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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작가회의영주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강태규
언어적 '섬'에 갇힌 詩들/ 백현국 (시인. 평론가) 모더니즘 작가들이 詩的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이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확대'와 관련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는 시적 스타일과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특이하고 다소 기벽스러운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것들은, 그 개별적이고 특이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어떤 언어적 기준을 통해 풍자하게 되는데, 그 풍자의 대상은 '과거의 것'을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모방이란 대상에 대한 해석(관념)에 관한 재해석을 말한다. 모더니즘계열 작가들은 바로 이러한 원본에 대한 은밀한 공감대를 반드시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모던'이란 첨단의 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행'이란 시대에 곧 뒤떨어지지만 진정한 의미의 '모던'은 세월이 지나면 다시 '고전'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모던'은 '고전'적인 것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모던'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전이 결과를 보기 위해 오랜 과거와 연결시키는 획기적인 시대의식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벌어진 신구파 논쟁을 보면 확연하다. 오늘날, 급진적인 모더니스터들은 과거(전통)과 현재간의 추상적 대립에만 더 골몰하였다. 미래를 위한 기대나 예찬이 현재의 고양을 의미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Bergson의 경우 새로운 시간의식(사회 내의 유동성, 역사 내의 가속, 일상 생활 내의 단절 경험)이나 새로운 가치관(일시성, 모호성, 단명성)은 미래적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안정된 현재에의 갈망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과연, 현재의 단절과 해체를 통해 미래를 암중모색한다는 시인들의 의식이 진정한 의미에서 모던한 것인지 그 인식의 깊이를 스스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여러 가지 시적 스타일과 독특한 정서가 엄청난 속도와 갈래로 파편화되어 나타나는 것 자체가 복잡한 현대문명을 해석하는 좀 더 분명한 코드를 제공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상력이 오늘날 예술의 이름을 붙이고 나타나는 여러 패러다임 속에서 전문화된 심미성을 드러내는데 상당히 유용한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보는 '현재의 것'들은 어떠한 것들일까? 그것은 바로 현재의 것들에 대한 맹렬한 부정이다. 따라서 낯설고 특이한 감각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만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논리를 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에 관하여 현실과 상상력에 관한 윌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의 견해를 잠시 생각해 보자. 스티븐슨은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곧 '관념에 의한 허구'이며 이를 nothing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있음(Being)'을 전제로 한 nothing이다. 윌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이 말하는 추상 개념을 살펴보면, 현실은 고안된 세상(invented world)이며, 보다 바람직하게 최고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또한 최상의 허구란 즉 '시와 현실', '상상력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곧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만약 '현실'보다 '상상력'이 더 우위를 가질 때, 불균형이 초래되며 마침내 '상상력'은 파괴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경고도 아울러 하고 있다. '시적 진리'가 '사실적 진리'라고 한 스티븐슨의 말은 곧 사실이 감수성과 상상력에 의해 시인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전에 이미 상상적인 것이 내재했다고 말함으로써, 인위적인 상상력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스티븐슨은 "현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상상력만 유일한 생산 능력이다"라는 말도 한다. 이는 현실과 상상력의 균형관계를 말한 것이다. 결국 '최상의 허구'란(Supreme Fiction) 상상력과 현실은 궁극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스티븐슨이 말한 '최상의 상상력'이란 작금의 시인들이 '기발한 언어'나 '상상력'에만 매달린 채, 언어의 진술이 어떤 기준과 규범을 무시하고, 모순의 중첩, 진술의 모호함, 암호 같은 언표, 개인적 감정의 난립시키는 것 등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단순히 스타일 상의 다양함만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이질적인 요소만 남게 되는데 이를 '죽은 언어'요 '언어의 섬에 갇힌 언어'라고 한다. 정통 모더니즘의 미학적 성격이란 독특한 세계관 형성과 스타일 속에 독특한 자아와 사적인 정체성의 단단함, 고유한 퍼스넬리티와 아이덴티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누적된 모든 예술적 발현들이 독자적인 경험과 개념, 그리고 정체성이 더 이상 새로운 세계로의 진전이나 새로운 경험, 그리고 독자적인 스타일의 발생을 이미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독창성'이란 엄밀히 말해서 과거의 것을 '재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다. 이 것을 '심미적인 딜레마'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미적 딜레마'를 해소하는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용'이 곧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내용'은 다른 형식을 선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일 때, 그 스타일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정될 것이다. 이규보는 시의 '미적 본질'을 말함에 있어, 시가 어떤 유형의 것이든 인습적으로 관념화된 사물과 세계의 일상적인 관계를 깨뜨리는 작업에서 스스로 미적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고 볼 때, 시인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갱신을 수행해야 하는 일차적 사명을 가진다" 고 생각하였다. 이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순수한 실체(내용)을 드러나게 해야한다는 시 본질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스티븐슨이 말한 '최상의 허구'가 곧 '최상의 현실 반영'과 관련 있듯이, 인습적으로 관념화된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깨는 것은 오히려 사물과 세계의 순수한 본질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측면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결국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는 시인의 의식저변이 어떠한가 하는 깊이와 해석에 따라 그 스타일(상상력, 기법, 해석)이 결정되는 것이지 얄팍한 스타일이 시 내용을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작가들이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올바른 천착과 깨달음 없이 기묘하고 비일상의 관념(상상력)에 휘둘릴수록 스스로 '언어의 섬'에 갇힌 시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많은 시인들이 현재를 '심미적인 비극'으로 이해하게 됨으로 인해, '언어적 이상', 즉 언어와 기표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게 된다. 따라서 언어가 갖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무너지고 가장 쉽게 물화시킬 수 있는 '현재 경험'만을 강렬하고 환각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기의'를 상실한 '기표'는 이미지가 왜곡 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왜곡은 곧 폭력이라는 장·보드리야르의 견해를 생각해봐야 한다. 현재 주목되는 시인들의 시작들과 공모 당선작들이 시인의 '미적 의식'이나 '현실 인식'과는 별개로 특정 집단에 의해 주목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난 이런 시를 '언어적 섬에 갇힌 시'라고 부르고 싶다. 당면한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감각적인 상상력만을 최대 무기로 삼는 시인들과 그 아류의 시작을 모방하여 시작을 양산하는 시인들을 보면서, 사물에 대한 존중심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삶에 대한 신선하되 근본적인 감각, 기계적이고 합리주의 사고보다 道家的 상상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시적 인간'이란 바로 '가슴으로 말하는 이'를 뜻한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굳이 시작의 표본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어도 시인은 스스로 판단할 최소한의 능력이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계간 <현대시문학> 2005년 여름호 시의 상상력과 인식의 탁월함 ‘메타포어를 잘 쓴 것은 좋은 시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의 진술은 유용하다고 본다. 롤랑바르트는 “세련된 언어, 잘 쓴 글이라는 표현은 비문학적인 진술이다”라는 말을 한다. 과연 잘 쓴 글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메타포어를 사용한다? 기실 언어의 세련도에 집중하여 작품을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짓은 좀 웃기는 짓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메타포어는 제한된 언어의 카테고리 속에서 자신의 특별하고 다양한 욕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좋은 수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메타포어의 과잉은 결국 난해성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면에서 詩作의 기술적인 면보다 詩作하는 태도나 세계관을 더 중요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활동의 매개이기에 사회의 제현상을 언표화 하는 것과 밀접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사회의 제현상에 대한 인식을 특별한 감각으로 드러내는 것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과연 어떤 것에 초점을 두고 작품성을 따지게 되는 것일까? 때로는 샤토 브리앙(Chatearbriand)의 말처럼 차라리 남의 결점이나 잡아내는 사소하고 안이한 비평을 버리거나, 토마스 칼라일(Carlyle)의 말처럼 오직 시인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비평의 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평의 본성과 직책에 대해 구체적인 고찰을 남겼던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는 “비평가는 고찰하고, 비교하고, 체질(sift)하고 키질(winnow)하는 것이 비평가의 양심”이라고 한 바 있다. 개인적인 느낌에서 보면 수년에 걸쳐 본 결과, 매년 되풀이되는 신춘문예에 오르는 작품의 경우, 어느 신문사에서나 거의 비슷한 작품 양상, 특히 시어의 기술적 올가즘에 능숙한 작품들이 選作되는 것에 놀라고 있을 뿐이다.(고정된 심사위원들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신춘문예 뿐 아니라 현재 시중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의 당선작도 거의 비슷한 양태를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따라서 당선작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차단된 만큼 당선작에 대한 평가 역시 논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옳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유럽처럼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어떤 나름대로의 순탄한 경로를 거쳐서 이루어진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일부에서 이러한 인식에 대해 서구 시스템에 대한 사대적 발상이라고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문학적 토대를 무시하는 발상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넘어간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말(역사의 역할)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 자체 내에 봉해져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연속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야한다.” 이는 작품 속의 특수성, 독자성 못지않게 사회적이고 외면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문학은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언어의 절묘한(?) 표현의 백화를 보인 바 있다.(물론 외국 사조의 백과사전식 도입에 의한 결과겠지만)이러한 사조의 백화에 대하여 문학사적인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면에는 남한의 식민지하 문학에 대한 평가상의 부정적인 논의(임종국의 친일문학론류)와 함께 북한 역시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조선문학개관』 등에 나타난 대략적인 평가에 대하여 활발한 논의를 할 수 없었다는 문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품의 내적인 자산(작품성)에 대하여 충분한 평가를 남북한 서로 이뤄내지 못한 상태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는 한국 근대문학이 시종일관 식민지의 검열에 시달려 온 점과 더불어 문학인들의 시대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 광복 이 후에도 현대문학의 평가가 분파주의와 편의주의에 의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광복 이후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과제를 재논의 하는 과정에서 그 평가가 엇갈리는 점과 남북간 전쟁으로 인하여 예술적 평가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문제 등, 문학적 평가에 있어서 갈등과 모순 등이 논자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해소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詩作은 시인의 단순한 주관적 세계표현 이라는 초점과 시인 각각 개별적인 상상력 자체에만 미적인 관심이 집중하게 되었다. 작품에 대하여 파괴적인 비평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생산적인 비평을 할 것인가는 작자와 독자 그리고 당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전체성(Whole)을 각각의 미묘한 특성으로 지각, 재구성을 통해 해석해 내는 일일 것이다. 이는 역으로 면밀한 집중과 해석을 통해 전체를 해석해 낼 수 있다는 점과도 같다. 풍부한 어휘는 분명 사물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눈(雪)에 대한 어휘를 70여종을 갖고 있다는 에스키모인들의 인식은 놀라운 것이다. 문병란이 시적 사명에 대해 얘기한, “시는 정서와 사상의 융합인 정서적 등가물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또 시는 시정신의 고양과 기법보다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사상적 힘이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다양한 어휘는 특히 시적 상상력으로 치부되는 시어의 상상력은 어떤 경로를 가져야 하는가? 미술평론가 유홍준씨의 송강 정철 「장진주사」에 대한 감회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지적해 준다. 송강의 작품 중, 장진주사에 대하여 ‘원숭이 정서의 허구성’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한잔 먹새그려 또한잔 먹새그려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우해 거적더퍼 주리혀 매혀가나 뉴소보댱의 만인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해 희달 가눈비 굴근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물며 무덤우해 잔나비 파람불제 제 뉘우찬달 엇디리 당대 사람들은 알리 만무한 원숭이 휘파람을 슬쩍 끼워 넣는 행위를 일러 원숭이 정서의 허구성이라고 한 것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술의 비인간화를 말해 보자. 우리나라 문인들은 심정적으로 모두 양반들의 풍류 내지는 選者의식들이 있는 것 같다. 당대의 동류와는 뭔가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사람으로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예술가라는 명칭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당대의 현실과는 뭔가 다른 세계를 나름대로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 보면, 결국 예술가와 현실은 서로의 괴리를 갖게 된다는 당위성이 전제된다. 따라서 현실적인 감각이 무디어질수록 환상적인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픈 욕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모순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서구자본주의가 선전하고 일깨워 준 절망적이고 비인간적 제 모순을 미적 세계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현실 감각을 추상화 해버리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 해석해 내기 힘든 권력에 의한 폭력과 비인간화, 물신화, 노동과 인간소외, 분단과 계층갈등 등의 부정적인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절망적이고, 순간적이고, 영적이며, 어둠과 죽음의 미학으로 표현해 버림으로써 反인간적, 反민중적, 反사회적 일탈이 예술적 고뇌로 꾸며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휴머니티를 강조하는 예술에 대해 서구 자본의 병폐(이데올로기)를 들어 비판하면서, 우리는 미처 체득되지도 못한 이론적 허구를 따라가다 보니 마침내 내용과 소재를 떠난 말초적 기교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예술과 생의 거리를 없애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중(독자)은 어떤 상황을 운명적이고 예정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말한다. 이는 문학 현상이 결코 개인적인 산물이 될 수 없으며, 일정한 사회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생기고 발전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시작태도에 있어서 심미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은 예술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는 별개로 본다. 즉 고상한 예술적 취향을 계속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당시대의 모든 제 모순에 대하여(노동/빈곤/학대/폭력/성/권력/문화)구체적인 논의를 피한다. 그만큼 현실 문제에 대한 느낌과 해석의 강도가 약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통일된 지각을 거부하고 감정의 혼란을 다스리는 성숙한 관점에서 시작하는 기법은 없다. 단순한 수사와 아니면 현란한 수사로 자기 암시성을 강조할 뿐이다. 환언하면 공감력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하나의 관념임에는 틀림없으나 관념의 사회적 기반은 없다는 말이 된다. 소비예술의 측면에서 보면 단편적인 현실로써 전체적인 현실을 반영시킨다고 생각하는 한 현실적인 모순은 흔히 고급예술을 주장하는 예술가 사이에서 전혀 문제될게 없는 법이다. 결국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상존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을 하는 이는 문화적 시혜성 발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독자는 예술작품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이는 순환적인 오류를 발생시키게 되는데 이를 일러 예술의 소외라고 하우저가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이 ‘시인추방론’에서 밝힌 것처럼 예술이 사사로운 수단으로 추상화, 형식화 되어갈 때, 예술적 소외가 심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문학 활동이 극소수의 동호인 문학으로 전락하고 문학권력이니 출판 권력이니 나아가서는 학연과 지연 그리고 끌어주기식 풍토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타인을 위한 문학을 주장했던 싸르트르/까뮈/리차드슨/필딩/디킨즈 등등이 설파한 예술의 기능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예술가의 신념과 행동 인식의 탁월함은 작품의 탁월함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삶의 해석과 전망에 자신의 체험이 얼마나 공감대를 갖는가를 먼저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작자의 시적 상상력의 베이스가 곧 인식의 탁월함에 있다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고자 장황하게 풀어 본 잡설이다. 끝으로 시인 김수영의 말을 빌어 보자 “시작詩作은 머리도 심장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문단의 카스트 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작가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대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러한 절차는 신문과 문학 전문 잡지를 통해 하게 되는 것이 대개의 경우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책으로 묶으면서 등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절차가 문단에 대단히 중요한 카스트적 인식을 제공하고 있는데 어느 잡지로 언제 등단했는가 내지는 어느 신문으로 몇 년도에 등단했는가를 따지는 문단의 풍토 때문이다. 이러한 등단 출신지에 대한 문제는 그 사람의 작품의 성과내지는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로 작용한다. 문학잡지에서 작품을 싣는 구조 역시 일단 작품성에 따른 청탁 보다는 손쉬운 인맥이나 잡지사의 이해에 따라 청탁을 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 작품성보다는 네임 벨류를 더 중요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네임 벨류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 문인들은 그 네임 벨류를 높여줄 잡지를 찾게 되고 어느 정도 작품성을 갖게 되면 흔히 말하는 등단처 세탁을 하게 된다. 내가 아는 시인의 경우도 무명의 잡지로 등단하고 시집까지 냈으나 도무지 원고를 실을 만한 곳에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방의 잡지로 등단하고 또다시 중앙의 잡지로 재 등단했다고 한다. 또 어떤 시인은 등단처가 이름이 없었던 까닭에 좀 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명망 있는 문사(청탁 여부를 쥔 사람)가 참석하는 모임에 줄기차게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고 노력하여 지금은 시집도 내고 어느 정도 문단에서 자리를 잡기도 한 사실도 있다. 이 경우 그나마 시간과 금전이 뒷받침해준 결과다. 소위 자기 수준에 맞는 괜찮은 잡지로 등단했다는 이유 때문에 기존에 등단한 잡지와 결별하거나, 아예 기등단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등단처는 문인에게 카스트의 쇠사슬과 같은 것이다. 등단처가 유명하지 않는 사람의 시집은 아예 좋은 잡지사에서 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등단처가 좋지 않은 사람은 작품도 안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변별력을 갖고 있는 잡지는 얼마나 될까? 기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받은 시인들과 작품의 면면들을 보면 의아해진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등단한 잡지 수준에 따라 원고 청탁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바로 현재 한국 문학잡지의 왜곡된 구조를 잘 대변하는 좋은 예다. 우리나라는 약 400여종의 문학잡지가 있고 대부분 신인상 제도나 추천 제도를 갖고 있다.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번 발간하는 잡지에서조차 신인상을 주어 등단시키는 예도 있을 정도며 일부 월간지의 경우 한 번에 최고 10여명의 시인과 수필가를 배출하는 것을 보았다. 일 년이 지나면 도대체 몇 명이 등단하게 되는가? 과연 이들이 문인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일부는 좀 더 나은 다른 잡지로 이동할 것이며 일부는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능력이 없어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문단의 옥상옥 구조를 받치는 하부구조가 될 것이다. 한 때, 몇몇 잡지사 주간에게 등단처 표기를 말거나 아니면 젤 뒷장에 표기함으로서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권고를 많이 해봤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작품보다는 이름을 원하는 문학사나 그 이름만을 보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다를 게 없다. 등단 절차는 글 쓰는 자의 계급적 이해를 심화시키고 있고 단은 스스로 카스트적 사고에 빠져 있다. 물론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일부 시인들의 작태를 보면 할 말이 없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시인들도 여럿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란 누구일까? 그리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금전으로 인맥으로 때로는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넓히려는 사람들은 분명 문단 패거리의 능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얼마 전 민족작가협의회에서 민족이란 명칭을 빼자는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작가를 지우고 민족은 살려놔야 할 것이다. 작가는 넘쳐나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작가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미래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단이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사이 그 패거리에 들 수 없는 사람들이 틈새를 공략하여 문인들을 양산하고 잡지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에 의해 문인입네 거들먹거리는 문학 떨거지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문인의 관을 쓴 사람들이 작품보다는 권력 잡기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문인단체들이 권력 헤게모니 싸움에 능한 까닭이 여기서 읽힌다. 문인이 작품으로 읽히지 않고 계급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또한 문학 건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슬픈 일이다. 농민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농민이 없고 노동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글을 쓰는 노동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면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거시적인 평가를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출판사나 문학사에서 호들갑 떠는 문학의 위기는 분명 여기에서 출발된 것이다. 문단은 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열려진 사회가 아니다. 가장 폐쇄적인 카스트적 계급 단체다
창작의 기본 태도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2005년 봄 계간 e문학 창간호>
매체를 위한 시- 매체철학 ( new media philosophy) '매체에는 메세지가 담긴다'. 그러면 매체가 바뀔경우에도 그 메세지는 유효한가? 특정매체에 특정 메세지가 있다면 매체가 바뀔 경우 그 메세지는 또다른 메세지로 바뀐다라고 보는 것이 옳다. 즉 매체가 바뀔수록 원래 의도된 메세지는 계속 왜곡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특정한 배경과 음악, 그리고 장면과 대사들이 광고나 선전에 이용할 경우가 있는데(주로 패러디) 그 메세지가 현저하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버리즘'을 옹호하는 시인들은 매체는 대단히 효용면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효용성이란 것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시를 매체로 전달하려는 욕구는 그 '기술적 효용성'보다 '시의 상품성'에 더 논리적 우위가 있다고 보는 탓이다. 따라서 '시의 상품성'을 강조한다면 그것이 대중적 문화의 확산을 기저로 한다는 논리라기 보다 대중의 지갑을 열기 위한 판촉수단에 따른 기술적 효용성 강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웹북의 경우 내려받기나 페이지 뷰에 따른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폭력'에 주목한다. 특정한 사물과 인식에 특정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행위는 분명 폭력이라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특정한 이미지의 현현은 곧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가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 공급하는 매체와 결합할 경우 마치 명곡이 디즈니랜드의 애니메이션과 연동되어 음악적인 메세지가 대체되는 것과 같은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좀더 심도있게 들어가 보면 음악이나 미술, 그리고 문학의 대중성 지향이 필수적이라는 이슈 이면에는 대중의 구매력을 부추기려는 자본가들의 전략이 숨어있다. 그 선택권도 공급자의 상업적 이해에 따라 편협한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문화적으로 대중성을 지향한다는 논리는 언제나 자본가들의 전략적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지 시인들의 발상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문학의 양상은 사대부의 문학과 민중적 토대를 지닌 민중 문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특이 한 것은 사대부의 문학이 국가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득권에서 멀어진 사대부와 민중 그리고 여성들의 문학은 그 문학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오늘날 대중적 문화의 토대를 지녔다고 말하는 대중 문학이 과연 전대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가하는 문제다. 예술과 관련된 문화 향유층의 확산은 분명 산업 사회의 발달과 출판 자본의 성장과 관련있다. 따라서 전대의 사대부층의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상업자본의 이해에 따라 그 이데올로기 양상이 변화 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정의 계급과 소수의 문화적 기반을 전체 문학의 양상으로 이해하던 시대와는 그 계층적 대상에 있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뉴미디어를 구축하고 있는 자본과 그러한 자본의 혜택을 받고 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은 뉴미디어의 특성에 주목하고 뉴미디어의 이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대중적이라는 적절한 사회적 용어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다. 평자의 입장에서 특정 시작이 매체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하여 판단해야 한다면 평자의 판단은 기술적인 판단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철학적 사유를 그에 따른 글쓰기 및 제반 표현의 방식의 변화를 통해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매체'이지 '철학'이 아니요, 역사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다. 설혹 뉴미디어 매체가 급변하는 정보사회를 장악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인간의 인식과 철학 등 존재론적인 위상이 좌우된다고 까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문제 삼은 것이 바로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뉴미디어의 발달과 확산에 의거해 어떻게 사회구성이 급변하는가가 아니라 뉴미디어의 발달과 확산에는 어떠한 '자본의 논리'가 숨어있는가가 문제를 삼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울러 이러한 매체를 통해 대량의 정보를 왜곡시킬 경우 그것을 검정할 만한 능력이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특정의 이해에 따른 이데올로기에 함몰된다. 따라서 매개나 수단으로서 매체를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그 위해성 인식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마크 포스터는 1990년 저작 『The Mode of Information : Poststructualism and Social Context』에서 분석의 대상은 '언어'이다며, 인간의 언어는 구어(口語)에서 인쇄된 글로, 그리고 '전자언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천해 왔다고 보며, 전자 언어는 이전의 두 단계가 갖고 있던 '수신자-발신자'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고 본다. 의미의 상징과 소통의 맥락에서 포스터가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전자적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소통 양식이다. 문제는 그 소통의 전자 언어의 주체는 누구인가이다. 그것은 바로 '상징과 기호'들이다. 그 상징과 기호는 누가 만들고 배포하는 가 반문하면 분명 소통 당사자의 것(흔히 정보양식을 이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징과 기호 이미지는 끊임없이 상업적인 이해에 따라 뉴미디어를 통해 공급되어 왔다. 그러면 그 공급자는 누구인가를 반문해보면 쉽게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매체가 바뀌면 메세지도 바뀐다. 따라서 소통 당사자의 의도를 상징과 기호로 바꾸는 순간 원래의 메세지는 쉽게 왜곡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 때, 광고에서 "이 제품을 사는 주부는 현명한 주부입니다" 라고 함으로써 대다수의 주부들을 현명한 주부와 그렇지 못한 주부로 나누는 기준으로 설정된 광고가 있었다. 모 가구회사에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고 함으로써 일부 학생들 사이에 침대에 관한 정의가 달라지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이후 현대의 전자 문화의 특성은 분명 대중적인 지향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또한 중산층의 의식과 생활패턴, 소비욕구를 충족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중이란 오늘날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소비를 조장하도록 격려되는 또다른 피착취계급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미국의 조세제도가 자본가나 대기업보다 중산층이나 중소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산층의 의미란 거대 자본과 국가의 항존적인 재정적 기반계급임이 분명해졌다. 한국의 경우 소비를 조장받은 70%의 중산층(허구적인 인식 수치)이 IMF 이후 그 소비적 여력이 무너진 후 상 하층으로 극단적으로 나뉘어진 예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부를 상위 자본가들에게 뺏겼다는 뜻이다. 따라서 건전한 중산층의 문화나 경제를 위한 것이라는 선전은 거짓이라고 봐야한다. 다시 매체 문화로 돌아가서 시를 매체를 통해 시인의 의도를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면적을 시공간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와 함께 시인의 시적 의도를 충분히 매체의 활용으로 커버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물론 문학 역시 아날로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텍스트가 문학 텍스트의 내적 외적 변화들을 주도해 나가는 현실을 인정하라고 한다. 또한 아날로그 텍스트로 출판되든 디지털 텍스트로 출판되든 시인의 상상력과 세계관은 시대와 조응하고 시대를 사유하는 힘은 같다고 본다. 물론 그림이나 음악, 문자의 운용등이 시를 감상하는데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때 교과서에 실린 시인들의 시가 시인의 의도와는 달리 대입전형을 위한 분석용 시가 됨으로써 그 시를 분석받은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 시에 대한 또다른 이해자체를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예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해석의 독단성이 가져온 병폐였다. 특정한 매체를 통해 특정한 시를 매개할 경우 매체가 주는 효과를 작품성과 별개의 문제로 따져야 하는 이중성을 갖는 동시에 가장 좋은시란 가장 매체를 잘 이용한 시인가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자칫 매체를 가장 잘이용한 시를 가장 뛰어난 시로 뽑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매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온전치 못한 현실에서 이미 갑자기 몸의 철학(Comparative Philosophy)에 휘말린 한국의 시단을 보면서 인간의 인식에 대한 깊은 이해조차도 다 되지 못한 상태에서 (전통적인 유가나, 노장, 불교철학) 갑자기 벌거벗고 나온 감각적인 시들을 보면 과연 인간을 대체할 만한 매체와 사유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보는 반 생명적이며 기술주의 우위의 서구적인 시각의 맹점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시인들에게 있는 지 묻고싶다. 매체철학에 앞서 자본의 이동과 그 성격에 대해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보나 미디어 , 이미지가 폭력의 제록스가 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오직 변화만을 감지하는 메세지는 때론 독창성을 잃을 수 있다. 메세지가 독창성을 잃으면 폭력이 된다는 측면에서 이미지는 이미지의 표현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