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
입덧이라 하여 여편네 먹는 게 그냥 음식 취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다. 셰퍼드 밥그릇만한 사발단지에 국물이 그만큼, 면발이 그만큼, 모락모락 김이 그만큼, 진종일 돌짐 진 장정이나 먹을 만한 것을 옥이는 냠냠 쩝쩝 후르륵 잘도 먹는다. 땀을 뻘뻘 숨을 헐떡이며 시원 거뜬하게도 넘긴다.
“그지가 들었어.”
“그지면, 그 그지를 나 혼자 만들었남.”
“말은 잘한다.”
“후룩…… 어허.”
“배 불러?”
“호호, 배야 처음부터 불러 있는데 뭐.”
“너 먹는 거 보면 밀가루 농사 져야 하는 디 이. ”
營?옥이는 마른 체질이 흔히 그렇듯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라면보다는 밥을 찾았고 짜장면보다는 볶음밥을 챙겼고 칼국수니 수제비보다는 차라리 떡이나 이런 것을 밝혔다. 그런 체질이 아무리 입덧이라고 해도 이렇듯 한순간에 밀가루 체질이 되는가. 둘은 서로가, 먹는 모습을 보거나 아니면 제가 정신없이 먹고 난 그릇을 보거나 엉뚱스러워했고 괜히 제 자식이 가난을 머리에 통째로 쓰고 태어난다는 징조인가 싶어 가슴 졸이는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번 생강만 그런대로 되면 한 백만원 출산 준비로 저축해둘 셈이던 은이는 그런 계획이 물거품 되어버린 탓에 허전한 마음으로 옥이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바라보았다.
계획에 없던 임신이었다. 피임에 신경을 썼는데도 애가 덜컥 들어선 거였다. 며칠을 두고 미적거리다가 병원에 가서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둘은 한동안 대리석 벽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하다 야. 그리고 풋, 웃었던가.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도무지 애를 가져서는 안될 것 같던 마음이며 주변 상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애를 낳아 기르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조화였다.
“우리나 느네나 생강이 저래서 워떡헌다니.”
그의 걱정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옥이는 별 표정없이 후후 면발을 불어가며 대꾸를 한다.
“아 까짓것, 꾹 참고 자연분만 하면 퇴원도 빨리 하고 돈도 거의 안 든다는데 뭐. 언니 말대로 입덧도 싸구려로만 하잖어.”
“그렇게 먹고도 자연분만 할 자신 있니?”
은이는 웃음을 머금고 묻는데 옥이는 고개 박은 채로 대답한다.
“하면 하는 거지 뭐.”
어린것이 처녀것이 되었다가 이렇게 엄마것이 되어 앉아 있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은이는 손을 뻗어 옥이 목덜미에 묻은 흙가루를 털어준다. 그들은 오전 내내 생강 수확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기는 했는데 한마디로 아니 뭉친 것만 못했다. 일거리 생기면 어떡해서든 혼자 힘으로 넘기려는 장인과는 달리, 이만큼 키워놨는데 하다못해 일품 하나 거들 생각도 안하느냐, 너희 아버지 근력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못해 참 먹기 앞뒤로도 차이가 난다, 공일날 빈둥거리지 말고 집구석에 찾아와봐라, 노상 찌르고 어르고 보듬고 해서 노임 한푼이라도 아끼려던 장모마저도 이번에는
올 것 없다. 우리 둘 놀면서 해도 반나절이면 끝난다.
손을 내저었을 만큼이나 실제 일거리가 없었다. 그 말을 역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냥 일거리 없다는 말에 심심풀이 나들이로 생각했는지 몰라도 인천 사는 큰처남부터 아르바이트한다고 대전에 남아 있던 처제까지 빠짐없이 모였다.
“애덜이, 오랄 때는 태평양 건너 이민 간 놈들처럼 소식도 없더니 일 없다니께 왜 우르르 다 몰려온 겨. 청개구리 새낀겨?”
모두들 대처로 나간 뒤로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모내기 벼바심 할 때도, 이 일이 생겼다 저 일이 벌어졌다 핑계대다가 막상 별일 없다는 데 굳이 일하겠다고 몰려온 자식들에 대해 서운하다거나 어쨌든 딸 아들 사위 며느리에 손자까지 보니 눈은 좋다거나 하는 기분도 없지 않겠으나, 일 없으니 올 것 없다 할 만큼 작황이 바닥을 기는 밭의 사정이 그대로 옮아 있는 목소리요 얼굴이었다.
사실 생강밭은 한눈에 봐도 아니올시다였다. 천 평 남짓 심은 생강은 지난 장마철 기름가게 불나듯 번진 부패병에, 일격 정도가 아닌 말 그대로 초토화를 당해 그 밭이 처음부터 생강밭이었는지도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물정 모르는 이가 지나다 보면 꼭 드문드문 시누대가 솟은 묵정밭으로 알아 혹 죽순 없나 쭐레쭐레 살펴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난 오월 초순에 심어 얼마 있지 않아 어른 한 뼘 정도로 사이를 둔 잎들이, 덮어놓은 짚을 뚫고 장하게 솟아났을 때만 해도 얼마나 보기 좋았나. 100킬로그램에 40만원하는 종자 다섯 짝을 들여 일일이 눈 따라 엄지만 하게 쪼개서 소독하고 온 식구 두둑을 타고 앉아 이마에 땀을 식목일 새로 심은 나무에 물 주듯 흘려가며 그것들을 심었었다. 애들 팔 벌린 너비만한 두둑에 줄을 맞추어 종자를 넣고 두루 흙을 덮어주고 나서 한 뼘만큼 전진해가는 일이니, 차 몰고 가면서 하는 일도 아니요 배 타고 가면서 하는 일도 아닌 탓에 늙은이들은 노상 휘유 숨소리로 일의 진척을 알렸고 젊은것들은 끄응 아이고 신음으로 화답을 했다.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속도감 있는 일이라면 내 가야 할 곳을 저만치 짐작해보고 손질 발질을 서둘러보는 재미도 있겠지만 이건 코를 박고 한참을 끙끙대다가 고개 들어보면 그 자리가 매번 그 자리라 두둑 끝이 손에 닿을 듯 바로 저긴데도 도통 흥이 일지 않아 그저 저 지리한 해가 뚝 하고 떨어져 어서 날 저물기만 바라게 되니 호미질과의 싸움도 아니요 거리와의 경쟁도 아니요 마냥 늘어터진 시간이라는 놈만 원수 삼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라는 놈을 이빨 사이에 두고 질겅질겅 씹다보면 서역만리 같던 천 평 밭에 생강 종자가 두루 제자리에 가 박히고 이불처럼 짚더미가 그 위에 놓여 있는 넉넉한 풍경이 마침내 찾아왔다. 서둘러 차려 내온 장국에 봄나물에 동태찌개에 온 가족 먹고 마시고 하다보면 저 너른 밭일을 언제 다 했나 싶은 느긋함이 찾아오는 거였다. 밥 내려갈 때까지 손자 재롱도 보고 아들이 사온 여름 속옷도 펴보고 딸이 들고온 청주잔도 돌리고 올 생강 작황 좋으면 막내딸 치워버린다는 말도 하다가 연속극을 마지막으로 스르르 잠이 드는 재미가 있었다.
“거 자꾸 보고 있으믄 속만 상한데 뭐한다니. 왔으면 빨리 뽑지 않고.”
장인의 신호로 다들 말없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두둑을 타고 앉았다.
“아니, 노랑병(부패병)이 이리 들어도 약이 없다니. 도대체 방법이 없는 거야?”
인천에서 회사에 다니는 큰처남이 거의 맨땅인 밭을 바라보며 은이에게 입을 열었다. 이럴 때면 은이는 생강이 감염되어 줄줄이 죽어나자빠진 게 제 탓이기라도 하듯 막막해졌다. 생강의 부패병에는 아직 치료약제가 없다.
은이가 인근 농고와 대전에서 농대를 나온 탓에 어른들이 요량을 알 수 없는 새로운 병에 대해 물어오면 깜냥껏 대답해주기도 하지만, 해양대 나온 이 낚시질 변변찮듯이 농대를 나왔다고는 하나 교실에서 배운 농업이 현장 농꾼의 경험에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땅과 붙어 사는 이들의 경험을 중시하여 일러주기보다는 한가지라도 가르침 받는 것을 기꺼워해왔으며 다리품 전화품을 팔아 새로운 품종의 특성이나 병의 방제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힘썼다.
그러나 농꾼들의 농사정보가 일류기업 신기술정보 접수만큼이나 신속했기에 그들에게 방법이 없으면 농촌진흥청에도 방법이 없기 일쑤였다. 생강 부패병만 해도 그렇다. 은이가 나온 농대 연구진들이 방제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안됐다는 증거 아닌가. 한때 벼도열병약이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번져 다들 그 약을 써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유일한 방법은 ‘돌려짓기’를 하여 병 자체를 방지하는 것뿐이었다.
예년 같으면 작은 동산을 이루었을 생강이 올해는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인데다 중국에서 대량 수입되고부터 생강금까지 바닥이라 도통 일할 맛이 나지 않았는데도 일은 말 그대로 반나절 만에 끝났다. 줄기를 잡고 뽑아서 가지는 버리고 생강에서 그것의 씨가 되었던 구강을 떼어내 먹거나 내다 팔고 생강은 굴에 저장만 하면 됐다.
“배고파.”
옥이가 수건을 차양 두른 모자를 벗고 한쪽 얼굴을 찌푸렸다. 눈가에 땀방울이 또르르 맺혔다.
“또?”
“응.”
“뱃속에 그지가 중대병력으로 들어앉았어요.”
생강잎을 한쪽으로 모으며 은이는 웃음 반 타박 반 얼굴을 했다.
“이번엔 뭔데?”
“칼국수.”
“또?”
“응.”
“뭐 다른 것 좀 먹고 싶어해봐라. 맨날 칼국수 막국수 콩국수 수제비 또 뭐냐 이, 부침개……”
그러고 있는데 둘째를 가져 두 달 뒤가 산달인, 배가 물지게 항아리 만한 처형이 참견을 했다.
“가난한 집 표시 난다 얘.”
“가난한 집 애덜이 왜 밀가루 찾어? 고기 찾지.”
“그래 너 시집가 부자 돼서 밀가루 음식만 찾니?”
“그래. 언니처럼 뭐? 꼼장어, 족발? 그런 걸로 입덧 하는 사람이 가난한 티 내는 거지 뭐. 아이고 생각만 해도 넘어올려고 그런다.”
“애가 효자긴 효자다. 어떤 놈이 나올는지는 몰라도 값싼 밀가루만 찾는 거 보니.”
“지 아빠 사정을 잘도 알아주고 말이야 깔깔.”
일을 끝마쳤는데도 도무지 일한 것 같지가 않았다. 거둬놓고 보니 심었던 종자량 가웃에도 못 미쳤다. 굴에 생강을 넣고 가지와 잎을 치워 이젠 이 밭에 일이라곤 없는데도 점심때가 일렀다.
은이는 바로 어제 자신의 집 뒤에 있는 이만큼의 밭에서 꼭 이만큼의 생강을 뽑았다. 본가 처가 생강꼴이 말이 아니니 이것도 공평하다면 공평했다.
드넓은 땅과 현대시설을 갖춘 부농이 아닌 다음에야 농꾼들은 밭에 씨를 심는 순간 이것이 잘 자라나 힘껏 수확하여 제값을 받은 돈의 쓰임을 염두에 두게 된다. 물론 절기가 돌아 한가지 작물 파종 시기가 오면 으레 버릇처럼 땅을 갈고 파종을 하지만, 종일 씨 뿌리거나 심는 일을 할라치면 눈곱 같은 이것이 어느새 땅에서 터지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고 꽃을 벌리고 열매를 맺어 돈이 되었다. 해마다 빠짐없이 그만한 땅에 그만한 양을 심어온 터라 이 정도면 얼마 돈이 된다는 가늠이 있기에 마치 그 돈을 겨누고 쓸 곳이 생겨난 것처럼 끊임없이 돈 쓸 곳이 기다리고 있어 꼭 빚갚는 느낌이었다. 생활비가 그랬고 농협빚 이자에 마이너스 통장이 그랬다. 아이들 학자금이 그랬고 자취방세가 그랬다. 노모 칠순잔치가 그랬고 분가한 아들 새 가게 전세금이 그랬다. 장성한 딸 시집보낼 요량이 그랬고 큰집 시제 비용이 그랬다. 그러니 어쩌다 천재지변으로 작황을 망치거나 시절을 잘못 만나 가격이 똥값이면 집안 일이 돌아가지 않았고, 억지 모양새라도 내려면 다시 빚이라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은이는 텅 비어 있는 밭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비어 있는 곳에 무엇이든 다음 작물을 심어야 이 쓸쓸한 느낌이 사라질 거였다.
밭 저쪽으로 꼭 그만큼씩 스산한 생강밭이 널렸고 그 너머로는 산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저 산과 비교해보면 네모 반듯한 이것은 분명 사람의 먹을거리와 크든 작든 세상살이의 밑천을 뽑아내는 밭이지만 산보다 못해 보였다. 소나무 저것은 도대체 무엇에나 쓸모가 있나. 전쟁 때 부황난 이들이 저것의 속껍질을 먹었다고 하나 그것은 굶어죽기 직전에 돌을 삼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독기를 품고 씹든 넋 나간 얼굴로 우물우물거리든 그저 죽지 못해 죽을 각오로 하는 짓이었으니 처음부터 사람 먹을 게 못됐다.
석탄합리화정책으로 석탄산업이 망하자 소나무는 갱목으로도 못 쓰고, 집마다 부삽 없어진 게 옛날하고도 하냥 옛날이니 이젠 불쏘시개로도 소용없었다. 한여름에 그늘 만들어 시원한 바람을 이끌지만 키 있는 나무 치고 그렇지 못한 것이 없으니 그것 또한 저 혼자만의 미덕이 아니다. 지금은 추석에 솔잎 깔아 송편 찌는 것도 있는 집에서 어쩌다 옛 생각으로 해보는 풍류로나 이어지고, 그렇게 소용없어진 솔가리가 지천으로 쌓여 땅은 더욱 산성화되어 딱딱하게 굳어갔다. 솔잎이 산성이라 토양이 산성으로 변하는데도, 중학생 국어책에 소나무는 산성에도 강하고…… 운운하는, 앞뒤 분간도 못하는 글이 버젓이 실려 있으니 그런 사정 모르는 아이들의 앞뒤 분간을 교실에서부터 막고 있는 셈이었다.
저것이 쓸모있는 것은 예부터 지조있다는 사대부들이 독야청청 운운하며 그 푸르름 하나에만 저를 갖다 붙여 스스로 겨워하거나, 배부른 양반들 마름 불러 농꾼 닦달해놓고 저는 정자 지어 소출 감시와 아울러 바라보는 풍경으로나 쓰일 때였다. 물론 찾아보면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들 밥으로도 쓰이며 잎 다린 물은 풍 맞은 환자의 약으로도 쓰인다고 하나, 앞의 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순서를 이미 땅것(작물)들로부터 배운 농사꾼에게는 다른 차원의 삶이며 뒤의 것은 당자나 가족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담 너머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니 일년사시 허리 구부려 땀 쏟아야 하는 농꾼들에게는 그것처럼 쓸모없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은이에겐 그 솔숲보다 이 밭이 더욱 쓸쓸하고 소용없어 보였다. 텅 비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힘들인 만큼 노력을 배신하지 않고 수확이 된 논밭은 비어 있어도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땅의 쉼이었고 또한 다음 절기 그만큼의 수확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의 밭은 은이에게 학원비 과외비 교재비 받아가며 공부했다가 시험에서 다섯 등이나 뒤로 처져 성적표에 코 빠뜨리고 있는 학생처럼 제풀에 머리 박고 있는 무녀리로 보였다.
한번의 작황실패는 다음해 더 열심히 지어 손해를 벌충하면 되지만 그런 것은 계산상의 의미이거나 홧김에 술 마시고 아침에 새로운 다짐을 다잡을 때나 하는 거였다. 아니 물론 그렇게 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작황실패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품목이 생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생강이 각 농가 주 수입원이었고, 이번 부패병으로 전 농가가 당했으며, 불난 데 기름 붓고 물난리 때 수도꼭지 트는 격으로 중국산이 무더기 수입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입되고부터 한 짝에 이미 15만원 선으로 떨어져 있었다. 갈 길 멀고 돈 쓸 곳 지천인데 믿었던 생강이 이렇게 나자빠졌으니 누구나 그와 같을 거였다.
흐음.
은이는 낮은 비명처럼 신음을 내뱉었다. 농촌지도소 항의방문 하기로 한 날이 오늘이었다. 모두들 다 나오려나……
그는 일찍이 사는 것의 근본을 농사에 두었다. 짐승의 똥구멍을 쫓아 광야를 질주하다가 비로소 씨를 품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농경사회의 자손답게 그는 뿌리고 땀흘린 만큼 거두는 땅의 질서를 사랑하여 농고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다섯 마지기 자작에 삼십 마지기 소작인 아버지의 대를 이을 생각이었다. 입술로 흘러내리는 콧물을 스스로 닦을 수 있을 때부터 반 농꾼으로 살아 이런저런 농삿일을, 다른 애들 쉬는 시간에 공 차듯 해왔던 터라 심고 뿌리고 매고 자르고 뽑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심고 거두는 일의 이치를 깨닫는 직감답게 대한민국 땅 농사의 헛헛함과 농정의 기괴스러움도 금방 알아챘다. 그것은 학교 가서 교과서 외우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듣는 아비 어미 한숨소리의 원인을 찾아보면 그건 게으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요 땅 파먹는 이 끝내는 흙 먹고 죽어나자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농정이요 생산 분배구조였다.
뭐가 올랐네 뛰었네 해도 밭에서 거둬들인 작물 출하값은 그것과는 도통 상관없는 남의집 자식이었다. 오늘 아침 백원 받고 넘긴 배추가 다음날 저녁에는 스무 배인 이천원으로 뛰어 백화점에 누워 있었다. 농산물유통이 보통 다섯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경매하는 이들의 자격 요건을 문제삼아 경매자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둥의 말이 나왔을 때, 농꾼들은 또 그저 불 없는 화로에 딸 없는 사위 꼴이려니 하면서도 유통구조 개선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었다. 그러나 혹시가 역시였다. 중간상인과 경매꾼들이 우르르 들고일어나 경매 자체를 안해버리니 물건이 있어도 팔리지가 않고 물건 보낸 이는 팔지도 못하고 소비자들은 사지도 못하는, 정말 뭣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처음부터 안한 것만 못했다.
유통구조가 그런데다 나라것들이 농사 알기를 똥친 바가지로 알고 도시것들이 농사꾼 대접하기를 퍼다놓은 똥으로 취급하지 않는가. ‘農者天下之大本’은 관에서 주최하는 무슨 무슨 기념 행사장의 들러리 설 때 죽은이 기리는 지방처럼 허공에 서 있는 글자로나 찾아보게 되고, 농꾼들의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산 넘고 강 건너로 옮겨가면서 사랑은 사랑이되 이상하게 변질되어 복부인 품에 안겼다.
이미 죽탕 끌탕이 되어버린 농정과 유통구조는 낱으로 흩어진 농꾼들이 더 허리띠를 움켜쥐고 땀을 흘린다고 해결될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원대한 꿈을 키우고 가꾸고자 대전에 있는 국립대학 농대로 진학했다. 그의 유학 주춧돌은 가난이었다. 뿌린 만큼 나오지 않는 농사였다. 보낸 만큼 돌아오지 않는 유통구조였다. 정부의 살농(殺農)정책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을 면학의 등 뒤 바위요 집 뒤 산으로 삼아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현안에 벙어리 귀머거리 봉사가 되어 집과 도서관에 아예 뿌리를 내린 샌님들과는 층과 격이 달랐다. 농고 때부터 해오던 풍물을 키워보고자 1학년 때부터 풍물패에 들었고, 시국 문제가 결국은 집안 밥그릇 문제이자 자신의 삶의 문제라고 일찍이 자각하여 사회과학 학습을 하고 여차 하면 거리로 뛰어나가 최루탄을 생일잔치 촛불로 삼고 지랄탄을 축포 삼아 목청껏 함성을 지르고 달음박질을 했었다.
그는 좋은 세상을 그렸다. 마음속에 심겨져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상을 그렸다. 군사정권의 폭정에 힘써 싸우며 끝내 오게 될 새 세상을 머릿속으로 그렸고 가슴으로 기대했다. 그 세상은 당장에는 없지만 저만치서 보였고 팔을 뻗어보면 손에 만져질 것 같았고 두팔 벌려 안으면 오롯이 안길 것 같았다. 그 세상이, 대동세상이, 평등세상이, 자유세상이, 민중세상이, 노동자세상이, 농민세상이, 미륵세상이, 용화세상이 바로 저기에 있어 그는 집회가 있는 날 그 세상을 향한 출정의 꽹과리를 신명나게 두드렸다. 군중이 모여 파도처럼 움직이며 목청껏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요동도 안할 것 같은 군사정권의 진지가 흔들렸고 그렇게 흔들려 금이 가고 끝내는 허물어질 것 같은 그 진지는 그러나 동기에게 세습되어 새로운 방어진을 쳤다.
함께 길거리를 질주하던 그들은 아픈 마음을 가슴에 담고 졸업을 했으며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어떤 이는 노동현장으로, 누구는 길고 긴 도망자의 길로, 따라서는 시민단체로, 또 따라서 흣날을 기약하고는 학원강사로, 대학원으로, 회사원으로 또는 백수로 놈팡이로 흩어져갔다. 은이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취방을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처에서 살다가 귀향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견문을 넓히느라 잠시 대처를 다녀온 셈이었다. 집의 흙벽에는 금이 늘어 있었다. 주름이 더욱 깊어진 아버지 어머니는 그에게 농사를 이어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미 우루과이라운드가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농업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고 정부는 처음부터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는 우선 사람들을 만났다. 긴 말들이 필요치 않았다. 군사정권의 폭정 아래 모두들 피해자였고 당한 자는 자신이 왜 당하고 어떻게 당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과 농민회를 만들었고 간사일을 맡아 열심히 조직사업을 해나갔으며 생활비벌이의 수단으로 한겨레신문 배달원이 되었다. 그외 시간에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키워왔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농꾼의 마음이 농민회 운동원으로서의 마음보다 앞서는 것이어서 대정부투쟁의 실패에서 오는 쓰라림보다는 이렇듯 황폐한 밭을 쳐다보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냅둬요. 나가서 먹을 게요.”
옥이가 입덧으로 칼국수를 찾은 게 장모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부엌에서 밀가루포대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좋은 집이꺼 먹지 왜 돈 주구 식당꺼 먹어?”
양은으로 밀가루를 푸다 말고 눈동자를 오목이 떠 옥이를 바라보았다.
“엄마보다 더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단 말이야.”
“거긴 뭘 넣구 허는디 내것보다 맛있댜?”
“몰라, 하여간 그 집 께 먹구 싶어.”
“……하긴 입덧이란 게 그런 게지 뭐. 입덧이 뭐 음식으로 먹간. 변덕으로 찾구 기분으로 먹는 게지. 그렇게 혀. 암튼 말 나온 김에 우리도 칼국수 해야겄다. 얘, 막내야 밀가루 반죽 좀 허여. 접때처럼 물 너무 많이 넣지 말구.”
섭섭한 눈치를 모르는 척 안녕히 계시라, 그려 잘 가라, 잘 살펴 올라가시라, 그래 꼭 아들 낳아라, 딸이 어때서? 아들 낳아야 로타리 치지. 깔깔 에이 오빠는, 작은언니네 조카가 크도록 농사 짓겠어요? 저 니가 농민회 허니깐두루 아무래두 얘두 농사 짓겄지 뭐, 장인어른 농민회 모임이 있어서요, 그려 가봐야지, 그런디 이번 생강 파동은 워떴댜? 그렇잖아두 그것 때문에 회원들 만나기로 했어요, 하고는 헤어져 시내로 나온 거였다.
옥이는 멀국을 마시던 그릇을 내려놓으며 휴우, 숨을 내쉬고 있다. 은이가 휴지를 건네자 그것으로 이마와 콧잔등에 달라붙은 땀방울을 닦더니 조금 부끄러운지 눈을 살짝 치켜 뜨고는 슬그머니 웃음을 흘린다.
처음 입덧을 시작할 때는 무엇을 먹든 무조건 토하던 여자였다. 구역질을 하고 나면 그게 병은 분명 아닌데도 그렇게 무섭고 심각한 병이 따로 없을 정도로 샛노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뭐 먹은 게 없으니 노상 끙끙 앓으며 누워 지내기만 했다. 은이 듣기로 저렇게 모지락스럽게 입덧을 겪는 이들은 병원에서 포도당주사를 맞으며 지낸다고 했으니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국수를 찾더니 그때부터 원기를 회복하고 이래로 지금까지 밀가루 탐만 해대고 있는 거였다. 밀가루가 몸에 좋을 리 없지만 그저 그것이라도 잘 먹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옥이를 처음 본 게 옥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곳으로 내려와 농민회를 만들며 곧바로 시작한 게 YMCA 고등학교 풍물반이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풍물 회원을 모집하자 여드름이 튕겨나올 것 같은 선머슴애들과 까르르거리기 좋아하는 새침데기들이 모여들었다. 꽃같은 애들이었다. 이른바 천재니 수재니 우수니 4년제 진학이니 하는 재원은 아니었지만 북풍한설에 대가리 한번 솟구쳐보지도 못하고 우우 바람 따라 다 몰려가니 그것이 좋은 길이라고 여겨 쏠리는 세태에, 대처 유행보다는 집안 사정에, 날마다 변하는 가수나 탤런트 옷가지보다는 일년사시 바뀔 줄 모르는 어버이 작업복에, 오토바이보다는 경운기에, 랩댄스보다는 풍물에 눈을 더 주는 아이들이니 꽃들이지 않는가.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유달리 예쁘기도 했거니와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말 없는 편이라기에는 할말 있으면 여물게 내뱉을 줄도 아는 축이었고 새초롬하다 하기에는 누가 웃기면 신나게 깔깔거리는 편이었다.
인사굿 타법 난타를 지나 기본가락인 2채 3채 굿거리 풍류 양산도 오방진 7채 진오방진 거쳐 선반판굿을 익히고 웃다리를 다 배우자 그들은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대학 간 애들도 어쩌다 있었지만 대부분 월급의 현장으로 찾아들었다. 부근에서 취직한 애들은 청년모임 회원이 되었다. 옥이도 자그마한 회사 경리가 되어 모임에도 나오고 풍물반 후배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였던가. 은이가 전농(全農) 중앙에서 내려온 문건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오후에도 이어져 하루종일 농민회 사무실 창문에 물 무늬를 그려대고 있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옥이가 조용히 들어왔다.
술 좀 사주실래요?
은이는 술을 샀다.
무슨 일 있어?
쓸쓸한 낯빛이 어느새 어린 티를 벗은 어른의 그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랬어 이?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이.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지방 소도시의 자그마한 회사라는 게 그렇다. 일 많고 월급 적은데다 간혹 밀리기도 하고. 그것보다도 은근히 사람 업신여기고 계약 조건 수시로 무시하고 일할 때보다는 일 끝나고 나서 더 친근하게 지내려고 하는.
몇달을 미루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사표를 냈는데 한 삼일 후련하더니 이제 걱정이에요.
그려.
빗줄기만큼이나 후줄근하고 녹녹하기도 한 시간들이었다.
아빠가 뭐래시는 줄 알아요?
말씀드렸어?
예. 한동안 그냥 계시더니 너한티 농사지라고 하겄니? 그러지 말고 집안 어른이나 찾아가볼래? 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 강씨 가문에 유명한 사람 누가 있어요? 했더니 강부자 있잖니. 맨날 텔레비 나오고 국회의원까지 됐잖어 하시면서 허허 웃으시잖아요.
하하. 헤헤.
이 사람이 살가워지기 시작한 게 그때쯤부터였다. 저만치 떨어진 꽃에서 씨가 하나 날아와 가슴에 슬그머니 내려앉더니 육신을 토양 삼고 마음을 거름 삼아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틔운 게 있는 듯 없는 듯 한순간이었다. 서로를 멀리 두기 괴로워하며 그렇게 아끼다가 결혼을 하고 셋집으로 분가를 한 게 일년 전이었다.
“더 먹을래?”
“애 짜구나.”
둘은 말짱 국물만 남은 칼국수 그릇을 사이에 두고 살풋 웃었다. 은이는 시간을 살폈다.
“늦었다야.”
“안 데려다줄려구?”
“그냥 걸어가. 오늘 항의방문 하기로 한 날이잖어.”
“이 씨. 데려다줘.”
“임신했을 때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는 거 몰라?”
“운동? 아침나절 내내 밭일 하고 온 사람한테 운동?”
“헤, 하긴 그렇다. 그렇지만 너 집에 데려다주고 가면 늦어.”
옥이가 투덜대며 낑낑 살림집을 향해 고갯마루를 거의 다 올라갔을 때쯤 은이를 비롯한 농민회 회원들은 시커멓게 탄 얼굴들을 하고 농촌지도소에 도착했다.
글쎄 왜 여기 와서 이래요.
사무실에서 몰려나와 입구를 막아선 지도소 직원들이 왜 하필이면 우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병이 도져 말짱 망했는디 그럼 누굴 찾아야 써?
글쎄 여기 와서 이러면 어떡해요.
얼라 농촌지도소가 뭐하는 데여.
글쎄 우린들 어떡합니까.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줘야지. 생강 부쳐먹는 전 농가가 심었던 종자도 채 못 뽑고 있는디다 중국산까정 들어와서 그나마 똥금이 되았어. 다 나자빠지게 생겼는디 농촌지도소에서는 뭐 하고 있는 겨. 소장하고 대담 좀 합시다.
글쎄 소장님 안 계세요.
워디 가셨댜? 옳아, 생강밭에 피해 확인하러 가셨는개벼. 누구네 밭에 가셨댜? 우리가 찾아갈팅께.
글쎄 공무로 출타중이시라니까요.
공무? 공다방 미스 무헌티 생강차 마시러 갔남. 농민은 죽어나자빠지는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공무가 워딨어.
하면서 힘으로 사무실 문까지 밀고 들어가자 그중 젊어 보여 그만큼 힘이 나 울뚝 성부터 밀고 나오게 생긴 직원 하나가 엇조로 나왔다.
지금 뭐하시는 거요. 당신들 어디서 행패를 부려요. 대학생 애들한테서 못된 것만 배웠구만.
뭐여? 싸가지 없는 놈 보게. 농촌지도소라고 펜대나 굴리면서 순 싸가지 없는 소리만 배웠구만 이.
그러면서 더 밀어붙여 사무실로 발을 들여놓자 젊은 직원을 끌어당기며 달래던 다른 직원들도 합세해 대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들 지금 공무를 방해하는 거야.
공무 방해? 농촌지도소에 농민이 찾아오면 공무 방핸겨?
아무튼 나가요. 경찰을 부르기 전에.
그 말에 기가 눌릴 농민회 회원들이 아니었다.
불러라. 어차피 죽어나자빠질 농민이다.
그려. 어차피 정부놈덜 눈에는 기업농만 농사꾼으루 보이니께 너희들 눈에두 우리가 농민으로다가 안 보일 겨.
그려, 우덜이 그동안 자식새끼덜 키워 대기업 노동자 맹글어줬지. 이 나무 심으라믄 이 나무 심구 저 풀 뽑으라믄 저 풀 뽑구 소 키우라믄 소 키우구 말여 이. 헌디 농촌지도소라는 디서 농민들헌티 내뱉는 소리 점 봐.
그러니깐 왜 여기 와서 그래요. 농촌지도소가 뭔 힘이 있어요. 돌아가 계시면 우리가 건의하죠.
그중 나이 들어 보이는 직원이 달래조로 나왔다.
힘? 힘 같은 소리 허구 앉았네. 당신들이 농민들을 업구 일을 해야 힘이 있지. 상전것들 눈치나 보믄서 복지부동이나 하구자빠졌으니께 힘이 없지.
이 기회에 이름버텀 바꿔. 지도가 뭐여 지도가.
당신들 말이여. 내 말 잘 들어. 우리 죽고 나믄 당신들도 그 자리루다가니 굶어 죽는단 말여. 농민 읎이 농촌지도소가 뭔 소용 있어.
그렇게 사무실서 콧구멍이나 팜서 퇴근시간이나 기다리지 말고 우리 세금으로 낸 월급 받아묵었으믄 농가 돌며 피해 조사허구 생강 수입허는 곳 알아보구, 방제 대책이 어느 정도나 진척이 됐는가 국내외루다가니 살펴보구, 이왕 나온 김에 농협 찾아가서 농민들헌티 돈놀일랑 그만큼 벌었으믄 때려치구 생산자 소비자 유통구조 개선에 신경 좀 쓰라구 일르기도 하구 말여.
당신들 정말 안 나가고 이렇게 실력행사만 할 거야?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전 농가 피해규모를 정확히 조사할 것, 피해 농가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촉구하고 돌아서 나왔으나 속이 허전하고 입맛이 쓰기만 했다. 농민회 사무실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내일 오후에는 시의회를 항의방문 하기로 정하고 나자 그 길던 해도 어느덧 서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돼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몇달 전부터 어른들을 상대로 풍물반을 열었다. 은이는 옷을 갈아입고 앉아 잠시 장구를 살펴본다. 대학 3학년 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산 장구인데 그새 세월이 그렇게 물같이 흘렀나 손때가 참 많이도 묻었다. 새하얗던 가죽은 거무칙칙 변했고 막 베어온 듯 탱탱하던 오동나무통은 시간의 윤기를 머금어 되레 은은하다. 궁편 테 한쪽 부분이 닳아 실밥처럼 뜯긴 가죽의 보푸라기가 보이지만 그것 또한 군대 삼년 빼고 그동안 오롯이 그의 옆자리를 지켜온 탓이다. 늘 닦아주고 비 오면 습기 없애주며 공들여 보관해온 탓에 여전히 소리가 맑고 깊다. 그는 변죽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다가 끈에 달린 부전들을 채편 쪽으로 힘주어 몰아 팽팽하게 만든 다음
두둥 두둥 두둥 두둥
궁채로 조용히 구궁을 친다. 넓은 지하실에 둔중하면서도 경쾌한 소리가 퍼진다. 이미 가득하다. 두둥 두둥 두둥…… 슬그머니 감은 눈 저 깊은 속에서 만주벌판이 보인다. 말을 타고 저 넓은 곳을 질주하는 어떤 이가 보인다. 따그닥 따그닥…… 두둥 두둥…… 국민학교 때 마을회관 앞 공터에서 한바탕 풍물가락이 울려 퍼졌었다. 지금은 인천에서 종이공장 다닌다는 덕만이네 할아버지 환갑이었던가 그랬지. 마을 장년들이 꽹과리 북 장구 징을 들고 메고 신명나게 쳐댔다. 깽매깽매 두둥둥.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을 어른들이 불콰한 얼굴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것을 보며 그는 아련히 넓은 벌판을 떠올렸다. 고선지였을까, 광개토대왕이었을까? 학교에서 배운 어떤 옛적 장수가 말을 타고 저 넓은 벌판을 달리는 장면이 아슴히 떠올랐다. 정신없이 그 소리에 빠져들었고 그때 저 가락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둥 두둥 딱 두둥 두둥 딱
구궁에 맞춰 열채로 채편을 두드리다가 끼닥을 넣는다.
둥 끼닥 끼닥 끼닥 둥 끼닥 끼닥 끼닥
옛 사람들이 대대로 이르기를 왼쪽 궁편에 소가죽을 써서 소걸음의 완만함을, 그리하여 일의 촘촘함과 절기를 기다리는 여유로움이, 오른쪽 채편에는 말가죽을 써서 말발굽의 가쁨을, 그리하여 생활의 급박성과 절기를 맞이했을 때의 수고로움을 나타낸다고 하였고, 나아가 궁편과 채편의 다른 두 개의 소리는 서로 장구의 늘씬한 허리를 통로로 하여 울림통에서 섞여 이것이면서도 저것이고 저것인 듯하면서도 이것인, 삼라만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짓거리를 나타내 보여 이끌고 밀고, 당기고 쫓고, 찌르고 보듬고, 재촉하고 얼싸안고, 떼어주고 붙여주고, 불어주고 빨아주고, 널어주고 개켜주고, 잘라주고 이어주고, 깨워주고 재워주고, 열어주고 닫아주고, 울려주고 웃겨주고, 올려주고 내려주고, 잡아주고 보내주고, 죽여주고 낳아주고, 굶겨주고 밥해주고, 벌려주고 오므려주고, 넣어주고 빼내주고, 퉁겨주고 주물러주고, 무너뜨려주고 쌓아주고, 버려주고 주어주고, 일해주고 놀아주고, 털어주고 심어주고, 때려주고 달래주고, 박아주고 뽑아주고, 보내주고 숨겨주고, 벗겨주고 입혀주고 하여 풀어놓다가도 추스러준다고 했던가.
마음 한쪽에서 느긋한 기운이 생겨나고 또 어딘가에서 바람 같은 느낌이 피어오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어깨를 꿈질꿈질 고개를 까닥까닥 가슴을 출렁출렁 흔들며 신명이 오른다. 불기운을 타고 오르는 재처럼 슬슬 신이 나고 재미가 생겨난다.
덩덩 덩따궁따 더덩 덩따궁따
덩따궁따 덩 구궁 딱
사람들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덩다다 덩다다 덩덩 따딱
더더덩 더더덩 덩덩 따딱
덩끼다딱 구궁 딱 구궁 딱
덩끼다딱 궁딱 궁딱 궁 딱
활활 번지는 불기운을 온몸에 받으며 나풀나풀 하늘로 오르는 잿가루는 그러나 더 솟구치지 못하고 스르르 풀어져버린다. 저 혼자 흥을 돋우려 3채를 지나 오방진으로 넘어가는데 달리다가 발이 풀리듯 스르르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다.
언뜻 고개를 든 순간에 그는 벽을 보고 말았다. 그곳에는 은이 제가 붙여놓은 팜플렛이 반듯하게 걸려 있다.
농민이 함께하면 승리합니다. 통합의료보험을 쟁취합시다.
연상작용인가. 저 솔밭보다 못하게 보이던 생강밭이 눈에 잡히고 썩어버린 생강이 그곳에서 하늘하늘 솟아오르고 있다. 내일은 시의원실 항의방문 하는 날. 항의방문만 해서 뭐 헌댜, 농민회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한 회원이 오늘 투덜거렸다.
장구소리는 더이상 나지 않아 갑자기 사방이 고요한데 그는 멍하니 팜플렛만 보고 있다.
의료보험마저도 일반 직장근로자나 공무원보다 배는 더 내야 하는 농민들. 월 소득산출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본보험료에 능력비례보험료라 하여 재산 소득 자동차는 물론 농업시설물, 소 돼지 수와 그것들이 먹는 사료까지 계산에 넣어 나오는 보험료를 내야 하는 농민들. 아프더라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병원 가볼 염두도 시간도 못 내는 사람들. 결국 병을 키워 병원에 실려가면 보험 혜택이 안되는 비싼 의료기계 신세를 저야 하는.
생강 저 독한 게 감염이 되어 썩어문드러지는 게 보통일 같지가 않았다. 배추나 상추에 병이 들면 그저 여린 것 다루듯이 마음 가련하지만 생강처럼 독성이 강한 작물이 나자빠지는 모양을 보니 그게 꼭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미 성 밖에 내몰린 전염병 환자 꼴이 농민들이었다. 세상 천지를 샅샅이 둘러봐도 돌아가는 일들 중에 도무지 농꾼들을 위한 것이라곤 지푸라기 한올 잡혀지지 않았다.
막막해졌다. 흥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흐음.
신음 같은 낮은 비명을 그는 내뱉었다. 생강 싸움을 계속하기로는 했지만 스스로도 암담한 노릇이었다. 뭐가 보이거나 비비고 들어갈 구석이라도 있어야 그 일도 재미가 있는 법이었다. 지루한 싸움에 바쁘다는 핑계로 회원들은 점차 나오지 않고 앞서서 열심히 하는 회원들만 더욱 죽어나니……
거기다가 저는 앞으로 몇달만 있으면 애아빠가 되지 않는가. 그게 마음이 흐뭇하고 은근히 오지고 해야 할 텐데 홀로 괜히 가족들 피폐롭게 하는 것 같아 묵직하다. 그러고 보니 임신한 몸으로 산중턱에 있는 집까지 걸어 올라갔을 옥이도 마음에 걸린다.
한 명이 들어선다. 들어서면서 인사를 까닥 하는데 얼굴에 황송함이, 늦었다는 미안함보다는 지금까지 아무도 오지 않은 이 풍경이 더 송구스러운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처럼 사람들이 밀어닥친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늦은 사람들은 황급히 장구들을 잡고 앉아 늦은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늦어서 미안한 마음을 보이기라도 하듯 구궁 끼닥을 두드려댄다. 순식간에 다시 시끄러워진다. 은이는 한동안 사람들의 손이 풀어지고 밖에서의 바쁜 정신이 가다듬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딱딱 시작 신호를 보낸다.
인사굿을 하고 전날 배운 것들을 복습한다. 그러기를 한참.
“선생님, 어디 편찮으세요?”
인근 중학교 교사인 강습생이 근심스런 얼굴로 물어온다. 풀죽은 기분이 그새 다른 이들에게도 옮겨갔나 다들 너무 조용한 분위기였고 그 원인이 자신 때문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은이는 뜨끔하다. 아니라고 웃어 보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순간 조용해진다. 옥이였다.
“배고파.”
“또?”
“응.”
“이번엔 뭔데.”
“가락국수.”
“알았어. 사갈게.”
“저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가락국수가 먹고 싶은데……”
“뭐, 뭐?”
“히잉.”
“그것을 어떻게 사.”
“알아, 근데 먹고 싶단 말야 히잉.”
“이 씨, 알았어. 일단 끊어.”
사람들의 눈이 모두 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은이는 슬슬 웃음이 생겨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무슨 전화예요? 누가 물어온다.
“고속도로에서 파는 가락국수, 어디 살 데 없어요?”
하고는 자초지종을 말하자 와르르 웃음이 터져나온다. 입덧이에요? 어머, 선생님 부인 임신하셨어요? 그걸 사려면 글쎄 어디로 가야 하나, 거 워떤 놈이 나올라나 까탈스럽네 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자 가락국수는 가락국수고 굿거리 삼채 이채 순으로 한바탕 칩시다.”
은이가 쇠를 들고 청하자 모두들 좋다고 맞장구를 친다. 빠르고 느리게, 급하고 한가롭게, 촘촘하고 헐겁게 그것들을 쳐대자 새로 흥이 일어난다. 생길 것 같지 않던 신명이 어디선가 은근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거참 까탈도 유분수지. 고속도로 휴게소 가락국수를 찾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덧 그 아이가 태어나 있었다. 아니 이미 자라나 있어 제 엄마처럼 퍼질러 앉아 가락국수를 쭉쭉 먹고 있었다.
허, 그것 참.
쇠와 장구는 삼채를 넘어 이채인 휘몰이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