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0.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5)
(구지권 세거지와 재실)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 현풍읍에 이어 이번에는 구지면의 여러 성씨 세거지 및 재실에 대해 알아보자. 참고로 구지면 마을들은 대부분 대니산을 등지고,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현풍 곽씨·군위 방씨, 구지면 오설리 ‘영모재·오산재’
오설리(烏舌里)는 대니산 남서쪽에 있다. 대니산 자락 마을 중 크기로 치면 첫손가락에 든다는 오설리는 군위 방씨(軍威方氏)와 현풍 곽씨 세거지다. 마을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오설리 군위 방씨는 한성부 좌윤을 지낸 니암(尼庵) 방치원(方致遠)이란 인물을 입향조로 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좌측 산기슭에 군위 방씨 선영이 있고, 선영 입구에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현풍 곽씨 역시 군위 방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터를 잡은 현풍 곽씨는 솔례마을을 연고로 하는 청백리공파 후손이다. 마을 안쪽 오설지(烏舌池) 뒤 ‘큰등’에 현풍 곽씨 선영이 있다. 이곳에는 청백리공 곽안방의 어머니인 수성 나씨(壽城羅氏)를 비롯한 선조 묘가 있으며, 선영 아래에 재실 ‘오산재(烏山齋)’가 있다.
남양 제갈씨, 구지면 덕곡 ‘제갈남학 효자비각’
응암(鷹巖)1리 덕곡(德谷)은 대니산 남쪽에 있다. 구지면은 최근 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곳이다. 그중에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개발의 바람을 피한 곳이 몇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이 응암리 약산(藥山) 골짜기에 자리한 남양 제갈(南陽諸葛)씨 세거지 덕곡이다. 덕곡 마을 입구 길가에는 ‘갈효자’로 이름난 제갈남학(諸葛南鶴·1847-1903)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응암리는 덕곡 마을만 남아 있고 큰마·안마·새터·아릇굼·사무실·대포 같은 자연부락은 대부분 사라졌다. 응암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있었던 매방바위[매바우]에서 유래된 것인데 지금은 매방바위도 사라지고 없다.
현풍 곽씨·서흥 김씨, 구지면 화산 ‘추원재·파산재·화산서원’
화산2리 화산(花山)은 최근까지 대니산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마을 역사가 무려 500년이 넘는다. 하지만 2013년부터 시작된 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화산2리 옛 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현재 이 지역에는 공단 가운데 화산이라 불리는 작은 동산이 하나 있다. 이곳이 과거 화산촌이라 불린 현풍 곽씨 세거지 뒷산이다. 화산촌은 현풍 곽씨 청백리공파 파조인 곽안방의 2남 규헌(葵軒) 곽승화(郭承華)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현재 화산에는 곽승화의 묘를 비롯한 선조들의 묘가 있고, 화산 아래엔 ‘화산서원’이 있다. 한편 서흥 김씨 세거지인 화산1리는 대니산 남쪽 기슭에 바짝 붙어 자리한 탓에 국가산단에 수용되지 않고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는 김수침(金壽沈)을 기리는 ‘추원재(追遠齋)’와 김응현(金應賢)을 기리는 ‘파산재(波山齋)’가 있다.
밀양 박씨, 구지면 송림 ‘송담서원’
도동2리 송림(松林)은 대니산 북서쪽에 있다. 이곳은 유학자이자 임란 의병장이었던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6)과 관련 있는 마을이다. 박성은 19세에 사마시에 1등을 하고 낙천(洛川) 배신(裵紳) 문하에 출입했다. 배신은 그의 인물됨을 보고 “한훤당[김굉필]이 난 고을에서 또다시 인물이 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임란 때는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에서 활약했고, 정유재란 때는 청송·진보·영덕 세 고을 의병장을 지냈다. 반면 선조 때 두 번이나 8도 인재로 천거됐음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을 만큼 ‘진퇴(進退)’가 분명했던 선비였다. 마을 위쪽에 박성을 기리는 ‘송담서원(松潭書院)’과 ‘박성 묘비각’이 있으며, 뒷산 정상부에 묘가 있다. 인근 구지면 창리에는 그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현풍 곽씨·경주 이씨, 구지면 징리 ‘영사재·첨가재’
징리(迲里)는 대니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 모습이 마치 떡시루를 차곡차곡 쌓은 모습을 닮아 ‘증골(甑谷)·증동·질골’이라고도 하고, 마을 형국이 징처럼 생겨서, 혹은 마을 뒷산에 징을 걸어 두었다고 해서 ‘징동’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와 현풍 곽씨가 많이 산다. 징리 경주 이씨는 1660년 진위장군 수문장이었던 이견용(李見龍)을 입향조로 한다. 마을에는 경주 이씨 재실인 첨가재(瞻柯齋), 현풍 곽씨 탁청헌공파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서흥 김씨, 구지면 도동 ‘관수정·낙고재·도동서원·정수암’
도동(道洞)은 대니산 북서쪽 도동서원이 자리한 도동1리에 있는 마을이다. 약 400년 전 서흥 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마을 이름은 ‘보로동(甫老洞)’이었는데 도동서원이 들어선 이후 지금의 도동으로 마을 이름이 바꿨다. 본래 도동에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 종택이 있었는데, 1779년(정조 3) 지금의 현풍읍 못골로 옮겼다. 현재 도동에는 재실인 ‘관수정(觀水亭)’과 ‘낙고재(洛皐齋)’가 남아 있으며 2024년 11월 ‘도동서원유교문화관’이 개관했다. 인근 다람재에 한훤당 선생이 여묘살이를 했던 정수암(淨水庵)이 있는데 지금은 불교 암자로 변했다.
현풍 곽씨·김해 김씨·밀양 박씨, 구지면 창리 ‘누호재·도호재·모은재·영모재’
과거 구지면의 중심 마을이었던 창리(倉里)는 대니산 남쪽에 있다. 고려말 마을이 형성되어 방호백이란 인물과 수성 나씨가 살았다고 전한다. 이후 서흥 김씨·밀양 박씨·진양 강씨·김해 김씨·현풍 곽씨 등이 터를 잡아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창리란 지명은 마을에 큰 창고[外倉]가 있은 것에서 유래됐다. 창리에는 지금도 문중 재실이 여럿 남아 있다. 밀양 박씨 재실로는 ‘대암 박성 불천위 사당’, 박숙손(朴叔孫)을 기리는 ‘도호재(島湖齋),’ 낙은(洛隱) 박지용(朴之溶)을 기리는 ‘모은재(慕隱齋)’가 있다. 김해 김씨 재실로는 박암(撲庵) 김현의(金顯儀)를 기리는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현풍 곽씨 재실로는 곽념(郭捻)을 기리는 ‘누호재(樓湖齋)’가 있다.
현풍 곽씨·경주 김씨·수원 백씨·달성 서씨·창녕 조씨, 구지면 수리리 ‘경모재·산전재·안산재·이사재·지정재·첨경재’
수리리(修理里)는 대니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정확한 마을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북쪽 대니산 기슭에 중담[중리]과 지정동[수리1리]이 있다. 지정동(芝亭洞)은 수원 백씨·달성 서씨·경주 김씨 세거지로 수원 백씨 재실 ‘지정재(芝亭齋)’, 서호(徐浩)를 기리는 ‘산전재(山田齋)’, 김사충(金思忠)을 기리는 ‘경모재(景慕齋)’가 있다. 그 아래 사동[泗洞·寺洞·수리2리]은 창녕 조씨 세거지로 조상천(曺尙天)을 기리는 ‘첨경재(瞻敬齋)’와 조윤암(曺胤巖)을 기리는 ‘이사재(履泗齋)’가 있다. 수리리 제일 남쪽에 있는 안촌[安村·수리3리]은 현풍 곽씨 세거지로 곽홍원(郭弘垣)을 기리는 ‘안산재(安山齋)’가 있다.
*** 다음 회에는 대니산 반경 10리 내에 산재한 기타 유교문화유산을 소개하면서, 6회에 걸친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