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오정국
흙의 시간 속에서 외 4편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일치감치 재를 꺼내온 것이라
꽃의 시간,
나무의 시간,
흙의 시간을 뒤적거렸지
숨이 차오르도록 헐과 할을 반복하면서
새벽녘에 잠을 깨면
벽시계를 보지 않았어
냉장고 불빛에 얼굴을 펼쳐놓고
쩌억쩌억 금이 가길 기다렸지
얼음덩어리의 푸르스름한 숨결을 따라
내 핏줄 굽이치던 노래가 있었다고 믿었던 거라
현관문이 열리면
도어락 저편으로 사라지는 4608#처럼
액정화면의 타임캡슐에 봉인되긴 싫었어라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진흙 바닥을 뒹굴고 춤추고 노래했지
나의 기억은
폐지와 의류, 쇠붙이로 분류되고
유리병과 플라스틱으로 재활용되는데
분리수거는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토요일을 끝없이 중얼댔어
나는 이 풍경에 휘감기고 뒤섞이고 흩날렸지
비바람에 흩어지고
폭설에 휩쓸리며
악천후의 후일담으로 남겨진 것이라
컨테이너에 말라붙은 칡덩굴처럼
전봇대 귀퉁이의 입간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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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체험 기동연습
고작 현관문을 닫았을 뿐인데, 사방이 순식간에 캄캄해지고, 거울 속의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예정된 파국이 지연되고 있다 손끝에서 움직이던 소설의 문장이 멈춰 서 있다 스토리를 되짚고 뒤집어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희미하게 웃는다 스토리가 엇갈려야 플롯이 되는데, 일직선의 줄거리가 철길처럼 완강하다 교각을 감고 도는 물길이 시퍼렇고, 강바닥엔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다
책상머리 유리창에 검은 눈동자가 흘러내린다 눈동자1은 전봇대 뒤에서 입김을 내품는 유령 같고, 2는 전깃줄에 걸린 천 조각처럼 펄럭펄럭, 3은 흙구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1,2,3이 얼굴을 쳐들면
소설이 다시 시작되고, 등장인물이 성큼성큼 걸어올 텐데, 골목은 텅 비어 있고, 누군가의 서늘한 손바닥이 목덜미에 놓여진다 이것 봐! 네 생의 파국을 불러올 문장, 아직 멀었어!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이다 여기까지 나를 몰아세운 문장들,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으려는 것인데, 행간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움푹한 담장이 보이고, 흙덩이와 돌덩이의 균열들, 흠집이 깊다 깊은 밤이면 담장 안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 돌 구르는 소리
내 입술의 주기도문이 물결처럼 고요히 밤하늘을 지나간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얼굴이 물풀처럼 흔들리고, 이윽고 벽시계가 내 곁에 몸을 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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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X
이게 뭐람,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말소리, 이명인가 했더니, 낯익은 듯 낯설다 어라, 청중들의 웃음소리, 박수갈채, 누군가 보내준 녹음 파일 하나, 그 어느 문학 강연장인가
■는 캄캄하다 ▶과 함께 작동되는 목소리는 길 잃은 아이의 울음을 삼킨 채 떡갈나무 숲의 밤길을 걸으며 죽은 아비의 말투를 흉내 내는데, 뒤돌아보면 사라지는 바람소리 같은 것, 공중에서 자꾸만 되울려오는데
우리는 현재진행형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만
그건 그때의 현재였을 뿐
■는 닫혀 있다 문학을 논하고 시를 읊던 붉은 목구멍이 보일 듯한데 ▶의 목소리는, 텅 빈 방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는 저만큼의 당신을 비껴서 흩날리지만 결국은 당신을 통해 성립되는 이야기가 된다
기억 속으로 흘러가는 얼음조각이거나
불탄 책갈피로 여기에 남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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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해변은 끝없이
멀어지면서 저무는 뒷모습
밤의 해변은
멀거나 가깝고
수평선에 넋을 놓다가 파도 한 줌
노을빛으로 울먹이다가 파도 한 움큼
새벽바다 어선의 불빛에게도 파도 한 자락
밀려오고 쓸려가는 무한반복의 물굽이가
무너지고 멈춰 설 때
비로소 홀로임을 깨닫는 모래알들
제본되지 않는 모래의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닭 뼈다귀 개뼈다귀 사람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텅 빈 모래밭에서
희고 검은 돌멩이의 시계판 위에서
발끝에서 물밑에서
물결은 겹쳐져서 출렁이지만
제각각의 찰라 속으로 사라진다
폭죽이 솟는다 허공에서 꽃피는 불꽃의 아우성
캄캄하게 메아리치는 겹겹의 구멍들
저 상처를 어찌하랴 싶지만
밤의 해변은
끝없이
널빤지와 신발짝과 폐타이어와 함께
헛딛지 않고선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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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를 때려주오
마스크를 벗고 나니 딴 얼굴이네 붉은 왕관 스티커와 선거판 벽보가 붙어 있어, 아프가니스탄 포연이 얼룩져 있고, 희고 검은 테두리가 지워지질 않아
절반의 얼굴은 이미 나를 떠났고
엘리베이터에서의 짧은 침묵, 영문 모를 적의의 눈빛을 주고받을 때, 인간의 눈동자가 그토록 깊은 줄 미처 몰랐지, 지하도 계단에선 팔을 펄럭거렸어, 절름발이 시늉, 말더듬이 흉내, 노래방 풍선 인형이 따로 없었어
날마다 딴 길로 찾아가는 내 얼굴
도로는 하구한 날 포장공사 중, 땜질과 덧칠이 거듭되는데, 그 많던 맨홀, 싱크홀로 꺼졌나, 블랙홀로 사라졌나? 아무렴, 헛발을 내딛듯 공중제비 몇 바퀴 돌고 싶은데, 마스크 없는 세상이 덜컥, 철렁
절반의 얼굴은 이미 나를 잊었는데
택배가 쌓이네 앞마당엔 팔다리 없는 옷가지가 펄럭거리고, TV 토크쇼는 엔데믹, 엔데믹을 나풀대는데, 내 얼굴이 내게로 돌아올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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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혼돈 속에 멈춰선 시
시를 읽을 때마다 벽돌 담장을 보는 것 같다. 행(行)과 연(聯)이 너무 가지런하다. 행간 또한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시의 형식이 그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문제는 문장 뒤의 생각 또한 너무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나 세상이 그러할까? 이 세상의 균열과 상처를 말끔하게 봉합시켜놓았다. 꼭 그래야만 시가 완결되는 것일까?
이 세계는 혼돈의 덩어리다. 시간은 무한대로 이어지지만 찰나의 매듭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시’를 지향해왔다. 아날로지(analogy)에 길들여졌고, 여기에 구멍을 내는 아이러니(irony) 역시 의미형성 방식이다.
누구나 그렇듯, 시집을 내고 나면 세상이 막막하다. 그간의 생각들을 묶어서 내던지고 황량한 벌판에 몸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일곱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 새삼 시가 뭔가를 질문하게 되었고, 시집들을 읽었고, 이 세계의 균열과 간극을 생각하게 되었다. 균열 안쪽의 거대한 혼돈이 눈에 들어왔다. 주체와 객체, 현재와 과거, 지속과 단절, 영원과 찰라, 삶과 죽음 등의 생생한 이미지가 그것이다. 뒤섞이고 엇갈리는 혼돈의 심연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거기에 나를 밀어 넣을 때, 내 손이 자유로워지고, 삶도 그러하리라.
굳이 명명하자면 ‘혼돈 속에 멈춰선 시’가 되겠다. 불가능한 꿈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쪽으로 나를 옮겨가고 싶다. 지난 몇 달간 쓴 시를 되짚어본다. 저간의 생각들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우선, 「흙의 시간 속에서」는 지난해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를 펴내고 나서 출간 후기 삼아 쓴 시이다. 다섯 번째 시집 『파묻힌 얼굴』에서 노래했던 ‘흙의 시간’과 그 이후의 ‘재의 시간’, 그 간극을 담아보고자 했다. 소설 창작을 소재로 한 『암흑체험 기동연습』은 “예정된 파국이 지연”되는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상황이 “막다른 골목”의 “움푹한 담장”, “흙덩이와 돌덩이의 균열”로 나타나 있다.
그런가 하면, 「파일 X」에선 ‘녹음된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 사이의 거리를 담고자 했고, 「밤의 해변은 끝없이」에선 “제각각의 찰라 속으로 사라”지는 “물결”을 통해 시간의 지속과 단절을 말하고자 했다. 「어릿광대를 때려주오」는 ‘포스트 코로나’를 그리고자 했다. 마스크로 가려진 “절반의 얼굴”로 ‘나머지 얼굴’을 찾아가는 길, 어쩌면 그게 우리의 삶이며 시가 아닐까 싶다.
시를 써놓고 시를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시작노트’는 늘 난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이렇게 썼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해진 듯하다. 문득,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전에 썼던 글의 흔적이 투시되는 일종의 양피지”라던 보르헤스의 말이 생각난다. 이전의 흔적을 불태우면, 지상의 시간이 나를 통과하면서 그 어떤 균열을 던져줄지 궁금하다.
오정국
•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현대문학》 등단.
•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
•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 문화일보 문화부장,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