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삐삐' 마을을 찾아서

[김건수]

'말괄량이 삐삐' 마을을 찾아서

기사입력 2008-01-17 14:45

삐삐 마을을 찾아서

“내 이름은 삐삐로타 빅투알리아 롤그라디나 쇼코민자 에프라임스톡터 랑스터름프야.”

어린 시절, 주말 오후면 씩씩한 발걸음으로 TV에 나타나 신비한 세계로 인도했던 내 친구 삐삐. 삐죽삐죽 땋은 양 갈래 머리, 짝짝이 스타킹에 한참 큰 신발을 터덜터덜 끌고 다니는 지독히 긴 이름의 범상치 않은 소녀. 원숭이 닐슨 씨와 말 한 마리와 뒤죽박죽 별장에서 살아가는 삐삐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집 안을 쿵쿵 뛰어다니고, 방 안을 엉망진창 어지럽히고, 초콜릿이니 쿠키니 군것질 거리를 하루 종일 놓지 않아도 되었다.

그뿐인가. 쓰고 싶은 만큼의 금화도 있었고 어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논리와 괴력도 지녔다. 학교에 간 삐삐에게 선생님이 덧셈 문제를 내자 삐삐는 선생님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주면‘선생 모독죄’를 짓는 것이라며 대답하지 않는다.

아, 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무엇보다도 삐삐가 좋았던 것은 그녀의 끝없는 상상력이었다. 삐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느덧 나도 온갖 사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말 몰랐다. 우상이었던 삐삐가 스웨덴 출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빨간 머리에 창백한 얼굴, 깨알 같은 주근깨로 미뤄 짐작했을 때 영국이나 아일랜드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조차도 굉장히 발전된 사고다. 그 시절의 외국인은 전부 ‘미국 사람’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던가.

결론을 말하자면 삐삐를 비롯해 이를 집필한 작가 모두 스웨덴 사람이었으며 스웨덴의 빔메르비Vimmerby라는 작은 마을에는 삐삐 마을이 있다. 그리고 특별하게도 올해는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큰 행사가 삐삐 마을에서 열렸다. 이날, 삐삐와 그녀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1000명의 아이들이 빔메르비로 향했다.

삐삐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스웨덴 국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사는 전설의 그룹 아바도, 전설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도, 축구선수 프레드리크 융베리도 아니다. 남자로는 국왕이며 여자로는 바로 삐삐의 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다. 물론 <삐삐 롱스타킹Pippi Langstump> 한 권으로 대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린드그렌은 1907년에 빔메르비에서 태어나 2002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동화는 물론 희곡, 미스터리물까지 100여 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동화책으로는 <라스무스와 방랑자> <사자왕 형제의 모험> <에밀은 사고뭉치> <떠들썩한 마을의 아이들> 등이 있다. 이제 입질이 슬슬 오는가? 입질이 안 올 수도 있다. 삐삐 마을의 마케팅 매니저를 만났을 때 다른 책은 기억나지 않아 “우리나라엔 삐삐만 번역되었나 보다”고 했다.

그런데 삐삐 마을의 숍 안에 한글판의 위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국내는 모르겠지만 유럽에서 그녀가 대단한 동화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매해 린드그렌 여사의 옛날 이야기를 찾아 38만5000명의 팬들이 빔메르비를 찾는다. 스톡홀름에서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결혼을 해 딸 카린을 낳았는데 잔병치레가 많아 종종 침대에 앉아 딸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삐삐 롱스타킹>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주변의 권유로 이 책을 출판사에 넘겼으나 첫 출판사는 말괄량이 삐삐의 파격적인 이야기를 거부했다. 곧 대성한 린드그렌을 보며 땅을 치고 후회했겠지만.“린드그렌은 설교 따윈 하지 않아요. 아이들의 호기심을 같은 눈높이에서 나누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씩씩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삶의 주체임을 알게 해줘요.” 행사에 참석한 스웨덴의 한 지방 신문 기자가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웨덴 사람들이 강인하고 독립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국민 할머니 생일잔치에 천사들이 모이다

11월 14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고향 빔메르비에서는 그녀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스웨덴 특집을 준비하던 중, 스웨덴 현지 관광청은 흥분된 목소리로 이 행사 소식을 전했다. 우리

는 촉박한 마감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출장 일자를 변경해야 했다. 오전 10시, 작가가 묻혀 있는 묘지에서 행사가 시작됐다.

작가를 사랑하는 3명의 어린이 대표와 친족이 그녀의 무덤 위에 꽃을 올리고 추모사를 올렸다. 5세 아동에서부터 80세 노인까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용하고 소박하게 작가를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이었다.

이틀 내내 빔메르비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슬쩍 자취를 감췄다. 스웨덴에 온 지 7일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 드리워졌다. 곧이어 1000명의 아이들이 시청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행사가 있었는데, 아이들을 사랑하는 린드그렌이 눈보라를 그치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 앞으로 향하니 빔메르비는 물론 주변 동네의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스키복을 챙겨 입고 대절 버스에서 내렸다. 작은 아이들부터 앞줄을 채우고 20분이 지나자 시청 앞 광장은 1000여 명의 아이들과 이를 보

기 위해 찾아든 주민들로 가득 찼다. 20여팀의 취재진과 사진작가들도 참여했다.

인천에서부터 스톡홀름까지 약 15시간, 스톡홀름에서 빔메르비까지 3시간 30분, 도합 19시간이나 걸려 찾아온 <프콤>. 사회자는 <프콤> 취재진이 대견했는지 행사 시작 때 “한국 취재팀이 멀리서 왔다”고 소개해 예쁜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1시간여 동안 인기 동화 주제가를 부른 후 아이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삐삐 마을,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월드로 향했다. 이곳은 린드그렌의 생가와 빔메르비 마을을 비롯해 그녀의 동화 속 배경을 재현해놓은 테마 파크다. 여기에선 삐삐 뮤지컬 팀이 야외무대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끄떡하지 않고 야외무대를 꽉 채워 앉았다. 게다가 한 손엔 시나몬 페이스트리와 차가운 삐삐 소다수를 들었다. 뜨끈한 붕어빵과 꼬치어묵이 떠올라 소다수에 입도 대지 못했던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추위와 눈 속에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배우들을 따라 신나게 장단을 맞췄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월드의 레스토랑에서 전통 음식인 버터에 구운 청어와 으깬 감자를 점심으로 먹고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린드그렌의 생가로 찾아갔다. 주민들이 준비한 린드그렌 작품의 연극과 함께 100주년 한정판 기념우표를 팔고 있었으니, 동화 속 예쁜 일러스트가 담긴 엽서를 두 장 사서 애인에게 한 장, 가족에게 한 장 엽서를 썼다. 기념우표에 크리스마스 특별 도장까지 쾅 찍어서 말이다. 행사는 오후 5시, 촛불을 든 주민들이 생가에서 시청 앞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작은 마을 빔메르비. 오늘 밤에도 엄마가 읽어주는 린드그렌의 환상 동화에 아이들의 꿈이 무럭무럭 자라날 테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월드

Astrid Lindgren’s Varld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월드는 5월부터 9월 사이에 오픈을 한다. 겨울이라도 중요 공휴일이나 행사가 있는 날에는 부분 오픈을 한다. price range 가족 1일 티켓 490~725크로나, 성인 155~495크로나 address 598 85 Vimmery tel +46 492 798 00 web www.alv.se

빔메르비 스타츠 호텔

Vimmerby Stadshotel

빔메르비 스타츠 호텔은 9월에서 5월 동안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저녁 뷔페를 무료로 제공한다. rooms 총 53실. price range 싱글룸 650~1250크로나, 더블룸 790~1450크로나, 3베드룸 1495크로나 address St. Torget 9 tel +46 492 121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