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책을 읽으면서 점점 뒤로 갈수록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너무 허구적이 성격이 짙어서 재미를 더해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종교적인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기대가 줄어들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은 종교적인 소재를 다루긴 했지만 정말 그럴 듯하게 내용을 잘 구성하여 책을 읽는 내내 긴장감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신의 침묵은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쳐지고 읽다보면 독자들에게 ‘모르카(신)가(이) 범인이구나’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려주고 있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아 이거 신앙적으로 시험을 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용의 허구성이 독자들에게 재미를 위한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려주고 있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자연스레 걱정거리는 없어졌다. 책 내용과 상관없이 정말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도달할 수 없어서 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메클린 교수의 말이 있다. 이 말은 현재 나의 상황에 정말 도전을 주는 구절이다.
메클린 교수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물론 캐슬린도 교수의 말을 떠올리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고 그래서 교수에게 자신이 배웠던 것을 감히 스승에게 말한 것이다.) 캐슬린이 자신이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하자 기운을 차리고 클라리사를 도우기 위해 다시 ‘쌍둥이 0.809’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지만 이 구절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네가 할 수 없어서 안했던 것인가? 하지 안하서 못했던 것인가?’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에 대해 반성하게 하였고 그리고 앞으로 대학생활과 나의 미래에 대해 도전을 심어주는 강력한 구절이였다.
책을 읽다보면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다. 클라리사는 캐슬린과 매클린을 신뢰한다. 클라리스는 정말 믿을 수 있는 동료인 매클린을 찾아가 ‘내 말을 믿어요?’라고 묻고 누군가 듣는 다면 정말 ‘저 늙은기가 추리소설만 쓰더니 노망이 난거야’라고 할 정도로 상상 속 이야기인 살인 사건을 이야기 한다. 난 매클린의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럼요. 당신 말이니까.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당신도 인정하겠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얘기는 조금도 믿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매클린은 클라리스의 질문에 대답한다. 이들에게는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조차 믿어 줄 수 있는 신뢰와 믿음, 동료애가 있다. 역시 이 구절도 전체적인 줄거리로 볼 때 연관되어있는 감상은 아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책을 살펴보면 이들은 신뢰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관계를 이어간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이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이라면 긴박한 상황이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믿고 도와줄 사람도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도왔다. 매클린은 수첩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진전이 없자 자신과 클라리사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를 소개 연결해준다. 다행이도 매클린의 동료인 종교사 교수 바코비아는 매클린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클라리사의 이야기를 믿고 수첩을 조사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바코비아도 비록 클라리사라는 사람에 대해 별로 알지는 못하지만 매클린이 신뢰와 믿음으로 이어준 끈으로 유대인 슐론스키를 소개시켜준다. 서로의 신뢰와 믿음이 이어준 끈으로 클라리사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들의 동료에 대한 신뢰감과 믿음 정말 부럽게 느껴진다. 정말 인생에 살면서 이런 동료를 5명만 만나도 많이 만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위험에 처했을 때 즉각 달려와서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달려와 줄 수 있는 그런 동료(친구)가 얼마나 있을까’하고 뒤를 돌아보게 하는 구절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몇 있는 것 같다. ‘술’이란 도구 없이 솔직하게 고민과 마음에 있는 말들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을 읽는 도중에 어느 한 구절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아마도 무신론자들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오해할 만한 내용인 것 같다. 모르카가 예수에게 물었다. 부활하지 않았느냐고. 예수는 ‘안했지. 그럴 능력이 내게 있겠니?’라고 대답했다. 감상문에 이런 내용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 책을 감상하면서 너무 종교에 대해 꾸며 쓴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현재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는 세 가지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 중 하나를 부인하고 있다. 바로 생명에 대한 권세 이다. 예수는 생명을 심판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받았다. 그러기에 예수도 어느 한 생명을 심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예수는 물론 허구적이지만 누군가를 죽일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부활한 사실도 부인한다. 이 내용은 왠만한 독자들은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을 읽고 소설임을 망각하고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예수는 하나님이 등 떠밀어서 여러 역사를 행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자들 중 한명에게 팔릴 것을 알았고 베드로가 3번 부인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성경을 왜곡하는 내용이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책을 읽는 내내 신경이 쓰였고 이 부분 만큼은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그런 구절이었다. (모르카의 모습을한)신에게 클라리사는 이런 말을 한다. “욥의 내기. 까마득한 옛날에 당신들 둘이 시작한 ‘욥의 내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군요. 이제는 이 지구에서…….”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크리스찬이라서 그런지 자꾸 이런 구절만 눈에 들어온다.
신앙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항상 갈등한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예를 들어 어떤 교수가 뇌물로 천만원짜리 수표를 받았다.
그는 즉시 아내와 상의를 했고 결론은 되돌려주자는 거였다. 과연 그들의 마음속에 되돌려주자는 선한 마음이 있었을까? 수없이 고민 했을 것이다. 받아야 한다,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두 생각이 수없이 싸웠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긴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앞으로도 이겨 나갈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내적 전쟁을 많이 한다. 이 욥의 내기나 혹은 이 책에 나오는 끔직한 내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에서부터 이런 내기는 시작된다. 욥의 내기처럼 큰 사건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도 선한 마음으로 올바른 생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잘못된, 나쁜 생각을 이기다 보면 뿌듯함이 느껴질 것이다. 이 구절 또한 나에게 앞으로 소방공무원이 목표인 나에게 도전을 주는 가슴에 와 닿는 부분적으로 좋은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런 임무에 몰두할 거예요. 나는 내 형제가 훔친 것을 두 배로 돌려줄 거예요.”라고 신은 말한다. 지금까진 책 밖에서 느낀 것을 썼지만 이 부분 만큼은 책 속에서 느낀 것을 쓰고 싶다. 이 책에 나오는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관념을 무참히 깨뜨린다. 신은 모르카의 모습으로와 캐슬린과 사랑에 빠져보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해 주고 걱정해 주고 자하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강력한 힘 또한 없어 보인다.
또한 신이 불멸의 존재인 자신이 공허함을 느껴왔다고 하는 부분에서 인간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삶을 사랑하며 사는 삶을 뒤로 한 채 신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임무에 몰두할 것이라고 클라리사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동시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홀연히 사라진다. 어떻게 보면 결말이 참 허무하지만 역시 권선징악은 어디에나 있는 듯하다. 또한 사람들도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해피엔딩이라 부르며 그것을 바라기도 한다. 이 책 또한 선한 신과 사탄의 내기에서 신이 계속해서 이겨 나가기를 바라는 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책을 읽으면서 비록 뒤로 가면서 긴장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이 책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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