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仁과 孝의 의미 – ‘논어’를 중심으로
後漢시대에 허신(許愼 A.D 100경)은 부수자 540字를 중심으로 관료들이 쓰는 반경의 9353字에 대한 간단한 뜻을 기록한 것이 ‘說文解字’이다. 청나라시대에 단옥재(段玉裁 1735-1815)는 거의 30년에 걸쳐 설문해자에 방대한 注를 붙였다. 이 ‘說文解字注’에 근거하여 仁의 뜻을 정리해 본다. 仁은 중용, 예기, 시경, 논어에는 사람으로, 맹자에는 사람 혹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나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인가? ‘서로 친하고 대등하며 서로 공경하는 사람의 짝’이니 즉 그 두 사람(二人) 사이의 공감과 교감을 말하며 안부를 묻는다는 뜻도 있다.
그러면 논어에서는 어떨까? 논어에서 仁을 언급한 경우는 많다. 이 인의 의미를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할 수는 없고 중요한 몇 부분의 仁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옹야편(雍也篇) 29장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여쭙는다. ‘만일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여러 사람을 구제할 수 있으면 어떻습니까? 仁이라 말할 만합니까?’ 공자 답한다. ‘어찌 仁에서만 일삼겠는가 반드시 聖人일 것이다! 요순(堯舜)임금도 오히려 그것을 부족하게 여겼다.’ ‘仁이란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내가 통달하고자하면 남을 통달시킨다.’ ‘능히 가까운 곳(나의 마음)에서 취하여 비유하면 仁의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仁의 반대인 불인(不仁)은 어떤 의미일까? 송나라시대의 정자(程子)는 이렇게 말한다. ‘의서(醫書)에 수족이 풍을 맞아 ‘마비’되는 것을 ‘불인(不仁)’이라 하였으니 이 말이 仁의 형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仁이란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니 자기 아님이 없다.’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영어에서 美學 혹은 審美眼을 aesthetic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반대어인 unaesthetic은 바로 ‘마비’인 것이다. 그렇다면 仁의 의미가 조금씩 다가올 것이다.
안연편(顏淵篇) 제 1장에서 안연이 仁을 물으니 공자는 말한다. ‘자기의 이기심을 이기고 禮로(公으로) 돌아가는 것을 仁이라 하였고, 하루라도 자기의 이기심을 이기고 禮로(公으로) 돌아가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간다. 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말미암지 남에게 말미암겠는가?’라고 하였다.’ 안연이 묻는다. ‘청컨대 그 조목을 묻겠습니다.’공자 답한다. ‘禮가(公이)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의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제 2장에서 중궁(仲弓)이 仁을 물으니 공자 말한다. ‘대문을 나가 큰 손님을 뵙듯이 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라. 내가 하고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제 3장에서는 사마우(司馬牛)가 仁을 묻자 공자 말한다. ‘인이란 말을 참는 것이다.’사마우 말하길 ‘말을 참아 하면 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공자 말하다. ‘행하기 어려우니 말을 참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밖의 인의 의미를 알아본다. ‘中庸’에서 ‘하늘이 명령한 것을 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道라하고, 道를 品節하는 것을 교육’이라 하였다. 性은 본래(本然之性) 善한데 그 선의 덕목을 仁義禮智(信)이라 하였는데 仁은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아울러 포괄한 것이다. 이 仁義禮智는 막연하고 설명하기 어려워 실마리(端緖)로 표현하니 사단(四端)이 된다. 그러므로 仁은 '사랑의 실마리'가 된다. 또 마음(心)을 性과 情으로 나누어 보면 인은 '本心之全德'이 된다. 또 인에는 '씨앗'이라는 뜻이 있으니 이 씨앗의 본성을 잘 살려 자라게 하여 물을 낳을 뿐만 아니라 싹이 나고 잎이 나 (본성대로) '꽃피우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천하생물지심'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인은 '문(글)'과 의미를 같이 한다. 글을 배워 자신의 재능을 잘 발현시켜 '꽃 피우게 한다'는 것은 바로 물을 낳아 잘 자라게 하는 생물지심과 그 뜻이 같다. 또 문(글)은 '도를 싣는 그릇(재도지기)'이라 한다. 도는 본연지성의 선한 덕성인 인을 따르는 것이니 이 도를(선을) 행하거나 공부를 하여 내가 얻게 된 것이 덕이니 (덕은 득이니) 결과적으로 내가 인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인란 인을 펼치는 방편이 아니겠는가. 글은 소통이자 교감이며 마비가 아닌 것이다. 인이란 서로 친하고 대등하며 존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인간다움을 교감하고 소통시키며 마비된 것을 풀어주는 것이니 글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이런 성찰이며 실천(仁)으로 나아가는 행위인 것이다.
이제까지 논어를 통해 仁의 몇 가지 의미를 알아보았다. 이제 논어와 효경을 중심으로 효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인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효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인의예지는 體가 되고 五常(五倫)은 用이 된다.
먼저 논어 위정편 5,6,7,8장에 나오는 효의 의미를 알아본다. 맹의자가 효를 묻자 공자는 ‘어기지 않는 것’이라 말하였다.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날 번지가 공자를 위해 수레를 몰았는데 그때 공자가 번지에게 말한다. ‘맹손(맹의자)이 나에게 효를 묻길래 어기지 않는 것이라 내 대답해 주었다.’ 이어서 번지가 ‘무슨 말씀입니까?’ 라고 여쭈우니 공자 말한다. ‘살아서는 예로 섬기고 죽어서는 예로 장사지내고 예로 제사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의자에게 고해 준 것은 보통사람에게 효의 의미를 고해 준 것과 같다. 또 맹무백이 효를 물으니 공자 말하길 ‘부모는 오직 자식의 질병을 걱정한다.’라고 하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나 오직 질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항상 걱정으로 삼는다. 사람의 자식은 이를 체득하여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무릇 몸을 지키는 것에 스스로 삼가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효가 되지 않겠는가? 사람의 자식이 부모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는 것을 걱정으로 삼게 하지 않고 다만 질병을 걱정으로 삼게 한다면 바로 효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백에게 고한 것은 이 사람이 걱정할 만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공자가 이렇게 고해 준 것이다. 또 자유가 효를 묻자 공자 말하길 ‘지금의 효는 공양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데 犬馬에 이르러도 다 능히 공양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으면 어찌 구별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자유는 공양을 잘했으나 혹 공경을 잃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해 준 것이다. 또 자하가 효를 물었다. 공자 말하였다. ‘얼굴색을 온화하게하기가 어렵다. 일이 있어 자제가 그 수고를 대신하고 술과 음식이 있으면 부형을 먼저 마시고 드시게 하니 일찍이 이것이 효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자하는 곧은 의에 능했으나 혹 따뜻하고 윤택한 얼굴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해 주신 것이다. 각각 그 재질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부족한 바로 고해 주신 것이다.
‘효경’의 경(經) 1장에서 공자가 한가히 계시고 증자가 모시고 앉았다. ‘參아 선왕은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가 있어 세상을 순히 하였고 백성은 이로써 화목하여 상하가 원망이 없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증자 벌떡 일어나 한걸음 옆으로 옮기면서 존경을 표하고 ‘제가 똑똑지 못해 어찌 충분히 알겠습니까?’라고 답하니 공자 이르길 ‘효는 덕의 근본이니 교육이 이에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앉거라 내 너에게 말해 주겠다.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아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立身하여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고, 중간은 임금을 섬기고, 立身에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자의 효와 제후의 효와 대부의 효와 선비의 효와 서민의 효를 일일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천자이하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효의 시작과 끝이 없고서 우환이 미치지 않는 자는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 세월이 흘러 훗날 증자는 질병이 있어 문하의 제자를 불러놓고 ‘이불 밑에 내 발을 열어 보거라 내 손을 열어 보거라. 시경에서 이르길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한 것과 같이 (두려워)하였고 얇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였는데 지금 이후에야 내 (신체의 훼손을) 면함을 알겠구나 소자야’라고 하였다. 증자는 그 지킨 바의 온전함을 제자에게 보이고 그 지키기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장차 죽음에 이른 이후에야 훼상을 면할 수 있음을 안 것이다.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하여 돌아간다. 신체도 오히려 휴손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그 행동을 어설프게 하여 그 부모를 욕되게 하겠는가?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 사친장제오(事親章第五)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사람이 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해야함을 알지 않음이 없음이로되 효자는 몹시 드무니 부모의 은혜를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 부모님 섬기기를 오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식된 자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함이 옳다. 옛사람 시에 이르길 ‘옛사람 하루의 봉양을 삼공(정승)과 바꾸지 않는다’했으니 이른바 날을 아낀다(愛日)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와 같이 논어를 중심으로 仁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孝로부터 시작한다(行仁必自孝始)는 인(본체)과 효(작용)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인과 효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옛날은 깊고 지금은 넓다고 한다. 그 깊은 의미를 현재의 다양한 해석과 처지에 견주어 현재 나의 삶에 어떤 변화로 다시 연결하고 이끌어내어 한문공부에 작은 토대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금년 한해 봉화문화원에서 함께 공부하신 여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건강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나는 나를 어떤 나로 만들려고 하는가?' 또 '나는(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가?'라는 화두를 감히 던지면서 이 작은(?) 주제를 마감합니다. 戊戌年 復月 上澣 仁同 張完洙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