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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1 9 9 2 학 년 도
석 사 학 위 논 문
창세기 6장 1-4 절의 주석적 연구
- 네 피 림 의 기 원 을 중 심 으 로 -
성서신학 전공 전 계 상 1 9 9 3 년
목 차
Ⅰ. 서론 ........................................................ 1
A. 문제 제기 .................................................. 1
B. 연구 방법 및 범위 .......................................... 8
Ⅱ. 문학적 분석 .................................................11
A. 사역 .......................................................11
B. 번역상의 문제점들 .......................................... 8
C. 삶의 자리................................................... 9
D. 문학적 콘텍스트 .......................................... 18
Ⅲ. 주석 ....................................................... 24
A. 사람의 딸들 ............................................... 24
1. 불경건한 자들의 딸들 ..................................... 26
2. 하층민의 딸들 ............................................ 31
3. 평범한 인간의 딸들 ....................................... 32
B. 엘로힘의 아들들 ........................................... 33
1. 신명칭-엘로힘 ............................................ 35
2. 영웅들 ................................................... 35
3. 왕의 아들들 .............................................. 36
4. 하나님을 따르는 경건한 자들 .............................. 36
5. 천사들 ................................................... 37
6. 신적인 존재 .............................................. 40
7. 결혼 ..................................................... 43
8. 토브( ).............................................. 46
C. 야웨의 심판 ............................................... 47
D. 네피림( ) ........................................ 59
Ⅳ. 신학적 의의 ................................................ 66
A. 인간의 반역과 하나님의 심판 ............................... 66
B. 거인의 기원과 거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70
Ⅴ. 요약 및 결론................................................ 78
* 참 고 문 헌
Ⅰ. 서론
A. 문제 제기
창세기 6:1-4은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난점을 갖고 있다. 이 단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에 대한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각 귀절마다 쉽사리 풀리지 않는 용어들 자체와 귀절들 사이의 맥락이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연구사를 보면 학자들은 주로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을 둘러 싸고 “천사의 결혼”이라든지 “거인의 기원”을 핵심으로 다뤄졌는데, 이와 함께 이 단락의 주제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것으로 취급되어 졌다. 이 단락의 문제성 많은 이야기 자체에 비하여 주제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거의 일치를 보고 있으나 특이하게 여겨지는 ‘결혼’이나 ‘거인’에 관한 대목과 관련된 해석상의 문제들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아담)의 딸들에 대한 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①. 신, 혹은 천사적 존재와 사람의 딸들
②. 왕의 아들들과 하층민의 딸들
③. 경건한 자들의 아들들과 불경건한 자들의 딸들
우선, ②, ③항의 입장은 우선 기록 자체가 문자적으로 보여 주는 언어상의 관련성이 희박하다. ②항의 경우 고대 근동의 왕을 신, 혹은 신의 형상으로 보는 기록들이 있으며 이에 대하여 사람의 딸들을 하층민으로 볼 수 있으나, 거인의 기원이라는 내용을 감안하여 볼 때 그의후손이 평범한 자들이 아니라 반드시 키가 큰 거인이거, 유명한 자(포악한 용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한편, ③ 항의 경우 엘로힘의 아들들을 성서의 다른 본문들 과 비교해 봄으로써 경건한 자녀들이라 볼 수는 있으나, “사람의 딸들”을 반드시 셋의 후예가 아닌 카인의 후예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우선 ‘사람’이라고 번역된 원문이 ‘아담’이며 ‘아담’이 그의 아들 ‘셋’으로 이어지는 경건한 족속의 조상으로서 카인의 계보와 달리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여기 기록된 “아담의 딸들”이라는 낱말은 오히려 불경건한 자들의 후손이라는 해석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 사이의 결합에서 2항의 문제점에서 처럼 평범한 인종으로 보기 어려운 존재들이 태어나기는 힘들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①항의 입장은 신적인 존재가 어떻게 사람들과 결혼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해서 범죄의 주체가 되는 듯 보이는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심판에 해당되는 언급이 없고 인간들에 대해서만 여호와의 심판이 주어지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천사와 같은 신적 존재와 사람들과의 결혼과 같은 예는 우선 성서에 달리 나오지 않으며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신화적인 요소가 유입된 것으로 보는가 하면, 일부 학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신화의 차원으로 낮추게 될 위험성 때문에 이런 해석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과연 신화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신적 존재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쉽게 단정짓기 어려우며 한편, 이들을 단지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가정할 때 인간과의 결혼 가능성의 여부를 전혀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우기 고대근동의 신화에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은 이에 대한 조명을 해줄 수 있는 가능성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권위가 하락된다고만 여길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신화적인 결혼 이외의 난 문제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여러가지 의견들을 주장하고 있으나 적어도 이 단락의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공통적인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인간의 질서파괴와 타락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중심되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일부 독일계 학자들을 제외하면 영미계의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이 단락의 난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고 있으며, 이 단락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설명에 그치고 있다. 그 원인을 들자면 우선 단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가 성서 내부에나 외부에 충분치 못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우기 문제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이 단락을 소홀하게 혹은 난해하여 귀찮은 것으로 여겨 실상 더 자세히 연구할 수도 있으며 좀 더 심도 있는 신학적의미를 발굴해 낼 수 있음에도 충분한 논의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와같은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현재 존재하는 자료에 대한 일차적 접근이라 할 수 있는 객관적접근 즉, 문학적 접근이 소홀히 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학적 접근이 순수하게 이뤄지기도 전에 기존의 학설에 영향을 받아 현재의 단락이 우선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쉽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문헌이든지 그 자체를 현재 나타나 있는 대로 이해하는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기본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본인은 이 논문에서 이미 논의된 사실들을 정리하면서 학자들의 논의에서 아직 일관성이 부족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에 대하여 좀 더 일관성 있는 해석을 위해 문학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며 증명할 수 없는 신화적 결혼의 문제 자체보다는 이 단락의 내용이 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의 촛점을 맞출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이 단락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성서에 들어 왔든지에 관계 없이, 성서가 보여주는 현재의 최종판(final form)을 중시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설혹 이 단락 내에 서로 다른 기자들의 기록이 있다거나 혹은 이 단락과 관련된 앞 뒤 문맥에 서로 다른 자료층들의 여부와 관계 없이 현재의 신구약 성서를 하나의 최종 형태의 정경으로서 단락과 단락 혹은 책과 책 사이에 서로의 관련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최종 기록자의 의도를 논의하되, 성서의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를 살펴 좀 더 그 관련성을 찾아내고 그 기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킬 것이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먼저 이 단락의 문학적 맥락에 있어서는 본인의 입장을 1항으로 세우고 1항의 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신적 존재와 인간의 결혼문제와, 이에 따른 하나님의 편파적인 심판에 대한 일관성 없는 해석의 문제를 성서 내외의 예들을 통하여 해결을 시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 다다르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과 비교함으로써 이 단락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다각적인 조명을 시도 할 것이며,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단락의 신학적 의미를 좀 더 타당한 위치에 두고자 한다.
이 논고를 진행함에 있어 저자가 가지는 해석상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가지는 입장보다 자료면에서 우월함을 인정하고, 이 단락을 포함하고 있는 창세기 본문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기록으로 본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입장이 주어진 이 단락을 가능한 지나친 선입견 없이,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을 이 논고의 우선적 목적으로 하고 논문을 진행할 것이다.
최근의 구약신학이 신약과의 관련성보다는 오히려 그 독립성을 인정하고 구약 자체내에서의 신학을 추구 하고 있으나 신학을 포함한 성서 전체가 기독교에 주어진 하나의 정경임을 들어 양자가 서로 무관한 자료가 아니라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본단락을 논의함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언어상 관련이 있다 여겨질 때는 신약을 언급할 것이다. 주석 방법은 취급하는 단락이 짧고, 자료비평 대상으로서 역사적 정황이나 그 형성 과정상에서 볼 수 있는 신학적 특징들을 언급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통시적인 접근보다는, 공시적으로 현재 형태의 완전성을 인정하고 그의안에서와 다른 단락과의 관계성에서 주로 문학적 비평방법을 통하여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Ⅱ. 문학적 분석
A. 사역
1절.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났을 때에
2절.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았고 그들이 그들을 위해 택한 자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
3절. 그러자 야웨께서 말씀하시되 나의 영이 영원토록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니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셨다.
4절. 그 때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으며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 갈 때에 그 딸들이 거인들을 낳았으니 고대의 용사들이었다.
B. 번역상의 문제점들
1절. 개역판은 ‘그들에게서’라 되어있으며 RSV는 ‘born to them’으로 되어 있는데 BHS 본문은 으로 되어있으며 LXX에도 복수 3인칭 여격인 ‘αυτοισ’로 되어 있어 ‘그들에게’라 번역함이 타당하다.
2절. 엘로힘은 개역성서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엘로힘이 본래 ‘엘’이라는 가나안 신명칭이 이스라엘 종교에 도입되어 주로고유명사로 사용된 점이 한국어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로 변경된 경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엘로힘이라는 낱말은 단지 야웨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이방의‘신들’, 혹은 천사들로 번역 되기도 하기 때문에 때로 ‘신’으로도 번역된다. 여기서 이 단어를 엘로힘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 단어가 ‘아들들’이라는 낱말과 함께 하나의 어구로서 어떤 의미를 형성하는가가 불분명하며, 이 단어처럼 자주 사용되는 주요 명사인 경우에는 이 어구의 본래의 의미를 선입견을 가지고 한정하지 않도록 원어를 살려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기때문이다.
이 을 꾸미는 형용사 절을 형성한다. 비록 개역성서의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번역도 ‘의’를 주격으로 보면 맞는 번역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번역했다. LXX도 οτι가 이끄는 절 οτι καλαι εισιν이 τασ θυγατερασ των ανθροπων을 꾸미는 형용사절로 되어있다. RSV역시 ‘사람의 딸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았다.(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fair)’로 번역하고 있다.
C. 문학적 장르
일반적으로 성서비평학자들은 6:1-4은 J자료로 평가한다. 즉, 3절에 나타나는 “여호와”는 이 글이 J기자의 글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1절에 엘로힘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J기자가 P문서로 보이는 전승을 재생산해 낸 것으로 본다. 즉, 하나의 전승에 J기자가 가필했다는 것이다. 한편,“ B. S. Childs는 J기자가 이 단락 이후에 나오는 홍수기사의 서두로서 이것을 삽입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이와같은 기존의 입장에 변경을 가하고 있다. 본 단락은 사람의 딸들을 불경건한 가인의 후예로 해석하지 않는 학자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락으로 간주되고 있다. 렇게 해석되는 이유를 살펴보면,다음과 같다.
1. 우선 여러가지 신화들이 신들과 인간의 육체적인 결합을 신화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Westermann은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① 신과 여왕 사이에서 에집트 파라오 출생(H. Brunner, Die
Geburt des Gottkonnigs, 1964, W. H. Schmidt에 의해 언
급됨).
② Ugarit 시편에서 언급된 El 신과 인간의 두 딸들의 결합합
으로 출생한 Shr와 Slm(U. Cassuto)
③ Phoenician Mythology(Philo of Babylos)
④ Hesiod의 theogony(신통 계보학): 티탄과 거인들이
Ouranos(신)와 Gaia(인간)의 후손으로 묘사됨.
⑤ 힛타이트 본문의 Hurrian myths에는 Hesiod의 Ouranos 이
야기와 유사한 내용이 있음(H. G. Gütterbeck).
2. 이 외에도 신화에는 창세기의 본단락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거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① 아랍, 페니키아, 희랍, 게르만의 거인들에 관한 이야기
들.
② Koran: 자주 Ad Thamad라는 고대의 거대하고 감히 신을
모독하는 거인을 언급함.
③ Atrahasis Epic: 인구의 증가와 지배신들에 대항하였던
하류계층의 신들이 반신이자 거인으로 묘사됨.
3. 또한, 본 단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창 6:3)이 여타의 신화에 나타나는 거인족속들에 대한 심판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들어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티탄들의 전쟁, 이와 유사한 페니키아의 신화, 코란의 전승,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공히 거인들이 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들은 이에 대하여 심판을 내렸는데 특히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서는 성서의 홍수기사와 유사한 내용으로 그 심판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서와 신화내용 사이의 유사성은 신화내용과 성서사이의 어떤 관련성을 상정케한다. 이러한 관련성은 정경으로 선택되지못한 외경과 위경에서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바룩 3장 26절, 지혜서 14장 6절, 그리고 에녹서와 Jubilees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 외에서 창세기의 본문(6:1-4)과 비교할 만한 내용들이 있다 하여도 본 단락과 동일하게 합치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근동지역 자료와의 유사성을 감안 하여 창세기의 위 본문이 형성된 삶의 정황을 살펴 보면, 오경의 형성시기를 솔로몬 시대로 볼 때 자들은 일반적으로 본문의 기록자로 알려져있는 J기자가 주변에 있는 이방세계의 신화자료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서 재서술하던 시점에서 이 내용의 삶의 자리를 찾는다. , 고대의 이스라엘은 주변의 고대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 신화의 내용이 먼저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 전해지다가 성서기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 입각하여 재 서술,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스터만은 가나안 신화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보는 한편, 까젤은 아나스타시 1 파피루스라는 이집트 텍스트를 야휘스트가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신화가 이스라엘 안으로 유입되어 하나의 기록으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구분을 하면, 먼저 이방의 신화를 기자들이 처음부터 비신화화 하였다는 입장이 있고, 이방의 신화가 유입되어 상당 기간 구전되어 오다가 기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입장에 따라서 재서술 되었다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Westermann의 말대로 현재의 본문과 합치하는 자료가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위와 같은 식의 자료 형성과정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신화적으로 보이는 이 본문의 내용이 이미 또 다른 하나의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 오다가 기자들에 의하여 기록, 정착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본문을 하나의 신화로서 취급하려하는 것은 이 내용 속에 비합리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신적 존재와 인간의 육체적 결합이 나타나고 더우기 근동지역에 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신과 인간의 결합을 묘사한 유사한 신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문을 창조기사나 홍수기사와 비교해 볼 때도 좀 달리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창조기사나 홍수기사에 비하여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용이하지 않으며, 더우기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문학적 맥락에서의 위치도 그만큼 긴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주석가들은 본 단락의 소 제목으로 “천사의 결혼”이나 “거인의 기원” 등으로 잡아 앞 장(5장)과의 관련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본문 뒤에 연이어 나타나는 홍수기사와의 관련성도 희박한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궁켈이나 폰 라드같은 학자들은 이 본문을 어색하게 끼워진 돌출부로 본다.
이와 같은 경향은 모두 “신화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신화에 대한 기본적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과 학자들의 경향은 신화를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사실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려한다. 이 점에 있어서, 고고학적 발굴이나 계속적인 최근의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위에서 제시한 기사들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이 빈약하거나 거의 없다시피 하므로 이 논문에서는 최근의 경향에 따라 신화에 대한 기존의 기본적 개념을 약간 수정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즉 신화는 사실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우나 사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실이라 함은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과 함께 사람들에 의하여 사실로 믿어지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복음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신자들에 의하여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발생한 가시적 사실로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비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하여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으며 단지 신앙의 증거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성서와 신화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화 역시 당시대인들에 의하여 어떤 사실로 믿어진 것으로 학자들에 의해 진술 되고 있다. 물론 그들에 의하여 사실로 믿어진다 하여 그 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라 여겨진다. 오히려 신화가 발생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믿어지는 것들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이 논문에서는 여기서 취급하는 단락을 ‘증명할 수 없으나 실제 있을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로 보고 이를 뒷 받침하는 자료를 일차적으로 오경을 비롯한 관련 성서 자료에서 찾는 한편 성서외의 위경 그리고 고대 근동의 신화를 비롯한 기타 자료들도 이 단락의 사실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 내용이 고대 근동의 신화와 일치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반드시 고대근동의 신화로부터 유입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단지 근동의 유사한 신화의 존재는 이 본문의 사실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기자들이 이 내용을 성서에 기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입장, 달리 말해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문학적 맥락과 관계된 문제이다. B. S. Childs는 이 내용이 죄의 증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홍수사건의 원인으로 제시되었다고 한다. 한편, Westermann 은 이 내용을 죄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내용만으로는 홍수 심판을 받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 4장 2절에서 16절까지 기록되고 있는 카인의 범죄, 그리고 11장 1 절부터 9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바벨에서의 반역 사건들과 함께 본 내용이 죄의 다양성을 보여 줌으로써 3장부터 11장까지의 하나의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한계에 대하여 3장과 4장은 개인적인 반역과 타락을, 6장은 성적 관계를 통하여, 11장은 기술 문명을 통한 반역과 타락을 제시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창6:1-2이 창 12:10-20(아브람이 사래를 빼앗기는 이야기), 삼하 11-12장(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이야기와 평형을 이룬다고 본다. 그러나 창12과 삼하 12장은 모두 “범죄에 개입하시어” 막으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언급되어있는 한편 6:1-4은 그렇지 못하다. 베스터만도 그 점을 인정하여 창세기 12장을 “가정문제”로, 삼하 11-12장의 이야기를 “정치적인 문제”로서, “원인론(etiology)”적인 이 단락(6: 1-4)과의 차이점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Westermann의 견해는 본 단락의 전후의 문학적 맥락이 구체적인 사실성을 가진다거나 혹은 그 맥락이 신학적 중요성을 가질만큼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이 단락과 함께 여러 가지 인간의 범죄행위들의 순서에 별 중요성을 두지 않고 단지 죄의 다양성을 가리키는 예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비록 이 단락을 포함하여 창세기의 기록에 대한 시간적인 배열과의 관련성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하여도 성서의 마지막 형태(final form)가 현재의 모습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문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단락의 기자의 의도를 설명함에 있어서 우선 이 단락 자체의 내용과 함께 전후의 문학적 맥락을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 자세한 내용은 문학적 콘텍스트와 주석 그리고 신학적 의의를 다루는 장에서 설명할 것이지만 여기서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즉,이 단락은 자체의 내용상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신적 존재들과 인간의 반역적 행위를 다루고 있는 한편 이와 함께 거인의 출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전자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홍수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어 이 단락은 홍수사건의 서론으로서, 후자는 민수기와 여호수아를 비롯한 구약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출현에 대한 설명으로서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D. 문학적 콘텍스트
창6:1-4은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창1:28; 4:1; 5:1-32을 반향하며 아담 이후 카인과 셋의 계보의 결과를 한 귀절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2, 3, 4 절은 새로운 존재 즉, ‘네피림’과 ‘깁보림’(거인, 용사, 고대에 유명한 사람)의 출현을 제시하면서 이것의 기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적 결심을 표현하고 있다.
학자들의 입장은 이 단락이 아담의 계보의 결말이며 한편 홍수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6:1-8의 전반부로 보는 견해와 앞뒤 문맥과는 색다른 “독립적”단편으로 보는 견해, 각장과의 연관성은 인정하되 창 6:5-8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부인하는 견해 등으로 나누어진다.
Wenham은 6장 1절을 5장의 묘사로 보고 6장 8절에서 5장 32절의 ‘노아’가 다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5장과 6:9의 사이에 긴밀하게 놓여있는 단락으로 보았는데 언어상의 관련성이 있으나, 그 내용상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Von Rad는 단지 “사람이 번성했을때 일어난 일”로서만 이 이야기를 수용하는 한편 다른 것으로서는 앞뒤의 연관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이 단락이 야휘스트의 “고대 역사가 시작되는”것이며 그 시작의 “완전히 새로운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수기 13장 33절에 ‘네피림’이 언급되고 거인, 용사와 관련된 의미로서 아낙, 르바임족속에 대한 언급이 신명기 1장 26절; 2장 10, 11, 21절; 9장 2절, 여호수아 15장 14절, 아모스 2장 9절에 나타나 있다. 또한 ‘엘로힘의 아들들’과 동일한 언급이 욥기 1장 6절; 2장 1절에 나오며 ‘하나님의 영’,‘여호와’ 등의 언급은 이 단락을 파격적이고 별로 관련성 없는 어떤 것으로 볼 수 없게 한다. 오히려 이 단락은 최소한 가나안 정복 당시 갑작스레 등장하는 ‘거인 족속’의 출현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자료로서, 성서 내용 사이에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장과의 관련성은 인정하면서도 홍수사건과의 직접적 관련성은 부인하는 입장은 그 이유를 6장 5절이 6장 4절과의 관련성이 없다는 데에 근거한다. 3절의 120년이라는 기한은 홍수가 일어날 때까지의 남은 기간이라는 언급이 4절이나 5절에 전혀 없다는 것이다. 홍수사건의 기록을 함에 있어서는 “그 할당된 기간이 완료되었다는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Skinner는 그 관련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홍수설화가 본 단락과 유사하다는 Gruppe의 주장은 그의설화의 작성시기와 성서 기록시기상의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해도 양자 사이의 내용상의 연관성을 간단히 무시하기 어렵다. 또한, 5절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면 6:1-4의 내용이 그와 같은 인간 타락상의 한 면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3절)임을 감안할 때 5절부터 시작되는 홍수기사와의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고 오히려 본 단락과 이후의 단락은 자연스런 연결로 볼 수 있다.
한편, 본 단락은 앞뒤의 관련성을 맺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완전한 의미 단락을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결심, 그리고 결혼의 결과로 되어 있으며 하나의 사건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하나의 완전한 의미단락을 형성한다. 물론 이 단락은 5장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즉 5장의 연속이면서도 이와 함께 새로운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단락자체의 독립성을 보여준다. 또한 6장 5절에 나타나는 홍수기사와도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5-8절은 5:1-6:4까지를 총망라하는 의미단락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전후 단락과 문학적 맥락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적인 의미단락으로서 별개의 장으로 취급함에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인류의 계보와 홍수 심판으로 이어지는 문맥사이에서 인류 타락의 양상으로서의 연속성과 아울러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 및 네피림, 깁보림의 출현이라는 내용으로 그 독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단락은 하나의 의미단락으로서 5장 및 6장 5-8절과 구분하여 취급할 수 있으며 전후문맥의 관련성 속에서 이 단락만의 고유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단락은 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1절과 2절은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3절은 이에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행위이며 4절은 당시의 현상 즉 ‘네피림’과 그 후손 ‘깁보림’의 등장에 대한 서술적 묘사이다.그러나 von Rad는 3절이 오히려 4절과 뒤바뀌는 것이 낫다고 한다. 실제로 3절이 말하고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연결에 무리가 있게 보인다. 왜냐하면, 우선 사람의 딸들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심판행위가 빠져 있는듯 하기 때문이다. 또한 4절의 내용은 다시금 엘로힘의 아들들을 언급하고 있어서 2절과 같은 맥락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4절의 처음에 나오는 “네피림”의 언급은 2절과 4절에 공히 등장하는 엘로힘의 아들들의 관련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Westermann은 4절을 2절과 관련시키는 데에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 거인의 기원을 함축하는 서로 다른 두개의 자료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편 성서의 전체적인 문학적 맥락에 대한부정적인 선입견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일단 성서는 현재의 모습으로서 그 마지막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기 전에 주어진 자료에 대한 현상태로서의 형태를 우선 인정하고 일차적으로는 객관적인 문학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여호와의 심판의 불공정성 내지는 어색함에 대해서는 이 단락이 여러 자료층들이 짜맞추어져서 그렇다고 보기 전에 이 단락이 보여주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 이해 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선행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각 절의 주석에서 자세히 논의 할 것이지만 이 논문에서는 여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즉, 그것은 엘로힘의 심판에 불공정성이 있다거나 혹은 자료의 서투른 편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성서가 보여주는 문학적 맥락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성서는 일관성 있게 여호와의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호와의 심판은 구약에 있어서 사람들에 대하여는 가시적으로 묘사되지만 신적 존재에 대하여는 구체적 묘사를 피하고 있다.
또한 Westermann의 견해처럼 어색하게 보이는 3, 4절의 위치는 서로 다른 자료를 서투르게 편집한 것으로 보기 전에 주어진 맥락의 타당성을 우선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즉 “네피림”은 “깁보림”과 동일한 종류의 거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엘로힘의 아들들이 지상에서 드러낸 가시적 모습으로 깁보림의 출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von Rad와 Westermann과 같은 학자들이 지적한 이 문맥의 어색함에 대한 문학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자체만 가지고는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모세 오경 전체를 하나의 문학적 맥락을 이루고 있는 전체로 볼 경우에는 그 타당성이 더욱 드러난다. 성서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 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기록 자체가 갖고 있는 문학적 맥락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해석은 홍수 사건 이후에 오경에 나타나는 거인들의 등장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고에서는 이 단락이 전후 단락과의 관련 속에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한편 하나의 독특한 의미단락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단락을 따로 떼어 주석함에 정당성이 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 자체 내의 문맥도 오경 전체의 해석에 일관성을 줄 수 있는 완벽한 문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서 여러 자료층들의 편집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기자의 기록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Ⅲ. 주석
A. 사람의 딸들
: 1
1절: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 났을 때에 ;
이 절은 창세기 1장 28절 상반부에 기록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이 절에 사용된 (번성하다)라는 낱말이 본 단락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도 입증된다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카인과 셋의 후예들의 족보(창 4:16- 5:32)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과 같다. 사람들이 번성할 때에 ‘아들들’이 태어남을 언급하지 않고 ‘딸들’만을 언급한 것은 이 문장의 주절인 2절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의 결합한 일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일부러 아들들을 제외시킨 채로 언급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이라는 낱말이 등장한 데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특별한 이유 즉,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를 벗어나는 특이한 결혼에 대한 묘사를 하기 위하여 엘로힘의 아들들과의 결혼 상대로서 미리 언급해 놓으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기서 사람들에게 태어난 딸들은 2절에서 “사람의 딸들”이라는 하나의 어구로 다시 언급되는데, ‘사람의 딸들’은 대개 학자들 사이에서 세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1. 불경건한 자들의 딸들
사람의 딸들을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비하여 불경건한 부류의 딸들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본 단락을 창세기 4장 16절부터 5장 32절까지 계속되는 가인의 후손들과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를 요약하여 결론짓는 것으로 보고 ‘사람의 딸들’과 2절에 나오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앞 단락의 ‘가인의 후손’ 및 ‘아담의 후손’과 평행시켜 보는 것이다. 즉,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과, 엘로힘은 아들들은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후손과 연결시켜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해석은 이와 같이 문학적 맥락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그 다음 구절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취해진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이러한 해석의 배후에는 어떤 신학적 선입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들면 2절에 나오는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엘로힘의 아들들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볼 경우 그와 같은 존재들과 사람과의 결혼 가능성에 대한 해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을 천사로 볼 경우 ‘천국에서는 천사들처럼 결혼하지 않는다’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엘로힘의 아들들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본다 하더라도 양 부류들 사이의 결혼에 대한 야웨의 심판적 선언이 단지 사람에게만 주어진 데 대한 해명이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된 듯 보인다.
구체적으로 1, 2절을 살펴 보면 위의 해석에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볼 때 본 단락의 서두인 “사람들이 땅에 번성할 때에”라는 말은 앞장과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아들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딸들이 태어났다는 것만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사람에게 딸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 경견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과의 결혼이 이 단락의 주제라면 “사람들이 땅에 번성할 때에”라는 어구 다음에 “사람들에게 딸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불필요하게 보인다. 이러한 점은 이어지는 2절에 “사람의 딸들”이 등장함으로써 좀더 분명해진다.
2절의 “사람의 딸”들은 1절의 사람들에게 태어난 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서로 관련시켜 동일시하여야 한다. 만약 서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서, 1절의 딸들과 2절의 딸들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이 단락은 하나의 단락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1절과 2절이 주종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으며 딸들의 출처인 ‘사람’이라는 말이 동일한 히브리어 ‘아담’의 활용형인 점을 전혀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자를 동일시 하여 해석한다면 결국 1절의 “사람들”은 ‘불경건한 자들’이라는 말이 되며 ‘불경건한 자들에게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내용을 암시하게 된다. 즉, 이런 해석은 본래 일반명사인 ‘사람’, 바꾸어 말하면 ‘인류’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부과시키는 것이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난다.
여호와의 심판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해석은 문제점을 드러낸다.비록 여호와의 심판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이 해석에 따라 경건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전체에 대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지만실상 심판은 “사람들”, 즉 이러한 해석을 따르는 자들이 말하는 ‘불경건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심판 역시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며 아담이라는 말이 “아담의 딸들”에 사용된 낱말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딸들”에 대해서는 ‘불경건한 자들의 딸들’이라는 의미를 부과하고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는 ‘인류’라는 식으로 동일한 단어를 상이하게 해석한다면 일관성 없는 해석이 된다.
또한, 이처럼 본 단락의 표현인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하여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창세기 전체의 묘사를 살펴 볼 때에 매우 파격적으로 의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기껏해야 부분적인 듯하게 보이는 가인의 계보와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계보의 나열만을 통해서 이러한 구분을 시사 받을 뿐이다. 문학적 맥락으로 볼 때 본 단락의 위치는 아직 아브라함과 같은 야웨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언급되기 이전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런 해석을 옹호하는 자들의 추론대로 야웨를 따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본 단락의 어구처럼 노골적으로 한 문장 안에서 구분해 내는 신앙적 묘사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한 “엘로힘의 아들들”이라는 낱말은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예보다는 천사를 가리키는 예가 두드러진다. 물론, 야웨의 백성과 이방인들의 구별은 성서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본 단락의 ‘사람의 딸들’처럼 평범한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를 가지고 그와 같이 의미화된 어구로 표현되는 식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아담’이라는 어구를 사용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어구는 일반적으로 인간 혹은 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에스겔서(2:1)와 다니엘서(8:17)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표현된 어구 즉, ben 'adham이 불경건한 자의 아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 에스겔을 지칭하거나 신약과의 관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이른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고 추측되는 본 단락의 3절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심판과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결혼관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이 단락의 의미가 오경의 문학적 맥락과 함께 그 내용의 진행상 어울리지 않게 일찍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표현 기술상으로도 지나치게 의미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해석은 4절에 등장하는 네피림과 깁보림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할 수없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으로 부터 거인을 기대하는 것은 돌연 변이의 경우에나 해당할 것이며 그러한 예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본단락이 묘사하고 있는 거인은 복수명사로 쓰여 있어 하나의 부류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로서 드물게 보이는 예가 아님을 시사하며 이러한 점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민족의 정탐꾼들의 보고에 의해서 더욱 뒷받침 된다. 또한, 이들의 출생은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의 자연스런 결과로 태어난 자들로 묘사 되어 있으며, 우연이나 돌연변이의 예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더우기 이들은 당대의 이름난 자들이었다. 이문제의 자세한 논의와 함께 야웨 심판의 편파성의 문제에 관련된 타당한 질문에 대해서는 해당 절의 주석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2. 하층민의 딸들
고대의 왕의 아들들에 대하여 비천한 하층민 계급의 딸들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고대의 왕을 ‘신의 형상’, 혹은 ‘신의 아들’로 기록한 자료들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런해석은 위와 같이 고대 근동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으며 구약성서 내에서도 고대 이집트나 가나안 지역의 왕에 해당되는 자들의 결혼과 관련된 실례들을 찾을 수 있는 점에서 왕의 아들들이 그들의 권력으로 하층민의 딸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내로 삼았다는 데에 착안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해석 역시 엘로힘의 아들들과 이들의 결혼에 대한 야웨의 심판에 대한 해명에 대한 이유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이 단락 전체의 문맥 속에서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문제점은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한 타당성 있는 해석에 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다는 데에 있다. 왕들의 아들들이 하층민을 다수 자기의 처첩으로 삼는 예는 구약에서 얼마든지 용인되는 행위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예가 당시의 사회에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였을 것인가를 상정해 본다면 홍수심판으로 이어지는 야웨의 심판은 윤리적 타당성이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항의 경우와 같이 이 해석도 거인의 출처에 대한 적절한 해명을 하기 어렵다.
3. 평범한 인간의 딸들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지 않고 주어진 그대로 사람의 딸들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결국 엘로힘의 아들들을 평범한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짓게 되는데, 위의 두 해석에 비하여 문학적인 맥락에 있어서 타당성이 많다. 1절에 사람들에게 ‘딸들’이태어 났다는 것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주절에 나오는 엘로힘의 아들들과의 결혼을 묘사하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등장한 것이다. 종속절(1절)에 나타나는 딸들은 주절(2절)에 다시 “사람의 딸들”이라는 하나의 어구로 표현되는데 이 말은 종절의 딸들을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종절에 나타난 딸들에 대하여 아무런 수식어가 없으므로 불경건한 자녀라든지, 하층민이라는 등의 어떤 의미를 부과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또한, 하나의 문장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낱말(딸들)을 서로 관계가 없는 동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절에 나타나는 딸들도 역시 평범한 사람의 딸들로서 보아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3절에 나타나는 야웨의 심판의 불공정성에 대한 의문과 이 해석의 결과로 규정되는 천상적 존재인 엘로힘의 아들들과의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대한 해명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 역시 해당 귀절에서 논의 하기로 한다.
B. 엘로힘의 아들들
2절: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들이 그들을 위해 택한 자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
‘엘로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의미상 우선 갑작스런 느낌을 준다. 이 낱말은 창세기 본문에서 처음 나타나는 용어이며 구약 전체를 통틀어 4회(창 6:2,4; 욥1:6; 2:1; 38:7) 등한다. 더우기 이것은 이 문장(1,2절)의 주어이며 이 문장 전체의 중간 위치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 위치상으로도 불쑥 튀어 나온 느낌을 준다. ‘엘로힘의 아들들’은 앞의 ‘사람의 딸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한 해석 여하에 따라 그 대비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원문에 나와 있는대로 는 ‘엘로힘의 아들들’ 혹은, ‘신들의 아들들(the sons of gods)’로 번역이 가능하다. 욥기 1:6; 2:1은 “bene(ha)'elohim”으로서 후자를, 시편29:1;89:7은 “bene 'elim”으로 전자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bene elyon(sons of Most high:시82:6)”과 “bar 'elohim(a son of the gods:단 3:25)”의 예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들의 아들들이 과연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다. 본 단락의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사람으로 보는 것과 사람이 아닌 천사나 혹은 규정하기 어려운 신적 존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한 몇가지 견해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엘로힘의 명칭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신명칭-엘로힘
개역성서에 번역된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원문은 ‘엘로힘’( )으로서 이 낱말은 본래 우가릿 문서에 나타나는 가나안 신명칭인 El( )의 복수형으로 여겨진다. 이 어휘는 이스라엘에 수용되어 성서에서는 대개의 경우 야웨를 지칭하며, 때로는 이방의 신들이나 인간이 아닌 신적 초자연적 존재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이고 있다.
그 외에도 예외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사무엘 상 28장 13절에서는 엔돌의 영매자인 여인이 신을 부를 때에 그 응답으로 사무엘로 나타나는 것이 ‘엘로힘’이다. 이와 동일한 개념이 이사야 8장 19절에 나타난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라는 귀절에서 하나님에 해당되는 낱말이 엘로힘이며 이때의 뜻은 야웨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찾을 수 있는 신을 지칭한다. 시편 8장 5절에서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귀절이 있으며 여기서 천사에 해당되는 낱말이 엘로힘이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도 번역된다.
2. 영웅들
드문 해석으로서 “Dexinger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로 보고 이들을 영웅들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가 증거로 제시하는 우가릿 문서 “bn El(엘의 아들)”이라는 낱말의 bn이 단수로만 되어 있으며 창세기의 본문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복수형태의 우가릿 어구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달라져 신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약하다. 그러므로 본문의 엘로힘의 아들들을 영웅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3. 왕의 아들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기록들이 있다. 그리하여 엘로힘의 아들들을 왕의 아들들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특히 강제성을 띤 결혼 혹은 강제성을 띠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할 수 있는 주체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1,2절에 한하여는 타당성이 있으나 4절까지의 전체문맥을 통하여서는 그 타당성을 잃게 되므로 적절하지 못하다. 예를들어 거인의 출생을 설명하기 어렵고 야웨의 심판에 있어서도 충분한 해명이 어렵다.
4. 하나님을 따르는 경건한 자들
성서에는 ‘엘로힘의 아들들’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는데 이와같은 예들을 근거로 카일 델리취를 비롯한 일부학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시 73: 15(주의 아들들: 바네크); 신 32:5(당신의 종들: 바나이우); 호세아 1:10(이스라엘 자손: 브네이 이스라엘). 또한 시82:6에 나오는 엘로힘을 인간 통치자와 동일시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을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델리취가 언급한 것들은 창 6:2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문자적으로 같지 않다. 더우기 이것을 다음 귀절인 사람의 딸들과 대조하여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으로 보기가 더 어려워 진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혹자는 사람의 딸을 경건치 못한 자들의 딸이라 하지만 사람의 딸이 그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가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는 한편,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와의 결혼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다는 것으로부터 역으로 추측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5. 천사들
LXX는 이것을 “οι υιοι του θεου(하나님의 아들들)”로 번역하는 한편, 이와 비교되는 욥기 1장 6절; 2장 1절; 38장 7절은 “αγγελοι(천사들)”로 번역하고 있다. 더우기 히브리 전통에 의하면 천사들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상위의 천사들은 생식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신약의 유다서에는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
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
느니라. (유 1:6-7)
자기 처소를 떠났다는 말은 창세기의 네피림을 ‘떨어진 자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서로 어떤 관련성을 짐작케 한다. 주요 위경의 하나인 제 1 에녹서 6-36장과 쥬빌리 5장 1-10절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천사들이 사람과 결혼한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children of men had
multiplied that in those days were born unto them beautiful
and comely daughters.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heaven, saw and lusted after them and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wives from among the children of men
and beget uschildren.’. . . And they were in all two hundred
who descended in the days of Jared on the Mount Hermon
because they had sworn and bound themselves by mutual
imprecation upon it.” (Enoch 6.1ff)
And all the others together with them took unto
themselves wives and each chose for himself one and they
began to go in unto them and defile themselves with them and
they taught them charms and enchantments and the cutting of
roots and made them acquainted with plants. And they became
pregnant and they bare great giants whose height was 3,000
ells, who consumed all the acquisitions of men.”(Enoch 7)
And the lord again said to Raphael: ‘Bind Azazel hand and
foot and cast him unto the darkness. . . And the whole earth
has been corrupted by the works that were taught Azazel. . .
(Enoch 10)
And it came to [ass when the children of men began to
multiply on the face of the earth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that the angel of God saw them on a certain year
of this jubilee that they were beautiful to look upon; and
they took themselves wives of all whom they chose, and they
bare unto them sons and they were giants. . . And against
the angels whome He had sent upon earth, He was exceedingly
wroth and Hegave commandmentto root them out of all their
dominion. . . (Jubilee 5)
그러나 엘로힘의 아들들을 반드시 천사라고 단정 짓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단 3: 25 예외). 욥기에 나타나 있는 엘로힘의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로서 거기에 사단이 함께 등장한다. 그리하여 사단과 엘로힘의 아들들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엘로힘의 아들들과 천사를 동일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섯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즉, 사단이 타락한 천사라고 하여 그곳에 참석한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단정하는 데에도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의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천사들은 “순수하고, 고양된” 존재로서 주(Lord)를 대신하여 그의 이름으로 그의 분부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천사라고 한다면 왜 이와 같은 경우에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mal’akhe 'Elohim”, 즉, “하나님의 메신져(전달자)”로 불리우지 않는가? 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로서 하나님께서 부리는 종들이지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논의할 대상이 아니라 보이기 때문이다.
6. 신적인 존재
궁켈은 최초로 이들이 천사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그 대신 히브리의 용법에 따라 이들이 “엘로힘의 범주에 속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처럼 ben이라는 말은 그것과 붙여서 쓰는 말과 관련성이 깊으며 그것의 속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서 “bene hannebhiim (sons of the prophets)”은 이 사람들이 예언자의 계층에 속함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비록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신적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이라 볼 수 있다. William Foxwell Albright 그의 주요 저서인,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에서 이것이 가나안인들에게는 신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한편, 이 어구는 고대 근동의 개념들과의 관련에서 볼 때 천상의 존재들의 회의와 관련이 있다(cf. 시 82:1; 89:6,8; 왕상 22: 13-28). 이런 관련 속에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우가릿 문서들과의 평행 어구에 비추어 “신들의 아들들”로 해석한다. 창 6:1-4과 비교되는 우가릿 본문은 아래와 같다.
the offering which we offer
the sacrifice which we sacrifice,
it ascends to the (father of the bn El),
it ascends to the dwelling of the bn El,
to the assenbly of the bn El.
페니키아 비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어구가 “신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또한 성서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욥기 1장 6절, 2장 1절, 15장 8절, 그리고 시 82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들이 모여 회의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들과와 유사한 회의를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서 12장 22-3절에는 장자들의 총회가 나타나는데 이 총회는 천사들과 구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2-23)
여기서 장자들이라 함은 분명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낱말이다. 출애급기 4장 22절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장자라 지칭한 예가 있으며 주석가들은 이것이 바로 앞에 나오는 천사들을 다시 언급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들의 정체가 확실히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장자들의 총회가 천사들의 모임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그것이 위의 기록처럼 천상에 속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한편, 시편에서는 야웨 신과 다른 엘로힘의 존재들을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너희 하나님의 아들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
지 어다. (시 29: 1)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하나님의 아
들들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
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
할 자시니이다. (시 89: 7-8)
29편의 ‘하나님의 아들들(개역성서에 “권능있는 자들”로 번역됨)’은 그 존재 확인이 어려운 낱말로서 ‘엘림의 아들들’로 되어 있으며, 89편의 ‘하나님의 아들들( 개역성서에 “신들”로 번역됨)’이라는 낱말 역시 ‘엘림의 아들들’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야웨신과 비교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욥기 38장 7절의 새벽별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동일한 문맥속에서 서로 동일한 존재를 반복하듯이 언급되어 있으며 여기서 별들이라는 것은 이교도들에게는 신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
( )이 다 기 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욥 38: 7)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영역에 하나님과 천사들 외에 다른 어떤 미확인의 존재들의 존재가능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전혀 없는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엘로힘의 아들들은 천사와 다른 신적인 존재들로서 해석 될 수 있는 것이다.
7. 결혼
엘로힘의 아들들은 이미 부사절에서 언급된 사람의 딸들을 원하는대로 선택하고 아내로 취한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는 데 먼저 이것은 일부다처를 의미할 수 있다. 신적인 존재였던 그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함에 있어서 합법적이라 보이는 식으로 결혼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보이는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타락한 만족을 채우는 식의 결혼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U. Cassuto는 이것이 강제적인 결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공식적인 결혼”에 대한 언급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illmann은 이것이 성서의 일반적인 결혼 묘사에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한다. 세기 19장 14절, 25장 1절 36장 2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사람의 딸들(복수)을 취한다는 것은 주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생겨난 수의 일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느냐는 것이다. 엘로힘의 아들들을 신적인 존재로 볼 경우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하여 후손을 낳는 다는 것은 오히려 성서의 기록에 배치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도 천상적인 몸으로 변화될 경우 천사들과 같이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
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저 세상과 및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 20: 35-36)
즉 사람이 변화 되면 비록 천사는 아니더라도 천사와 같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Cassuto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천사들의 종류를 둘로 나누고 타락한 천사들 중에는 육체를 가질 수 있는 천사의 부류에 속한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논지는 예수의 말씀이 천사에 대한 일반론이 될 수는 있으나 모든 경우를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들이거나 천사들이거나 간에 모두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의 영역내에서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본 단락에 등장하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경우에 있어서 이들은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존재이므로 천국의 천사들과 동일시 할 수 없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을 천사로 보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의 뜻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 단락의 문맥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과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6장 1절은 사람이 땅에 번성함을 서두로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사람들에게 태어난 딸들과 무리없이 연결된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바로 이전의 사람과 그들에게 태어난 딸들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이며 나타난다. 그리고 1절과 2절이 하나의 문장임을 생각한다면 2절은 따로 떼어서 볼 것이 아니라 1절과의 관련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상이성은 더욱 뚜렷해지며 사람의 딸들과 번성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평범함이 드러난다. 즉, 전자는 인간들 중 비천하고 혹은 불경건한 자가 아니라 윤리적인 의미나 사회적인 지위의 고하를 가리키는 의미가 없는 평범한 사람의 딸들인 것이다. 단지 여기서 사람의 아들들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이 딸들과 결혼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저자의 의도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이라 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언급함이 없이 사람들만을 심판하신다는 데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한편 Cassuto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 의해서 강제로 결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합의’하에 정당히 결혼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딸들에게도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Cassuto의 해설은 사람들의 심판에 대한 타당성만을 해명할 따름이지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의 행위가 정당화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3절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8.
여기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토브’( )로 되어있다. 본래 이 낱말은 외적인 미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선을 포함하여 즐거운, 보기에 좋은, 적절한, 좋은 것, 부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세와 압살롬의 외모에 대하여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볼 때 여기서는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신적 존재들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인간들과 결합하는 경우에 대하여 ‘토브’의 의미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C. 야웨의 심판
: 3
3절: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나의 영이 영원토
록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니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셨다.
1. 이 절에서는 ‘여호와’라는 신명칭이 등장하며 1절의 엘로힘과 대조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단락을 둘 이상의 자료들이 편집된 것으로 보는데 일반적으로는 J기자가 기록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 것이 아닌 신화적인 내용에다 신학적인 해석을 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론을 포함하여 어떤 경로를 통하여 구성되었든지간에 일단의 추론들이 과학적으로 완전한 입증을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추론들은 결국 이 단락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임을 인정한다면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 다음 단계로서 이 단락 전체가 주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절차이다. 그럴 경우, 우리의 우선적인 자세는 형성된 단락에 대한 최종 기자의 입장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서 이 단락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추구를 위하여 우리는 몇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먼저, 저자는 왜 엘로힘과 야웨라는 서로 상이한 신 명칭을 동일한 작은 단락내에 사용하고 있는가? 혹은, 이미 주어진 기록을 변경하는 것을 제한하는 어떤 종교적 사고 때문에 이런 문맥이 존속된 것인가? 아니면, 저자의 입장을 충분히 인정하는 의미에서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하면서까지, 혹은 이런 문제점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단락 전체의 의미에 통일성을 부여하거나, 그 의미를 더 잘 밝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록을 하게 되었는가?
궁켈이나 폰 라드를 비롯하여 일단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락 전체를 어색하고도 파격적인 내용이라 하는 점과, 이 내용이 기본적으로 P문서와 J문서 혹 E문서와 J문서의 조합으로 보는 점으로 보아 이것은 최종기자의 편집 혹은 기록이 전체 내용의 통일성에 도움을 주는 것이거나 이와 같은 기록에 어떤 의도가 있었음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인정하는대로 구약성경의 기록이 B.C.10 세기로부터 이루어졌고 독특한 신앙과 신학적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저질의 기록이 아닌 수준있는 면모를 보이고 있는 기록이라 한다면 이 단락에 대한 최종 편집자의 편집 기술을 조악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더우기 이 기록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경전 기록자들이 보기에 불경스런 기록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의 학자들은 이 기록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내용처럼 천사나 어떤 신적 존재로 보기를 꺼려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이 경전에 들어 온 것에 대한 신중한 이해가 요구된다.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하나 이상의 공리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상기하여, 이사야서와 신약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기록대로 성서의 영감성에 대한 신앙을 신학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하나의 공리적 대전제로 한다면 비록 이 단락이 최종 편집자나 혹은 기록자의 미숙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도 이것이 주는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만을 고수할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시도 한다면 우선 엘로힘이라는 신명칭이 결국 야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가나안 신명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야웨’라는 고유명사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관계하면서, 구체적으로 계시되는데에 비하여 엘로힘은 창조주로서 때로 일반적인 신을 가리키는 신명칭이라는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이 문맥을 해석하고자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신적 존재들을 야웨의 아들들이라 하는 것보다는 엘로힘의 아들들이라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 방법이 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상이한 표현을 통하여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구체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여호와께서 그의 영이 사람속에 혹은 사람과 함께 거하지(머무르지)않으실 것이라는 이유는 사람이 육체( : 바사르)이기 때문이었다. 바사르는 구약에 273회 정도 나오는데 하나님께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으며, 그 중에 104회는 동물에 쓰이고 있다. 즉 이것은 동물이나 인간에게 공통적인 속성을 지칭한다는 의미가 된다. 볼프는 바사르를 4가지의 의미군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① 살: 이사야 22장 13절에서는 동물의 살을 가리키고 창
세기 2장 21절에서는 아담의 갈비뼈 대신에 그곳을 살로
채운다는 표현이 나오는 데 이것이 바사르이다. 또한 이것
은 남자의 성기를 가리킨다: 그 하체는 나귀같고 그 정
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겔 23:20).
② 몸: 육체의 보이는 부분을 포함한 몸체를 가리킨다: 면
도로 온 바사르를 밀게하라(민8:7).
③ 일가친척: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친척이다(창:
37:27). 또한, 모든 인류를 지칭하기도 한다: 생명의 호흡
흡을 하는 모든 바사르를 천하에서 멸절시키리니 지상의 모
든 것이 죽으리라(창 6:17).
④ 허약성: 인간의 생이 그자체로는 대체로 허약하고 몰락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를 제한하신다:
인간은 육체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셨다(시78:38).
이처럼 구분한 뒤 볼프는 바사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바사르는 구약성서 안에서 이미 몰락할 운명을 지닌 피
조물로서의 무력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실함과 순종에 있어서도 허약함을 노정키고 있다.”
이와 같은 볼프의 견해를 감안한다면 하나님의 판결과 인간이 육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떤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사용된 은 “ + + 으로서 in + which + also의 의미”로 분해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39장 9절, 23절 에서도 비슷한 예로 나타나며 ‘...때문에’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란 예들은 3절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앞의 절을 모두 받아서 결과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하여 또한”(by + which + also)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거두심으로 사람은 육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욥기 34장 14절에 나오는 내용과 그 문맥이 일치된다.
;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 진
대, 모든 혈기있는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
라”.
한편, 이 귀절은 창 2장 19절과 6장 1-8절의 내용을 반향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베샤감’을 결과적으로 해석을 할 경우 그때의 ‘루아흐’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신적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 “Akkadia어에서 danu(dianum)은 심판하다(to judge)를 의미하며 dinu는 “판결을 선고하다(verdict)”,“법적교훈(legal maxim)”,“소송”(lawsuit)을 의미하며 dayyanu는 “심판하다”(judge)를 의미한다. 우가릿에서는 dn이 “판단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며 dnf는 “알력,불화”(dissens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결국 근동어에서는 거의 법정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구약에서 dyn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25회 발견되는데, 사무엘 하 19장 10절의 niphal(경쟁하다)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kal형태이다. din은 명사상당어구로서 24회 나타나며 “판단”(Judgement)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22:10에서 din은 madhon(다툼), qalon(남용)으로 쓰여 법률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있다. 전도서 6:10에서는 ‘논쟁하다(dispute)’로 쓰여 심판하다는 의미가 ‘논쟁하다’, ‘심판하러가다’의 의미로 확장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낱말의 해석에 대하여 학자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먼저 Cassuto는 아카디아어와 아람어 그리고, 후기 히브리어에서 “거하다, 남아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Cassuto는 최근에 아랍어 danna가 제4활용에서 ‘남아있다’, ‘존재하다’의 의미로 형성된다는 Guillaume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dannan은 명사 dan에서 온 것으로서 “남아있다”, “주어진 장소에 영원히 거하다”를 의미하며 이것은 “탈무드적 아람어”, 히브리어에도 나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야돈’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먼저, 이 닡말은 ‘거한다’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 인간 내부에 부어주신 영을 거두어가심으로 인해 인간은 육체가 되고 그의 날이 120년으로 제한되어 결국에 멸망한다는 것이다. 한편, 신약의 경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볼 수 있는데 신약은 영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내에서 보고 있다. 여기서 육체라는 말은 σαρχσ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살이라는 의미와 함께 인간의 허약성을 의미한다. , 인간은 육체이기 때문에 범죄한다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볼프는 “인간의 생이 그 자체로서는 대체로 허약하고 몰락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인 인간은 홍수로인해 몰락된다는 결과와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허약하기 때문에 자기의 분노를 제한하고 계신다고 하는 시편의 기록(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 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시 78:38b-39a)은 이에 대하여 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보면 ‘ ’(yadhon)의 의미를 굳이 ‘거한다’라는 의미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영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위의 해석처럼 육체로서 살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죽음의 순간을 의미한다(전도서 3:21). 죽음의 순간에 인간의 영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위로 올라 간다는 것이다. 영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동물(전3:21) 역시 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절을 결과적으로 해석할 경우에 사람은 육체가 ‘되어야’하지만 원문은 육체 ‘이다’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영( )을 인간내부의 영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은 태초에 수면위에 운행하시던 ‘여호와의 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적절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 ’은 사람과 ‘함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을 사람들이 사는 영역에서 거두어가시며 온 땅에는 홍수가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곳은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곳, 다시 말해 혼돈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육체이기 때문에’라는 말과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연관성이 희박하다. 인간의 영은 죽기 전에 육체안에 함께 있으며, 그것이 당연한 모습이다. 육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이기 때문에 약하여 범죄한다는 이유밖에는 달리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와 같이 제시된 “사람이 육체이기 때문에”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와의 관련성의 문제에 대하여 ‘ ’에 대한 두 번 째의 해석은 좀 더 적절한 맥락을 유지시켜 준다. 본래 이 낱말은 Cassuto가 근동의 자료로부터 찾아낸 ‘거하다’의 의미보다 ‘심판하다’, ‘다투다’의 의미로 더 잘 사용된다. 사람이 육체이기 때문이라는 귀절은 오히려 ‘다투다’의 어의와 관련성을 인간이 육체이기 때문에 “인간과 영원히 다투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뜻은 시편 78장39절에서 그 반향을 볼 수 있다;‘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이렇게 해석할 경우 앞의 각주에서 언급한 대로 그 뒤의 은 접속부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원히 다투시지 않을 것이나 그들의 날은 120년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볼 경우 그들의 기한이란 그들의 수명이라기 보다는 홍수심판까지의 생명체의 기한이라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동시에 홍수 이후의 인류의 생명기한은 급격히 단축되어 120세 이상의 인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날”은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4. 그런데 야웨의 심판은 왜 사람들에게만 주어져 있는가? 이것은 엘로힘의 아들들을 신적 존재로 보는 견해의 약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견해들이 이미 신빙성이 약한 것으로 추론해 왔으며 여기서 본인의 입장에 대한 근거를 성서의 예를 들어 제시하고자 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의사에 대하여 배치되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아담의 타락을 비롯하여 무수히 나타난다. 이러한 경우들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죄가 있을 경우 특히 그 죄가 포악한 라멕의 시에서 처럼 어떤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어떤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날 때에는 대개 그에 대한 심판이 언급된다. 비근한 예로서 우리는 아담의 타락과 카인의 살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 사탄의 부류들이 하나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범죄하는 경우는 이와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경우는 구약의 경우 구체적인 예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때로 비 현실적인 존재들(천사)이 가시화 되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선한 존재들로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정확히 ‘사탄’과 같은 하나님의 선한 이미지와 대비되는 영적 존재들의 등장을 예로 든다면 역대기(대상 21: 1)와 욥기(1:6-9,12; 2:1-4,6,7), 스가랴(3:1-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가랴의 경우는 사탄의 구체적 범죄 행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앟다. 이에 비하여 역대기서와 욥기에서는 사탄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나 이러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는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역대기의 경우에서 우리는 인간 다윗과 사탄이 공히 죄에 대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 대한 형벌만 시행되며 그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사탄에 대한 심판은 전혀 언급이 없다. 욥기에서도 사탄의 행위가 그다지 선하게 보이지 않음에도 야웨는 사탄의 일종의 도전적인 요구를 허용한 것에 비하여 사탄의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문책 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스가랴에서 사탄에의 불분명한 어떤 행위에 대하여 ‘책망하노라’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외에도 사탄을 상징할 수 있는 ‘뱀’이나 ‘용’, 혹은 ‘라합’등의 용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은 구체적인 죄악 행위에 대한 현장감 있는 묘사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약의 경우에 비하여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여겨지는 사탄의 무리들 즉, 귀신 혹은 마귀의 행위가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신약에 이르러서야 사탄의 왕국, 세상의 임금등과 같은 용어들을 비롯하여 사탄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귀신들의 모습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왕국과 대비되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양상은 요한 계시록에 이르러서 절정에 다다른다. 계시록에서는 7회에 걸쳐 사탄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 다른 곳에 비하여 좀 다양한 내용과 함께 유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는 상징적인 시에 나타나는 용어들을 제외할 경우 구약에서는 거의 소극적으로만 나타나다가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심판하는 모습을 보이고 계시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탄을 결박하고(계 20:2) 유황못에 던진다는 내용(계20:10)으로 발전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경전으로 보고 경전내의책들의 배열을, 기록에 있어서 반드시 시대적인 순서로 보는 것은 아니나 내용상 그 배열이 신학적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은 전제를 인정한다면 이 논의는 본문 해석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즉, 사탄에 대한 야웨의 심판은 당시에는 보류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D. 네피림( )
: 4
4절: 그 때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으며 그 후에도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갈 때에 그 딸들이 거인들
을 낳았으니 고대의 용사들이었다.
1. ‘그 때에’라는 것은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을 당시 즉, 홍수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땅에라는 말은 네피림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 평범한 일이 아님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먼저, 땅이라는 말은 특정한 지명을 가리킴이 아니므로 일단 ‘땅’에 속한 영역내의 서로 다른 작은 지역을 가리키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지명이 다른 지명을 전제하여 서로를 구별하기위해 사용되는 것 처럼 ‘땅’은 하늘과 대비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있다. 또한, 단순히 네피림이라는 이름의 존재가 땅에 속하는 평범한 것이라면 굳이 이 낱말을 기록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최소한 범상한 일이 아니다.
2. ‘네피림( )’이라는 낱말은 ‘나팔( )’의 칼(kal)형에서 파생된 복수 명사형으로서 성서를 통틀어 두 번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 외에 민수기 13장 33절에 나온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그 존재를 파악하기 힘들게 표현되어 있으나 민수기 에서는 ‘아낙( )’족속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
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
손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2-33)
여기의 “대장부”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을 보면 “네피림”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과 동격으로 되어 있다.
(민 13:33상)
그러므로 민수기의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의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아낙자손은 “네피림으로부터 나온” 자들이며, 동시에 이들을 네피림으로 부른 것으로 보아 네피림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들과 같이 평범하고 작은 인종이 아니라 비교하기에 그들이 훨씬 크므로 자기들을 “메뚜기”와 비교할 정도의 존재들에 대한 당 시대의 통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네피림이 거인을 표현할 수 있는 명사는 될 수 있어도 거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창세기 6장 4절에서는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아낙자손이 원문에서 ‘네피림의 후손( )’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네피림으로부터 나온( )”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네피림이란 본래 ‘나팔( )’ 즉 떨어지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 ① (사고로)떨어지다.
② 특히 잔인한 죽음을 당하다. 파멸하다.
③ 깊은 잠에 빠지다.
네피림은 70인역에서 γθγαντε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의 의미를 잃게하는 번역이다. 거인의 조상으로서 거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땅에 떨어진 존재’라는 의미도 함축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단어의 의미상으로 볼 때 네피림은 ‘나팔’의 의미를 ‘떨어지다’로 보고 이것의 변형으로 본다면 ‘떨어진 존재’라는 뜻으로 직역된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네피림은 영적 혹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존재들’, 혹은, 물리적으로는 ‘떨어진 자들’로서 땅의 존재가 아닌 천상적 존재임을 시사할 수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도,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관련성이 있다. 이들은 떨어진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4절의 말대로 “땅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상의 존재라기 보다는 땅에 떨어져 땅위에 거하는 존재로서 아낙자손과 같은 영웅, 거인, 용사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 러므로 ‘깁보림’과 동일시할 수 없다. 당시에 네피림은 땅에 “있었던”존재이며 깁보림은 “태어난” 존재 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려면 최소한 땅에 내려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우리는 제 1 에녹서를 들 수 있다.
제 1 에녹서는 ‘에티오픽 에녹서’라고도 불리우며 중요한 위경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다섯 권으로 구분 되는데, 에녹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과 결혼함으로써 거인들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홍수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3. 학자들은 4절을 “이전의 귀절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며 오히려 4절이 “3절보다 2절뒤에 나오는 것이 더 좋게 보인다." 고말한다. 즉,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의 결과를 서술하는 내용으로서 4절이 2절뒤에 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베스터만은 이 단락이 어색하게 보이는 부분들은 두 개의 전승이 조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4절에 대하여 문맥상의 어색한 점을 지적하게 된 데에는 4절이 1,2절의 결과만을 서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렇게 본다면 3절이 굳이 4절 앞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4절을 1, 2절의 결과로만 보는 데에는 4절에 동시에 나타나는 ‘네피림’과 ‘깁보림’을 같은 종류의 거인들로 보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그래서 베스터만은 4절이 네피림에 대한 전승과 깁보림에 관련된 전승이 조합된 것으로 보며 둘 다 거인의 기원을 다루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또한, 틴들 주석은 둘 다 같은 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거인은 그 기원이 위법적인 특이한 결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네피림에도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 재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형태의 성서 본문을 통해 본다면 우선, 3절이 먼저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는 결혼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과보다 먼저 강조적으로 선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4절은 이와같은 사건의 결과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4절은 네피림의 존재를 서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작되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네피림을 깁보림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서술은 단지 1, 2절의 결과만이 아니다. 4절의 서두는 1절을 재 서술하는 것이 되며 4절은 전체적으로 1, 2절은 총괄함과 동시에 그 결과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4절은 이 외에도 홍수 사건 이후 가나안 지역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존재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다. 특히, 르바임 족속의 조상을 네피림이라 한 것은 이와 같은 추론에 어울린다. 게다가, 4절은 신적인 존재가 사람과 결혼하고 그 결과로 거대한 인간이 태어난다는 기록을 함에 있어서 ‘엘로힘의 아들들’을 ‘네피림’으로 달리 표현 함으로써, 타락한 신적존재의 지상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이로써 구체적인 육체적인 결합의 가능성을 그 결과인 거인의 출생과 더불어 묘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4절의 위치는 매우 적절하며 이 단락처럼 간결한 분량으로서는 탁월한 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우기 3절과 4절의 위치를 비교해 볼 때 3절의 심판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상에 대한 관심과 그 심판의 동적인 현장감마져 준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간다는 말은 미완료태로 되어있어 “반복적인 행위”를 가리키며 들어간다는 것은 “성행위”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다.
Ⅶ. 신학적 의의
A. 인간의 반역과 하나님의 심판
이 단락은 구절마다 문제거리로 채워져 있다. 또한, 그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마다 나름대로의 이론을 펴고 있으나 나름대로의 약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점들에 대한 이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락이 주는 주된 의미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칼빈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 단락의 신학적 의미를, 그 적용 범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위반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있다. 베스터만은 이 단락을 죄의 종류들 중의 하나로 보고 에덴동산의 타락,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의 범죄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베스터만의 비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서의 문학적 맥락이 보여주는 역사적 계속성를 취급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죄의 발전이라든가 그 범위등 본문의 전후 맥락과 함께 볼 수 있는 내용상의 어떤 일관성 있는 관계에 대해서 이 논문이 지향하고 있는 식의 역사적 계속성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견해는 오경의 기록이 내용상 순차적인 진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동시에 그 가정에 의하여 제한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최종형태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통하여 본다면 우리는 성서를 그 내용상의 역사적 관련성을 인정하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은 본문의 구체적 주석에도 기여하는 바가 있다.
창세기 내에 나타나는 인간의 범죄들 중에서 본 단락과 같이 하나님의 질서에 또한 불순종 내지 반역의 죄에 해당되는 비교적 그 규모가 크거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들면 아담의 타락, 본 단락과 관련된 인류의 타락, 바벨탑 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세가지의 범죄 행위는 모두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부되어 있는데 범죄 행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 어떤 공통성과 일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범죄 행위에서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위반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라 볼 수 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데에 그 촛점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본 단락에 나타나는 엘로힘의 아들들과 인간의 결혼은 그것이 신적 존재들과 인간의 결혼으로 볼 경우 엄청난 질서 파괴이며 우주적인 대 혼란이다. 이와 같은 혼란은 먼저 인간이 에덴동산의 사건과 유사하게 하나님의 신적 영역에 침범하여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그 위치에 이르려하는 반역적인 시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바벨탑사건 역시 인간들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함으로써 온 땅을 정복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반되는 행위와 더불어 인간의 이름을 하늘에 높이려는 교만한 반역행위로 결국 모두 야웨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이 범죄들은 공히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하나님의 위치에 이르고자 하는 것으로서 특히,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모두 인간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함과 더불어 하나님과 인간의 질서 및 한계를 더욱 극명하게 한다. 먼저, 아담의 경우 그는 인간이 본래 흙으로 부터 온 존재이며, 생령이 아닌 흙이라 명명되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더우기 이제는 에덴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은 범죄의 목적에 반하여 오히려 그의 위치가 하락된다. 이전에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영생할 수도 있었으나 이젠 그 수명에 한계가 그어지고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결혼을 취급하는 본 단락에서는 인간들이 신적인 존재들과의 결혼을 통해 신적인 지위와 더불어 아울러 신적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점은 이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추론해 볼 수가 있다. 인간은 그들의 시도에 반하여 오히려 그 생명이 단축될 뿐 아니라 결국 완전히 멸망케 된다. 이와 같은 전면적인 인류와 모든 생명체의 멸망은 위의 예에서 든 다른 두가지 경우보다 그 범위가 크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멸망이라는 점에서 유일하며,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과의 결혼에 대한 판결로서는 지나친 느낌을 주는 한편, 신적 존재들과 인간들의 결혼이 초래 했을 혼란을 상정해 본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타당성이 있게 여겨진다.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주어졌던 인간의 생명의 한계는 이제 더욱 단축되었다. 120년이라는 것은 홍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집행유예의 기간으로도 볼 수 있으나 홍수사건 이후 인간의 생명이 급격히 단축되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족장시기를 지나서 모세의 수명기록으로 부터는 120세이하로 한정되어 나타남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일관성 있고도 구체적으로 발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 즉,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하)는 판단으로 인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단축과 같은 한계지움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명령 수행을 위하여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제재만 가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인간들의 결속을 통하여 인간의 위상을 하늘에까지 높이고 나름대로의 번영을 추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서로의 관계가 깨어져 그들의 의도는 무산되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지면에 흩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구음이 하나였던 이전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원활한 교류와 그로 인해 가능했다고 여겨지는 인간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판결은 바벨탑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의도가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영속적 생명을 얻으려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가지의 주요 사건들의 일관성있는 관계와 공통성이 약화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내지는 명령을 위반하면서 인간의 위치를 한계밖으로 하나님께 접근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한계를 더욱 명확히 함과 아울러 더욱 그 한계가 좁아지는 방향으로 주어짐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이미 주어졌던 자유와 능력은 점점 더욱 상실하게 되었다.
B. 거인의 기원과 거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한, 부분적으로는 지식적인 면에서 최소한 우리가 여기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은 이 단락이 거인들( )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베스터만과 같은 학자들의 지적대로 본문의 내용이 신화의 영향을 입은 것이라 보고, 이 단락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을 인정한다 하여도 이외의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과의 관련성을 생각할 때 소홀히 할 수 없는 단락이라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처음으로 겪는 난관이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여 거인이어서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즉, 가나안 일곱 족속의 특징적인 모습이 거인이었다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을 멸하라하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성서의 기록은 거인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 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의 당위성은 창세기 15장 12-16절에서 찾아 볼 수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 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
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네 조상
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
이니라....(창. 15:12-16)
즉,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의 한 거주민(창 10:16)으로서 헷, 브리스 족속 등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적으로 성서에 등장한다(출 33:2). 이들은 요단강가의 양쪽 구릉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민 13:29) 아모리 족속이라는 낱말은 가나안 거주민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창 48:22; 수 24:15으로서)으로도 사용되었다. 에스겔 선지자도 팔레스타인의 혼합된 사람들을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의 후예라고 하였다(겔 16:3, 45). 이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되는데 그 심판의 과정은 이스라엘의 출애급과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죄악이 관영함에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지역을 정탐했던 자들의 눈에 비친 가나안 거주 족속들의 특징적인 모습이 ‘거인’이었다는 점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죄와 그들이 거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비록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지는 않는다 하여도 어떤 간접적 관련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서에 나타나는 거인 족속들에 대한 언급들은 가나안 지역 정탐 당시 뿐만 아니라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언급되는 것으로서 한 두 차례의 신화적 요소의 편입으로 볼 것이 아니다. 이들을 지칭한다고 보이는 용어로서는 깁보림, 아낙, 르바임,숨밈, 에밈등이며 골리앗 역시 이와 같은 의미를 함축한다. 성서의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라바, 르바임: 창 14:5; 신 2:11,; 3:11, 13; 수 12:4; 13:
12; 15:8; 17:15; 18:16; 삼하 21:16, 18, 20,
22; 대상 11:15; 14:9; 20:4, 6, 8.
깁보르: 창 6:4; 10:8-9; 수 1:14; 삼상 9:1; 대상 1:10;
욥 16:14; 시 19:5; 33:16; 사 3:2; 49:24-25;
겔 32:12, 21, 27; 39:18, 20.
아낙: 신 1:28; 2:10
엠(에밈): terryfing beings 초기 모압 거주민: 창 14:5
수스: 창 14:5, strong peoples
삼수밈: 신 1:20.
이와 같이 성서에는 거인 족속들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으며 오경에 속한 예들은 거의 모두가 거인 족속들과의 싸움이나 그 결과로 인한 죽음, 최소한 적대적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경우에도 그들이 당시에 존재했으며 죽임을 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8, 20, 22; 대상 20:4, 6, 8). 그 외의 경우는 대개 비지역과 관련된 묘사이거나 사실적인 사건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오경을 비롯한 역사서에 등장한는 것으로서 죽임을 당한다(참조 겔 32:21, 27).
이처럼 거인 족속과 죽음의 관계는 홍수 기사와의 관련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본 단락이 홍수기사의 서론이자 그 원인을 밝혀주는 대로 인류의 범죄와 혼란에 대한 야웨의 심판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케 되었고 결국, 거인 족속들도 함께 멸망하게 되었다. 홍수의 사건 속에서의 거인과 죽음의 관계는 성서외에 근동의 자료에서도 발견 된다. 예를 들어 길가메쉬 서사시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같이 홍수기사를 취급하고 있는 자료들을 살펴 보면 모두 거인들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그 원인이 성서만큼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길가메쉬 토판중 제 11판에 홍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신들은 “홍수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11판 14행). 그러나 최고신이자 홍수를 일으킨 Enlil에게 하는 Ea신의 말에 따르면 홍수는 비록 지나친 심판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죄와 관련이 있다.
신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 영웅이여
어떻게 당신이 이치에 맞지 않게도 홍수를 일으킬 수 있었는가?
죄인에게 그의 죄를 부과하라,
범죄자에게 그의 범죄를 부과하라.
(그러나) 관용을 베풀라, 그가 죽지 않도록,
참으라, 그를 쫓아내지 말라.
(11판 179-182행)
또한,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라 할 수있는 길가메쉬는 ‘용사’이자 바벨론의 포악한 통치자였다.
그의 2/3은 신이고 1/3은 사람이라.
그 육신의 모양은...
(파손 혹은 분실)
그는 거친 숫소와 같이 무서우며, 고상한...;
진실로 그의 맹렬한 무기를 상대할 자가 없다.
북소리에 그의 동료들이 일어났다.
Uruk 의 귀인들은 그들의 방 안에서 근심하였다.
“Gilgamesh는 아들을 그 아비에게 남겨두지 않는구나;
밤낮으로 그 방자함은 그치지 않도다.
이 자가 Uruk 성의 목자 Gilgamesh란 말인가?
이 자가 용감하고 당당하며 지혜로운 우리의 목자인가?
.......................................
하늘의 신들은 그들의 탄식에 귀 기울였다.
(1판 2:2-19)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생을 추구하다가 홍수 사건당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을 만나러 간다. 결국 그는 영생을 얻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야콥슨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제를 죽음의 도피로서의 영생 추구로 보았으며, 덧붙여 이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정신적 성장을 한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Ringgren역시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제를 “인간의 헛된 불멸추구”로 보았다. 글의 주제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신적인 능력이나 지위를 얻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더욱 하락된다는 창세기 본문과 주제 및 내용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편, Atrahasis 서사시에서는 “열등한 신들(subordinate)”인 Igigi가 그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짐에 항거함으로써 신들이 그 부역을 담당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그 인간들이 번성하면서 시끄럽게 되자 (“Noise”) 이것이 홍수를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Apsu와 신들과의 전쟁의 원인이 젊은 신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Apsu의 휴식을 방해한 데에 있었다는 바벨론의 창조설화(에누마엘리쉬)의 내용과 흡사하다. 여기서 ‘시끄럽게 한다’는 것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Westerman은 이것을 하나의 반역행위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하고 있는데 endel은 홍수의 원인 중의 하나를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에누마엘리쉬, 길가메쉬 서사시, 트로이 전쟁 이야기등에서 나오는 신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혼합으로 생겨나는 demi-gods(반신)을 죽이려는 데에 있었다고 본다.
Ⅷ. 결론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서의 맥락은 여타의 신화들과는 달리 비신화적이고 역사적인 타당성들 및 합리성이 있는 문장과 신학적 사상을 담고 있는 정제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편집자의 의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의 의도에 따라 전 후 문맥과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본다면 인간의 타락의 일면과 홍수심판 사이의 관련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타락의 일면이란 카수토, 베스터만의 해석처럼 인간이 신적 존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악한 의지를 드러냄을 말한다.
우리들 인간의 지식은 유한하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작은 지구 위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을 경우처럼 아직도 우리에게는 도저히 우리의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진실이 있을 수 있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말하고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썼을 때 사람들은 특히 기성 종교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당시 사회통념에 알맞고도 안전한 해석틀만을 갖고 있었으며 탄력있는 개방된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비극은 현재 다수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성도들에게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안전한 해석이 반드시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진리를 거부할 굴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이브가 선악을 알게하는 지혜롭게 할 듯했던 그 열매를 먹었을 때처럼 하나님과 같이 뛰어난 존재 혹은 영웅들이 되고자하는 시도를 계속 해오고 있다. 바벨탑 사건이 아니더라도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모양으로 탈을 바꿔 쓰면서 사람들은 영웅이 되고자 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긴 역사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성장과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누구든지 타락한 인간은 이기심으로 명예욕, 권력욕, 등의 정욕으로 가득차 있어서 세상에서의 영광을 취하려 애를 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스타들, 작은 영웅들을 만들어 낸다. 모두 그와 같은 추구 속에서 하나님의 법이 정하는 한계를 넘어서 형성되며, 이와 같은 세상의 흐름은 바로 타락의 증거이며 이 타락된 세계는 당연한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세상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멍에를 지고 있는 자들, “너희에게 영생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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