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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평화센터>
평화누리길 트래킹
●일시 : 2013년 10월 26일(토)
●장소 : 경기도 파주 ‘평화누리길’
●일정 : 평화누리공원, 통일동산, 헤이리예술인마을, 프로방스 카페촌(버스로 답사)
-반구정(방촌기념관, 앙지대) → 마정초교 → 장산전망대 → 화석정 → 율곡습지공원 (10.8km 트래킹, 3시간 30분)
●맛집 : 통일동산 두부마을(1인 1만원), 반구정 나루터집(장어구이, 민물매운탕),
1.평화누리길이란?
평화누리길은 2010년 5월에 개장되었으며, DMZ접경지역인 김포, 파주, 연천, 고양 일대를 도보로 답사하는 우리나라 최북단 트래킹로입니다. 모두 12개 코스로 구성되었으며, 파주지역은 4개 코스가 있습니다. 이 길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DMZ의 자연생태를 탐방할 수 있으며,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숨어 있습니다.
2.헤이리예술마을
헤이리 예술마을은 1998년 화가, 작가, 음악가 등 380여 명이 모여 파주지역 15만평의 부지에 만든 예술마을입니다. 이곳에는 창작실, 20여 개의 박물관, 10여 개의 미술관, 공연장, 여러 개의 판매공간(아트 샵) 등 다양한 문화 예술공간을 갖췄습니다. 헤이리라는 이름은 파주지역 전래농요 ‘헤이리 소리’에서 빌려왔습니다. 헤이리 입구 종합안내소에서 체험티켓을 구매할 수 있으며, 체험은 사전예약이 필수입니다.
3.황희 정승과 반구정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 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록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398년 (창왕 1)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 고려조때 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의 직무가 기복시켜 관직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후 언사로 인해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다시 문하부우습유에 임명되었고, 1399년(정종 1) 10월 문하부우보궐에서 면관되었다가 그해 2월 복직되는 등 강직한 직언으로 인해 수 차례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후 경기도도사를 거쳐 내직에 등용되어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 등을 역임하고, 1401년 (태종 1) 지신사(승정원도승지)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된 후 병조의랑으로 옮겼다가 1402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특별히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고, 1404년10월 우사간대부. 좌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언(좌부승지)에 올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계에 유력자로 부상된 것은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 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 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을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 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에 그는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409년 8월 참지의정부사로 승진되기까지 근 4년간 도승지로 재임하는 동안 국정에 커다란 실권을 행사하면서 태종대의 왕권강화와 제도 개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1409년 12월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2월 지의정부사와 7월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411년 9월에는 병조판서로서 명에 다녀왔으며, 1413년 4월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6월에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5년 5월 이조판서로 재임중 송사처리에 연관된 문책으로 6월에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직되었다. 그후 1415년 11월에 의정부참찬, 12월에 호조판서를 거쳐 1416년 이조판서로 재임하면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곧 이어 공조판서로 복직된 후 1417년 2월 평안도 도순무사로서 평양부윤을 겸임하였고, 그해 9월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왕실의 적서자봉작법을 개정하였으며, 1418년 1월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그해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서인으로 격하되어 5월에 교하로 유배되었고, 곧 이어 남원에 유배되었다. 그 당시 태종은 그에게 세자로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양녕대군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세자의 나이가 어리고 과실의 대부분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태종은 그가 중립을 취하여 사태를 관망하는 것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도 대간에서는 양녕대군 및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계속하여 탄핵하였으나 상왕(태종)의 오해가 풀리면서 1422년(세종 4)2월 남원에서 소환되어 직첩을 환급 받고 3월에는 과전을 환급받은후 10월 경시서제조 의정부참찬으로 복직되었다.
그후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이어 7월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이임하자 관동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특히 1425년 강원도 삼척에서는 중국의 주대에 선정을 베풀었던 문왕의 서자인 소공에 비유하여 그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에 대를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였으며, 지금도 '정승고개'라고 부르며 유덕을 기린다고 한다.
1423년 12월 판우군도총제부사로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하였고, 1424년 6월 의정부찬성, 이듬해 3월 사헌부대사헌을 겸대하였다. 1425년 3월에는 남원부사가 보낸 물품을 수뢰한 고위관직자를 조사할 때 조정의 다른 재상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의 여론이 황희만이 정직하다고 평가하였다. 1426년 2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를 재임중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 도체찰사로 파견되어 낙산성기를 답사한 뒤 약산을 요충지로 판단하고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하여 평안도 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되었다.
좌의정 황희가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행수로 임명하였다는 것과,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 필을 죽게 한 혐의로 사헌부에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담당관에게 사사로이 부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파주의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종이 그를 파직시킨 것은 일시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무마하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세종은 그를 파직시킨 지 1년도 안되는 1431년 9월 영의정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가례,성리학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렷한 학보를 가지고 있지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는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동안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내정 면에서 세자의 강학 요청과 양녕대군 문제, 민무구 등 외척의 문제, 경제육전의 개정, 상정 조례의 논의, 법관의 남형 금지, 소나무의 남벌 금지, 태만한 수령의 처벌 규정 등의 시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방문제와 대외관계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과 구휼을 통한회유책을 동시에 강구하였다. 특히 공조판서 재임 시에는 각 도에 비치한 군사와 군수물을 낱낱이 점검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였다.
그 밖에도 야인 토벌과 4군 6진의 개척, 북방인의 대우문제, 서북토관제의정비, 병마군기의 점검, 봉화의 시행, 강무시의 군복 제정 등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종자를 배급케 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여 백성의 복식생활을 풍족케 하는 등의 민본정책을 폈다. 그의 이러한 민본적 경제정책은 법률의 개정에도 반영되었다.
종래 원집과 속집으로 나뉘어져 내용이 중복되거나 누락되어 그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을 펴냈으며, 과전수세법, 공물문제, 기민의 구제책,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등 광범위한 대민정책을 펴서 민중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하였다. 문화면에서도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국가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즉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물을 진흥시키고, 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고려의 예법을 명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 보완하였다. 그 밖에도 복제규식으로부터 아악전례제도, 사직제도, 산천제사, 산릉보수칙, 기자묘의 신위제호, 종친대신의 상사의주 제정, 역대 국조제사제도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마련하였다.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하여 태종의 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기에 세종이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도 600명을 동원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적 출판에도 힘써 노걸대. 박통사. 효경 등을 간행케 하고 문학적인 면에서도 시와 가사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청빈과 과 자상한 인품, 그리고 인재양성 등에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루는 태종이 황희의 집에 들렸는데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멍석은 낡아서 많이 헤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태종이 "이 자리는 뽑아서 가려운 데를 긁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대와 세종대에 걸쳐 국가 발전과 민생의 안정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고, 청빈한 생활과 어진 성품으로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1452년(문종 2)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이 좌익공신에 책록 되면서 남원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파주의 반구정과 문경의 숙정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 남원의 풍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이다.
반구정은 방촌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지었다고 한다.
4.율곡 이이와 화석정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 사적 제 525호인 파주이이 유적지에는 이이선생의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568년(선조 1) 2월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직강으로서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우계 성혼과 '지선흥중'과 '안자격치성정지설'을 논하였으며, 11월에는 이조좌랑에 재임중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파면함이 옳다고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비록 외조모라도 정이 간절하면 어찌 안 가볼수 있겠는가. 효행한 일을 가지고 파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기각하였다. 선조는 1569년 6월 그를 홍문관교리에 임명하면서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뵈러 가는 것이 비록 법전에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이 사람만은 벼슬을 그대로 두고 왕래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시무책으로 알려진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폐단을 개혁코자 하였다. 1570년10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처가인 해주 석담으로 물러나와 문하생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설하는 일을 낙으로 삼다가 이듬해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그후 이조정랑. 의정부검상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주에 있으면서 고산의 석담구곡을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네번째 굽이의 이름을 송애라고 하고 기문을 짓는 한편, 거기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71년 6월 청주목사로 나가서 청주의 '서원향약'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우계와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1573년 7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경하여 세 번의 상소를 통하여 허가를 받아 8월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서 '감군은'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이나 만족할 것이요. 그러나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이요."라고 하자, 율곡은 웃으면서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기 모두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응답하였다.
9월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된 후 곧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직하고, 이듬해 1월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를 올려, 정책을 세워도 백성을 구하는 실효가 없다는 등 7가지 시폐를 지적하고 재앙을 막아낼 계책과 진덕하는 공을 말하였다. 1574년 3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그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
파주에는 이이가 세웠다는 화석정과 율곡 이이 묘, 신사임당 묘,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