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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능선, 진시황, 서불, 실크로드,
귀화 성씨
심마니 능선.
반야봉 지도에서 눈길을 끄는 '심마니 능선'.
반야봉에서 뱀사골과 나란히 흘러내린 능선.
그 이름만 들어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지리산 [ 심마니능선 & 뱀사골 ] 지도
가끔 안방 텐트에서 야영하는 분위기 만끽.
텐트 안과 텐트 밖의 느낌은 전혀 다른 맛.
텐트에 누워 지리산 지도를 보며 상상의 날개.
꿈속에 심마니 능선을 누비다가..' 산삼캐는 꿈.'
"심봤다.""심봤다."
헛꿈이라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꿈속에서 지리산 곳곳을 헤메이는 즐거움.
텐트에서 산속을 누비는 상상은 늘 새롭다.
'지금부터 심마니 능선 속으로 들어가보자.'
반선 전적 기념관에서 반야봉까지 뻗은 능선.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다.
한때 산삼 약초가 많아 심마니들이 찾아든 곳.
산행 시작 2시간쯤 뒤부터 뱀사골의 계곡 물소리
반선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도 반야봉 야영을 각오
좀 서두른다면 노고단이나 뱀사골 대피소까지 도착.
심마니 능선은 예상보다 산세가 험란한 곳.
하여, 잘못 길을 잃으면 조난을 겪기 쉬운 곳.
원래, 약초꾼이나 심마니가 다니는 길은 험하다.
심마니란 산삼을 전문적으로 캐는 약초꾼을 말한다.
심마니 능선이란 약초꾼이 다니던 길에서 유래된 지명.
우선, 이곳에 가기 전에 산삼과 심마니에 대해 알아보자.
..........................산삼..................................................
산삼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부터 귀중하게 여겨온 약초.
옛부터 한반도에만 자생한다고 알려져왔고 부르는 게 값.
산삼은 성장이 늦고 뿌리가 곧게 내려가다가 기듯 자란다.
'산삼은 그늘지고 서늘한 800m 이하 지역에 자생.'
산삼 종자는 낙엽 섞인 땅에 떨어져, 바람과 빗물따라 땅에 묻힌다.
새나 짐승에게 먹힌 후 배설물과 함께 배출되어 땅에 묻혀 착근한다.
착근 후 1년이 지나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되어야만 싹이 돋는 산삼.
재배 인삼은 매년 1개의 잎이 늘어나지만,
산삼은 잎 1개 늘어나는데 몇 년~ 몇십 년.
1∼5년이 되면 잎 3개 달린 가지 1개가 자라 ‘삼화(三花)’.
5∼10년이면 손바닥형 잎 5개(오출엽)가 달려 ‘파장(巴掌)’
10∼20년이 되면 2 가닥의 오출엽이 자라 ‘이갑자(二甲子)’
30년 이상이 되면 3가닥의 오출엽이 자라 ‘등대자(燈臺子)’
50년 이상이 되면 4가닥의 오출엽이 자라 ‘사품엽(四品葉)’
4품엽은 50∼80년생이라 주위에 새끼 산삼들이 번식한다.
심마니 우두머리는 보통 4품엽을 일촬(一撮)이라 부르며
부하들에게 그 주변의 새끼 산삼들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대략 100년 산삼은 5가닥 오출엽이 있어 오품엽(五品葉)
심마니는 오품엽을 일퇴(一堆)라 부르며 주위에 자손 산삼이 많다.
6가닥의 오출엽이 있는 육품엽(六品葉)은 일편(一片)’이라 부른다.
산 기슭마다 자손 산삼들이 퍼져있다면 육품엽 산삼이 있다는 증거.
..............................................................................................
"심봤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가 일행에게 외치는 구호이다.
일행은 그 구호를 릴레이로 전달하며 그곳에 모인다.
모두 다 모이면 간단한 제례를 올린 후 산삼을 돋운다.
"심봤다" 는 말은 신(神)의 마음(心)을 보았다는 뜻.
전통 심마니는 혼자 남몰래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마니는 심메를 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산삼으로 돈벌거나 오래 살 욕심은 심마니에게 금기사항.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쓸 목적이라야만 돋울 수 있단다.
"돋운다."는 삼을 캔다는 뜻의 심마니들 만의 전문용어.
심마니의 독특한 제례의식을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자.
...........................심마니...........................................
“법천 삼각산령, 병가대인 구월산령, 기마불통 오대산령
천지대방 지리산령께 저희( 아무개 아무개)들이 고하오니,
天地人神의 부정을 소멸해 주시고, 일편 산삼을 살펴주십사.”
심마니는 목욕재개 산신제 후 꿈속 산삼을 찾아나선다.
삼은 눈에 보였다 안보였다 해서 변초(變草)라고도 한다.
하여, 산신령이 허락해야만 돋울 수(캘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 몇명 남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심마니들의 의식 세계
산신제 제단(祭壇)은 샘물 곁 고목이나 큰바위 아래 차린다.
청수(淸水) 음식을 차린 뒤, 향피워 술 울리고, 세 번 절한다.
청수를 뜰 때는 반드시 오른 손으로 물살을 거슬러 퍼올린다.
입산일자는 일진(日辰 ; 음양오행에 따른 하루의 간지)을 짚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고, 절명(絶命)이 든 날은 피해 오른다.
이때 개고기나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안되고,
뱀 벌레 같은 미물의 생명을 해쳐서도 절대 안된다.
상가 문상도 삼가고 상주를 봐도 못본 척 해야 한다.
심메를 보러갈 때 여자랑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되고
산에서 식사할 때에도 산 나무가지 젓가락을 써야 한다.
젓가락 지팡이를 만들때 싸리나무와 버드나무는 안된다.
금기를 어기면 삼을 캐지 못하고 몸을 다친다고 믿기 때문.
심마니 샤머니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계시인 ‘꿈’.
만약 하산몽(下山夢) 또는 꿈자리가 나쁘면 즉시 하산한다.
평소 꿈에 나타난 곳이 있다면 천리 먼길도 찾아가야만 한다.
꿈에 나타난 곳을 찾지 않으면 신의 계시가 중단된다고 믿는 탓.
그러나, 꿈에 산삼을 돋우면 흉몽이라 여기고 하산해야 한다.
더덕 무 당귀 나물을 캐거나 황소 돼지 동자 꿈은 길몽이란다.
길몽 중에 길몽은 꿈속에서 여자랑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
'40~50세 통통한 여인과의 통정 꿈이 길몽.'
스무 살 남짓 날씬한 처녀와의 통정 꿈은 흉몽.
꿈속 여성의 몸매를 닮은 산삼을 캔다는 믿음 탓.
하지만, 빨간 모자를 쓴 숫처녀와의 통정 꿈은 길몽.
'산삼은 사람의 몸매를 가장 닮은 약초.'
남성, 여성 또는 남녀가 한몸으로 뒤엉킨 형태.
산삼은 그 모양새가 고울수록 상품 가치가 높다.
요즘 남녀지위가 동등해 심마니의 금기도 깨졌다.
예전 심마니 세계에서 여자는 부정타는 금기의 존재.
그러나, 요즘은 여성도 전문직 심마니로 활동을 한다.
여성 심마니 역시 남자 못지않게 꿈을 중요하게 여긴다.
꿈속에 건장한 남근 방망이를 보면 100년 산삼 돋울 꿈.
비몽사몽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뺨에 비벼댈 정도면 길몽.
남편한테 혼날까봐 말도 못하고 산으로 달려가면 돋운단다.
'<모둠>은 심마니들이 잠자며 삼돋우기 위한 움막.'
평평한 돌구들장을 깔고 흙을 덮어 만든 베이스 캠프.
그 위에 낙엽과 짚을 깔아 만든 임시 움막 야외 온돌방.
바닥이 완성되면 나뭇가지 틀에 비바람막이 비닐 씌우기.
심마니들은 삽이나 호미 같은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구들 놓고 짚을 깔거나 배수로를 낼 때에도 손으로 흙을 판다.
텐트 대신에 비닐을 사용하는 이유는 짐을 줄이려는 목적이다.
상황버섯 석이버섯 등등을 캐면 짐 무계가 40 kg이 넘기 때문.
'심마니 길은 경사 50도가 넘는 길도 아닌 급비탈.'
정강이까지 빠지는 낙엽 덮인 길에서 한발만 삐끗하면 추락사.
석이버섯을 따러 가면 경사 130도쯤 되어 경사 50는 약과란다.
자일타고 채취 중 토종 벌꿀을 얻는 망외 부수입도 짭잘하단다.
심메를 보기 좋은 시기는 5~7월,
약효가 좋은 시기는 9~10월경이다
봄 여름 산삼은 가치가 없어 파삼(破蔘)
요즘, 등산을 겸해 산삼캐는 약초 산행 인구가 늘고 있다.
일석이조 욕심을 부리다가 험로에서 몸다치는 경우도 많다
전문 산악인 수준이 아니면 약초 산행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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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능선은 지리산이 산삼 자생지 임을 알려준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삼천 동자를 보낸 지리산.
지리산 신 '방장'은 불로장생 묘약 불로초 지키는.. 산신령.
천왕봉 전설 속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천왕성모.
스님을 사로 잡은 천왕성모 젊음의 비결은 산삼.
반야를 만나 딸 8을 낳고 사랑을 잃어버린 마야부인.
구도자에게 사랑은 헛된 감정임을 일깨워주는 가르침
득도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났던, 반야.
그 발자취가 아직 남아있을 듯한 심마니 능선.
전설 속 불로초 찾아 심마니들이 오르내리던 길.
'반야봉 북사면 따라 반선으로 뻗은 심마니 능선.'
반야봉은 지리산 능선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둔부 곡선.
달궁을 지나 성삼재로 넘어가는 북쪽 도로에서 보는 반야봉.
그곳은 한번 들여다 보고 싶었던 여인의 그곳과 사뭇 다르다.
부드러움과 우아함 뒷면에 숨은 매서움과 깊숙한 자연의 멋.
그 멋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몸을 허락하듯 길을 열어준다.
심마니 능선는 뱀사골 계곡과 나란히 있기에 들머리는.. 반선.
능선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접근 거부하는 까탈스러운 오르막.
봉우리를 넘고 안부에 올라서면 다시 내리막 오르막 여러 차례.
4~5개 봉우리를 세워보다가 그만 두며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숨 벅차게 비몽사몽 무릉도원 오르내리 듯.. 다시 오르막.'
오솔길 우측엔 기와지붕 같은 만복대 및 아스라한 와운 마을.
적송 군락지 지나 오솔길 막아선 고목 군락들이 정말 아름답다.
소나무 붉은 숲 헤집고 나면 점점 가깝게 다가서는., 중봉.
산죽숲 헤집고 허겁지겁 올라서야, 처음으로 만나는 이정표.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찾아 헤메다가.. 꿈결에 해후.
아직 1.5km 남은 반야봉은 초암릉과 빼곡한 원시림 틈 오솔길.
반야봉 두 곡선 사이 북쪽 음습한 골짜기 주변은 산삼 자생지.
진시황에게 불로초 및 정력 강장제로서 효험이 알려졌던 산삼.
산삼 자생지의 오묘한 산세를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것 같다.
그러나, 심마니의 치열한 삶이 느껴질 만큼 고단한 <심마니 능선>.
'이정표 좌측 길로 40 여분 오르면, 반야봉 정상.'
은밀한 애욕과 육체의 고단함, 물욕을 넘어야 오를 수 있는 곳.
구상나무숲 진달래, 철쭉 꽃동산을 지나 초원으로 이어지는 길.
반야봉은 천왕봉 노고단과 더불어 지리산 3대 주봉으로 부른다.
그러나, 불교적인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의미가 담겨있다.
'혹시, 반야는 이곳 고행을 통해, 득도한 것은 아닐까?'
반야봉을 멀리서 조망하면 두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 표석이 있는 곳은 '상봉' 헬기장 북쪽은 '중봉'이라 한다.
6.25 당시, 포탄 자국 같은 민둥산 초원, 깨진 암석, 구덩이 흔적.
'반야봉 자락은 인적드문 거미줄 같은 미로.'
반선에서 심마니능선까지 긴 코스는 주능선에서 떨어져 있다.
숨벅차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원시림 험로가 연속되는 코스.
여성스러움 속에 깊이 숨겨진 야성적인 험준함이 원시림 지킴이.
정상에 올라선 피로감을 여인의 품처럼 감싸주는 '반야봉'.
어지간한 준족이라도 초죽음에 이르도록 지치게 하는 산세.
男心 사로 잡고 미궁 속 헤메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산세.
반야가 도를 닦기 위해 마야부인을 떠나 머물던 전설의 고향.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으로 알려진 <반야봉의 낙조>.
심마니 능선을 통해 오르는 반야봉은 처녀지 원시림 가득한 곳.
노루목에서 반야봉 가는 길은 패이고 깍이고 상처받은 살점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등산객에게 외면받는 반야봉은 다행인지 모른다.
진시황.
중국 고대국가 역사는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다.
북경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중심.
고대 중국 대륙은 넓어도 인구 밀집 지역은 북경
'북경을 고대사회부터 중국을 장악하는 위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 또한 중국과 일맥상통.
북경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인접국가인 때문.
특히, 진시황은 한반도의 역사흐름과 밀접한 관계.
진에게 멸망한 고조선 1차 유민들은 왜로 건너간다.
왜 최초의 신무천왕은 고조선의 1차 유민들의 후예.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에 창건한 오가 제국(가락국)
신라에 합병후 2차로 왜로 건너가 이자나키 신화 창조.
갑비고차(강화도) 유민과 가야 연합국 유민이 세운 왜.
강화도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군사적 요충지.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 한성이 함락
하여, 고구려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고,
강화도 또한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갑비고차'라고 하였다.
훗날 신라에 패망한 백제세력이 일본에 망명
백제 망명정부 및 조선족 유민이 창건한 일본.
일본은 조상이 동이족 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여, 일본 역사를 <신도와 마쓰리> 신화로 각색.
'혹시, 진나라와 우리 조상은 같은 민족 아닐까?'
진시황에 관한 기록을 보면 떨쳐버리기 어려운 느낌.
동이민족이 조상인 진시황은 우리나라와 핏줄이 같다.
진시황은 스스로 한반도의 민족을 같은 핏줄로 여겼다.
진시황 당시에 진나라는 한반도와 문화교류를 한 듯.
진시황이 지리산에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것이 한 예.
하여, 진시황에 관한 기록을 여기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진시황은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중국을 통일한 황제.
단군의 고조선이 무너진 직후 황제 칭호를 처음 썼다.
진시황 천하통일 전까지 중국은 소국들이 난립했었다.
단군 신검 역시 진시황 이전에 소국들을 거느린 황제.
고조선 영토는 진나라 영토와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나라는 고조선 역사와 상호 무관할 수 없다.
진시황은 한반도 정치, 문화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
삼국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중앙집권 정치제도.
고조선이 무너진 이후 한반도는 중앙집권 세력이 지배한다.
진시황이 불노초를 찾으려던 집념에 관한 일화가 유명하다.
'진시황이 지리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한 것은 사실일까?'
진시황은 어떠한 인물이기에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을까?
......................진시황.......................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원래 후계자가 아닌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다.
거상 여불위 후원에 힘입어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다.
이때 진은 중국 북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지역 나라까지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산지로 이루어진 서부 변방에서의 강력한 위치 때문에
진은 전체주의적인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로 발전.
BC 238년 공식적으로 친정을 선언하기 전까지
진나라는 사실 상 여불위가 정권을 담당했다.
진시왕은 왕으로서 그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어머니와 정을 통한 반대파의 신하를 살해하고
여불위를 제거한후 이방인 추방 법령을 폐지했다.
진나라는 여섯 경쟁국 및 제(齊)나라까지 멸하고
BC 221년에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게 된다.
그는 자신을 시황제라 선언하고 중앙집권화를 확립
또한 그 이전 진나라에서의 봉건세력을 철폐하고,
각지의 부호들을 수도 셴양[咸陽]으로 이주시켰다.
도로와 운하망,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건설.
BC 220년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 조직을 감독하며 신성한 여러 지역에서 제사
각지에 제국통일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을 세웠다.
BC 219년 그는 계속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유가들은 그 조치들이 사기성 짙은 행위라고 강력 비난
이로 인해 그들 가운데 460여 명이 진시왕에 의해 처형.
옛 봉건적 질서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논쟁
BC 213년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었다.
시황제 말년에는 측근들의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
3차례 암살기도 후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근 금지
신적인 존재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다가 BC 210)년에 죽었고,
산을 깍아내 우주의 형태를 본떠 만든 거대한 능에 묻혔다
강력한 지배자가 죽자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들이 항쟁
결국 BC 206년 진은 붕괴되었고, 황족들이 제거되었다.
그에대한 기록은 진을 계승한 한(漢)나라에서 나온 것.
한나라는 유교를 숭상했으므로 법가를 중시한 진을 비방
그가 여불위 아들이라는 기록도 그시대의 조작인듯 싶다.
그가 지나치게 잔인했다거나 인격파탄자였다는 비방 등은
법가 철학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각색된듯 보인다.
시황제는 확실히 위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전제적인 지배와 가혹한 형벌은 법가사상에서 나온 것.
전통적인 역사서에서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교양 없고 미신적인 사람으로서 취급했던 그.
당시 그가 실시한 제도화된 관료 행정구조.
역대 국가들은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부인
사실상 후대 국가들의 통치기반이 되었다.
.............................................
진시황은 13 살에 '정 호랑', 왕으로 등극하여, 39 세에 천하통일.
말년엔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불로장생 불로초를 찾기에 집착했다.
3000 동자를 풀어 동해 건너 지리산에서도 불노초를 찾았다는 기록.
'그당시 진나라에서 동해라고 부른 바다는 한반도 서해.'
기원 전부터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하루 한석(30 kg) 분량 서류를 결재할 만큼, 치밀했던 정치인.
극단적 합리성과 비합리적일 만큼 낭비벽 심했던 양면성 성격의 소유자.
만리장성, 화려한 아방궁, 묘역 둘레 2.5km의 시황릉이 그가 남겼던 유물.
시황릉 속의 알렉산더 마케도니아군을 꺾었던, 직사각형 방진 유물도 유명.
결국, 지리산에서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50 여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진시황이 단명했던 이유는 수은 독성에 중독된 탓이라고 한다.
시황릉 천정은 진주로 장식한 별천지가 고래기름 촛불 빛에 영롱.
시황릉 무덤 안의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시황릉 바닥에는 수은을 쏟아부어 흐르는 강물을 장식했다고 한다.
시황릉은 진시황이 죽고나서도 몇년간 공사를 계속할 만큼 큰 규모.
진시황이 궁궐에서 거느린 시종들까지 함께 생매장했다고 전해온다.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죽은 사람의 부인을 미망인이라 한다.
미망인이란 부계사회에서 신분이 높은 과부에 대한 높임 말.
미망인(未亡人) 이란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죄인'이라는 뜻.
'미망인은 한반도 부계사회에서 순장 풍습의 상징.'
한반도 고대국가 왕이 죽으면, 후궁들까지 생매장하던 풍습.
과거 중국에서 남편이 죽을 때 그 아내를 함께 묻는 순장 풍습.
남편과 함께 무덤에 묻히지 않은 부인을 죄인 취급해 생긴 단어.
'중국과 한반도의 옛 풍습이 일치함을 뜻하는 미망인.'
진나라 순장풍습과 한반도의 순장묘는 유사한 점이 있다.
혹시 먼 옛날에 같은 조상에서부터 비롯된 풍습이 아닐까?
하여, 한반도의 순장묘 지산동 44호 분을 여기 소개하려 한다.
...................한반도의 순장묘 지산동 44호분.................................
한반도에서 궁궐 시종들까지 생매장한 순장무덤은 고령에 있다.
'전설 속의 나라' 대가야의 각종 토기와 금관이 출토된 순장 무덤
고령의 70 기 고대 순장무덤은 슬픔으로 가득한 여인을 연상시킨다.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의 손에 멸망한 대가야 500년 역사.
대가야는 건국신화부터 여인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신 이비가를 맞이하여 대가야의 왕인 뇌질주일을 잉태
대가야를 건국했다는 설화가 적혀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가야의 문화는 백제의 우아함이나 신라의 화려함과 다르다.
각종 철기 장식품과 토기류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
철기 문화가 발달한 대가야가 시작되는 지점은 고령군 야로면
거창과 합천 해인사 가는 길에 있는 대장간과 화로 유물 흔적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다곽순장묘.
무덤방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개의 무덤방에 30명을 함께 매장.
사후에도 생전의 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믿음의 매장풍습
고령의 무덤은 모두 산등성이에 있고 고분가는 길은 산책로.
현재 발견된 무덤은 200기 정도이고 그중 70 기를 재현했다.
지산동 고분군으로 오르는 길은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시작.
전시관에는 왕이 묻힌 주실 외 32개의 소형 무덤이 원형 재현.
순장무덤 안 22개 인골에는 머리를 둔기로 때리거나 묶인 흔적
순장에 순순히 응하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시관 뒤편 돌계단 따라 하늘을 향해 굽이 굽이 봉우리 고분들.
'하늘을 향해 봉긋 솟은 무덤들의 형태는 달을 순장한 듯..'
달은 '여인의 상징'이자 인류의 조상이 유래된 곳이라도 한다.
지산동 고분 44호에는 부부, 부자지간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있다.
살아 누린 부귀영화를 죽어서까지 영원히 누리고 싶었던 흔적이다.
매년 천왕제를 지내기 위해 고천원지를 찾는 일본인이 많다.
고령이 일본 황실 선조의 고향이라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옆 성보박물관은 해인사와 조계종 12교구 말사의 유물관
이곳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나타나며
부도를 지나 10분 가량 올라가면 사찰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너머 연못 영지를 지나면 해인사의 중심인 대적광전 앞.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은 문 하나를 더 통과해야 나타난다.
16년에 걸쳐 만든 팔만대장경은 그 제작과정이 경이롭다.
제주 거제 울릉도 후박나무를 수년간 바닷물에 쪄서 진 빼고
이를 다시 수년간 그늘에 말린 후 판목으로 정성껏 다듬었단다.
그러나, 아직 팔만대장경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수수께끼.
'오늘날까지 손상되지 않았던 과학적인 보존방법.'
목제를 다듬는 기술과 보관방법이 일본으로 건너간 듯 하다.
아울러, 지산동 44호분 순장무덤은 일본 가부장 제도의 뿌리.
고령은 지금도 백자 토기를 비롯해 딸기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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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아방궁은 전국에서 뽑혀 온 미녀들 대기실만 600 개.
진시황은 늘 침소를 옮겨다녔지만 죽을 때까지도 다 못 다녔다.
진시황은 말년에 코가 문드러질만큼 흉했는데 성병 탓이란 구전.
도에 지나칠 만큼 주색을 탐했던 진시황.
패망왕조는 새 왕조에 의해 그 역사가 왜곡되기 마련.
아방궁은 기록에는 있지만, 유적이 없어 신빙성은 미궁.
아방궁은 진시황이 통일한 육국(六國)의 궁전을 본뜬 육국궁
동서 700m, 남북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1만 여명을 수용.
죄수 70만을 동원해 건설했으나 진시황 생전에도 미완성 규모.
BC 207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3개월 동안 불탔단다.
신상필벌 정책을 바탕으로 인재를 모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진시황의 강력한 중앙집권 군주제는 연합국 통치형태보다 강했다.
훗날, 아시아 고대국가들은 진시황의 중앙집권 군주제를 채택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과 권모술수로 진나라를 통째로 삼킨 여불휘.
주체사상이 없었던 진나라는 두 영웅의 시대로 명백이 끊기고 만다.
진시황과 여불휘는 정경유착의 현대국가 체재 및 운영 방식의 근간.
진시황과 여불휘의 정경유착은 세계 최초
당나라 신라 왜 무역로를 연 해신 장보고.
장보고가 무너지자 해상권은 왜구들이 장악.
왜구란 고대중국, 한반도 일본을 오가던 무역군단.
중국 왜, 한반도 왜, 일본 왜를 통털어 왜구라 지칭.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 후 유래된 왜.
동아시아 해상무역에 종사한 고조선 패망 세력들.
중국과 우리나라는 농업 정책 위주의 농본 국가.
명나라와 고려가 농본정책을 펴며 해상봉쇄령 선포.
사실상 중국 한반도에서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상인들.
일본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해상무역의 거점을 확보.
명나라와 고려를 무력으로 침입하며 무역활동을 전개.
이 무렵부터 왜구는 일본 해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왜구 상행위로 무역적자 폭이 컸던 명나라.
국가 경제가 위태로워지자 왜구 무역을 억제.
중국 명나라 때에는 해안봉쇄령을 내릴 정도.
한반도 고려에서도 공도령을 내려 해안 봉쇄.
무역 항로가 봉쇄된 왜구들이 극렬하게 반발.
이조는 삼포를 개방해 왜구의 무역활동을 승인.
왜구는 일본 춘추전국시대 토호세력과 정경 유착.
500척 이상의 군사력까지 갖춘 해상군단으로 발전.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
'중국 명나라와 고려 정권을 위협했던 왜구.'
한편, 한반도는 개성상인 군단이 고려 왕실과 유착.
그러나, 일본 토호세력들과 정경 유착 왜구에 밀린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무역을 제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국력 약화.
고려가 패망하게 되는 커다란 원인으로도 작용.
하여, 고려와 정경유착한 개성상인도 점점 쇠퇴.
...................개성상인........................
개성 상인의 뿌리는 패망한 발해의 동경 상인들.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의 도읍 개성에 유입되었다.
그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성상인은 패망한 진나라 유민들.
중국 격변기를 피해 한반도로 유입.
진나라 유민들은 한반도에 진국을 건설.
삼한시대에 진한이 바로 진나라 유민들.
진한은 신라에 흡수된, 지금의 경상도 일대.
훗날, 당나라와 신라는 상호 활발한 교역.
신라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개척자.
그 해상왕국의 뿌리는 진나라로부터 이어진 듯.
'따라서, 그 역사적인 뿌리가 깊은 개성상인.'
고려와 이조시대에 개성상인(송도상인 또는 송상)
개성상인은 시전인(市廛人)과 사상(私商)으로 분류
사상들은 이조 후기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인 상업망
송방을 통해 각 지방 특산품을 매점하거나 판매했다.
개성상인은 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고,
오늘날 복식부기와 비슷한 개성부기(開城簿記)를 고안
상술이 뛰어났으며 주요한 상품은 의류·도자기·인삼
일제때 근대 공업제품을 취급하는 일본상인들에게 압도
그러나, 개성, 종로에서 일본상인과 대항하여 단결했다.
상인의 종류에는 객주(客主)·도상(都商)·산상(散商)
용인(傭人)으로는 사환(使喚)·차인(差人) 등이 있었다.
개성상인의 특성 5 가지,
1. 골짜기 골짜기 찾아가서 판매하는 상인,
2. 팔 물건과 살물건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인,
3. 한푼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십리를 가는 근성,
4. 상인 간에 서로 서로 공동체 의식을 갖는 연대감.
5. 생존과 이윤에 대한 정보를 중요시 하는 유목민 정신
개성상인의 5대 정신
1.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2.한가지 업종을 선택해 그 분야 최고 기업으로 키운다.
3.장사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용을 지킨다.
4.자식이라도 능력이 모자라면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
5.기업은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해야한다.
개성상인의 정신은 중국인 상술을 떠오르게 한다.
개성상인은 옛부터 중국을 오가며 생업에 종사했다.
하여, 상인에겐 옛부터 국적보다는 상권이 중요했다.
산동반도 - 강화도 - 개성 - 인천 - 여수 -김해 - 왜.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 상권을 장악했던 '개성상인'.
고대국가 영역다툼도 치열했지만 상권다툼도 치열했다.
장보고 이후 고려 이조 구한말 근대 한반도 상권의 핵.
개성 상인의 주종 상품은 오늘날까지 유명한 고려인삼.
산동반도와 거리상 가까운 강화도는 수출용 인삼 원산지.
개성 상인은 반야봉의 산삼도 중국에 수출하지 않았을까?
일제시대에는 종로 민족자본을 형성해 일본 상권과 대항.
이조 초기에는 고려왕조의 부흥을 위해 이조 정권과 대항.
이조시대에는 개성 사람을 중요한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막강한 재력이 이조 정권을 뒤엎을까 두려웠던 탓.'
국가상대로 거래하는 거상들의 재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
정경유착으로 밀착된 먹이사슬 고리는 '보이지 않는 큰 손.'
특히, 첨단무기 취급상들은 국가간의 전쟁 승패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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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말기에 전란의 격변기를 피해
진나라의 유민들이 한반도로 몰려든다.
중국은 진나라가 무너지고 한나라가 장악
그 혼란기에 한반도의 정세도 크게 바뀐다.
진나라에게 무너진 고조선 세력은 분열.
한반도에는 중앙집권 고대국가들이 득세.
삼한시대가 무너지고 삼국시대가 열린다.
진나라의 아방궁 역사는 오늘날까지 전세계 유곽문화에 큰 영향.
독일 함브루크, 네델란드 암스텔담을 비롯, 우리나라의 유곽 문화.
한반도 고대국가 구중궁궐 궁녀 및 왕의 축첩제도에도 상당한 영향.
진시황은 아방궁 모든 문에 자석 장치로 자신의 신변을 보호.
그 누구도 무기를 감춘 채 궁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기원전 자석으로 묘소 방향을 잡았고 11세기에는 항해에 사용.
자석은 아랍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유럽에 전해졌다.
자석은 철을 끌어당기는 모습이 어머니를 연상한다는 뜻.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을 때의 모습을 비유한 말.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마그네시아 지방에서 발견한 암석
'마그네타이트' 암석은 자석을 뜻하는 마그넷<magnet>의 어원
'마그네타이트'는 잘게 쪼개도 다시 새로운 N극과 S극을 가르킨다.
이 특성을 이용해 나침반을 만들었고 오늘날 자기열차도 발명한다.
진시황은 죽기 전까지 불로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법사 '서불'에게 동자 500 명을 딸려 불로초를 찾게 한다.
서불의 항로.
진시황이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던 서불.
그당시 발자취만 남긴 채 어디로인가 사라져버린 서불.
과연, 서불은 어디 어디를 거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불로초를 찾아오면 나라의 절반을 떼어준다는 진시황의 약속.
그당시 서해 항로의 성공율은 반반이라 목숨을 건 무역선 항해.
목숨 건 항해라 무역선 상인들 이익도 수십배에 달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서불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약속도 무리는 아닌 듯.
서불은 불로초를 찾겠다며.. 제주도 한라산으로 가서 신나게 유람하고
서귀포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처(徐市過處)’이라는 글을 새겨 놓는다.
서불이 그곳에 다녀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
서불은 항해한 곳마다 흔적을 남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불은 그당시 이미 서해항로를 꿰뚫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시황이 살아남기 위해 서불에게 걸었던 최후의 승부수.
서불은 서해 항해 이후 귀국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불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자신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서불은 왜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패망한 진나라 유민들도 한반도를 거쳐 왜로 유입.
우선, 서불이 한반도에서 거쳐간 항로를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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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서불은 우리나라까지 다녀간 것일까?'
참 궁금하다. 그러한 전설에 대해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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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불의 발자취...................
서불의 설화는 서귀포로 끝나지 않는다.
안덕면 대평리에도 그 족적이 남아 있다.
옛부터 중국과의 인연이 깊은 포구를 당케.
대평리는 제주에 있지만 제주답지 않은 고을.
제주시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창천 삼거리에서 오른쪽(대정 방향).
1㎞를 달려 안덕계곡 주차장그 왼쪽 방면에 대평리를 알리는 푯말
그 뒷산을 굽이굽이 흘러내려가 계곡을 낀 도로를 벗삼으면 '산방산'.
그곳이 오른쪽 차창에 스쳐간 후 바다가 보이는 산 아래에 작은 마을.
가파도 마라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병풍 절벽 동쪽 언덕 위에 하얀 집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길과 어촌이 길게 이어진 마을 풍경의 '당캐포구'
이곳을 통해 중국의 고대국가 당나라에 말과 소를 보냈단다.
정치망 어업이 성행했고, 큰 소나무가 있어 '마쓰미나토(松港)'.
대평리는 1948. 4·3 항쟁 사건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4·3 관련 젊은이들을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대피한 탓.
일본 무역상이던 이 마을 정태언 김규언씨 등의 숨은 공로.
당캐 서쪽에 조약돌 해변가! 골짜기가 막힌 곳에 있어..< 마궁굴>.
계곡 따라 500m 가량 산책로 그 끝 지점에 절벽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서불이 지나가다가 ‘서불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을 썼다는 곳.
기원전 230년에 썼다는 그 글씨는 현재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주민들은 ‘선비기돌’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절벽 만 설화를 말한다.
남제주군 대평리 당캐 ·병풍 절벽은 온갖 암석 가득한 바위 박물관.
진시황이 죽자, 서불은 귀국하면 죽을까 봐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서불은 진나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항로를 알고 있었던 듯.
서불의 무덤은 와까야마 섬에 있고 그 족적은 구례읍 서시천에도 있다.
기원전 230년 서불이 건넌 개울에 서불(徐市)을 '서시'로 잘못 읽어 서시천.
서시천은 지리산 골짜기 산동면 위안리에서 발원.
구례읍 남북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섬진강과 합류.
산동면 위안리는 중국 산동반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서시가 동남동녀 2백명을 거느리고 지나갔다는 서시천.
구례 지역의 논과 들은 대부분 서시천 유역에 몰려 있다.
섬진강 본 물줄기와 만나 사실상 구례군의 동맥역할을 한다.
넓은 모래밭이 있어 여름 피서객들의 모래찜질 장소였으나
지금은 수중보가 설치되어 낚시터로 각광받고 있는 서시천.
서시천은 서불이 다녀갔기에 붙여진 지명이 사실인 듯 싶다.
여수시 연도와 통영시 소매물도에도 서불 일행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서불 일행이 제주도, 여수, 구례읍 서시천, 일본 와까야마에 남긴 흔적.
그것은 서불 일행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던 항로가 아닐까?
진나라 - 강화도 - 제주도 - 여수 - 구례- 지리산 -섬진강 - 여수 -일본.
17세기 제주에 표류한 화란인 하멜이 이조 억류 후 일본행 탈출 항로.
<기원전 230년 서불과 17 세기 하멜>의 항로가 우연하게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불은 중국, 우리나라, 일본을 오갔던 거상이 아니었을까?
‘지혜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 - 공자.
서불은 불로초를 구했다고 해도 진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을 듯.
진나라에서 한반도를 잇는 뱃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
그 거친 서해항로를 거꾸로 거슬러 돌아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
설령 불로초를 구한다 해도 진시황이 서불을 살려줄지는 의문.
불로초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비의 영약인지도 알 수 없는 일.
서불은 진시황의 부하 그 누구라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탈출.
그당시 항해술로 진나라에서 일본까지 가기란 위험한 일.
서불은 스스로 살길을 열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한 듯 싶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면 서불은 어차피 귀국해도 죽을 목숨.
일본행 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것 아닐까?
아무튼 그 옛날 서해항로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서불이 일본항로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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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불로초의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했던, 진시황
심마니능선의 산삼 한뿌리가 중국 대륙만큼 소중했을 듯.
진시황에겐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꿈과 희망이었던 불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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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삼신산 불노초를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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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 년전 지리산 산삼은 진나라에 이미 알려진 약재.
사마천 사기에 진나라 옛 조상은 황해에서 이동한 민족.
지구 온난화로 저지대가 해수면에 잠기자 민족의 대이동.
진시황에 이르러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역사 기록.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왕조 역사를 추적해 파헤쳐 보자.
...................중국의 고대국가 왕조들...................
하나라는 중국 최고의 고대왕조(BC 2100~ BC 1600)
은나라는 중국 그 다음 고대왕조(BC 1600~BC 1046)
주나라는 BC 1066 ~ BC 771, 동주 BC 770 ~ BC 256.
하(夏) 은 주(周) 3대 왕조가 이어 중국을 지배했다는 역사.
하왕조는 고전에 기록되어 있을 뿐, 현재 발굴된 유물이 없다.
20 세기에 은나라 수도 '은허'의 발굴로 실존 왕조 였음이 판명.
은나라 전기는 기원전인 BC 1600 ~ BC 1300 년.
도읍을 은으로 바꾼 후기는 BC 1300 ~ BC 1046 년
전설 속 하왕조는 중국 전역을 휩쓴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주로 나눠 통치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
그후 17대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걸왕은 웅장한 궁전을 짓고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다.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고 장야궁을 짓고 남녀 합환의 유흥.
사기(史記)에 의하면,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퇴하였다.
걸왕은 부도덕해 도덕군자 은나라 탕왕을 하대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
결국,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했다.
당시 1년이 360일에 12개월, 1개월이 30일인, 달력이 있었다.
달력은 양력 음력을 모두 사용, 절기를 맞출땐 음력에다 윤달.
은나라 말기 주왕은 왕비 달기(己)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다.
하여, 은나라 패망후 주나라로 이어진 중국 고대국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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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기원전 770 ~403년) & 전국시대(기원전 403 ~ 기원전 221년)
진, 제, 위, 조, 초, 연, 송, 월, 오, 노, 한,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6 년)
흉노, 항우와 유방, 한(기원전 202~서기 220년), 5호16국 시대(316~439 년),
남북조 시대(서기 439~589), 수(581~618), 당 618~907), 오대십국(907~960)
송(960~1279), 원(1279~1368), 명(1368~1644) , 청(1644~1911), 중국(1912~),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역사와 맛물려 돌아간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공자.
공자는 주왕을 섬겼지만 그 폭정 탓에 물러난다.
공자가 은나라에서 물러난 결정적 원인은 달기 탓
훗날, 공자의 사상은 이조의 유교사상으로 정착한다.
하여, 달기는 한반도의 역사에 간접적 영향을 끼친 인물.
달기는 중국 역사상 양귀비와 쌍벽을 이루는 미인
음란하고 잔인한 독부로 주왕을 사로잡은 왕비이다.
주왕을 사로잡고 은나라를 망하게 한 달기는 누구일까?
.............................달기.......................................
여러 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화장법.
즉 오늘날 연지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던 전설속의 여인.
‘은행알과 같은 눈, 복숭아 같은 뺨, 눈꽃 같은 피부.
도화장(桃花)이란 연지를 바르고 주왕을 미혹시켰다.
“달기야말로 진짜 여자.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겪었지만
달기에 비하면 목석에 불과하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여자.”
오랑캐 나라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
주왕은 달기에 대해 찬탄하며 달기와 <주지육림>에 파묻혔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 덩어리를 걸어 숲을 이루게 한 후
수많은 젊은 남녀로 하여금 벌거벗고 서로 희롱하게 하였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한데에서 비롯된, <주지육림>
주왕은 숯불 위에 구리봉을 걸쳐 놓고 죄인에게 걷게 했단다.
기름 바른 구리봉에서 미끄러져 타 죽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이는 잘 웃지 않는 왕비 달기를 웃기기 위한 잔인무도한 놀이였다.
그 이글거리는 숯불 위 구리봉 위로 맨발로 걸어가는 죄수의 모습.
절박함속에서 발버둥치게 하는 형벌이라는 뜻의 포락지형(烙之刑)
달기는 높은 누각에서 그 죄수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웃었다고 한다.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천하절색이었지만 착하지 않았던 듯.
5년간 노나라 정치가로 있다가 스스로 물러났던 공자.
그 제자들이 저술한 논어에 <달기에 관한 일화>도 등장.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사직을 권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은 마땅히 사직하셔야 하겠습니다.일찍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도 처음에는 총명하고 뛰어난 왕이었으나 달기(己)에게 빠져 포락지형이라는 형벌을 즐기다가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에게 토벌되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지금 노나라의 임금과 권신이 모두 여색에 빠져있으니 노나라의 사직도 은나라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논어는 한반도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공자의 사상."
삼성 그룹 창업자 故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술회한 말이다.
<이조가 고수한 유교사상>의 근본 뿌리는 공자의 논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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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지리적 여건상 역사적으로 홍수가 빈번했다.
중국이 대홍수가 빈번했던 시기는 우씨 왕조의 하나라.
고조선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대홍수를 겪었던 기록
하나라와 고조선은 홍수를 잘 다스린 황해 저지대 민족.
한반도에 우씨 성은 고대중국 하나라 유민으로 추정된다.
즉, 서해 저지대의 하나라 유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해온듯.
하나라의 하씨 은나라의 은씨 주나라의 주씨 진나라의 진씨
중국 최초 고대국가 은나라 왕실인 우씨 역시 한반도의 성씨.
우, 하, 은, 주는 중국 고대국가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성씨.
'우리나라 단기 역사는 은나라와도 일치.'
달기의 연지 역시 우리나라 여인들의 전통적인 화장법.
따라서 4천년 전 은나라의 조상들 역시 황해 저지대 민족.
황해가 물에 잠긴 후에는 섬들을 잇는 항로로 오고갔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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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은 고대 중국에서 상고시대를 지배한 종족이었다.
그 단서는 일만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상나라에 있다.
기원전 17세기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의 대부분이 동이족
중국의 학자들은 요임금, 순임금이 동이족이라 증언한다.
요순이라면 공자가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제왕이다.
유교사상은 동이족에서 나왔고 산해경이 동이족의 경전.
산해경은 고대신화를 기록한 신선 도교사상의 원전이다.
초나라 굴원이 쓴 초사는 산해경의 집대성으로 알려졌다.
초나라에서 노자는 도덕경을 썼고
초나라는 상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초나라에는 태양신과 조상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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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마지막 왕은 악명높은 폭군 걸(桀 : BC1808~1766)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화려한 누각과 궁전에서 매일 술과 여자.
이러한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성탕(成湯) 제후.
성탕은 걸왕을 내쫓고 창건한 상(商)나라가 곧 은(殷)나라이다.
성탕이 출생한 가계의 내력에 관한 설화.
고대 삼황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제곡고신의 여러 부인 중에 간적(簡狄)
어느 날 목욕하다가 하늘의 현조(검정새)가 떨어뜨린 알 하나를 주웠다.
간적이 이를 받아먹고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설이다.
훗날 순왕과 하나라 우왕 때 상지방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리고 그의 후손 성탕이 하나라 말에 상나라를 세웠다.
앞서 언급한 검정새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말하며,
은나라 역시 그 뿌리가 동이족에 있음을 뒷받침하는 설화.
특히 알에서 태어난 설의 후손인 성탕, 즉 탕왕은 성씨를 자子
자는 12간지 중에서 북방을 의미하고 북방은 검정색을 뜻하므로
현조와 동일한 의미이다. 은나라 뿌리에 대해 중국학자들이 한 말.
중국학자 양관 - “현조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의 조상신이다.”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중국학자 필장복 - “상나라 사람은 동북아 민족과 밀접한 관계.”
은나라뿐 아니라 그 이전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 지류.
은나라는 거북의 등껍질과 동물의 뼈 등에 새긴 갑골문자.
은나라 역사를 서술한 단군세기 등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특히 갑골문은 주변의 다른 나라에 관한 표기.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등등.
이 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키는 명칭인 듯 하다.
중국역사 지도의 고조선은 산동성에 인방으로 표기
갑골문에는 은나라가 귀방을 정벌했다고 기록이 있다.
이는 후한서 및 단군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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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백제와 고대 일본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
백제는 4C 근초고왕 ~ 7C까지 300년간 왜 열도를 통치,
왜 열도에 정착한 백제 후손들이 본국에서 문화를 수입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인」에 관한 역사.
진사 왕과 아신 왕(침류왕 태자) 숙질간 권력투쟁
당시 왜 열도의 아신 왕 추종세력이 진사 왕을 제거.
신묘년 왜는 그곳에 정착한 한민족이 창건한 통합국가.
일본 천황가문은 物部系, 大伴系로 크게 나눠지고
物部系의 가계는 근초고 왕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묘년에 건너온 武內宿 니라는 백제계 집안이 천무의 선조.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백제 역사에서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비류백제는 한반도 남부 및 왜까지 진출했던 해상왕국.
일찌기 일본에 고대 국가를 건설한 민족이 비류 백제인
일본에 세워진 고대왕조는 비류 백제의 망명정권이었다.
백제 = 백가제해(百家濟海) = 바다를 널리 지배했다는 뜻.
왜 뿐 아니라 중국 산동지방 양자강까지의 영토가 백제권.
고대 일본은 7C경까지 거의 전부가 한반도 이주민 문화.
일본이 중국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인 시기는 7C 후반이다.
일본서기가 편찬 된 8C 초에는 황국주의 사상표현이 많다.
일본의 도시 '나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국가란 뜻이다.
망명백제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일본에 세운 망명 정부.
나중에 백제의 왕족과 귀족이 일본의 실질적 황실 귀족.
또한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려 촌을 이룬 곳이 있어 지금도 일본 지명은 고려 촌.
일본은 백제 고구려 고조선 국토 수복 명분으로 전쟁 도발.
일본 천황은 성이 없지만 조상이 김해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천황이 스스로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부터 일본까지는 모두 한민족인 동이족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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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은 고대부터 해상무역 왕국,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을 놓고 각축전.
17세기 네델란드 상선이 남해에서 조난.
우리나라에 첫발을 밟은 서양 외국인
17세기 이조에서 억류생활을 한 하멜.
이조를 서양에 처음 알린 하멜 표류기.
화란(네델란드)는 환경변화로 해수면 속에 잠긴 나라.
성서 속 '소돔과 고모라 일대'가 사해 속으로 잠겼듯.
네델란드는 전 국토의 1/3 이상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
네델란드는 저지대 민족 중에서도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는다.
특히, 화란인의 상술은 유태인, 중국인과 함께 세계를 지배한다.
네델란드는 풍차로도 유명하지만 눈물의 바다로 더 명성이 높다.
...............................눈물의 바다.......................................
국토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에 넓은 바다에 3 중 뚝을 쌓았다.
바다와 저지대의 흙을 파서 눈물로 뚝을 쌓아올려..눈물의 바다.
예전에는 풍차를 이용해 '눈물의 바다' 물을 뚝 밖으로 뽑아냈다.
이제 풍차 대신 전력으로 물을 뽑아내기에 풍차는 관광자원일 뿐.
'눈물의 바다' 밖에는 뚝 그 밖에는 또 다시 바다이고 뚝이다.
그 뚝 밖에 비로서 높은 바다가 있을 정도이기에 '눈물의 바다.'
눈물의 바다는 계단식으로 먼바다로 갈수록 높아지는 구조이다.
'늪지대 육지를 바다속에서 건져 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신이 버린 땅을 인간이 살려냈다." -네델란드 민족의 자부심.
네델란드 수도 암스텔담에는 바둑판 줄무늬 같은 수로가 있다.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늪 지대 흙을 파낸 수로는 배의 통로이다.
수로의 흙을 파내 돋운 땅에 건물을 지어 도시를 만든 '암스텔담'.
네델란드의 국토는 지금도 나날이 해수면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바다에서 퍼낸 흙으로 땅을 돋운다.
그렇게 사람들이 파서 만든 드넓은 '눈물의 바다'는 항구로 쓰인다.
네델란드인 즉, 화란인은 세계 경제를 지배한 3대 민족 중 하나.
그 어려운 여건을 딛고 일어나 선진국이 된 존경스러운, 화란인.
방수 조선 건축 바다 제방공사에 관한 첨단기술들은 세계 제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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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저지대에서 민족 대이동 이후 세워진 중국의 진나라.
그 뿌리는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들을 통해 밝혀진 것 같다.
그들 역시 화란인처럼 저지대에서 바다와 싸운 우수한 민족
하여, 중국을 대홍수에서 구해낸 우씨 민족이 세웠던 하나라.
하은주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국가 중 은나라는 고조선의 이웃.
중국 고대국가 은나라가 고구려라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있다.
훗날 중국 대륙을 점령했다면. 그 세력 규모가 대단했을 듯.
즉, 진나라의 조상은 황해지대와 서해지대에 살았다는 민족.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그당시 세계를 정복한 민족이기도 하다.
한반도 삼한(마한 변한 진한)이전의 원주민들과 동일한 민족.
한반도와 제주도가 저지대 육지로 이어졌을 당시의 원주민들.
하여, 제주도 낙동강 신, 구석기시대 유물이 비슷한 것 아닐까?
서해가 저지대일 때부터 한라산과 지리산은 유서 깊은 명산.
진시황이 그 역사를 알고있기에 삼천동자를 지리산에 보낸 듯.
진시황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삼천동자를 보낼 수가 있었을까?
서해와 황해를 잇는 육지 시절엔 말 타고 육로로 왕래했을 듯.
서해 저지대가 해수면 속에 잠긴 이후에는 항로로 왕래했을 듯.
'진시황이 보낸 삼천동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당시 항해술로 서해항로의 위험을 극복하지 못한걸까?
아니면, 해적들에게 서해 항로에서 공격을 당했던 것일까?
그후 서불이 500명을 이끌고 다시 온 것을 보면 풍랑 탓인듯.
서불은 그당시 진나라에 거점을 둔 거상 신분으로도 추정된다.
진나라 한반도 왜 삼국은 해상무역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반야봉 산삼은 불로초로 알려질 만큼 값비싸고 귀한 약재였던 듯.
한반도 고대국가 중에서 어느 나라가 진나라와 해상무역을 했을까?
그당시 한반도에서 해상권을 장악한 고대국가는 마한왕조 뿐인 듯.
마한은 기원 전부터 고조선과 대치해 한수 이남을 다스렸던 고대국가.
한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중국의 진나라 이전부터 해상교류했던, <마한>.
2500 년전 진나라를 오고 갈 정도라면 항해술이 상당히 발전한 나라.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까지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시대의 최대 강국.
마한은 달궁에서 패망 후 바다를 유랑하고 그 영역은 백제로 넘어간다.
그당시 신라는 진한을 점령후 변한 영역 일부도 장악했다.
이어 남은 변한영역은 김수로왕이 점령 후 가락국을 창건.
우리나라에서 삼한시대가 막을 내리고 삼국시대가 열렸다.
실크 로드.
'관리 3년이면 은자 천량을 벌 수 있다’
청나라 봉건주의 부패한 시절에 정경유착.
실크로드 상권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전 세계 상권을 누비던 아라비아 상인조차
비단장사 왕서방에게 눌렸다는 중국인 상술.
인재중심 경영, 신용제일 경영, 위기이용 경영.
'실크로드 상권장악 = 전세계 상권장악.'
왜구는 동아시아 육해 실크로드를 오간 상인.
무장 군대까지 거느린 대규모 거상들의 집단
한반도는 실크로드 동아시아 끝의 중요한 길목.
'실크 로드는 한반도 고대사와 밀접한 관계.'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해상무역로를 장악
삼국시대에는 가락국 거쳐 통일신라가 장악.
고려는 코레아로 불릴 만큼 동아시아 해상왕국.
'고려 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回回) 아비.'
고려에 정착한 대식국(아라비아 상인) 이슬람 교도.
고려가 원나라 속국일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대거 정착.
쌍화점은 1274년 충렬왕때 회회 아비가 고려에 차린 기방
당시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고려 개성상권을 장악.
당나라 송나라에서는 아라비아를 대식국이라 불렀다.
고려에서는 아라비아를 대식국이라 부른 기록이 있다.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장악.
고대부터 집단을 형성했던 아라비아 상인들.
고대사회 동아시아 해상무역 바닷길까지 장악
가야국 김수로왕 역시 아라비아 거상인 듯.
한반도에 최초로 정착했던 아라비아 왕족인듯.
김수로왕 골격에 관한 기록이 그 사실을 뒷받침.
한반도에 불교를 최초 유입한 허황후 일행.
허황후는 아유다국 공주이자 김수로왕 부인.
허황후는 마야계곡 전설의 여주인공 인도공주.
650년 이후 아라비아는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
중국은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라 하여 대식
원나라 이후 대식이란 말 대신 회회(回回 Hui-Hui)
13세기 중엽 이후 회회는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종족
고려와 밀접한 회회 실체는 이슬람화한 위구르계 종족
대식국 유민들이 고려에 들어온 첫기록은 11세기 전기
이슬람교는 7세기 아랍 예언자 마호메트가 창시.
이슬람 사료에 의하면 9세기 중엽부터 신라와 접촉
11세기 고려에 이주한 100명이 넘는 대식국 상인집단
'고려 현종 15년(1024) 대식국에 관한 역사기록'
"9월에 대식국의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다음해 9월에도 "대식만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정종 6년(1040) "11월 병인(丙寅년) 대식국 객상 보나합이
와서 수은·용치·점성향·몰약·소목 등을 바쳤다"는 기록.
대식국은 고려와 규모가 큰 무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식인들의 활동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다가
원나라가 일어난후 13세기 중엽부터 본격 고려에 진출
회회인들은 고려에 오는 몽골 공주 수행원으로 오거나,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고려 왕자 및 지배층들과 친분관계
그후 그들과 함께 고려에 와서 귀화하여 정착하기도 했다.
충렬왕비인 제국공주 시종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한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공민왕과 친분을 맺고 고려에 귀화한 설손의 아들 설장수와 설미수,
손자 설순은 고려말~조선초에 장수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고려말 회회인은 개경에 집단거주하며 원과 고려와 무역업
이조 초기까지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고려왕실과 밀착한 이들이 개성상인 뿌리 아닐까?'
그들은 고유의 종교적 문화적 습속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조 조정 하례의식에 그나라 대표로 초대받기도 했다.
1427년(세종 9) 이질문화 금지 칙령이 내린후 사라진다.
이슬람 교리는 엄격하지만 대식국의 성윤리는 문란.
아랍인은 골격이 굵고 예나 지금이나 성욕이 강하다.
하여, 변강쇠전은 대식국 상인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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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실크로드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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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로드(Silk Route)는 비단길이라고도 한다.
고대사회 비단 무역을 했던 육로와 바닷길 총칭.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준 길.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처음 사용한 말.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에서 시작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까지 이어진 무역로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까지 이르는 구간
장안을 기점으로 하면,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길
사막 북쪽(톈산 산맥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길.
남로는 파미르 고원 쿠시쿠르간에서 서쪽 쿠샨 왕국
여기부터 뱃길로 천축(인도의 옛 이름)까지 가는 길.
인더스강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는 해상무역로
북로는 강거 서쪽 이란을 지나 지중해와 로마로 가는 길.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개 국 통과.
실크로드를 보다 알기쉽고 간명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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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에서 - 둔황 - 타클라마칸 사막 - 사마르칸트
여기서 흑해 쪽 이스탄불로 이어진 유럽과의 통상로
지중해 연언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어진 아랍지역 통상로
아랍지역 통상로는 아프리카와도 연결점.
알고 보면, 세계를 하나로 잇는 실크로드.
지도상에서 완만한 커브길이 있는 직선도로.
'중앙아시아 서역 실크로드는...꿈의 길.'
꿈과 동경의 세계.. 타크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주변 고비사막의 뜨거움과 사막의 황량한 바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황갈색 비단과 같다고한다.
하늘에 우뚝 솟은 천산산맥 기슭 따라 동서 이동
옥, 아라비야 향료, 로마의 유리그릇, 카라반(隊商)
낙타 등에 타고 동서양을 오가던 실크로드 상인집단.
신강성, 감숙성 중국의 실크로드를 따라
로마의 궁정까지 운반되었기에..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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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
한 무제는 대월지 오손과 연합, 중국 북방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 교통로 확보하려 장건을 중앙 아시아에 2차례 파견.
전한 때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하여 서역과 관계 개선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 시리아 및 페르시아만까지 왕래.
실크로드 서쪽 끝을 연장시키는데 크게 공헌.
실크로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당대(618~907).
당시 중국 북방은 돌궐 세력이 중원을 위협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호가 말라 실크로드 남도가 끊겼고,
북도는 둔황에서 하미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
태종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해 동서무역을 활발히 전개
이무렵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 위구르족과 서쪽 이슬람 상인이 활발.
송대 이후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 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 시리아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
이와 함께 육로 실크로드는 점차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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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 왕조는 여러 나라와 사절 교환
민간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사신과 민간인의 왕래는 문물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 법승들 경전을 구하러 인도 여행.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현장(玄)의 역경 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의 유교 도교 불교는 당대의 3대 사상.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
등등의 종교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전해졌다.
당대 장안에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거주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폭넓게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에 전파.
실크로드는 상업, 동서 문화의 교류하는 교역로.
실크로드는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잇는 포장도로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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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의한 세계 각국 유민들.
지리산 일대를 비롯 강화도 제주도.
대부분 실크 로드를 오가던 거상 집단.
실크(비단)는 명주실로 짠 천연 섬유.
우리나라 실크 원조는 은나라 기자(箕子)
누에 치고 직조술을 가르친 한서(漢書) 기록.
'그후 삼한에 보급된 양잠 견직 기술.'
한반도는 실크(비단) 생산국.
뽕나무 + 누에고치 = 실크 산업.
옛부터 섬유산업이 발전한 한반도.
금 세공, 철기문화도 세계 첨단.
금관, 거북선, 세계 최초 금속활자
여수는 기원 전부터 국제 무역항.
광양은 옛부터 최첨단 제철 문화
육해 실크 로드를 잇는 화개장터.
실크로드 상인 거주지 지리산 일대.
대를 이은 소금장수 상인들 삶의 터전.
기원 전부터 왕래한 거상, 진나라 서불.
불로초로 진시왕과 진나라 절반을 흥정.
옛부터 불로초 산삼은 부르는 것이 가격.
진시황이 죽자 왜로 도망쳐 정착한 서불.
중국 왜는 당나라 실크로드 상인집단.
일본 왜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상인군단.
왜는 고대국가와 맞설 군사력도 갖춘 집단.
왜는 일본이 무역왕국이 된 원동력.
신라는 장보고가 있어 동아시아 해상왕국.
신라는 지리산 일대에 무수한 사찰을 건립.
그 경제적 원동력은 국제 해상무역이 수입원.
나당 연합군과 백제 일본 연합국 전쟁.
그 내막을 파고들면 국제무역 경제전쟁.
결국,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
당나라 수도는 전세계 민족 전시장.
신라의 당 유학파는 스님들과 최치원.
이조 말 청나라 유학파로는 추사 김정희.
세계 첨단문명을 한반도에 들여온 불교.
지리산 사찰 고승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
경전을 국내에 들여오며 세계 첨단 문물을 유입.
따라서, 지리산 일대는 선비의 고장.
역사적으로 이인을 많이 배출하게 된듯.
해외 선진문명이 일찌기 유입된 남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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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추역활을 했던 지리산의 사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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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는 전세계 문명이 한반도로 들어온 통로.
대부분 중국 서적을 통해 유입된 고대사회 첨단문명.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싹튼 원동력은 실크로드.
'고대사회 한문은 당시 동아시아 공통어.'
첨단문명을 받아들이려면 한문 공부는 필수.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면 한문은 필수 전공과목.
하여, 이조시대엔 어릴때부터 서당에서 한문공부
사실,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 뒤섞인 민족.
이민족에게 정권을 빼앗긴 역사도 수두룩한 중국.
중국 역사상 유명인물도 한족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
5,6세기 중국은 선비, 흉노, 저, 갈, 강종 5개 이민족
5호 16국의 혼란기를 거쳐 이민족과 한족은 연합 체제
이민족마다 독특한 정치, 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중국은 이민족간 혼인이 성행하여 광범한 혼혈민족.
차츰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질 정도.
한족은 양자강 유역의 동진 정권이 명맥을 유지
오랜 분열 끝에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정권.
한화정책을 강력 추진하자 북방 6진 군사들이 반란.
뒷날 수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성을 지키려 거병.
이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제국을 향한 소용돌이
6진 중 하나인 무천진 군벌 세력이 수나라를 건국
양견(楊堅, 수문제)과 당나라를 세운 이연(당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李浩) 이씨 집안
원래 대야씨(大野氏) 성을 가진 호족집단
중국이 자랑하는 수당제국 황제들은 오랑캐.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를 정복할때 황제가 직접 전투 지휘
중국 관념에서 볼때 대단히 드문 유목민 호족의 관습
당태종은 군주 칭호인 천자보다 칸 호칭을 선호했다.
유목민 군주 칸(可汗)에 天을 덧붙여 천가한(天可汗)
당 고종이 아버지 후궁인 측천무후를 황후로 삼은 일.
당 현종이 며느리를 귀비로 삼은 일은 유목민 호족 관습.
중국적인 관습이 지배하는 한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불륜.
'북방 유목민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혼례풍습.'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
여권을 존중하는 유목민 전통이 당나라에 끼친 영향
당나라는 전통 중국이라기보다 국제적인 제국의 연합.
따라서,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비 중국적 국가.
그 이유는 유목민의 개방적인 풍습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과 동아시아 각국 인종 전시장.
각각 자기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었다.
역사상 우리나라는 패망 중국 왕조들의 피난처.
우리 민족 중국왕조 성씨들이 그 사실을 뒷밭침한다.
특히, 한반도의 고대국가 삼한은 중국 역사의 축소판.
지리산 일대의 전통적인 풍습은 고대 중국왕조들과 일치.
종교도 페르시아 마니교, 유럽의 네로토리우스교 등
유목민의 뿌리깊은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적인 현상.
신라의 최치원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파 선비 및 승려들.
'한반도에 첨단문명을 들여왔던 선구자들.'
현재 한반도는 실크로드 선상에서 중요한 위치.
역사상 전세계 강대국들이 경쟁해온 전초기지.
해상과 육로를 잇는 정치 경제 전략적인 요충지.
귀화 성씨.
단군은 우리 한(韓)민족이 세운 나라의 첫 임금
천제(天帝) 환인(桓因) 손자이며 환웅(桓雄) 아들
BC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개국
엄밀하게 따져, 한(韓)민족은 한 핏줄은 아니고
유사 종족, 동일 언어권을 갖고 있는 민족 연합.
한반도에는 옛부터 외국인이 귀화한 성씨도 많다.
'한반도 250 성씨 중 130 성씨는 귀화성씨.'
특히,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귀화.
외국인이 귀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초,
그 당시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다.
고려시대 귀화인은 송나라 사람을 비롯
여진, 거란, 베트남, 몽골, 위구르, 아랍
이조시대에는 명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귀화.
이들이 귀화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착(漂着),
종교홍포(宗敎弘布), 투항(投降), 구원(救援), 상사(商事),
전란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외래 귀화 성씨를 크게 나누면
중국계,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 등으로 분류 할 수 있다.
柳(문화 유씨.고조선)
車(연안 차씨.고조선)
全(천안 전씨 등 28본.고조선)
趙(평양 조씨 등 5본. 고조선)
南宮(함열 남궁씨. 기자조선)
景(태인 경씨.기자조선)
琴(봉화 금씨.기자조선)
强(충주 강씨.기자조선)
魯(밀양 노씨등 9본.기자조선)
弓(토산궁씨.기자조선)
韓(청주 한씨.마한)
奇(행주 기씨.마한)
鮮于(태원 선우씨. 마한)
徐(달성 서씨 등 10본.마한)
余(의령 여씨.마한)
徐(남양 서씨.당에서 신라)
徐(당성 서씨.신라)
徐(절강 서씨.명나라-정유재란)
소소계 : 18성 63본관
.......삼국시대 이전 귀화성씨...........
李(고성 이씨.BC108년)
羅(금성 나씨 등 15본.BC 200)
張(울진 장씨.전한)
蘇(진주 소씨. 원삼국)
.........소계 : 4성 18본...........
......삼국시대 귀화성씨...........
都(성주도씨.고구려)
黃(평해황씨 등4본.28년)
姜(진주강씨 등 3본.598)
金(진도김씨.265년)
庾(무송유씨.4세기)
孫(안동손씨.5세기)
.....소계 : 6성 11본..........
......통일신라 귀화성씨.........
李(연안이씨.660년)
丘(평해구씨.663년)
嚴(영월엄씨.750년께)
盧(광산노씨 등 9본.755년)
白(수원백씨.780년)
周(상주주씨 등 2본. 786년)
南(의령남씨 등 17본.786년)
皇甫(영천황보씨.신라말)
安(죽산안씨 등 5본.807년)
張(안동장씨 등 48본.8세기)
呂(함양여씨 등 4본.877년)
孟(신창맹씨 등 2본)
崔(충주최씨.889년)
廉(파주염씨.907년)
李(성주이씨.미상)
辛(영산신씨 등 2본.미상)
成(창녕성씨.미상)
吳(해주오씨 등 14본.950년께)
.......소계 : 19성 125본........
.......당나라 8학사 귀화성씨........
元(원주원씨.643년)
魏(장흥위씨.649년)
洪(남양홍씨.649년)
房(남양방씨.649년)
徐(남양서씨.649년)
邢(진주형씨.649년)
方(온양방씨.669년)
卞(초계변씨.743년)
公(김포공씨.763년)
諸葛(남양제갈씨.836년)
林(평택임씨 등 8본.840년)
殷(행주은씨.850년)
司公(효령사공씨.897년)
宋(남양송씨.926년)
陸(옥천육씨.927년)
玉(의령옥씨. ?)
吉(해평길씨 등 2본. ?)
田(남양전씨 등 2본. ?)
....소계 : 18성 27본.........
....고려시대 귀화성씨....................
李(태안이씨.927년)
尹(무송윤씨.960년께)
韋(강화위씨.960년께)
表(신창표씨.960년)
連(전주연씨.고려 초)
禹(단양우씨.고려 초)
任(장흥임씨.정종)
池(충주지씨.960년)
劉(거창유씨 등 4본.고려 초)
杜(두릉두씨.1004년)
牟(함평모씨.현종 때)
李(안성.문종 때)
愼(거창신씨.1068년)
蔣(아산장씨. 예종 때)
鄭(서산정씨.예종 때)
沈(풍산심씨.1110년)
余(의령여씨.1120년)
毛(함평모씨(광주).인종때)
郭(현풍곽씨.인종 때)
具(능성구씨 등 18본.인종 때)
鞠(담양국씨.인종때)
夏(달성하씨. 인종 때)
宋(여산등4본.인종때)
魚(함종어씨.고려 중엽)
閔(여흥민씨.고려 중엽)
簡(가평간씨.의종)
于(목천우씨. 고려중엽)
桂(수안계씨.고려중엽)
章(창녕장씨.고려 중엽)
李(태원이씨.고려 중엽)
伊(은천이씨.고려 중엽)
陳(여양진씨 등 6본.고려중엽)
葉(경주섭씨.고종)
賓(수성빈씨.충렬왕 때)
朱(신안주씨 등 4본.1213년)
宣(보성선씨.1382년)
唐(밀양당씨.고려 말)
李(상산.고려 말)
明(연안명씨.1371년)
昇(창평승씨.1371년)
睦(사천목씨.고려)
墨(광령묵씨.고려)
凡(안주범씨.우왕 때)
燕(곡산연씨.고려)
芮(의흥예씨.고려)
陳(양산진씨등2본.공민왕)
秦(진주진씨.고려)
溫(금구온씨 등 2본.고려 말엽)
尙(목천상씨.미상)
.......소계 : 50성 84본.....
..........몽골계 : 연안 인씨(延安印氏)..................
시조 인후는 1275년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귀화.
평양군, 자의도첨의사사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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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계 : 청해 이씨(淸海 李氏)
일본계 :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
...........위그루계 : 경주 설씨(慶州)..............
원효대사 아들 설총이 시조로 되어있는 경주 설씨.
신라 왕실에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위구르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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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계 : 덕수 장씨(德水張氏)............
평택시 팽성읍은 600년전 고려에 귀화한 아랍인 마을.
고려말 의랑 벼슬을 지냈던 덕수 장씨의 중시조 장우.
아직까지도 팽성읍의 주민 70%는 덕수 장씨인 집성촌.
이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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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계 : 화산 이씨(花山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타고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화산 이씨가 유래.
국수, 쌈, 목기.등 한반도 문화에 큰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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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대씨는 패망 발해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
우리나라에서 100만명 이상 성씨는 5 개 성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귀화 성씨로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
희귀 귀화성씨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있는 성씨들
천녕 견씨(川寧 堅氏)가 대표적인 그러한 사례.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 견권을 시조로 모시고 있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
김충선 기념관(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왜장).
희귀 성씨 중에는 옛 외국 왕족의 성씨도 많다.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이조 개국후 탄압을 피해 개성 내씨로 바꾼 성씨.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한 귀화성씨.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있는 귀화 성씨들도 참 많다.
개성 노씨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이조에 귀화해 강음에 정착한 귀화 성씨.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 김충선(金忠善)
사야가는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몽골인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연안 부원군에 봉.
온양 방씨(溫陽 方氏)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
남양 방씨는 고려 때 벽상공신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개성 방씨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 공주를 따라 온 방두현
각각 방씨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 지용수(池龍壽)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 남궁(南宮)
독고, 사공(司空),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
그 외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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