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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공파.줄기 스크랩 문묘(文廟)에서 배향(配享)하는 동방18현
金正澤 추천 0 조회 120 10.06.07 15: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방 18현(東方十八賢) 또는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은 문묘(文廟)에서 배향(配享)하는 한국의 유학자(儒學者)들을 말한다.

 

1.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2. 홍유후 (弘儒侯) 설총    3. 문성공 (文成公) 안유

4. 문충공 (文忠公) 정몽주  5. 문헌공 (文憲公) 정여창  6. 문경공 (文敬公) 김굉필

7. 문원공 (文元公) 이언적  8. 문정공 (文正公) 조광조  9. 문정공 (文正公) 김인후

10. 문순공 (文純公) 이황  11. 문간공 (文簡公) 성혼   12. 문성공 (文成公) 이이

13. 문열공 (文烈公) 조헌  14. 문원공 (文元公) 김장생 15. 문정공 (文正公) 송시열

16. 문경공 (文敬公) 김집  17. 문순공 (文純公) 박세채 18. 문정공 (文正公) 송준길

 

1.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857년 경주에서 출생했다. 868년(경문황 8년) 당나라 유학을 떠나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 선주 수현위(宣州 水縣尉)가 되고 승무량(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74년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884년 음력 10월 귀국했다.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泰山:지금의 전북 태인) 등지의 태수를 지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2. 홍유후 (弘儒侯) 설총(薛聰)

 

655년 ~ ?)은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이다. 자는 총지(聰智), 호는 빙월당(氷月堂)이다. 원효와 요석 공주(태종무열왕의 딸) 사이에 태어났으며, 신라 3문장(三文章: 强首·薛聰·崔致遠) 중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유학과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설총은 고대 한국어를 한문으로 표현한 첫 문자 체계인 이두와 구결 문자를 규정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설총은 다만 그때까지 존재하던 향찰의 집대성자였으며,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개발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에 공이 컸다. 강수와 함께 9경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 강론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그의 작품으로는 〈화왕계〉라고도 불리는 〈계화왕〉(戒花王) 1편이 전한다. 이것은 한문으로 된 단편으로 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이야기를 전개한 것으로 당시 왕의 어질지 못함을 풍자한 글이다.

 

3. 문성공 (文成公) 안향(安珦)

 

1243년~1306년)은 고려의 명신(名臣)·학자이다. 본관은 순흥,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1]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문종 이후로 어휘를 피해(문종의 휘가 향(珦)이었으므로) 향(向)으로 적기도 했으며, 초명을 따라 안유로 불리기도 했다. 흥주(興州 :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순흥 안씨의 관향) 출생으로, 아버지는 원래 흥주의 관리였으나 의술(醫術)로 출세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1286년(충렬왕 12)에 정동행성의 좌우사 낭중(左右司?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갔다. 연경(燕京)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이라 하여 손수 그 책을 베껴 쓰고, 또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또 학교가 날로 쇠퇴하여 감을 우려하여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장학기금으로서 6품 이상은 각각 은(銀) 1근씩,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 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써 학교를 운영케 하는 한편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원나라에 보내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그리고, 제기(祭器)·악기와 경서(經書) 등을 구해 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의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주자의 호(號)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를 보고 거기에 심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그를 한국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라 보고 있다.

 

4. 문충공 (文忠公) 정몽주

 

정몽주(鄭夢周, 1337년~1392년 음력 4월 4일)는 고려의 문신이자, 정치가·유학자이다. 본관은 영일,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 태종의 손에 영의정에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5.   문헌공 (文憲公) 정여창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학문을 익히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성리학을 연구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1490년(성종 21) 소격서 참봉이 되었으며, 그해 가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오래 가르치지 못하고, 연산군 1년(1495년)에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종성에 유배되어 150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중종 때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할 뿐이다.

 

6.   문경공 (文敬公) 김굉필

 

김굉필 (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성리학자(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며,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등과 동문이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 이장곤· 김안국· 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한성부 정동에서 태어나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했다. 김종직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였다.

김굉필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을 지냈고,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1577년에 시호 문경(文敬)을 받았고, 중종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610년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아산인산서원, 서흥화곡서원, 회천성현서원, 현풍도동서원, 순천옥천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나 그를 사숙함으로서,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7.   문원공 (文元公) 이언적

 

이언적(李彦迪, 1491년 ~ 155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현신(賢臣)이었다.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자를 덧붙였다. 호는 회재(晦齋), 자계용(紫溪翁)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여주(驪州)이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 밀양부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에는 사간이 되었다. 그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해서 모략을 받아 한양에서 쫓겨나 경주 자옥산에서 성리학 연구에 집중하였다. 1537년에 다시 관직에 올라 직제학을 역임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경내(境內)를 평안케 하는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1545년에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그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관직에서 곧 물러났지만,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서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죽었다. 유배 때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저서로 《대학장구보유》, 《속혹문》, 《군인록》 등이 있다.

죽은 후 시호인 문원(文元)을 받아 1573년 자옥산에 건립된 옥산서원에 제향했다. 동방 5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의 묘소에도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왕조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리(主理)의 학설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무극태극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8. 문정공 (文正公) 조광조

조광조(趙光祖, 1482년~1519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한양(漢陽), 는 효직(孝直), 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마침 평안도 희천(平安道熙川)에 귀양 가 있는 김굉필을 처음 만났다는 설도 있다. 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에 차상으로 합격하고 1515년(중종 10)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으나 과거를 보아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하던 차 마침 그 해에 알성시(謁聖試)가 있어 응시하여 급제했다. 호조, 예조, 공조좌랑,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교리(敎理)·응교(應敎)·승지(承旨)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소격서의 폐지를 단행하고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을 겸임했는데, 당시 어진 선비들이 모두 뽑혀 요직에 앉은 때라 모두 협력하여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조광조 등의 계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행(材行)을  겸비한 사림의 선비 120명 중에서 1519년(중 종 14) 음력 4월 중종이 친히 장령(掌令) 김식(金湜) 등 28명을 뽑으니 조광조 등은 그들을 홍문관·사간원·시종 등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조정에는 간신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 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내세우고 기성 귀족들을 소인(小人)이라 지목했으며 양풍미속을 기르기 위해 미신의 타파와 여씨 향약을 도입·실시케 하고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인쇄하여 널리 퍼뜨리는 등 이상주의에 치우친 정치를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신진의 청년들이라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慶筵) 때마다 간언하는 바른 소리가 그치지 않아 중종도 차츰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하여 벽지로 좌천되어 있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이를 알게 되었다.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항상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과격파 선비들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1519년 음력 10월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과 함께 중종 반정(1506년)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문란하게 책록 됐으니 부당한 자들은 훈록에서 깎아 버리라고 소를 올렸으며 대신 6경(六卿)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심정·홍경주(洪景舟)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공신 훈적에서 깎아 버렸으며,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도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들에게 찾아가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케 하자 홍경주는 영중추부사 김전(金銓) 등과 함께 몰래 왕에게 글을 보내어 상변하려고 해도 왕을 모신 근시(近侍)가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밤중에 들어가 상변 하겠다고 청했다. 드디어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李長坤)·고형산(高荊山)·심정·홍숙(洪淑)·손주(孫澍)·방유령(方有寧)·윤희인(尹希仁)·김근사(金謹思)· 성운(成雲)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왕께 입대하고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주청 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李?)·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천 심연원(沈蓮原)·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유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결국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기준·박훈 등 8명 중 조광조는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 가, 음력 12월 20일 결국 사약을 받고 숨졌다.

인종 원년에 복권되고, 선조 대에는 의정부 영의정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묘소 왼편에 심곡서원이 있다. 저서로《정암집》이 있다.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

 

9. 문정공 (文正公) 김인후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인촌 김성수의 선조가 된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김인후가 죽고 나서 수년 뒤 이웃에 사는 오세억이란 사람이 죽었다가 하루 만에 살아났는데, 죽어서 자미궁(紫微宮)이란 곳에 갔더니 자미선으로 있는 김인후가 명부를 보며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

 

10. 문순공 (文純公) 이황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는 경호(景浩), 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이황은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성리학(유학) 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1. 문간공 (文簡公) 성혼

 

성혼(成渾, 1535년 ~ 1598년)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본관은 창녕이다.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고향인 파주로 내려갔다.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으나, 인조 때 복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12. 문성공 (文成公) 이이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1584년 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다. 본관은 덕수, 는 숙헌(叔獻), 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통덕랑으로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1536년 강원도 강릉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이이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이이는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 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 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1551년(명 종 6)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 판관인 아버지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했다는 견해도 있다.[2]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 만에 금강산에서 내려왔다.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1]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외척 심통원이 등용되어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1]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1570년(선조 3)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그러나 1573년(선조 6)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시 고향인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 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2세 때인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1]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1만 9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1]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1583년(선 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 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3]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

십만양병설에 관한 의혹 [편집]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억지로 날조하여 추가하였다고 한다.

말년 [편집]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새벽에 사망하였다.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뒷날의 동인 당쟁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사후 [편집]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이이의 사상 [편집]

그는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輕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평가 [편집]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1]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저서 [편집]

  • 《성학집요》(聖學輯要)
  • 《격몽요결》(擊蒙要訣)
  • 《동호문답》(東湖問答)
  • 《경연일기》(經筵日記)
  • 순언》(醇言)
  • 아버지 : 이원수 - 통덕랑 사헌부감찰 수운판관 역임, 좌찬성에 추증
  • 어머니 : 신사임당
  • 서모 : 권씨
    • 누이 : 이매창
    •  : 이번, 이선
    • 동생 : 이우
  • 부인 : 권씨
  •  :

13. 문열공 (文烈公) 조헌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報恩)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3사(三司)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게이테쓰 겐소(景 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일본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영남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일본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일본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평가 [편집]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2.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3.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4.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5.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6.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7.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14. 문원공 (文元公) 김장생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한성 ~ 1631년 충청남도 논산)은 조선의 유학자이며,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라 참봉·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의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으며,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쓰면서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산(連山)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였다. 또한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들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 뒤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첩의 딸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며느리 유씨가 사망하자 예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사계는 아들이 재혼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다 한다. 1641년(인조 19) 묘를 연산군 고정리 우수산(連山縣 高井里 牛首山)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선조비 허씨 묘의 후편이다.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경서판의》, 《가례집람》, 《송강행록》 등이 있다.

가계 [편집]

  • 아버지 : 김계휘(金繼輝)
  • 어머니 : 평산신씨
  • 서모 :
    • 서제(庶弟) 김연손(金燕孫)
  • 부인 :
  • 외조부 : 신영(申瑛)

 

15. 문정공 (文正公) 송시열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1]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1607년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는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송시열은 3세 때에 혼자서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7세 때에는 그의 두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송갑조, 김장생의 문인으로 그 뒤로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를 비롯하여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촌 숙질 간인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 한편 그는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민족적 수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 뒤 1649년(효종 1년) 인조의 뒤를 이어서 효종이 임금이 되자 송시열은 곧 어명을 받들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등용하자,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49년 대제학 조경(趙絅)이 찬술한 《장릉지문》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이때 김자점은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고,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 1658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효종 다음의 현종도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1660년 좌참찬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우찬성에 올랐을 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윤선도(尹善道)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 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1672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때 이르러 덕원(德源)·웅천(熊川)·장기(長?)·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예송 [편집]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만 1년설)을 주장하였으며,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1675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충청도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화양서원, 경기도 여주대로사, 수원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의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저서 [편집]

가족 [편집]

  • 아버지 : 증 영의정 송갑조(宋甲祚).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선산 곽씨. (봉사 곽자방의 딸)
  • 부인 : 정경부인 한산 이씨. (도사 이덕사의 딸)
    • 아들(양자) : 송기태(宋基泰). (생부는 송시형(宋時瑩))
    • 며느리 : 증 정부인 전주 이씨. (이정한의 딸)
    • 며느리 : 증 정부인 문화 류씨. (류신오의 딸)
    • 장녀 : 현감 권유에게 출가.
    • 차녀 : 사인 윤박에게 출가.

 

 

16. 문경공 (文敬公) 김집

 

김집(金集, 1574년~165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장생의 아들이다. 여덟 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3] 그 뒤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딸을 부실로 들였다. 부인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그가 재혼하길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와 해로하였다. 18세에 과거 급제하여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덕망이 높았다.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 지평(持平)·공조참의 ·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했다. 김육 등에 의해 대동법이 주청되자 그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효종이 즉위하자, 청서(淸西)의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이조판서가 되었으며,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벼슬에 있기보다 초야에 묻혀 학문에 힘썼다. 이이·성혼·송익필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과 더불어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어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가계 [편집]

  • 할아버지 : 김계휘(金繼輝)
  • 할어머니 : 평산신씨
  • 서조모 :
  • 서숙(庶叔) 김연손(金燕孫)
  • 아버지 : 김장생
  • 어머니 : 창녕조씨
    • 동생 : 김반(金槃)
      • 조카 : 김익희(金益熙)
      • 조카 : 김익겸(金益兼)
  • 부인 : 기계유씨(송당 유홍의 딸)
  • 부실 : 덕수이씨(율곡 이이의 딸)

17. 문순공 (文純公) 박세채

 

박세채(朴世采, 1631년 ~ 1695년)는 조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이·성혼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저서 [편집]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 논어·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18. 문정공 (文正公) 송준길

 

송준길(宋浚吉, 1606년 ~ 1672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으나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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