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松亭 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60호)은 1454년(단종2년)에 퇴계 이황의 祖父인 이계양(李繼陽)이 지은 5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고택이다
종택 대문 위에 걸려 있는 성림문(聖臨門)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데 ~ 이황의 모친인 춘천 박씨가 공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 이황을 낳았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
노송정 (老松亭) 노송정 (老松亭)은퇴계의 祖父 이계양의 호이면서 이집의 당호다. 이계양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주변에 늙은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노송정(老松亭)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老松亭 편액 뒤 옥루무괴(屋漏無愧)는 [詩經]과[中庸]에 나오는 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에서 인용한 것 "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는 뜻이다. 海士 김성근 선생 글씨
사랑의 동편에 걸려있는 온천정사(溫泉精舍)
노송정(老松亭) 종택 내부
노송정 종택 종부가 차려준 점심 공양
종부의 맛깔스런 밥상
후식으로 나온 노송정 종택 전통 다과
노송정(老松亭) 종택 최정숙 종부님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 태실 남쪽 처마밑에 쓰여진 현판 정면 7칸, 측면 6칸 전형적인 사대부 형태인 ㅁ 자형 으로 중앙에 튀어나온 방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난 데서 비롯 되었지만 건물 전체의 이름은 조부 이계양의 호를 따라 노송정 종택이라 부른다
아름다운 장독대
노송정(老松亭)에서 忙中閑
퇴계선생의 18대 후손 진성 이씨 종손 이창건(李昌建) 선생의 조상(?) 이야기 ~ ^^
노송정 종택 최정숙 종부 당호 헌정식 素絢堂소현당 (흰 바탕을 갖추고 문채를 더하여 완성됨) 논어 팔일편 제 8장
당호 헌정식 후 기념 촬영 (종손과 종부)
뒷쪽 벽에산남낙민(山南洛閩)현판. 낙읍은 정호. 정이 형제가 살았던 곳이고, 민 땅은 주자의 삶터였다. 정씨 형제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의 조선시대를 사상적으로 재배한 주자학을 생산하여 낸 것이라는 점을 상기 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해동추로'가 뜻하였던 같과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맞은 편(동쪽) 벽에 해동추로(海東鄒魯)는 추땅은 맹자가 태어난 곳이고, 노나라는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학의 본향을 일컫는데, 해동추로는 노송정 이계양과 퇴계 이황의 안동 도산을 조선유학의 본향으로 인식하는 현판이다.
노송정(老松亭) 종가 성림문(聖臨門) 에서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약 200m 떨어진 삼백당(三栢堂, 퇴계 넷째 형 온계 이해의 종택) 앞에 수령 500년 된 높이 12m, 나무둘레 5.5m 밤나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 마을이 수몰되어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농암(聾巖)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 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온 집이다 최초 이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 입향 시조 이현(李軒)으로 선생의 고조부 이다
입구 사랑채
긍구당(肯構堂) "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 " 라는 뜻으로 농암(聾巖) 종택의 상징적인 유적으로 남아있다.
분강서원(汾江書院) 분강서원은 광해군 때(1613년) 농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뜻으로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숙종 때(1700년) 서원으로 개편이 된 곳이라고 한다.
명농당(明農堂) 농암이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곳으로 이곳에서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애일당 (愛日堂)과 강각 (江閣)
애일당 (愛日堂)
농암(壟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 건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부친과 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고 경노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당호(堂號)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 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 이라 하였다.
1533년 농암은 여기서 94세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 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 자신이 이미 이때 67세의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孝子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강각 (江閣)
강각(江閣)은 농암 선생의 풍류를 즐기는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곳으로 퇴계선생, 이언적, 주세봉, 황준량 등 명현들이 이 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한다.
애일당, 강각 아래 분강(汾江)의 기슭에는 '귀먹바위(聾巖)라는 큰바위가 이름이 있었는데 훗날 이 것으로 호를 삼았다. 농암(聾巖)은 이 바위처럼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고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聾巖) 위에 애일당을 지었고, 75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농암(聾巖)이 있는 분찬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누리다 이 곳 분천에서 삶을 마쳤다.
농암각자, 농암선생 정대구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이현보 선생의 호 농암(聾巖)은 바위이름이다
江 건너 벽력암(霹靂巖)이 마주하고. 흐르는 강물에 달빛이 비출 때 하얀 안개가 끼면 그대로 神仙이 사는 곳이라 ~
老松亭 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60호)은 1454년(단종2년)에 퇴계 이황의 祖父인 이계양(李繼陽)이 지은 5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고택이다
종택 대문 위에 걸려 있는 성림문(聖臨門)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데 ~ 이황의 모친인 춘천 박씨가 공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 이황을 낳았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
노송정 (老松亭) 노송정 (老松亭)은퇴계의 祖父 이계양의 호이면서 이집의 당호다. 이계양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주변에 늙은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노송정(老松亭)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老松亭 편액 뒤 옥루무괴(屋漏無愧)는 [詩經]과[中庸]에 나오는 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에서 인용한 것 "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는 뜻이다. 海士 김성근 선생 글씨
사랑의 동편에 걸려있는 온천정사(溫泉精舍)
노송정(老松亭) 종택 내부
노송정 종택 종부가 차려준 점심 공양
종부의 맛깔스런 밥상
후식으로 나온 노송정 종택 전통 다과
노송정(老松亭) 종택 최정숙 종부님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 태실 남쪽 처마밑에 쓰여진 현판 정면 7칸, 측면 6칸 전형적인 사대부 형태인 ㅁ 자형 으로 중앙에 튀어나온 방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난 데서 비롯 되었지만 건물 전체의 이름은 조부 이계양의 호를 따라 노송정 종택이라 부른다
아름다운 장독대
노송정(老松亭)에서 忙中閑
퇴계선생의 18대 후손 진성 이씨 종손 이창건(李昌建) 선생의 조상(?) 이야기 ~ ^^
노송정 종택 최정숙 종부 당호 헌정식 素絢堂소현당 (흰 바탕을 갖추고 문채를 더하여 완성됨) 논어 팔일편 제 8장
당호 헌정식 후 기념 촬영 (종손과 종부)
뒷쪽 벽에산남낙민(山南洛閩)현판. 낙읍은 정호. 정이 형제가 살았던 곳이고, 민 땅은 주자의 삶터였다. 정씨 형제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의 조선시대를 사상적으로 재배한 주자학을 생산하여 낸 것이라는 점을 상기 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해동추로'가 뜻하였던 같과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맞은 편(동쪽) 벽에 해동추로(海東鄒魯)는 추땅은 맹자가 태어난 곳이고, 노나라는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학의 본향을 일컫는데, 해동추로는 노송정 이계양과 퇴계 이황의 안동 도산을 조선유학의 본향으로 인식하는 현판이다.
노송정(老松亭) 종가 성림문(聖臨門) 에서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약 200m 떨어진 삼백당(三栢堂, 퇴계 넷째 형 온계 이해의 종택) 앞에 수령 500년 된 높이 12m, 나무둘레 5.5m 밤나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 마을이 수몰되어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농암(聾巖)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 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온 집이다 최초 이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 입향 시조 이현(李軒)으로 선생의 고조부 이다
입구 사랑채
긍구당(肯構堂) "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 " 라는 뜻으로 농암(聾巖) 종택의 상징적인 유적으로 남아있다.
분강서원(汾江書院) 분강서원은 광해군 때(1613년) 농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뜻으로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숙종 때(1700년) 서원으로 개편이 된 곳이라고 한다.
명농당(明農堂) 농암이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곳으로 이곳에서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애일당 (愛日堂)과 강각 (江閣)
애일당 (愛日堂)
농암(壟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 건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부친과 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고 경노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당호(堂號)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 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 이라 하였다.
1533년 농암은 여기서 94세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 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 자신이 이미 이때 67세의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孝子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강각 (江閣)
강각(江閣)은 농암 선생의 풍류를 즐기는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곳으로 퇴계선생, 이언적, 주세봉, 황준량 등 명현들이 이 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한다.
애일당, 강각 아래 분강(汾江)의 기슭에는 '귀먹바위(聾巖)라는 큰바위가 이름이 있었는데 훗날 이 것으로 호를 삼았다. 농암(聾巖)은 이 바위처럼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고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聾巖) 위에 애일당을 지었고, 75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농암(聾巖)이 있는 분찬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누리다 이 곳 분천에서 삶을 마쳤다.
농암각자, 농암선생 정대구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이현보 선생의 호 농암(聾巖)은 바위이름이다
江 건너 벽력암(霹靂巖)이 마주하고. 흐르는 강물에 달빛이 비출 때 하얀 안개가 끼면 그대로 神仙이 사는 곳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