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차역, 오르세 미술관 |
글 : 박희숙(화가) |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 한복판에 있는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 튈르리 궁전과 마주보고 있는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부속 호텔과 함께 세워진 웅장한 복합 건물이었다. 기차역으로 사용되었던 오르세 역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철거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철거를 안타까워하던 시민들은 낡은 오르세 역을 미술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한다. 작품을 소장하는 데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루브르 박물관 관계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 예술 작품들을 모아놓은 미술관으로 1986년 새롭게 탈바꿈하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프랑스의 자랑인 작품이 밀레의 <만종>이다. 석양에 물들어 있는 벌판은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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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여자의 뒤로 아득히 보이는 교회의 종소리에 농부들은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고 있다. 밭 밑에 감자를 캐다 그만 둔 괭이가 남자 옆에 있고 감자를 담아둔 자루가 있는 손수레 그리고 여자의 앞에는 감자를 담아둔 바구니가 보인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은 1857년 여름 미국의 화가 토머스G 애플턴의 의뢰로 제작하게 되었다. 1889년 경매를 통해 뉴욕에 있는 미국미술연맹이 소장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작품이 루브르에 소장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이후 치열한 분쟁 끝에 루브르 백화점 소유주가 1890년 그 당시 막대한 금액이었던 80만 프랑을 주고 구입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국제 분쟁을 해결했다.
<만종>은 19세기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어 작품의 예술성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너무 평범한 그림으로 치부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주는 경건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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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1857~59년, 캔버스에 유채, 5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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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에서 근대 미술의 전환점을 마련한 마네의 대표작 <올랭피아>를 감상할 수 있다. 마네는 미술사에서 근대 미술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화가로서 역사나 신화를 주제로 표현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화가였으며 그의 그림을 시작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올랭피아>는 살롱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성공을 꿈꾸었던 마네에게 20여 년 동안 고통을 주었다.
<올랭피아>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이다. 마네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을 할 때 우피치 미술관에 있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인을 여인으로 묘사한 것에 비해 <올랭피아>는 밤의 꽃인 매춘부를 표현했다.
마네는 당시의 유행했던 유곽의 창녀의 모습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방금 옷을 벗은 듯한 여인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마네가 표현한 벌거벗은 여인은 사회가 감추고 싶은 치부였다. 그것을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했다.
그 당시 누드화는 인기 있는 소재 중에 하나였지만 대부분의 누드화는 여신의 모습으로만 등장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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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190 |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로마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정부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에서 나왔다. 그녀는 교황 이노센트 10세 동생의 미망인으로서 교황의 정부가 된다. 올랭피아는 교황의 정부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벨라스케스는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의 초상화도 함께 그렸다. 마네는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올랭피아는 그 이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올랭피아는 춘희의 연적으로서 부끄러움을 모른 채 아름다운 육체를 팔아서 살아가는 창녀의 이름이다. 이 소설의 성공으로 연극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올랭피아는 파리에서 창녀의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또한 이름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비너스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였는데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올랭피아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난초는 사치와 여성의 성욕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목걸이와 슬리퍼만 신고 쭉 뻗은 다리 아래 음부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은 고상하고 우아한 여신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한 여자였다. 더욱이 목걸이는 창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었다.
<올랭피아>는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하녀와 대조를 이루면서 남성의 사랑을 원하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발기된 남성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 고양이는 1865년 살롱전에 출품하기 전에 덧 그려진 것으로 이 고양이는 마네의 추문의 상징이 된다.
티치아노의 비너스 발밑에 잠들어 있는 개를 마네는 꼬리를 세우고 있는 고양이로 대치했다. 전통적으로 검은 고양이는 악마의 의미를 암시한다.
<올랭피아>의 원제는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였으나 시인 아스트뤽의 권유로 바꾸었다.
당시 <올랭피아>를 비웃고 비난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주먹을 휘두르고 지팡이로 후려치는 소동이 있어서 그림 앞에 3명의 호위를 내세워야만 했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이 작품의 모델인 빅토린 뫼랑 때문에 더 큰 오해를 샀다. 빅토린의 모델로서 자질은 <풀밭에서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추문들이 마네를 괴롭히게 된다. 그는 스캔들을 불식시키고자 자신의 동거녀이자 <올랭피아>의 모델인 빅토린 뫼랑을 다른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시켰다.
19세기 프랑스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린 작품들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모로다. 모로의 대표작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나오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각색해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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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숲의 님프인 아름다운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하지만 신부는 첫날밤 뱀에게 물려 죽는다. 그녀를 찾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죽음의 강을 건너 저승세계인 하데스에까지 간다. 그곳에서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불러 저승을 다스리는 플루톤과 그의 부인 프로세르피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신부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다시 데려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지상세계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지하세계로 끌려가고 오르페우스는 영원히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비극적인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에서 모로는 영감을 얻었다. ‘한 젊은 여인이 헤브로 지방의 트라카아 강가까지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경건하게 거둔다’라는 부제로 모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모로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결말을 위해 다양한 방법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다.
화면 오른쪽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화면 왼쪽은 바위로 가려져 있어 분위기를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바위 앞에 젊은 여인은 리라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서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과 비극적인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모로는 당시에 발간된 고고학이나 문헌에서 찾아 여인의 옷을 장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영향을 받아 은쟁반에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살로메처럼 젊은 여인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
▲<오르페우스>, 1885년, 패널에 유채, 15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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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에서 자연을 사랑한 모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살롱전에서 여러 번 낙선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비를 들여 새로운 회화 기법(인상주의)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시회를 개최한다. 1873년 예술가 협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듬해 4월 첫 번째 전시회가 열린다. 첫 번째 전시회에 모네는 여러 작품을 출품하는데 당시 전시회애 출품한 작품 중에 대표적인 작품이 <개양귀비꽃>이다.
<개양귀비꽃>은 아르장퇴유의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르장퇴유는 파리 시민들의 주말 소풍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세련된 요트경기장, 해수욕장, 카페 등이 있어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상향이 되었다. 아르장퇴유에서 집을 얻은 모네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모네는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모델로 한 이 작품에서 화면의 위아래를 나무로 나누었다.
모네는 빛에 따라 변하는 풍경에 집요하게 추구하면서도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붉은 색의 개양귀비, 그리고 화면 아래 여인의 옷의 색채들이 하나의 통일감을 주기보다는 각각의 색으로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초여름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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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귀비꽃>, 1873년, 캔버스에 유채, 50*65 |
클로드 모네(1840~1926)는 빛에 변화에 따른 자연을 묘사한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일한 풍경이 빛에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탐구했다.
웹진아르코에서 |
첫댓글 98년 프랑스 월드컵때 파리에 있었다.. 그때 오르세를 갔었다.. 만종이 생각보다 작았고, 피사로의 그림이 인상적이었고, 물론 고흐의 그림도 좋았다. 고흐의 그림은 암스테르담에서 본 것이 최고였지만... 아무튼 루브르보다는 친숙한 그림들이 많았다.
오르세 미술관 진짜 좋았다. 그림 볼 것 너무 많고. 음 개인적으로 파스텔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