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 설레임.....
첫사랑은 설레임이다.
마주침에서 비껴나고,
비껴남으로 느낌이 사라지면 그저 만남이다.
만남은 수많은 사람들과 이루어지고,
친밀감은 몇몇의 대상과도 가능하지만
사랑은 친밀감과 좋은 느낌이 버무려진다고
불쑥 생겨나지 않는다.
성적 사랑이거나,
동정이나 배려를 유발하는 이타적 사랑
혹은 엔돌핀의 화학적 성분 요소인 평온함과 안정감이
가져다주는 편안한 부부의 사랑도
사랑의 한 유형이지만 늘 설레임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열정인데,
관계가 오래될수록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는 것이 또한 열정이다.
설레임을 오래 유지 못하고 바로 열정으로 연결되는 사랑은
기나긴 인내를 감당하지 못하면 지 풀에 스러져
추풍낙엽의 쓸쓸한 기억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사랑의 설레임을 잊지 못한다.
모든 사랑의 근원지인 첫사랑에 실패한 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것도 사실은
과거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매우 미쳤다는 것이라고.
무의식의 공간에서 가장 달콤한 향기를 갖고 있는 사랑.
그 향기의 원료는 바로 설레임이다.
잔잔한 호숫가를 일렁이게 하는 보드라운 물결 같은 설레임.
호숫가 밑바닥에 발목을 잡아채는 소용돌이치는 물길이 있음을 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달빛 따라 노 저어 가듯 가만가만 나아가는 나룻배의 흔들림 같은 설레임.
아무리 둔하고 척박한 감정을 두꺼운 비게살처럼 쌓아 놓은 사람들마저도,
눈빛 조리개 파고들어 나른한 균열을 일으키게 만드는 요망한 봄기운 같은 설레임.
언 땅을 풀리게 하고, 앙다문 매 발톱 같은 진달래 속살을
기어이 펼치게 하고 마는 앙팡진 봄 햇살 같은 설레임.
깊이 잠들어 있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위력을 가진 봄기운과,
밋밋한 가슴팍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인간의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랑의 향신료 설레임은 그래서 닮은꼴이다.
갑자기,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이성을 통한
설레임을 느끼게 해 준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성숙한 어른이 아니었기에 뜨거운 열정까지 진행되진 못했지만,
심연의 바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설레임의 통나무집.
내 인생의 1막에서 그 풋사랑을 제외시킨다면 2막은 올라갈 수 없으리라.
첫사랑은 봄날에 시작되어 짙은 가을에 막을 내렸다.
그 짧은 사랑의 추억은 스러졌지만 온몸을 진동시킨 설레임의 기억은
기어이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달고 다닌다.
어른이 된 나는 설레지 않는 사랑의 허망함에 절망하고
도저히 키가 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가슴 속 단발머리 소녀의 훼방으로 번번히 낭패를 본다.
도대체, 그 짧은 첫사랑의 설레임 속에 무엇이 있었길래, 열정이라거나, 언약이라거나,
육체적 은밀한 접촉 따위도 없었거늘. 그저 있었다면, ‘첫눈에 반하다’
라는 용어를 쓸 때 갖다 부칠 수 있는 페닐에틸아민 주1)의 약효가 투여된 듯
그저 혼미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마저도 극히 미량의 투약.
그럼에도 어찌하여 혈관에 흘러 다니며 배설되지 않고 그토록 오래 버티고 있는지...
가공할만한 위력 설레임.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성을 통한 두근거림을 퍽이나 일찍 알아버린 그 조숙한 여자아이의 나이 열네 살.
그 상대방 주인공은 열다섯 살 달근이었다.
실명을 밝힐 수 없으니 그를 달근이라 부르고 나를 분이라 부르자.
달근, 달근, 달근..
입 안에서 달근이 이름을 굴릴 때마다 달작지근한 침이 고여 오던 사내아이.
그가 건네준 첫 연애편지는 노오란 탱자. 그가 사랑의 징표로 건네준 것은 붉은 사과 홍옥이었다.
친구들이 다 가버린 빈 교실에 분이는 늘 혼자 남아있다.
심호흡을 하고 빈 교실의 고요함을 힘껏 들이 마시며 그 조용함을 가슴에 저장한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차분히 부유하고 있는 적막함이 분이를 동요시킨다.
분이는 일찍 집에 가기가 싫다. 대문을 열면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러대는 베틀 소리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혼자 남은 교실에서 인수분해를 푼다거나 숙제를 하는 것도 아니다.
막연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세계.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기척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올 듯한 은밀한 세계.
만져지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느껴질 것 같은 말랑말랑 한 그 무엇인가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도독 분출하는 두근거림의 세계.
분이는 급하게 팽창되어지는 젖가슴처럼 은밀한 감정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감지한다.
세상 바깥으로 향하는 호기심의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소녀는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열네 살 계집아이의 조숙함을 부추기는 것은 인위적인 책과 자연적 본능이었다.
아무리 건전 도서로 중무장을 해 놓은 도서실이라도 검증되지 않은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 문학이든 세계 문학이든 펼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튀어나온다.
능숙한 낚시꾼이 잽싸게 찌를 낚아채듯 분이는 그 속에 펼쳐지는
사랑과 이별과 갈등의 연결고리로 엮어진 인간관계에 몰입하며, 감탄하고,
안타까워하고, 숱한 의문을 가졌다. 텅 빈 교실 의자에 책속의 주인공들을 앉혀 놓고
그들과 대화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수호지의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을 불러내고, 임충과, 조개,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요부 반금련과 무송의 형 무대까지.
흡사 양산박기지를 통째로 들고 나올 기세로 그들의 세계에 유독 열광했던 기억이 난다.
분이는 그 시간과, 그 공간과, 그 미지의 세상에 빠져 있을 때 너무나 황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빈 운동장에 분이처럼 홀로 남아
운동장을 떠다니던 라일락 향기가
발걸음 바쁜 분이 꽁무니를 쫓아오던 저녁나절,
누군가가 분이를 불러 세웠다.
불청객처럼 불쑥 튀어 나온 그 누구는,
불러 세워 놓은 뒤 한마디 말도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다
느닷없이 노란 탱자를 내밀었다.
노란 탱자에 삐뚤삐뚤 못생긴 글씨.
“사랑해 분아”
1976.5.13일 달근이가..
그 밑에 구태여 날짜를 왜 적었을까. 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좋아해’ 도 아니고, ‘사귀고 싶다’ 도 아닌 ‘사랑해’ 라는
그 낯설고 도발적인 단어에 당황스러운 분이 뺨따귀가 단숨에 붉어지는데,
탱자를 건네준 까까머리 달근이는 후다닥 자전거를 끌고 저만치 내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막한 학교 운동장 중간에서 냅따 자전거에 껑충 올라타며 페달을 밟아대며 달리다가
휠끗 뒤돌아보더니 갑자기 다시 되돌아온다. 그때까지 탱자를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는 분이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달근이.
새까만 얼굴에 드러난 새하얀 치아가 따라 웃는다.
달근이가 운동장 한가운데 분이를 세워 놓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발긋발긋 돋아 난 여드름보다 더욱 붉어진 분이 볼때기.
한참을 돌다가 기껏 한다는 한마디.
“분아~ 또 보재이~”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빨이 섬광처럼 분이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고개 숙인 분이 곁에서 달근이 자전거가 멀어지자 설레임의 징소리가 딩 딩!
설익은 복숭아 빛 심장을 두드리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라일락 향기가
분이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저 애가 싫지 않지? 첫 눈에 반했지?’
평생을 살면서 첫 눈에 반할 수 있는 상대를 그 어린나이에 경험한 여자아이를 두고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할까, 아니면 불행하다고 할까? 사랑을 예습해 본 적 없었던
그 소녀는 소년이 건네준 노란 탱자를 꼬옥 쥐고 콩콩거리는 심장소리가 들킬까봐
콩콩 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어젖히고 제 방으로 들어 올 때까지 자지러지는
베틀 소리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더 이상 방과 후에 홀로 남아 책읽기를 하지 않는 분이.
저만치 신작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달근이를 이만치 뒤에서 따라간다.
소전거리를 지나 싸전거리를 지나 서문거리까지... 나즈막한 독산이 보이면 길 건너
기찻길로 불쑥 길을 틀어버리는 달근이. 쫓아가는 분이 발걸음이 바빠지고.
아지랑이 남실거리는 기찻길에 달근이가 손짓을 하면 콩닥거리는 가슴에 연분홍 물이 든다.
잘생긴 달근이가 좋아라. 키 크고 덩치 크고 남자다운 달근이가 좋아라.
웃을 때마다 하얗게 드러나는 고른 치아가 왜 그리 좋을까나.
수줍어 손 한번 못 잡고 그저 나란히 앉아 별이 내려앉을 때까지 철둑길
풀밭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많이 했던가..
"뿌앙!!"
가파른 죽령고개를 넘기 위해 미리부터 기합소리 내뿜는 기차가 지나가면
“엄마야!”
놀라 오그린 어깨를 감싸던 달근이의 듬직한 가슴팍이 좋아서,
오래오래 자주자주 기차가 지나가길 바랐던 눈 큰 계집아이의 잔망스런 속내.
쑥대궁에서 올라오던 쑥 향기 사이사이 보랏빛 구름 패랭이꽃 흔들리고,
쑥부쟁이 한들거리고, 토끼풀 꺽어 반지 만들어 끼워주던 첫사랑 달근이.
실한 탱자 꺽으려고 독 오른 가시에 긁힌 손등의 상처자국 볼 때마다
나를 좋아하는 그 징표가 마치 적장의 목을 갖다 바친 장군의 충성심 같아 의기양양해지던 마음.
그렇게 남몰래 설레임으로 시작해 설레임을 끌어안고 만났다가,
헤어진 뒤에도 또 다시 설레이며 만날 날을 기다렸던 미숙한 그들의 첫사랑.
분이는 놀라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낯선 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미래를 꿈 꿀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검은 빌로드 카펫을 쫘악 펼쳐놓은 밤하늘.
들판에 방목하고 있는 어린 양떼 같은 수만 개의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분이는 달근이가 그 양떼를 지키는 양치기라 생각했다.
양치기소년은 길 잃은 소녀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양떼를 몰고 은하수 다리를 건너가리라 상상했다.
할 말이 바닥나면 별을 바라보며 별 이야기를 한다.
공부는 못해도 별자리만큼은 분이보다 많이 알고 있는 달근이.
그런 달근이가 왜 그리 멋져 보였을까. 국자 모양을 한 북두칠성을
어느 자리 어느 방향에 있어도 단박에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달근이 덕택이다.
분이가 두레박을 타듯 국자 안에 들어가 앉으면 달근이가 지게를 지듯
분이를 메고 가리라 확신했던, 내 고향 공원산 밑 철둑길 밤하늘에는 지금도
그 때의 별무리가 그대로 있을까? 그립다.
그 시절 사모하는 이에게
줄 선물이 뭐가 있었겠는가.
홍정골 과수원집 막둥이 달근이는
분이에게 줄 것이라고는 사과밖에 없다.
여름이 되니 지천에 열린 게 사과라
어미 눈을 피해 한소쿠리 따다가
빨랫줄에 널린 런닝구를 걷어 사과를 닦는다.
반질반질, 빤질빤질 윤기나도록 붉은 홍옥을 닦는다.
흙 묻고 흠집 있는 사과를 분이에게 줄 순 없기 때문이다.
책가방에 책은 쏟아버리고 가방 가득 홍옥을 채워 놓은 뒤
숟가락 젓가락 쿡, 쑤셔놓고 등교를 한다.
책은 빌려보면 되고 노트 필기는 원래 안하고
도시락은 친구들 것 한 숟가락씩 뺏어먹음 된다나.
분이 방에 붉은 홍옥이 쌓인다.
어미도 주고 언니도 주지만 아까워 성큼 건네지 못한다.
머리맡에 달근이 닦아 준 새빨간 홍옥을
나란히 줄맞추어 세워 놓고 만지고 어루어도 먹지를 못한다.
아삭하고 깨물어버리면 드러나는 하이얀 사과 속살.
달근이 마음 같은 순백의 빛깔. 와작와작 베어 먹을 수가 없다.
백열전등아래, 불빛 따라 돌아가는 붉은 사과 빛 연정.
동그란 사과허리를 감싸고 빛나던 은빛 흔들림. 손에다 쥐고,
가슴팍에다 품고 잠들면, 꿈속에서 그네를 타던 분이.
저 멀리 자전거를 밟으며 다가오는 달근이.
“부우나~~ ”
그 어떤 반짝이는 보석이 분이 꿈보다 찬란할 수 있을까.
춘향이와 이몽룡이 부럽지 않다. 분이는 춘향이보다 절개 있을 자신이 있고,
달근이는 과거 같은 거 보러 한양 따위는 갈 일이 없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변사또가 등장 할 이유도 없다.
‘널 두고 어델 가노!’ 비장한 그의 목소리에 분이는 든든했다.
달근이를 볼 때마다 분이 마음에 설레임의 사랑물이 든다. 학교에서 꼴통이고,
말썽장이에다 공부와 담쌓고 살아도 분이는 달근이가 좋다.
소문이 난다.
분이랑 달근이가 연애를 한 대요~
분이는 연애 대장. 둘이 뽀뽀 했대요~
선생님이 불러들인다.
“이성교제는 정학이야!!”
“춘향이는 내 나이에 이몽룡과 연애했잖아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넌,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문제야!” 삼천포로 빠지는 선생님 답변.
왜 춘향이의 절개는 배워야 한다면서, 절개 지킬 이몽룡을 사귀면 안되나. 납득이 안된다.
허구한 날 달근이 엉덩이에 불이 나고, 분이 가슴이 찢어진다.
어느 날부터인가 달근이는 분이를 슬금슬금 피한다.
곱게 접은 편지가 전해져도 아무런 말이 없다.
속 타는 분이. 철둑길에 앉아 하염없이 달근이를 기다린다.
별이 쏟아지고, 달빛에 달맞이꽃 피어 올라와도 달근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밤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 다리는 양치기 소년을 기다리고,
철둑길 아래 분이는 달근이를 기다린다. 죽령터널 그 따배기 굴을 향해 선전포고라도 하듯
꽥꽥거리는 기차가 거센 바람을 분이 등짝에 퍼붓고 지나가도 그녀는 소리 지르지 않는다.
달근이가 곁에 없기 때문이다. 바싹바싹 타오르는 이 마음을 달근이는 알까.
수분이 빠져나가는 홍옥이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도
윤기 흐르는 새 사과로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다. 분이 가슴도 오그라든다.
교복을 벗어 던지고 홍정골 달근이 과수원으로 가는 분이.
따가운 가을 햇살에 불타듯 매달려 있는 붉은 사과나무들.
냇가에서 소꼴 베던 달근이 또래 남학생에게 그를 불러 달라 한다.
불길한 예감이 분이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별 꼴 다 보겠다는 시선을 던지면서도
달근이를 불러 주었던 남학생. 지금 그 아이는
그때 봤던 분이의 절박한 눈동자를 기억이나 할까? 할 리가 없겠지.
분이 손을 잡아끌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과수원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달근이.
지천에 사과알이 굴러 떨어져 있어 밟을 때 마다 비명처럼 터져 나오던 사과 향기.
그 때 분이는 처음 알았다. 사과는 상처 난 곳에서 더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걸.
곁에 앉은 달근이 손등에 더 이상 가시 긁힌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들풀만 잡아 뽑는 그에게 마음이 달아오른 분이가 묻는다.
“나, 보고 싶었어?.. ”
고개를 끄덕이는 달근이.
“진짜?”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발밑에 피어있는 분홍빛 미꾸리낚시를 짓이기는 달근이
손가락에 선홍빛 꽃물이 묻어나온다. 뒷창락 냇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별모양의 미꾸리 낚시풀이
달근이 과수원 웅덩이 주변에도 초록하늘 분홍 별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멀뚱히 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달근이가 물들은 손가락을 분이 두 볼에 비빈다.
“분이가, 연지 곤지 찍었대요~” 하며 씨익 웃는 새하얀 이빨. 여전히 새하얀 미소.
달근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분이의 오디 같은 검은 동공에 그 미소가 진입하는 순간
그 순간. 엉덩이를 들어 달근이 입에다 입술을 갖다 대는 분이.
.......................
분홍 연지 곤지 물들인 분이는 달근이 각시가 되었음 좋겠다. 그런 뜻이었을까?
그저 눈을 감고, 옆에서 굴러다니는 사과 알을 웅켜 쥐고 둘이는 입맞춤을 했다.
입안에 뭐가 사는지, 날카로운 첫 키스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두 입술만 맞댄 입맞춤.
빽빽이 둘러싸인 탱자나무 울타리를 비집고 기어이 가을 햇살 한줌이 분이 얼굴에 쏟아진다.
멀리서 개짓는 소리.. 온몸을 두드려대는 징소리..달근이 찾는 소리..
“달그나아~ 이누무 자슥이 또 어데로 내 뺐노”
가을해가 성급히 저물기 시작했다.
운명은, 견고하게 짜여진 끈으로 동여맨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끌려오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교무실로 불려간 두 사람은 정학처분 대신 육중한 몽둥이로 처벌을 받아야 했는데,
분이에게 내려치는 매질을 온 몸으로 달근이가 막다가, 노한 선생님의 분노로
그는 엄청난 매를 맞고 말았다. 시계를 풀고, 윗도리를 벗어 제키던 그 선생님의 모습,
질질 끌려가는 마지막 달근이 모습은, 분이 가슴에 면도날로 베인 깊은 상처로 남고 말았고, ‘
샘요~ 분이 대신 절 때리이소!’ 라고 했던 마지막 그의 목소리는 지울 수 없는 메아리가 되어
분이 심장을 헤집고 돌아 다녔다.
결국 달근이는 학교를 나오다 말다 하다가 그만둬 버렸고 그렇게 둘이는 헤어졌다.
한양으로 과거 시험이나 보러갔으면 오매불망 기다려나 볼 텐데, 지척에 있으면서도
달근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발목이 부러지면 붕대나 감지, 상처난 심장엔 무얼 발라야 낫는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쪼그라진 탱자를 집어 던지고 달근이 편지를 찢어버리고,
달근이 좋아하는 마음이 적힌 일기장을 태워버리는 걸로 분이는 그 모든 걸 잊기로 작정한다.
그래도 줄줄 새어 나오는 그리움, 안타까움, 미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의문 하나.
‘우리가 왜 헤어져야지?’
생전 먹어 본 적 없던 맛있는 막대사탕을 다 먹기도 전에 누군가가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버린 것 같은 억울함. 그것은 새로운 슬픔의 시작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이몽룡을 기다리는 절개 있는 춘향이는 분이 가슴에 동상처럼 잠깐 세워졌다가
곧 자진철거 되었다. 떠나간 달근이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하염없이 보고 싶었던
기다림의 징표는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하늘 어딘가에 지금도 떠 있다.
하지만, 분이의 마음에는 아직도 그 짧은 사랑의 감흥이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깊숙이 저장되어 있다.
달근이와 헤어진 분이는 달콤했던 사랑의 떨림은 간직하고, 베인 상처 같은 아픔은 잊었던가,
몇 년 후 또 다른 달근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호숫가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휘말리면서 사랑의 이중성을 경험하고,
서서히 설레임과 떨림의 물결을 조정하면서 성숙한 여인이 되어 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영원한 사랑은 없으며, 어떤 사람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사랑을 하면서 사람은 인생을 배운다. 사랑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다면
그것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관계를 가진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그 짧은 풋사랑의 기억을 떨칠 수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이 아니라
분이를 대신해 매를 맞았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지켜주려 했던 의리있는
남자의 상을 구리로 만든 동상처럼 마음 문 앞에 세워 두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랑은 과거 지향형이지, 미래 지향형이 아니다. 과거의 형상에 아름다운 환상을
덧칠하면서 착각에 빠지는 현상이다. 고향 남자에게 사랑의 배신을 경험한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고향 쪽 남자를 만나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되새기고 싶지 않은 방어 본능이 생기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가, 반질반질하고, 매끈거리는 매너를 가진 남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자꾸만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속이 메슥거린다.
투박한 고향 사투리를 휘두르는 사람을 만나면 단번에 호감을 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다.
나이가 들수록 증상이 심해지니 내가 앓았던 향수 속에는
그 첫사랑의 설레임을 고향이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래서, 홀로 고독한 인간이 되어 우그러뜨린 깡통처럼 늙어 가는 것을 지켜보기가
심란한 신이 인간들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도 겪을 수 있는 첫사랑의 설레임을 어떤 이는 예순을 넘겨서 겪을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나이는 무용지물이 되고 단박에 순수한 아이로 둔갑시키는 사랑의 묘약 설레임.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은 아름답다.
오죽하면 미쳤다고 표현을 할까. 그럼에도 미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후환을 두려워 하면서도 모두들 사랑의 독약을 들이키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물론 당신이 냉소적인 인간형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이 먹은 분이는 아들이 첫사랑에 빠지자, 의로운 달근이 이야기를 해 준다.
어쩌면 생애 딱 한번 뿐일 첫사랑. 그 아름다운 설레임이 찾아든 것을 축하하면서..
좋아하는 여자를 대신해서 절 때려달라며 무릎을 꿇고 애원했던
어미의 첫사랑 달근이 이야기를 하는데..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2년 전이던가, 30년 세월이 흐른 뒤 그 첫사랑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잘생기고, 듬직하고, 키가 컸던 그 때의 달근이는 찻집에 없었다.
농사일에 노화된 거친 피부, 그때 그 키를 위로 당겨 올리지 못하고,
옆으로 앞으로 확장한 나이 든 달근이가 앉아 있었다.
잔인한 세월과 거친 인생의 각본대로 분장을 하고, 현실이라는 드라마 속에 마주한 두 사람.
분이는 수정할 수 없고 각색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잠깐 좌절했지만
그에게 미소 띤 얼굴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춘향이를 황진이로 만들어 버린
최초의 남자 달근도령에게 그동안 묻지 못하고 간직했던 질문을 한다. 스쳐가듯이,
가벼운 농담처럼. 왜 나를 떠났느냐고..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그날 밤.
그의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대답이 너무 아팠던가. 가슴속 우물 안에
웅크리고 있던 단발머리 소녀가 두레박을 타고 올라와 나이 든 분이를 울게 했다.
그 역시 가벼운 농담처럼, 그저 바람에 스쳐가듯 웃으며 물음에 대답했지만,
언젠가 나를 보면 반드시 들려줄 요량처럼 항상 그 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 같았다.
감정의 조절 능력이 떨어졌던 그 때는, 내 마음의 상처를 꿰매기도 벅찼기에
달근이의 상처를 헤아려 볼 요량이 부족했다. 뒤늦게 그의 아팠던 상처를 위로하자니
이미 아물어버린 뒤라 할 일이 없었다. 그냥, 고맙고, 미안했다.
비록 설레임의 물결을 다시 안고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의리 있고
자신의 가족을 지킬 줄 아는 멋진 달근이 그대로였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이라는 노래가 있지만,
첫사랑이 너무 아팠던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첫사랑의 아픔마저 달콤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아름다웠기에 너그러울 수 있는 첫사랑만의 순수함.
수채화 밑그림처럼 투명하고 은은한 바탕 위에
덧씌워지는 다음 사랑을 채색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주니
그래서 미완성이기 쉬운 첫사랑. 질주하는 21세기에 진화하는 사랑의 행태.
폭발하는 젊음을 그대로 분출하는 우리들의 아이들. 그런 그들도 한 꺼풀 옷을 벗기면
흔들리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의 병 앓이를 할 것이다.
낡아빠진 순정을 비웃고, 가난한 남자를 무능력함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해도, 누구나 간과할 수 없는 사랑의 진실.
그 진실의 바탕을 버티고 있는 것은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고,
그 순수함의 결정체가 바로 첫사랑이 아닐까.
어떤 이는 말한다. 첫사랑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반백이 다 된 지금까지
오직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음이 자랑스럽다고. 혹, 어떤 이는 말한다.
결혼한 이가 있음에도 끊임없이 사랑에 목이 말라요 라고.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잘 한다 못 한다 판단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그저 당신은 운이 좋았다 나빴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약 판매가 불가능한 것이 사랑이고,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니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니겠는가.
벤츠를 몰고 다니는 멋진 남자의 파트너를 꿈꾸는 여자들과,
비욘세의 도발적인 섹쉬함에 전율하며 그녀를 태우고 질주를 꿈꾸는 남자들의
적나라한 밑바닥 본성을 그나마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 여릿여릿하고,
몰캉몰캉한 설레임의 기억이 제어 장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함이 배제 된 사랑은 감동이 없다. 감동 받지 못한 사랑은 거래이다.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그리 짐작하기에 사랑의 정체성은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달콤한 기억 설레임.
사랑이 찬 밥덩이처럼 식은 사람과는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을 계산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가 없다.
그것이 온 몸을 설레임의 강물에서 헤엄쳤던
어떤 소녀가 얻어 낸 사랑의 방법이다.
비웃음을 사거나 어리석다 해도, 분이는
여전히 설레는 사랑을 갈구한다.
설레는 사랑을 할 때, 비로소 행복해짐을 알기에.....
당신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마치 빙하처럼 드러내지 않는 부분과
드러내는 부분을 조절하면서 사랑하지는 않는가.
사랑하려면 모조리 보여주고 사랑하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치부를 다 드러내도
사랑 받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온 몸과 온 마음 구석구석
사랑의 기쁨을 머리로 밀어 올려 부쳐라.
그리만 된다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을지니.....
수많은 사람들의 첫사랑이 별 되어 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여전히 양치기 소년을 기다리는 은하수 다리가 놓여 있으니, 보고, 그리고, 되뇌인다.
나는 사랑하리라.....언제나 설레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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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풋풋한 첫사랑, 단편문학같은 좋은 글 다시 읽어요 경진님.늘 - 기다려요.
이상하죠? 풍우회에서 답글을 쓰다가 오늘 여기서 만난 내 첫사랑. 엄마찾아 온 집안을 헤매다 전에 못 본 작은 오두막..그 안에 들어가 만난 창틀의 햇살이 부서지던 다락 같은 곳.. 아름다운 금계중학교 카페..가슴이 설레네요^^
후배님!! 진짜 글 잘써요..
어제 만났지요? 단박에 제가 알아보았지요?..짧은 스침, 긴 여운..반가웠습니다 선배님*^^*
첫사랑 누구나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지 지금은 모두들 아련한 추억으로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겠지만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이 싶지는 않겠지요 책과 씨름만 했는지 알았디만 첫사랑도 잇었네요 바쁜연말에 잠시 책한권 읽고 쉬었다 갑니다 진짜 글솜씨 부럽네요 몸뚱아리 잘 보존 하시고 건강하시길...
내 첫사랑 달근이 같은 순수한 내 친구...보고싶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