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초대석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빛나는 시,
<상사화 지기 전에> 출간한 이건행 시인
-본인 소개 부탁합니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대전 보문고와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7년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에 의해 '창'으로 영화화)를 펴냈으며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뮤지컬 '상대원 연가'의 모티브가 된 동명 시를 2018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시집 <호박잎쌈>(디지북스 공모 선정.이북)과 인문학 소개서인 <인문독서 가이드북>(편저)을 각각 펴냈습니다. 경제일간지 등에서 사건. 미술. 증권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일간지에 '이건행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을 소개하면?
<상사화 지기 전에>에 실린 시들은 저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읽으면 금세 어떤 사건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은유나 상징, 이미지 등 시적 장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압축하기보다 그 한 단면을 도려내 새롭게 펼쳐 보였습니다. 일테면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사건을 시로 포착해낸 것입니다. 서사를 버무려 시로 만들어낼 때 시는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며 그만큼 견고하다고 믿습니다.
-시집을 내게 된 동기와 에피소드
몇 년 동안 제 개성에 맞는 시를 찾느라 끙끙 앓았습니다. 이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영원히 시집을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쯤에서 일단 쏟아내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 흔적이 역력한 시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걸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에 대한 생각이나 시창작론
시는 압축의 미학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암호가 될 수 있습니다. 소수만의 기호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는데 저는 이를 경계합니다. 나의 개성이면서 타자의 보편성이 깃들어 있는 시를 추구합니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 쓸 때마다 매번 고통스럽습니다. 서사를 중시 여겨 이야기에 관한 이론서를 닥치는 대로 읽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과 피터브룩스의 <스토리의 유혹> 등이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시는 직관의 예술이지만 직관 못지 않게 인문학이 뒷받침돼야 근육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시집을 읽으실 분들께 팁이 있다면?
시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읽으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즐기면 됩니다. 독자가 겪었던 어떤 사건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감정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의 재구성, 재탄생입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것이라고 하는데 <상사화 지기 전에>에 실린 시들은 보다 열린 구조여서 얼마든지 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애착이 가는 시 한 편 소개
사랑의 무게
사랑에도 무게가 있을까
스물한 살 초겨울
학내시위 사건으로 쫓기던 나는
무작정 서울에서 공주로 향했다
멀리서 공주사대 정문을 바라보며
온종일 누군가를 찾았다
실루엣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 졸였지만
그녀는 흔적조차 없었다
시내 여인숙에서
강소주를 마시며 밤새 흐느꼈고
그것은 작별의식이 되었다
교사 지망생인 가난한 그녀에게
나는 위험인물이어서
무조건 떠나주어야 했다
그 이후로 그녀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렇게 시시한 사랑을
저울에 달면 저울추가 움직일까
정말 사랑에 무게가 있을까
-앞으로의 계획
영화 장면 같은 시를 다양하게 쓰고 싶습니다. 나와 너의 이야기에 닻을 내려 보다 깊은 것을 시적으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출발선에 있기 때문에 매우 설렙니다.
아울러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쓸 계획입니다. 실은 이미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1000장 정도 써놨습니다. 이를 좀 묵혔다가 다시 들여다보며 장르를 에세이나 성장 소설 등으로 바꿀지 여부도 검토할 것입니다.
-뷰티라이프 독자들께 한 마디
우리는 이야기라는 거미줄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죽어서도 그 안에 존재합니다. <상사화 지기 전에>는 그 거미줄에 관한 시입니다. 우리의 이야기에 정성스럽게 귀 기울이면 우리의 삶도 그만큼 풍부해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소중한 삶이 더 소중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뷰티라이프> 2024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