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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째 날(9월 9일)
(34)
포항의 음지는 충격이다
식당에서 식사한 후 종이박스를 얻어 천막집 마루바닥에 깔고 반듯이 누웠다.
포항시 북구 장성동 주택가 한 소공원의 정자.
양북온천에서 여기까지 불가사의한 하루였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사고를 나는 완강하게 부정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라도 나쁜 과정이라면 나는 단연코 거부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는 것은 특정 철학자(Immanuel Kant/1724 ~ 1804)
만의 윤리관이 아니다.
보릿고개를 없애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는 분을 증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해피엔딩 했다 해서 이 하루를 선(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995년 환갑기념으로 동해를 자전거 일주할 때 1박한 적이 있는 포항(浦項).
그러나, 이 곳에서 일한 적이 있는(한 은행 지점장으로) P가 딴 세상으로 가버린 후로는
의식적으로 피한 곳인데 이렇게 또 한 밤을 보내고 떠나게 되었다.
먼저 가버린 친구 또는 혈연이 아니면서도 아우에 다름아닌 벗이었던 자와 관련된 곳은
피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천막집 생활에서 전무한 단잠을 잤다.
맥빠진 걸음으로라도 워낙 많이 걸었고 상기되어 또 많이 걸었기 때문인지 더 자고싶은
꿀잠을 깨고 짐을 챙겨 일어선 시각은 아침 6시쯤.
주택가라 일찍 비워주는 예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침판의 도움으로 주택가에서 빠져나와 해안을 찾아갔다.
포항시가 넓은 도로를 갖고 싶은지 왕복 6차선 공사가 진행중인 도로다.
밤에는 버스터미널에서 꽤 먼 듯 했는데 동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터미널(양덕동?)이고
곧 바다에 당도했다.
버스터미널에서 한바퀴 돈 셈이다.
죽천교를 지나 죽천리 해안로와 백사장을 번갈아 밟으며 본격적인 북상을 시작했다.
왼쪽 고지대에는 포항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포항에는 유사한 이름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POSTECH)도 있다.
한국의 MIT를 지향한다는 야심찬 대학이다.
MIT로 하여금 미국의 포항공대라는 별칭을 갖고 싶도록 야망을 더 높게 잡으면 않되나.
한국에는 19c(1861년)에 태어난 미국의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보다 오래 전 과학자가 수두룩하다.
5c나 전인 14c의 최무선을 비롯하여 15c에 최해산, 장영실, 이천, 16c의 나대용은 물론
19c의 정약용까지도 MIT 이전의 한국 과학자들이다.
240년도 못되는 나라의 150년 밖에 되지 않은 대학을 선망하고 있다니 오호 통재라.
포항에는 세계제1의 철강회사 포스코(POSCO)가 있다.
포스코 없는 포항은 상상하기도 끔찍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민의 요구에 대한 반응은 원전처럼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철강회사는 원전 같은 공포의 위험 요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포항의 음지에 자못 경악했다.
"누워있는 소의 눈 위치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우목(牛目/북구흥해읍)
마을의 해안은 지금까지 걸어오며 보아온 해안마을 중 가장 낙후되어 있다.
상하수도시설, 바다로 뛰어드는 하천, 해변에 쌓여있는 쓰레기더미 등 생활환경이 어느
지역보다도 열악하다.
이 쓰레기더미는 강태공들의 것이 틀림 없다.
마을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기고 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조사(釣師)가 아니고 낚싯꾼들이다.
대조적으로 바로 옆에는 아직도 공사중이지만 잘 정비된 신항만이 있다.
그런데도 '우목리생계대책위원회' 이름의 "어민생계대책 수립후 공사를 시행하라" "토지
허가구역을 즉각 해제하라"는 빛바랜 현수막이 걸려 있을 뿐이다.
방파제에 쌓인 쓰레기를 불태우는 이도 혼잣말로 투덜댈 뿐.
주민들이 양순한가 모자란가 유능한 리더가 없기 때문인가.
포항시의 재정자립도는 다른 지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고 구미시와 함께 경북도
자립도의 곱절 수준이다.
게다가 현직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처처안락이면 처처불성이다
구룡포를 전국적인 관심지로 만든 과매기를 구경도 하지 않고 포항 다운타운을 떠나는
멋 없는 늙은 길손에게 하늘은 소나기를 퍼부으려 했는가.
시내권을 벗어나면 옛 그대로 좁은 길을 걸어야 하는데 잠시지만 도로를 벗어나 해변을
걸을 수 있는 위치까지 서비스하는 차가 등장했다.
바다낚시 왔다가 비를 피할 겸 아침식사하러 낚시터를 떠나는 중인 듯한 S씨(AD교육지
원청)의 호의로 둑길을 걷게 되었다.
위도상으로는 먼 후방이지만 해병대에게는 최일선인데도 전방 감을 가질 수 없는 포항.
산업단지와 지원시설 단지가 양쪽으로 즐비한 빗속의 둑길을 걷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J은행 부장에서 명퇴한 안동(경북) 거주 S의 전화였다.
친구인 산지기님과의 통화에서 내가 현재 걷고 있는 지역이 동해안 어디쯤일 것이라고
알게 된 그가 도킹을 제의해 왔다.
부산의 상가에 문상하고 귀가길에 올랐다며.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神光馬北) 마북제에서 발원해 이곳 칠포리의 동해로 흘러
드는 곡강천(曲江川)의 칠포2교에서 비로소 17년 전의 자전기길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칠포해수욕장을 비롯해 고갯길과 북상하는 해안로 등.
해변의 백사장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바뀌었으나 잘 보존중(?)인 것도 있다.
월포로 가는 차로만은 옛날 그대로다.
포항 시내에서는 왕복 6차선으로 넓혀진 20번도로(국지도로)가 해안을 따라 겨우 교행
하는 왕복 2차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대형 트럭들 간의 교행은 버거울 정도로 좁은 차로에서 트럭이 짖궂게 울려대는 경적에
자전거를 몰던 내게 경기(驚氣)가 일어나는 듯 했는데 여태 그대로 있으니까.
수군 만호영이 있던 때 7개의 성이 있다 해서 칠포(七浦/흥해읍)라 했다는 마을.
2km 되는 긴 백사장의 칠포해수욕장 이후 월포까지는 연속되는 해안길이 없기 때문에
아스팔트 포장도를 걸어야 한다.
자전거 일주할 때 내연산 보경사까지 지그재그 하며 샅샅이 밟았던 길인데다 지형적인
이유 때문인지 전혀 손을 보지 않은 길이므로 버스편을 고려했던 구간이다.
물벼락 치고 가는 차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채 걷다가 고마운 젊은 부부를 만났다.
빗속의 해안을 드라이브 중인지 칠포해변에 들렀다 나온 그들은 나를 태웠다.
그리고 늙은 나그네를 위한 듯이 해안길을 찾아 서서히 달려 월포해수욕장(淸河面月浦
里)에 내려주며 자기 아내와 나를 카메라에 담은 후 떠났다.
내게 '영덕 블루로드'를 설명하고 추천하는 것도 잊지 않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에서 부부순례자들은 예외없이 자기 아내의
사진 파트너로 동양 늙은이를 빌려갔는데.
청하면 궁곡(弓谷/포항시 북구)에서 발원해 동해에 합류하는 청하천 다리가 이채롭다.
갈매기 조형물을 세운 이 다리의 자재가 철근 시멘트가 아니고 천연 바위였더라면 후손
에게 큰 선물이 될 텐데.
세월이 간 후 일급 관광상품이 되어 있을 것이니까.
유감스럽게도 서-남-동 길을 돌아오는 동안에 후손에게 귀중한 유산이 될 것으로 기대
되는 이 시대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
강약의 리듬을 타는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비에 다카도 거의 휴무에 들어가고 방어가
잘 잡히는 마을이라 방어리(方魚)가 되었다는 마을의 소규모어항 방어리항을 지났다.
"처처안락이면 처처불성(處處安樂 處處佛成)이라."
특이한 슬로건을 내건 동해의 방생기도도량.
차 한잔을 마시며 기도하는 도량(道場) '심휴암(心休庵)'이 해안에 있다.
얼핏 보아서는 해변의 찻집같은 작은 암자의 평범한 듯 하나 의미심장한 표어다.
차 한잔에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수 있다면 이미 성불 경지에 이른 것이다.
다만,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處處)가 안락궁(安樂宮)이며 처처가 불성(佛性
또는佛心)이라는데 '佛成'은 '佛性' 또는 '成佛'의 오자(誤字)가 아닌지.
늙은 길손의 빗길은 포항의 북단 송라면 조사리(松羅 祖師)로 이어졌다.
고려말 원각조사(圓覺祖師)가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조사리라 불리어졌단다.
해변과 소규모어항 조사리항을 지나 화진포해수욕장이 코앞인 지점에서 S와 도킹했다.
포항 이후에는 내 안내를 받아 내가 걸어온 길을 추적해 비내리는 해변노상에서 만나게
된 것.
서-남-동 해안으로 달려온 늙은 길손의 후견인 S
귀가하는 안동길에서 잠시 곁길로 빠진 것이지만 그가 내게 온 목적은 내 영양보충이다.
그러니까 내 몸이 원하는 최고의 진미를 대접하겠다는 그.
내가 한양 도성을 떠나서 16일만에 부산에 당도함으로서 영남대로를 마치던 5년전에도
부산지점에 근무하던(당시에는) 그는 그랬다.
S는 늙은 길손의 후견인을 자임하는가.
그는 한우(韓牛) 고깃집을 찾느라 해안을 떠나 부산~온성(함경북도) 사이의 7번국도를
타고 포항과 영덕을 가르는 지경천을 건넜다.
영덕군 남단 남정면(盈德郡 南亭面) 소재지에서 겨우 찾아낸 고깃집.
허름한 시골식당이지만 고기맛 만은 오래 기억될 만한 한우의 진미였다.
운전 때문에 자제하는 그에게는 미안하나 소맥을 곁들여 거동이 불편할 만큼 포식했다.
S는 퇴계(退溪李滉)의 고향인 예안(안동시) 출신이다.
오르며 내리며 만나는 도봉산의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갖는 시산제에서 유향(儒鄕)산
(産) 답게 늘 제를 주도한 그.
퇴직 후에는 서울에 가족을 두고 귀향해 연로하신 부모님 대신 농사를 짓고 있다.
(여기까지 쓰다가 그가 입원중인 병원에 문병하고 왔다.익숙해지지 못한 농사에 무리를
했는지 척추수술을 받았는데 또 한번 공교롭게 생각된다. 써내려오는 글에서 그를 생각
하는 시점에 문병이라....)
비가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강구까지 만이라도 자기 차편 이용을 권하는 S.
해안을 전혀 이어갈 수 없고 7번 국도를 걸어야 하는 구간만 함께 한 후 남호리(南湖里)
해수욕장 앞에서 하차했다.
남정천(남호교)을 건넌 후 곧 해안을 이어갈 수 있으므로.
S를 보낸 후 남호교를 건너 영덕 블루로드 이정표의 안내 따라 삼사해상공원으로 갔다.
'블루로드(blue road)'는 '해파랑길'의 영어표기일 뿐인데 영덕은 왜 영어를 좋아할까.
하긴,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람도 시도때도 없이 영어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선전하느라 여념이 없는 나라에서 아무려면 어떠냐.
삼사해상공원의 해양산책로는 동해안 최초의 해상산책로란다.
서해 궁평항(경기도 화성시 제부도)과 제부항 2곳도 여러 해 전에 물 위에 떠 있는 바다
낚시 잔교(棧橋/피싱피어/Fishing Pier)를 설치해 해상 산책과 낚시를 즐기게 했다.
아마, 서-남--동 해안에 무수히 늘어날 것이다.
과연 거시적으로 볼 때 관광상품으로 투자할만한가.
관리 소홀로 인해 위험한 애물단지로 전락하지는 않을지.
블루로드 노변에는 잘 관리되고 있는 '시랑신묘(侍郞神廟)' 현판이 붙은 사당이 있다.
신라때 시랑(侍郞) 3인이 났다 해서 삼시랑골이라 하였으며 훗날 세 시랑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삼사(三思)마을이라 했다는데 이 건물이 바로 그 시랑들을 모시는 사당인 듯.
해상공원은 갖은 치장을 하며 '삼사' 라는 흔하지 않은 마을 이름을 쓰고 있으면서도 시랑들의
사당에는 안내판 하나 없을까.
신라는 8c 중엽(747년/경덕왕 6), 당(唐)의 제도를 모방해 집사부(執事部)의 전대등(典
大等), 병부(兵部)의 대감(大監), 창부(倉部)의 경(卿) 등을 시랑으로 바꿨다.
관계로는 11관위(官位)인 내마(奈麻)로부터 6관위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五頭品)과
6두품의 신분층이 맡을 수 있는 벼슬이었으며 현대의 관직으로는 차관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마을의 시랑 배출시기는 747년 이후 신라가 문을 닫은 935년 이전이 될 것
이며 삼사마을의 형성 시기 또한 8c ~10c 이전이 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해안을 따라 오포해변, 오포3리로 갔다.
블루로드도 같은 길로 이어진다.
고려때 마을이 열였다면 삼사에는 뒤지나 10c~15c 어간이므로 오래된 마을이다.
오포(烏浦)는 마을의 뒷산이 까마귀 머리(烏頭)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강구항과 영덕대게와 인심
오포에서 강구교로 가는 신 강구길의 오십천변은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다.
오십천과 강구항을 잘 감상하도록 2층높이의 인도를 조성했으리라.
블루로드를 위해 만들었는가 만들어진 2층 인도를 불르로드가 차용하고 있는가.
오락가락하는 비 탓인지 늙은 길손 외엔 아무도 없고 벤치들만 있는 2층 인도.
오십천을 건너(강구교) 강구항으로 갔다.
국가어항이었다가 항종이 변경된 연안항이다.
영덕 오십천은 국립공원 주왕산권내인 낙동정맥 먹구등에서 발원해 기사저수지(영덕군
지품면)에 머물렀다가 북동류하여 강구항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동해에서는 또 하나의 오십천을 건너야 한다.
낙동정맥 백병산에서 발원해 죽서루(삼척)를 돌아 동해로 뛰어드는 오십천이다.
두 강이 모두 곡류가 심해 동해에 이르기까지 오십번쯤 꺾여야 한다 해서 오십천이란다.
60년대말,70년대초는 아예 접어두고 80년대 초에도 영덕땅의 강어귀(江口)는 푸짐했다.
설악산 등산 후 시간을 내어 덕구온천 또는 백암온천에서 풍진을 씻고 강구까지 달렸다.
도로 대부분이 비포장 자갈길이지만 구애받지 않고 달리는 동안 처처가 풍년인 어항들.
그 중에도 대미를 장식하게 하던 대게의 강구항.
정겹던 그 곳이 간데온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거기뿐 아니라 그 때의 팀원들도 세월 따라 가버리고 나홀로 남아있다.
'큰(大)게'가 아니고 '대나무처럼 길고 마디가 있는 다리를 가진 게'라 해서 대게.
양 다리를 길게 펴면 내 하반신 만큼 길고 크므로 크다는 대게도 맞는 이름인 대게.
홍어처럼 남획으로 인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가.
유통되는 대게는 거개가 캄차카 반도, 알래스카, 그린란드 바다에서 잡힌 것이라니.
부(富)의 상승에 따른 식도락의 다양화, 사치화 탓인지 급증하는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공급자들은 남획의 우(愚)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
깨진 금기는 상습으로 치닫고 마침내 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져가게 되었다.
지극히 자명한 결과 앞에서 탄식하는 우매한 종사자들이 가소롭다.
그들보다 더 우매한 자는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이다.
품귀현상에서는 소비를 억제하려 하지 않고 소비 조장에 더욱 기를 쓰니까.
강구항 북쪽끝 방파제로 갔다.
아직도 어항 분위기를 탈피하지 못한 듯이 느껴지는 연안항의 모습을 디카에 담으려고
가다가 한 젊은이에게 붙들렸다.
온전하지 못하도록 이미 취해있는 그에게 내가 옛 학교 선생님으로 보였는가.
내가 알 리 없는 학창시절의 추억 속에 나를 끌어들이고 있는 그를 떠나려 했으나 워낙
센 완력에 대책이 없었다.
방파제 한쪽에 설치된 천막이 자기의 집이라며 하룻밤 유하고 가시라는데 난감했다.
기초적인 생활도구가 천막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기거하는 듯 한데 못할 일이
없을 청년이 무슨 사연에 붙들려 이러고 있을까.
고백하건대, 가는 길을 중지하고 이 사람을 알고 싶어졌다.
이 젊은이가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면 서남동길 쯤이야 대수가 되겠는가.
그러나 시도하려면 그의 추억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이 천막에서 밤을 함께 보내야 한다.
문득 백두대간 대야산 밑 버리미기재에서 보냈던 공포의 한밤(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
맥'19번글 참조)이 떠올라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대간과 정맥들에서 이따금 카운슬러(counselor/상담자)가 되고, 심지어 신들(諸神)의
세계에서 우두머리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기력이 없다.
근처에서 어구를 손질하던 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해야 할 일을
유기한 것 처럼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해안을 걸어야 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어갈 때 해안길의 정자가 반가웠으나 가까이
가서 확인한 것은 금줄처럼 정자 기둥들을 감고 있는 줄과 출입구를 막고있는 각목들.
외지인의 정자 사용을 금하는 강구면 금진2리(金津) '영덕대게로'의 모습이다.
한참 더 가서 있는 금진1리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는 여행객들로 보이는 한팀이 식사중.
이 정자에도 금줄이 있었으나 걷고 올라간 듯 하얀 줄이 한쪽에 몰려 있다.
내가 걷어낸 줄이 아니므로 허락받는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팀이 아이스박스 안의 김치와 포도, 밥통의 밥 등을 내게 주고 떠남으로서
오늘은 낮과 밤 모두 아무도 부럽지 않은 늙은 나그네가 되었다.
회관앞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영감에게 다가가서 사정을 말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허락하며 드디어 인상이 펴지는 것 같은 영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정자를 사용한다 해서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던 듯.
쳐놓은 금줄을 걷으려면 허락받는 것이 예의임은 당연하지만 그깟 정자 사용에 위세를
부리다니 속 좁은 사람들.
나는 아니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지갑을 가볍게 하고 돌아가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나.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