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를 보았다.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그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부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선생은 이후 처사형 선비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황현은 거듭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선생의 동생 황원은 “평생 문학적인 사귐은 영재, 창강 두 분이 제일이었지만 영재에게 더욱 쏠리어 꿈에도 1년에 늘 수십 번을 만났다. 늙어서는 조금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내 평소에 선생의 문장을 좋아하였다”고 하면서 “아! 조선조의 문장은 선생에 이르러 볼 만한 것이 그쳤다”라 하여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서적도 탐독하였다. 그는 다산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선생은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16년 여 살면서 선생은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 데 몰두하였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이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특히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