의 교회는 민족의 해방을 한국 교회의 주보이신 성모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모님의 선물’인 해방에 감격한 전국의 상당수 교회에서는 ‘해방 축하 기념식’과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다.
해방 직후(1945.8.17.)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세계 평화의 회복에 감사하고 건전한 정부 수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전체 신자들에게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교회는 우선 기도를 통해 자신의 기쁨과 소망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 함께 스펠만 대주교가 입경하여 전쟁과 탄압에 시달리던 한국 천주교회를 위로하였고(1945.9.8.), 곧이어 연합군 환영 미사와 환영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1945.9.28.). 또한 해방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가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참석한 이 환영식에서 김구는 중국의 천주교회가 우리 나라의 독립을 후원해 준 데 대하여 감사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하던 미군정과는 달리, 교회는 이 환영회를 개최함으로써 독립 유공자인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그 주요 인물들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한편, 해방 직후부터 한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민족의 분단과 더불어 교회도 분단을 겪게 되었다. 당시 남한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북한의 교회는 사정이 달랐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종교의 자유를 공언하였지만, 교회에 대한 직간접의 탄압이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남한의 교회에서는 일제 말에 휴간된 「경향잡지」를 속간하고(1946.8.1.), 「경향신문」(1946.10.6.)과 「가톨릭 청년」 등을 다시 발행하여 올바른 언론의 전개를 위해 노력하며 선교를 위한 전열을 정비해 나갔다. 그런데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남한 교회는 북한의 교회가 공산주의자로부터 받고 있던 탄압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합병된 가톨릭 국가인 라트비아나 리투아니아, 그리고 소련군이 진주했던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 교회가 겪고 있던 곤경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교황 회칙 등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한 교회는 교회의 활동에 현실적으로 위협을 주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해 배격하는 자세를 더욱 분명히 취하게 되었고, 교회의 강단과 언론 기관에서는 반공 이념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해방은 교회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므로, 교회의 발전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과거 자신의 행적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반성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검토와 반성을 전제로 하여 교회는 변혁된 새로운 사회에 대처했어야 했다.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 간 남한의 교회는 선거 참여 등을 계몽하며 독립 촉성을 기원하였고, 교황청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부터 한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기간에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통한 간접 선교의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즉, 당시의 교회는 교육 운동에도 박차를 가하여 논산의 ‘대건중학교’를 비롯 각종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가톨릭교육협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병원, 진료소,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 사업 기관들이 전국 도처에 설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 운동이나 사회 사업의 전개는 해방된 민족에 대한 교회의 봉사를 다짐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청년 운동과 가톨릭 액션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교회는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권에 기반하여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며 ‘대한천주교총연맹’을 결성(1949.8.22.)해서 가톨릭 운동의 전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신심 운동과 순교자 현양 사업을 위해서도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 사회 복지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북한에서도 ‘평양 정권’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심화되어 갔고, 남한의 교회는 비교적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는 반면, 북한에서는 교회에 대한 혹심한 탄압이 가해지게 되었다. 북한은 공산 정권의 수립 직후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과 성직자 및 지도적 신자들의 투옥을 강행시켰으며, 6.25 동란 직전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하여,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0년의 6.25 동란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대구교구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교회에도 큰 피해를 끼쳐주었다. 전쟁 기간 중 교회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 및 지도적 신자들의 납치와 학살에 전율해야 하였다.
휴전으로 인하여 사회가 점차 안정되어 나가자,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를 비롯 전쟁 이전에 조직되었던 각종 단체들이 다시금 활발한 움직임을 드러냈다. 1948년 11월 주한 교황사절 방 주교(Most Rev. Patrick J. Byrne, M.M.: 동란 중 납북)는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의 조직 준비를 기후근 신부에게 위촉하였다. 이 조직은 전국 주교들의 자발적인 협력 기구로서 교육 및 사회 복지 등의 교회 사업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하고 조정하여 통일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으며, 그 사무국은 주교들의 지휘 감독하에서 각종 사업을 연구 계획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보도 자료를 발표하며, 여러 서적 등을 출판하고, 주교들에게 기타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주교회의가 1949년 4월 5`∼8일 연례 회의에서 설립했던 천주교중앙위원회(회장 노기남 주교, 고문 윤을수 신부, 사무국장 기후근 신부)는 6.25 동란으로 활동이 중지되었다가, 1952년 3월 12∼14일 주교회의 연례회의에서 활동 재개가 결정되고 문서 선교 등을 위하여 중앙출판사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1955년 7월 7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1959년에는 전국 교구장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체로 설립키로 하였고, 1962년 9월 8일 문교부의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한편, 6.25 동란 직후부터 한국 교회는 인류애에 입각한 외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전재민의 구호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이 전재민 구호 사업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국 교회는 또한 외국 교회의 원조로 성당을 건립하고 사회 사업과 교육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전재민 구호 활동은 교세의 신장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휴전 이후 1950년대 한국 교회는 평균 16.5%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보여주었다.
3. 교회의 쇄신과 정의의 실현(1962∼1981)
1962년 3월 10일 드디어 한국 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또한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의 쇄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자신의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수에서 1950년대와 같은 급격한 증가율을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점진적인 증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공의회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일치 운동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1962년 이후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인의 마음 안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 3관구 11개 교구의 교계제도(덕원면속구 별도)가 설정된 것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능력을 로마 교황청에서 확인한 결과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전교지 교회의 미숙한 단계를 청산하고 세계 교회 공동체의 성숙한 일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6년 주교회의의 정식 조직(1967년 12월 4일 주교회의 규약 교황청 인준 발효, 의장단 정식 취임)과 1968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요 문제에서 그 참여와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수원, 원주, 마산, 안동, 제주 등 새로운 교구의 증설이 계속되었으나,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는 북한의 교회로 남아 있다.
휴전 이후 1950년대에 연평균 16.5%라는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던 한국 교회는 1960년대에 이 증가율이 연평균 6.2%로 급속히 하락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더욱 둔화되어 5.2%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1970년대의 한국 교회에 선교 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고 있음을 뜻한다. 1970년대 교회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며 민족의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사회 발전을 위한 정당한 노력을 드러내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땅에서도 천주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일치 운동의 기운을 일으켜, 신학적 입장에 대한 상호 이해는 물론 사회 개발과 인권 문제 등에서 협력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서의 공동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한국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사회 발전을 위한 교회 고유의 역할을 모색해 나가며,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교서의 발표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사회 문제를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되어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대사회 활동에는 외부의 탄압과 압력이 뒤따르게 되었으며, 교회는 이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한국 정치는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의 제정, ‘긴급 조치’ 등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시도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정부에서는 정보 정치와 인권 유린 사태를 자행하였다. 이에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주교단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1.1.11.)는 공동 교서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의 구속(1974.8.26.) 사건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아픔을 대변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도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한 인권 운동은 별다른 준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국 교회는 이 운동 과정에서 국민 대다수와 정신적 일체감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여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 문화와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교육 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등의 종합 대학교와 단과 대학 및 전문 대학들이 있다. 그리고 유아 교육, 초등 교육 및 중등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고 있다. 한편, 현대의 교회는 의료 봉사 부문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병원들은 전국 병원 침상 수의 1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의료를 통한 사회 복지의 향상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는 각종 보육원, 양로원과 그 밖의 사회 사업 기관들을 통해서 민족에 대한 봉사의 자세를 뚜렷이 하고 있다. 민족을 위한 교회의 봉사는 사회 개발 부문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6.25 동란 이후 전재민의 구호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왔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부터 교회의 봉사 활동은 단순한 구호 활동보다 사회 개발의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주민 생활의 향상을 위한 간척 사업, 소규모 도로와 교량의 설치 등과 같은 사업들이 교회의 원조로 전개되었다. 이 사업의 추진에는 ‘가톨릭구제회’의 기여가 컸던 것이다. 한편, 교회는 주민들의 자립 정신을 키우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회가 주도했던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제 한국 사회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서민 대중의 경제난 해소에 큰 기여를 하였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와 각교구의 사회복지위원회를 통하여 사회 개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회복지위원회는 단순한 구호 사업뿐만 아니라 광산촌의 개발, 농축 산업의 발전 등과 같은 부문에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 개발 사업의 어떤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 교회는 영적 쇄신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 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창설되었다(1968.7.23.). 가톨릭 학생 운동도 4.19 혁명과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 일반 학생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전개되어 나갔다. 이와 같이 전국적 조직의 평신도 단체들이 등장하여 활동함으로써 교회에 새로운 활력이 부여되었고, 이들의 활동은 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우리말로 미사를 봉헌하면서부터(1965.1.1.), 한국 교회에서는 토착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신앙의 토착화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안들을 모색해 온 것이다. 또한 개인 구령을 목적으로 하는 비조직적인 신심 운동도 중요한 전환을 이루어, 1960년대 후반기에는 각종 신심 운동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도입된 레지오마리애를 비롯 꾸르실료 운동, 기초 공동체 묵상회, 훠콜라레 운동, 성령 운동, 각종 성서 연구 모임 등이 조직적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어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전통적 신심 중의 하나인 순교자 신심은 1968년의 병인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다시 한번 활발히 전개되었다.
4,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세계 교회(1981∼1992)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연평균 7.54%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와 같이 급격한 교세 증가가 가능했던 이유로는 먼저 한국 현대 사회의 제반 상황을 주목할 수 있다. 즉, 1980년대의 한국 사회는 고착화된 남북 분단 체제 아래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 소외의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침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 정체의 확립 등을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교회를 찾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도 천주교회의 성장 속도가 이 시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전통 종교의 그것보다는 2배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한국 천주교회가 위기 상황에 대처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다른 종교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천주교회는 이러한 의지 이외에도 자신의 각종 역량(신학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의 사회 개발 또는 사회 복지를 위한 활동, 그리고 인간 기본권의 옹호 내지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한 활동이 일반인들의 공감을 얻게 되어,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고, 평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80년대의 교회는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에는 ‘민주 개헌’ 촉구 운동의 일환으로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일반 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며, 1987년에는 ‘민주 개헌’ 촉구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른바 ‘6.29 선언’을 가능케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한 이 해에는 ‘민주쟁취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8년 ‘정의구현전국연합’이 발족하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분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80년대 전반에 걸친 노동 운동 탄압 과정에서 교회의 노동 운동도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교회의 노동 운동가들은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1985) 등 대중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상담소 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 신장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전국농민회의 결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현대 한국의 농민 운동이나 농업 문제를 이해하는 관건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는 평화 운동 또는 통일 운동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주교회의는 ‘북한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1985) 기도 운동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산하에 ‘통일사목연구소’를 발족시켜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 그리고 북한 선교에 관한 문제의 체계적 연구를 시도했다(1988).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지향하며 이 시기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이른바 ‘통일 열사’ 조성만 군의 죽음(1988),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1989) 등이 교회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1980년대에 전개된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이 지닌 특징을 1970년대와 비교해 보면 일반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운동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면, 1980년대의 운동은 평신도들이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전개한 운동으로서 그 성격도 ‘이웃을 위한 운동’으로부터 ‘이웃과 함께하는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어 갔다.
한편, 한국 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외 선교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는 이미 1930년대에 중국이나 일본에 성직자를 파견한 일이 있고, 1950년대 이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한국 성직자들이 활동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그 곳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위한 사목 활동이었으나, 1981년 한국외방선교회에서 파푸아뉴기니에 4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현지인을 위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아시아 지역의 대만,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아프리카의 수개국,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전통적 가톨릭 국가에도 현지인 사목을 위해 한국인 사제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한국 교회는 1980년대에 이르러 세계 교회에 대한 선교 책임을 수행하게 되었다.
1980년대 한국 교회사에서는 북한 교회의 활동 재개 사실도 주목할 수 있다. 1988년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교황청에서는 북한 신자 등을 바티칸에 초청한 바 있고, 평양에 장충성당이 준공되어 천주교회의 활동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신자와 교회는 오랜 침묵 끝에 부활의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의 이 교회가 본격적인 선교 활동으로 민족의 복음화에 공헌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이제 북한 선교 문제는 1990년대 한국 교회의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한편으로,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대규모의 종교 집회들을 통해 자신의 저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봉사의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즉, 1981년 10월 18일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서울대교구에서 주관한 이 행사에는 전국 각 교구의 많은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한 형제임을 확인했다. 또한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은 한국 교회사에서 한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빛을” 주제로 하여, 200주년 기념 정신 운동, 기념 행사, 기념 사업, 사목 회의 등을 추진하여 선교 제3세기를 활짝 열어제쳤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주례로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어,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비롯한 한국의 성인들이 전세계 교회의 특별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특히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 회의(1981.1.∼ 1984.11.)는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하느님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참여하여 교회의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논의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준하여, 전국 각 교구의 모든 차원에서 교회의 내적 반성과 대화라는 두 분야의 12의제를 4년에 걸쳐 토의하였다. 200년 교회사를 바탕으로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미래 지향적인 선교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던 이 사목 회의는 보편 교회 안에서 신앙의 원리 원칙에 충실하면서 민족의 고유한 문화 유산을 계시의 빛으로 조명 수용하여 토착화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적극 추진하고, 이땅의 민족 문화 창달과 인간다운 삶을 증진시키는 데에 이바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사목 회의가 공식 문헌을 채택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땅에 사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망과 고뇌로 엮어진 의안집에 담겨 있는 건의들은 대부분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1992년 3월 26일 주교회의 총회 확정) 등에 수렴되고 있다. 한국의 지역 교회법인 이 사목 지침서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는 1962년의 교계 설정에 이어 마침내 고유한 교회법적 토대까지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교황 성하의 두번째 한국 방문 중에 서울에서 개최되어, 한국 교회는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세계 교회에 드러내었다. 한국 교회는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며 북한의 신자들을 초청하는 등 북한 교회와 직접적인 교류를 추진하였으나, 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의 여파 등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한 다음 한국 교회는 그 후속 사업으로 ‘한마음 한몸 운동’을 교구별로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제 1990년대에 들어선 현대의 한국 교회는 1980년대 한때 교회 안에 감돌았던 자족적 분위기를 벗어나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침 없는 반성을 시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 정의, 사회 복지의 신장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의 전통 문화와 가치에 대한 존중 그리고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강화가 더욱더 요청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천주교회에 대해 바라고 있는 이와 같은 노력은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민족의 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일이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