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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와 빗소리에 몇 번씩 잠을 깬다. 비바람은 계속 강해지는 듯했다. 내 텐트는 성능이 좋은 텐트도 아니고 사용한지 10년도 넘은거라 강한 비바람에 내부까지 젖어들어간다. 아침을 먹고 출발해야 하는데 비바람 때문에 텐트밖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다. 3:30분 경으로 기억되는데 종구가 텐트에 다가와 비 피해서 식사할 곳이 있다고 알려줬다. 비바람은 계속 오락가락이다. 좁은 텐트 안에서 행동식으로 당장의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리고 짐을 꾸린다. 완전히 젖은 텐트가 문제였다. 비비람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닐봉지 큰 것 몇 개를 준비했었다. 텐트는 비닐봉지 안에 대충 구겨 넣었고 배낭 무게는 식량 소비로 인해 줄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젖은 물건들로 더 무거워졌다. 대충 챙겨 옛 대피소 안으로 짐을 옮긴다. 그리고 모두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하며 정비를 한다. 두영이 챙겨준 스벅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나마 기분을 나아지게 한다. 모두 어떻게 아침을 먹었는지 정비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날이 굳으니 내몸 챙기기에도 정신이 없다. 오늘 산행의 어려움을 시작전부터 각인시키는 듯 했다. 고산에서 산행내내 비를 안맞는다는 것은 완전한 행운에 가깝다. 그저 걷는 중에 비와 맞닥트리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잔뜩 먹은 덕에 출발 직전 화장실을 다녀왔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온종일 걷기만 하면 된다. 5시 30분 계획된 일정을 시작한다. 동혁 대장을 선두로 비바람을 뚫고 기타다케로 파이팅하며 떠난다.
기타다케(北岳, 3193m)까지는 산장에서 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어디에도 나와 있다. 6시 10분이면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바람에 휘청인다. 한걸음 내딛으면서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넘어질 수는 있겠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잡는 순간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내가 이정도이니 가벼운 분들은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앞 뒤에서 서로 챙기면서 걷는다. 덮어쓴 판쵸우의는 바람에 거추장스러웠고 비로 인해 안경은 보행의 장애물이 되었다. 쓰나안쓰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안경은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가 정상인지도 모르고 가는 중에 앞에 봉우리가 있다. 직상으로 넘어가야하나 돌아서 가야하나 하는데 동혁대장이 돌아서 뒤로 올라오면 된다는 소리가 비곰탕 속에서 작게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해서 돌아서 올랐다. 작은 표지석 같은 것이 있었고 정상인줄 알았다. 이 때가 6시25분이다. 후미로 지나가는 종구, 봉희를 불러서 여기가 정상이라고 올라오라고 했다. 여기서 인증샷 찍는다고 생쇼를 하며 10분 이상을 소요했다. ㅎㅎㅎ
모두를 출발시키고 마지막으로 이 곳을 떠나려는데 젊은 일본 산객 둘이서 직상으로 넘어온다. 그리고는 쿨하게 지나간다. 뭐지~~~
5분 정도 더 진행하니 진짜 정상이 나왔다. 정상의 표지목을 보니 사진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아까는 뭐에 홀려서 귀한 시간을 소비한 것일까! 남알프스의 최고점에 도달했으니 원없이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서 11분이 또 흘러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산행시간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다음 목적지인 기타다케산장까지 가면되고 거기서 비바람을 피하고 요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 같다. 산장까지는 1시간 5분 정도 계획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5분이 더 걸렸다. 지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기타다케산장(2,900m)까지의 여정은 다운힐이다. 그럼에도 비바람이 우리를 그렇게 지체하게 만든 것이다.
산장에서 다시 정비도 하고 행동식으로 아침식사를 보충한다. 9시 산장을 출발한다. 다음 목적지는 나카시라네산(中白根山, 3055m)이다. 150m 업힐이지만 상대적으로 경사도는 완만하다. 충분한 휴식 후 출발이어서인지 예정했던 40분에 선두그룹인 나, 외숙, 영탁은 가까스로 도착했다. 5분 후 봉희, 미영, 동혁이 도착했고 5분이 더 지난 후 종구, 자영이 도착했다. 5분 휴식 후 또 하나의 일본 100명산인 아이노다케(間ノ岳, 3190m)로 출발한다. 전 구간과 같은 150m 업힐 구간이다. 거리는 좀 더 길다. 하지만 이번 구간은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이 구간을 걸을 때부터 비는 거의 잦아들어 곰탕 속을 걸었다. 하지만 10시 5분경부터 갑자기 바람과 함께 벗겨지기 시작했다. 약 25분 정도 푸른 하늘과 구름들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며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남알능선의 속살을 그나마 제대로 감상한 것은 이 시간이 전부였던 것 같다. 온종일 이런 모습만 보면서 걷는 것을 생각하고 왔었건만.....
11시5분 선두는 아이노다케에 도착을 했다. 계획 대비 2시간 20분 지체되었다. 그래도 12분 후에 후미그룹도 도착을 했다. 정상은 곰탕이었고 일본 3번째 봉우리인 아이노다케에서의 멋진 조망은 결국 보지 못했다. 남알프스 능선의 3개 주요 봉우리인 기타다케(3,193), 아이노다케(3,190), 노토리다케(3,026)를 묶어서 시라네 산잔(白峰三山, 백봉삼산)이라 부른다. 다이몬자와산장에서 기념품으로 사려 했지만 완판되고 전시품만 있어 팔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노토리산장(2,800m)이다. 1시간 코스이고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완만한 다운힐 코스였다. 내려가는 11시30분에서 12시까지 약 30분 정도 곰탕과 벗겨짐의 연속이었지만 2번째로 남알의 풍광을 조금 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체된 시간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풍광을 충분히 즐길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산장에서 점심을 미리 주문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먼저 내려갔다. 12시 20분 산장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이 산장은 점심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산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산장지기와 사장 2사람만 있었다. 두 사람은 우리 팀의 산행속도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가타노산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했다. 다이몬자와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산장을 출발한지 이미 오래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악천후가 예상된다고 예보가 나와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둘러 하산하는게 좋겠다고 조언을 한다. 일정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다이몬자와산장까지는 앞으로 5시간 산행이다. 12시30분 지금 출발해도 5시 30분에 도착 예정이다. 그런데 우리 산행 속도가 너무 느려 두 사람은 8시까지 도착하는 것에도 의문을 갖았다. 국내 같으면 야간산행 걱정도 하지 않지만....
그러는 사이에 하나둘 산장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워야했다. 그래서 누룽지를 끓이기 시작했고 그 사이를 이용해서 텐트를 말리기 위해 사방에 널기를 시작했다. 산장지기들은 우리들의 이런 행동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말로 빠른 하산을 재촉했다. 사장은 지금 하산을 한단다. 그러면서 번역기로 많은 대화를 한다. 번역기의 번역은 유화되서 표현되어졌겠지만 우리를 욕하고 있었다. 산행능력도 안되면서 무리한 산행계획을 세웠다는 점, 우리 같은 한국인 산행팀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며 한국산행문화에 대한 지적질, 다이몬자와산장의 자기 직원들이 우리들 때문에 해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등등등. 너한테는 내 목숨을 의지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일본 산행문화 관점에서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장에서 숙박을 하고 내일 하산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내일 하산은 더 위험하다고 무조건 지금 날씨가 그나마 괜찮으니 빨리 내려가라고 재촉만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누룽지를 먹어 치웠다. 다들 약간의 따뜻한 음식을 먹어서 인지 힘이 나는듯해보였다. 하지만 자영, 봉희, 미영의 컨디션은 그닥 좋아질 수는 없었다. 여러번의 우왕좌왕 속에서 1시20분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니시노토리다케(西農鳥岳 3,051m)까지 시작부터 업힐을 해야 한다. 속도가 날 리가 없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외국인 2인 팀이 우리를 추월해간다. 나중에 다이몬자와산장에서 만나 얘기해보니 그들도 노토리산장에서 숙박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당장 하산하는게 좋겠다는 조언을 듣고 부지런히 하산했다고 한다. 그들 정도의 배낭 무게라면 우리도 휭하고 갈 수 있는데.....
느려지는 속도에 걸음을 멈추고 모두 모였다. 하산이 정말 가능하겠다고 다시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여차하면 후지산도 포기하고 이틀 동안이라도 산장에서 숙박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모두 힘들어했지만 내려가지 않으면 특별한 다른 대안이 없는지라 하산하자고 한다. 이제부터 오로지 하산만 생각하고 다시 움직인다. (당연한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올바른 결정이었고 거기서 백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는 생각해보려다가 접었다.) 선두는 예정보다 5분 늦게 니시노토리다케에 도착했다. 아마도 중간에 멈춰서 논의했기 때문인 듯하다.
다음 목적지인 노토리다케까지는 오르락 내리락 하며 내려갔다. 예정시간 40분에 도착을 했다. 나는 노토리다케에서 동혁, 자영, 종구를 보지 못하고 출발을 했다. 이제 노란 종탑이 있는 다이몬자와 분기점(大門沢分岐, 2820m)까지는 45분이 필요하다. 나, 외숙, 영탁 세 사람은 3시 50분 예정된 시간에 도착을 했다. 이 구간이 남알 전체에서 가장 편안한 구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탑의 종도 울려보고 10분의 휴식을 취한 후 4시에 다이몬자와고야(大門沢小屋, 1800m)로의 2시간 40분짜리 1,000m 다운힐을 시작한다. 등로의 상태를 알 수는 없었지만 조금 속도를 내면 어두워지기 전에 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40분 단축을 목표로 나 먼저 내려가기로 한다. 사장과 나눈 얘기도 있고 직원들 귀찮게 안하려면 최대한 빨리 내려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산길은 엄청 급했다. 그리고 끝도 없었다. 능선에는 수목이 없었지만 점점 수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둠의 정도도 숲으로 인해 더 빨리 어두워지는 듯 했다. 스틱을 최대한으로 빼고 내려간다. 하산 도중 딱 한번 앉아서 쉬었다. 이 때도 안경을 쓰지 않고 있어서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랜턴을 켤 정도는 아니었지만 점점 어두워졌다. 외숙, 영탁과도 제법 거리가 떨어졌다. 혼자가 되니 갑자기 산장에서 들은 곰 얘기가 떠올랐다. 곰의 출몰이 많은 지역이므로 특히 하산중에 비박은 절대 하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박 장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중간에 비박을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까지 하고 조언을 했던 것이다. 사실 난 거기까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어쨌든 안경도 안쓰고 어두워지고 혼자여서인지 조금 앞에 보이는 나무 둥치들이 곰처럼 보이기도 해서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결국 폰에서 노래를 틀었다. 산에서 이런 노인들 가장 혐오하는데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다. 참, 분기점 출발하고 바로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이기도 했다.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그저 숲속의 급한 경사로를 내려가는 지루한 하산길이었다. 지도를 보면 업힐은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모두 하산은 잘하고 있는건지 이 또한 걱정이어서 후미의 종구와 중간중간 무전을 하면서 간다. 후미도 4시 20분 경에는 분기점을 출발한 듯 하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을 기억해 두고 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후미로부터 무전을 달라고 했지만 내가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포인트 무전은 없었다. 6시10분 홀로 산장에 도착했다. 당직 산장지기는 젊은 친구였고 영어도 좀 할 줄 알았다. 사장이 내려가면서 이야기를 해둬서인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의 도착을 반겨줬다. 애석하게도 산장 실내는 자리가 없었다. 있기를 바랬건만.... 지진 몸으로 텐트를 또 쳐야한다. 캔맥주 8개를 선불로 지불했다. 한 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일행은 1시간 정도 후면 하산할 것이라고 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7시 넘어서 까지도 하늘만은 밝았으니까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7시 전에(?) 외숙과 영탁이 도착했다. 중간에 많이 쉬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5 사람도 곧 올거라고 했다. 주변은 빠르게 어두워져간다. 무전은 되지 않는다. 지금 사진을 보니 내가 5시 30분에 지나간 곳을 미영이 6시 52분에 지나갔다. 이후 나는 40분만에 도착했지만 미영은 1시간이 넘어서 도착한 듯 하다.
헤드랜턴을 챙겨서 천천히 마중을 나간다. 불빛에 달려드는 벌레들이 귀찮다. 조금만 올라가면 만나겠지하고 오르기 시작했고 동혁을 부르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며 보니 하산했던 길들이 하나하나 기억난다. 밟았던 자리까지 기억이 났다. 그렇게 천천히 10분을 올라갔지만 기척도 없다. 생각했던 포인트 들을 계속 거쳐서 올라간다. 이제 날은 칠흙같이 어둡다. 랜턴의 불빛만이 길을 밝혀줄 뿐이다. 엉뚱한 곳에서 본 빛은 다행히 달 빛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되는 것이었기에. 20여분이 넘어서 동혁, 자영, 미영을 만났다. 종구와 봉희도 많이 뒤처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자영의 배낭을 받았다. 솜털처럼 가볍다. 봉희와 자영의 짐을 종구와 동혁이 더 담아서 그런 것이다. 두 사람도 초인적인 힘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산장에 도착했다. 8시가 훌쩍 넘었다. 너무나도 지친 표정이지만 맥주는 시원하게 마신다. 방이 없다는 소식에 힘이 더 빠져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지친 몸이라 저녁생각도 없는 듯 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집을 짓는다. 그리고는 모두 뻗어버린다. 내일 날씨가 좋으면 텐트 밖만 나와도 후지산이 바로 보일텐데. 난 잠시 영지에서 해지기 전에 후지산을 볼 수 있었다.
첫댓글 원정의 어려움이 있을것으로 예상 했는데..날씨가 안 좋으니 더 힘드셨겠네요.
일본은 한국에서 무전기 가져가도 되는건가요?
토요일에 근무라 간담회 참석이 안되서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