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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틀었다 - 길(Camino) 아닌 길((Littoral)로
어차피 이루지 못하는 잠이다.
뽀르뚜길에 들어선 이래 알베르게의 크고 작은 독실을 차지하는 밤의 연속이라 누구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자유로웠는데 간 밤은 그 절정이었다.
그러나, 까미노의 중단 없는 완주만 거듭 다짐두었을 뿐 어렴풋이 보이는 듯 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무엇인가 잡힐 듯 다가오다가 멀리 달아나버리는 형국의 밤이었다.
알베르게 찾아 되돌아 가기의 잇달은 반복, 내 길 안내를 하려던 지역민들 간에 재연되고 있는
시비, 음식점 사건 등에 어떤 함의(메시지)가 있을 듯 한데도 막연하니 그런 밤일 수 밖에.
만사 일장일단이라 잖은가.
한낮의 더위가 석양까지 이어지는 요즈음의 날씨에는 무더위에 걷기 힘겹기 때문에 새벽같이
거동해야 하는데도 늑장 부리는 날이 계속되고 있는 것.
새벽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북새 떨며 출발하는 부지런한 뻬레그리노스로 인해서 깨게 되기
마련인데 알람(alarm)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당 50km 내외를 걷던 때는 32km쯤은 늑장부려도 되는 구간이었으나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32km밖(뽀르뚜) 로저 교수를 약속대로 만나려면 새벽부터 강행해야 할 만큼 늙었기 때문이다.
잘못에는 징벌이 따르듯 이 아침의 늑장 3시간(출발예정시간 6시가9시로 지연되었으니까)에도
응징이 불가피할 것이다.
어느 때, 어떤 형태로 할 지는 모르지만.
어제 마감한 지점(Tourist Information)까지는 버스를 탈 요량으로 방(알베르게)을 나왔다
이미 걸었던 길인데다, 영어 잘 하고 상냥한 여인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도 할 겸.
그러나, 불과 몇분만에, 도로에 나서기도 전에 생각이 바뀌었다.
수시로 속으면서도 한달 안에 환원된다(스페인으로 돌아가니까)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으며, 또
속을 뻔 한 내 시계의 9시는 스페인 시간이므로 뽀르뚜갈 시간은 출근 한참 전인 8시다.
많이 늦은데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설상가상이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방향을 바꾸어, 헤돈다 비치로 나갔다.
해안을 따라(littoral)감으로서 잘 조성되어 있는 해변길을 두고 내륙으로 가는 해안로에 가졌던
전일의 불만도 털어내려고.
이같은 경우는 대개 비중 있는 교회를 경유하기 위함이거나 마을 간의 이해 다툼의 산물일 수
있는데 그럴만한 교회가 없고 다툴 마을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
더러는 요새(要塞)처럼 구축한 방파제 길이며 아비강(Rio Ave) 하구까지 해변으로 일관된 5km
라고 확인해 주는 지도는 왜 있는가.
주민도, 다양한 피서객도 거동하기 전인 고요한 아침의 해변.
심신이 싱싱하고 활기찬 아침의 길나그네가 속도감 있게 걷기 안성맞춤인 해변길.
충분히 익혀진 비블리우떼까-디아나-바르 앞에서 남행 해변길(Av. dos Banhos)을 따라 뽀부아
지 바르징 항(港)을 지났다.
디아나-바르에서 약 1.5km 지점인 뽀부아 지 바르징의 교회(Igreja Nossa Senhora da Lapa)를
지나면 지자체 빌라 두 꼰지(Vila do Conde) 지역이며 동명(同名) 소교구마을이다
앞 교회(Igreja Nossa Senhora da Lapa)와 사뭇 다른 모습의 교회(Igreja Paroquial do Nosso
Senhor dos Navegantes)에 걸음이 멎었다.
까미노에서 만나는 가톨릭교회는 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유사 양식의 소규모 교회들인데
이색적인 외형의 인력(引力)에 발목이 잡힌 것.
그러나, 교회 건물 주위를 한바퀴 돌았을 뿐 아무 소득 없이 떠나야 했다.
모든 문이 딛혀 있으며 열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서양 해변에 연해서 이름만 바꾸며(Av. dos Descobrimentos ~ Av. Infante Dom Henrique~
Av. do Brasil) 거침 없이 남하하는 길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아비 강(Rio Ave) 하구 지근, 해변의 요새에 다름아닌 건물이 생기있는 걸음을 또 멈추게 했다.
현재(2015년)에는 호텔과 음식점(Restaurante/Hotel)으로 전용되고 있으나 원래 요새였단다.
1570년대에 축성하였다는 요새, 상 주앙 밥띠스따(Forte de São João Baptista).
이 요새는 빌라 두 꼰지가 당시에도 뽀르뚜갈의 중요 거점이었음을 뜻한단다.
중세부터 빌라 두 꼰지의 통치자들에게 아비 강 하구의 보호가 관심사였을 만큼.
13c중반 이후 어항과 해군조선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된 이 마을(Vila do Conde).
해적의 공격에 대한 강변의 방어문제가 중요 현안이 되었고, 마침내 요새를 쌓게 되었다는 것.
공사는 1642년에 완료되었으나 1834년 이후에는 수비대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 요새.
요새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가.
20c에 들어서는 거의 버려졌으며, 음산한 이 건물에 볕이 들기는 동 세기말(1990년대).
중세의 성채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요새(Forte de São João Baptista)도 호텔과 음식점으로
탈바꿈하고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유감인 것은 여유롭지 못한 시간이었다.
세뇨라 다 기아 해변(Praia da Senhora da Guia)의 성모 예배당(Capela de Nossa Senhora da
Guia)과 긴 방파제를 다녀오지 못했으니까.
다시(까미노를 걷는 중에)는, 날자를 정한, 만날 약속을 아무와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 둘 만큼
로저 교수와의 약속이 진행에 부담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회는 더없이 반갑고 바라는 일이지만 그 날자를 촉박하게 정했기 때문에.
아비 강변(Rio Ave)이 준 추억거리들
요새의 왼쪽길, 아베니다 두 브라질(Av. do Brasil)을 따라서 하구의 공원(Parque do Castelo)을
지나 북상하는 강변길(Av. Júlio Graça)로 다리 지근까지 올라갔다.
프레게지아(freguesia/지자체의 소교구마을)인 빌라 두 꼰지(강북)와 강남의 아주라라(Azurara)
를 잇는 아비 강의 다리(Ponte Sobre O Rio Ave)다.
강을 건너기 위함이였는데, 다양한 조형물들이 깔끔하게 단장된 강변의 너른 공간을 채웠다.
이 조형물들은 '2015년 상 주앙 축제'(Festas de São João '15 / 5 a 24. Jun : 6월 5일~24일)에
출품한 프레게지아들(freguesias)의 작품이란다.
(상 주앙/São João Baptista : 세례자 요한?은 지자체 빌라 두 꼰지의 수호성인이다)
지자체의회Câmara Municipal de Vila do Conde) 주관으로 열리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high
light)는 출품된 조형물들의 콘테스트(contest).
그래서, 마을의 주민들은 조형물 제작에 일체가 되어 심혈을 기울인단다.
이같은 사실은 4년 전(2011년 5월 8일)에 이미 알게 되었다.
순방향 뽀르뚜 길(내륙길) 걸을 때였는데 지자체 바르쎌루스(Barcelos/Braga縣) 광장(메뉴'까미
노이야기'56번 포르투 길3 글 참조)에서.
지스뜨리뚜(distrito/縣)는 다르지만 전일에 1박한 이스뽀젠지(Porto)와 같은 위도(緯度) 상이다.
그 때도 축제중이었으며 각 마을들이 출품한 다양한 십자가탑들이 장관이었다.
특히 극동 늙은이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니 악단(?)의 라이브 음악이 나올 때마다 남녀노청
이 친소 불문 맞잡고 덩실덩실 추는 사르다나(.Sardana) 춤이었다.
(Catalonia 지망이 발원지지만 이즘에는 전국적이 되었다는 춤으로 양손을 맞잡은 원형의 대소
그룹이 양팔을 위아래로, 전신을 앞뒤로 가볍게 움직이는 율동이다)
정오가 다가오기 때문인가.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데, 잘 꾸며진 축제장(강변) 주변의 식당들에서 새어나오는, 조리중인
음식 냄새가 공복을 자극했다.
점심으로는 이르지만 11가 넘었으므로 아점(아침 겸 점심)이라면 알맞은 때니까.
하구, 강변의 식당이라 해물이 주 식단인데, 음식점의 출입구 옆에 서있는 당일의 메뉴판에서
뜻밖에도 '보까디요'(bocadillo)를 발견했다.
바게트 속에 바게트 길이에 맞춘 고기를 넣은 스페인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김밥 처럼 휴대가
편한 바게트 샌드위치(baguette sandwich)다.
알베르게에서 만들어 먹기 편하고, 음식점에서 먹다 남거나 식사 시간이 부족할 때 테이크어웨
이(takeaway)가 용이해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까미노 메뉴다.
바게뜨의 길이와 두께, 내용물(쇠고기, 돼지고기, 생선 등에 따라 식단 이름이 다름)의 양(量)이
주인의 인심을 헤아리게 하는데 이 집 주인은 무척 후(厚)한 듯 반토막도 먹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와 달리 肉質은 등급을 메길 필요 없을 만큼 좋으니까)
드물게 양이 많고 맛도 좋으며 아점이라 많이 먹힐 듯 했는데도.
내가 부탁하기 전에 테이크어웨이를 제안한 주인은 뻬레그리노스(특히 늙은이)에게 각별한가.
뽀르뚜길에 들어선 이래 가장 확실한 만복(滿腹) 상태가 되었다.
한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불볕이 작열하는 시간대의 만복에는 시에스따(siesta)가 절대적인데도
야속하게도 간단없이 걸어야 했다.
4년 전의 체력으로, 80대에 70대 후반 경력으로 계산한 일정이라 나태하지 않았음에도 해안에
(日沒 前) 당도해야 하는 뽀르뚜가 아직도 25km나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라면 아무리 소중한 약속이라 해도 연기가 불가피하겠지만 시에스따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25km는 벅차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거리 아닌가.
아비 강 다리 위를 걸을 때, 다리 밑을 오가는 유소년들의 쏜살 같은 카누들이 볼만 했다.
작은 카누들(canoe)도 앙징스럽지만, 초등학생이 될까말까 한 꼬마들의 합동심도 칭찬받을 만
하다고 생각되었다.(다인 카누는 힘을 한데 모아야 하는 경기니까)
어린이들이 강과 바다에서 카누 또는 서핑(surfing)을 즐기는 것이 신기한 볼거리는 아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 꼬마 스케이터(skater) 또는 스키어(skier)가 되는 겨울 내륙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으니까.
볼런티어 Filipe Gomes
N13국도를 따라 강을 건넌 후, 한여름 한낮의 만복으로 인해 느슨해진 탓이었는가.
아주라라(Azurara), 아르보리(Arvore), 민델루(Mindelo)에 이어 N13국도와 A28고속도의 교차
마을인 모디바스(Modivas)까지 지자체 빌라 두 꼰지의 소교구마을들을 무심코 지나쳤으니.
지도에 따르면 6.7km가 되며 시계는 1시간 반을 걸었다고 알렸다.
아비 강 다리 남단에서 국도를 떠나 우측의 골목길로 들어야 해안으로 이어지건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내려가 있고, 이후의 N13국도는 지나치게 내륙으로 치우치는 길이고,
고속도로(A28)가 해안에 근접하고 있으나 걸을 수 없는 길이라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챙이 있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궁리했지만 막연할 뿐이었다.
사람이 그리운 참인데, 어느 쪽에서 왔는지 불쑥 나타나 옆에 앉은 젊은남이 무척 반가웠다.
모자란 데가 있는 듯 한 느낌이기는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싶어서 그에게 물었다.
영어로 물었으나 반응이 없고 스페인어로 물어도 무반응인데, 뽀르뚜갈어는 내가 모른다.
마임(mime/무언극)하듯 온몸으로 물은 것은 "마또지뉴스(Matosinhos)행 버스가 있는가"였다.
이해했는지 비로소 두 마디로 응답한 그.
이번에는 그의 두 단어 응답에 반응이 없는 나를 안타까워하는지 청년은 같은 말을 거듭했다.
우리 앞에 검은 밴(van)이 멎고 차에서 내려 우리를 유심히 살핀 장신의 중년남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듯이 보여 해결사를 자임하려고 내린 듯.
전말을 들은 중년남은 젊은이에게 이미 한 말을 다시 하도록 종용한 듯, 청년이 한 2단어 말을
들은 그(중년남)는 박장대소했다.
청년의 말은 뽀르뚜갈어 "무이뚜 론지"(muito longe)였고, 너무 멀다(too far)는 뜻이라니, 버스
편의 유무에는 동문서답 아닌가.
어이없는 해프닝에 불과한데도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그는 나를 마또지뉴스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자기의 목적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아예 뽀르뚜까지 거쳐서 가겠다고 했다.
아비강 남안인 아주라라 지역이었다면 모두 사양했을 것이지만, 1시간 반을 되돌리면 3시간의
낭비가 되며, 시간과 체력 모두 절대 부족이 되므로 제2 제의만 사양하기로 했다.
자기의 제의를 마다하는(?) 늙은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듯 "단지 돕고 싶을 뿐"임을 강조한 그.
싫거나 의구심 때문이 아니고 비록 늙은이라 해도 걷는 뻬레그리노(caminante peregrino)라면
사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첫 제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도 자괴할 일이거늘 하물며.
소규모 무역업에 종사하며 한국과도 거래한 적이 있다는 그.
거래는 했으나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소위 재미를 보지 못한 듯.
거래를 계속하지 않고 그만둔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말하려 하지않아서) 내 6.000여km 까미노
에서 이 정도라도 한국과 유관(有關)한 사람을 만나기는 그가 유일하다.
전회(前回)에서도 언급했지만, 까미노에는 정치 체제 또는 종교에 관계 없이 북한을 제외한 온
세계 모든 나라의 남녀노소가 몰려들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한국과 직 간접으로 관계가 없거나 한국을 모르는 사람만 선별, 뻬레그리노스
의 자격을 부여한 것 처럼 한국과는 무관하거나 한국에 무지한 사람들 뿐이다.
그게 아니면 내가 까미노에서 거동하는 동안에 나와의 조우(encounter)는 그런 조건의 사람만
가능하도록, 어느 누가 개발한 특단의 장치가 암암리에 작동중인가.
그럴 까닭이 없으며 터무니없는 상상인데, 하도 어이없게도 만나는 족족 실망스러우니까 이런
극단적 몽상(?)까지 해보는 것이다.
중년남은 마또지뉴스 해변의 아네모나 로터리(rotunda da anémona)에 나를 내려놓고 갔다.
헤어지면서도, 내가 원하면 뽀르뚜를 거쳐서 가겠다는 볼런티어(volunteer) 의지를 내보였다.
(자기를 알리는 e-메일을 보내겠다며 내 주소를 가져갔는데 다음날 새벽에 메일이 왔다.
자기 소개는 두 단어로 된 이름 'Filipe Gomes' 뿐인 것이 유감이지만, 내 여정의 완수를 빌어준
그에게 나와 함께 한 핸드폰사진을 바로 보낼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거대한 조각상 , 그의 이름은 "그녀는 변화한다"(She changes)
너른 호뚠다(rotunda/로터리) 중앙에 25 ~50m 높이의 3개 지지대 위에 대형 조형물이 공중에
떠있듯 앉아 있다.
직경 45m에 20톤이라는 거대한 그물형 강철 링이 바람 따라 진동할 때는 경이롭단다.
나는 그 장관을 목도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현존하는 미국 굴지의 조각가, 섬유 예술가인 작가
(Janet Echelman/1966년~ )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귀국 후에 내 나름의 애를 썼다)
미국의 조각가 재닛 에힐만이 지자체 마또지뉴스의 자금을 받아 제작한 공공 조형물.
2005년, 40세 전의 소장 예술가에게는 최초의,기념비적이며 영구적 야외 조형물이 마또지뉴스
(Porto縣) 해변, 하이웨이 로터리(Praça da Cidade do Salvador) 중앙에 설치되었다.
"말미잘(anémona)의 움직임을 모방한 것"이라는 말은 악의가 아니면 경솔과 무지의 폭로다.
"She changes"(그녀는 변화한다?) 라는 주제의 이 작품은 전통적인 현지 레이스(Portugal local
lace), 어량과 어구(魚梁漁具), 줄무늬 굴뚝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니까.
(이 도시는 이 조형물을 그래픽 심벌/graphic symbol로 만들었단다)
이 조각상이 그녀를 공공예술 분야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받게 하였다는데, 정작 조각을 공부해
본 적이 없으며 대학 졸업 후 일곱 곳의 미대에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다는 재닛 에힐만
그랬음에도 작가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10년동안 그림을 그리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풀브라이트(미국의 Fulbright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인도에 간 것.
그러나, 약속(그림전시)을 지키기 위해 보낸 물감의 증발로 인해 다른 작업이 불가피해진 그녀.
조각으로 유명한 어촌해변을 거닐다가 그물을 모래더미에 올려놓는 어부들의 모습에서 무겁
고 단단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부피 큰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보았다.
그 어부들의 힘을 빌어서 제작, 장대 위에 올려 놓은 조각(그물)의 형태가 바람 따라 끊임 없이
바뀌는 사실을 발견한 조각가 재닛 에힐만.
전통공예공부를 계속하고 장인들과 협업하면서 흠뻑 매료되어 작품의 대형화를 시도한 그녀.
어부들과 함께 150만개 매듭으로 엮어 만든 그물을 마드리드에 일시적으로 설치했다.
포르뚜의 해안가를 새로 디자인하는 스페인의 도시계획전문가 마누엘 솔라 모랄레스(Manuel
Sola Morales/1939~2012). 이 거대한 작품을 건성으로 보았을 리 없다.
그가 이 해안가에 영구 전시할 작품을 만들어줄 것을 그녀에게 제안함으로서 성사된 것이란다.
<2년간 자외선, 소금, 대기오염을 견디며 동시에 바람따라 유연하게 움직일 정도로 부드러운 섬유를 찾았다.
보통의 바람에는 우아하게 움직이고 허리케인 처럼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피터 헤펠(Peter Heppel)이라는 뛰어난 항공 엔지니어를 찾아냈고 그가 정밀한 형태와 유연한 움직임을 모두
갖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손으로 만든 매듭은 허리케인에 견디지 못하므로 내가 아는 방식으로는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그물 공장과 관계를 맺고 그 공장의 수많은 기계들을 파악한 후 그것들을 이용하여 레이스 같은 그물을
짜는 법을 알아냈으며. 3년 후, 우리는 4645㎡의 거대한 레이스 그물을 높이 올려 세웠다.
내가 상상해 온, 영구적이면서도 변형되지 않는 그물 조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녀가 밝힌 조각상 "She changes"(그녀는 변화한다)의 탄생 비사(秘史)다.
2015년 6월 17일 11시 반쯤에서 13시 49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한 순간도 상상해 본 적이
없으며 하도 의외의 일들이라 찜통 더위도 잊고 한동안 멍청스럽게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도 정점은 초대형 조각상(anémona)이었다.
무엇에(또는 누구에) 영혼을 빼앗긴 몸이 이런 형국일까.
검은 밴이 떠난지 한참이 지났을 때까지 그랬다.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해변의 '올라'(Ola) 노점에서 산 아이스크림(1€) 효과?
뽀르뚜갈인들의 사랑받는 브랜드인 올라 아이스크림의 자극으로 정신이 돌아왔는가.
(뽀르뚜갈語 Ola는 스페인語 Hola와 발음도 뜻도 같다. 영어의 Hello와 同意)
빠듯할 수 밖에 없는 일정에 스스로 찾아온 3시간 반이라는 행운이 마또지뉴스의 신(new)랜드
마크(landmark)에 심취되어 혼몽상태에 있게 했으니까.
아쉬움도 있다.
걷지 못한 13km의 해변에 어찌 아쉬움이 없겠는가.
두 지자체 빌라 두 꼰지와 마또지뉴스 경계 지역의 해변 마을들을 건너뛰었는데(skipped)
뽀르뚜 길 620km에서 13km는 2%에 불과하지만 여하한 길 13km를 대체해도 그 길(두 지자체
사이)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매정하기 짝 없으나 연로자 또는 병약자에게는 적극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을 자임
하려는 그들의 선의를 뿌리쳐야 할 때(Filipe Gomes의 제2 제의처럼)가 종종 있는 이유다.
콩가루 가계 근친혼
14시쯤,
한결 여유로워진 기분으로 레사 강(Rio Leça) 하구의 마또지뉴스 해변에서 남행을 재개했다.
레이송이스 항(Leixões港)과 아직 오픈 전인(내가 지나간지 36일 후인 2015년 7월 23일 open)
레이송이스 크루스 터미널(Leixões Cruise Terminal/여객선 전용)이 이채로운 해변에서.
한반도의 태평양해안에서는 상상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뽀르뚜갈 북중부의 대서양해안은
천혜의 해수욕장들이 간단없이 연속적이다.
따라서 많은 피서객들이 몰리는 소위 시즌에도 북적대는 형국이 아닌 것은 분산효과일 것이다.
지자체 마또지뉴스 지역은 조각상 아네모나 호툰다(rotunda da anémona)에서 끝나고 이남은
뽀르뚜 지역이지만 경계를 느낄 수 없도록 연속되는 해변이다.
소 교구마을이 마또지뉴스(지자체 Matosinhos의 同名)에서 니부질지(Nevogilde/지자체 Porto
의)로 바뀐 것도 모를 만큼.
뽀르뚜갈의 면적은 이베리아 반도의 15.3%(92.391k㎡)로 84.6%(505.990k㎡)인 스페인의 18%
쯤 되는데 인구는 스페인(46.700.000)의 23%(10.477.800)다.
인구밀도가 스페인의 90명(k㎡) 보다 높은 114명(k㎡)이다.
스페인에 비해 과밀함을 의미하는데 까미노의 일상에서도 절로 체감된다.
스페인에서는 마을과 마을, 해변과 해변이 절로 구분될 만큼 공간이 여유로우나 뽀르뚜갈에서
는 주시해야 가능할 정도로 대부분이 밀집 상태니까.
해안로(Porto까지)의 마지막(목적지) 10여km를 남겨놓고 오후 2시를 조금 지난 때.
한반도의 남쪽 해안 3면을 반 시계 방향(西- 南- 東)으로 걸었을 때 처럼 까미노 해안로(Via do
Castelo do Queijo/국내는 77번국도)를 버리고 해안에 밀착해서(littoral/沿海) 걷는 해변길.
13km여를 단축시켜준 F.고메스가 없었다면 꿈마저도 꾸지 못했을 해변(Praia de Matosinhos)
을 20여분간 거닐 듯 하여 또 하나의 요새(Forte de São Francisco Xavier)에 당도했다.
추측, 추정만 무성할 뿐 축성시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상 프란씨스꼬 샤비에르 요새다.
기존의 원시적인 구조물을 요새로 축성한 시기는 15c다.
1643년에 뽀르뚜갈 왕 주앙4세(King John IV/1604~1656)가 신축령을 내렸다.
스페인의 무적함대(the armada of Galicia)가 해안을 위협하던 1661~62년에 건설했을 것 등등.
일명 '께이주 요새'(Castelo do Queijo)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까스뗄루 두 께이주해변(Praia do
Castelo do Queijo)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듯.
상 주앙 밥띠스따 요새가 당시에는 빌라 두 꼰지가 중요 요충지였음을 말해 주듯이, 이 께이주
요새도 뽀르뚜갈에서 뽀르뚜의 위상이 어떠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조상이 세운 중요 건축물들이 이 시대의 후손들에게는 알찬 수입원인 관광자원이 되고 있는데,
이 요새는 시설의 전용(轉用) 대신 0.5€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2015년 6월 17일현재)
요새(forte) 지근 해안로의 대형 로터리 중앙에는 위엄있게 압도해 오는 말탄 기사가 있다.
'끌레멘치' (O Clemente/仁者/the Clement)라고 불리기도(nickname) 한 뽀르뚜갈 왕 주앙6세
(João VI/John VI/1767~1826 재위 1816~1826)의 동상이다.
그(João VI)는 숙질(叔姪/3寸)간에 근친결혼한 뻬드루 3세(Pedro lll)와 마리아 1세(Maria l) 부부
사이에서 태어남으로서 그의 가계는 숙부가 외할아버지가 되는 콩가루 가계다.
주앙 5세(João V)와 오스뜨리아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부부가 낳은 주제 1세(José l)는 주
앙 6세의 아버지 뻬드루 3세의 친형이며 어머니(주앙 6세의) 마리아 1세의 친정아버지니까.
주앙 5세의 두 아들, 주제 1세와 뻬드루 3세는 친 형제간이면서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된 것.
(형의 딸과 결혼했으니까)
합스부르크 가(Haus Habsburg)는 유럽의 왕실 가문 중 영향력이 가장 컸던 가문의 하나였다.
오스뜨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이나 지배했으며 1438년~1806년 간에 신성 로마제국의
제위(帝位)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연달아 나왔으니까.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왕도 외가로는 합스부르크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영향력 강화의 비결은 근친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흥성(興盛)이 근친혼으로 시작되었다면 그들의 쇠망(衰亡)도 근친혼의 결과였다.
이 아이러니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신라와 고려도 예외 아니었다.
유럽의 그 시기에 중국의 유교사상을 윤리 도덕의 골간으로 하여 태어난 이조(李朝)는 이 악습
(근친혼)을 극복한 듯 했으나 당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이 시대는 종래의 도덕과 윤리를 기준하면 콩가루집안이 더 비일비재하지만.
100% 인위 공원인데도 100% 자연 공원이라는 착각을 갖게 하는 해변공원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마지막 해안로는 몬떼비데오 길(Av. de Montevideu) ~ 브라질 길(Av. do
Brasil)의 해안쪽으로 길게 조성된 해변공원(Jardins da Avenida de Montevideu)을 지난다.
자연은 한면이 대서양 해변이라는 것일 뿐 100% 인위공원인데도 일부 편의시설 외에는 100%
자연공원이라는 착각을 갖게 하는 해변의 공원이다.
장관인 것은 아름드리 코르크(cork) 거목들이다.
1914년에 리모델링했다니까 그 때 심었다면 갓 넘은 100살에 이처럼 거대하게 자란 나무들.
수명이 200살(150~250)이며 재생 능력이 탁월하다니까 살아온 세월만큼 걱정 없이 더 살겠다.
또한 100년 전의 디자인인데 해안의 지형에 조화롭게 조성한 복층(2~3층) 해변 산책로와 우람
하게 자란 후의 분위기(調和)까지 고려하여 선정한 수종(樹種) 등 그들의 지혜와 노고에 경탄
하고 통과세(?)로 경의를 바치며 공원을 벗어났다.
우리도 느티나무, 팽나무 등 거목은 정자나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해변에 띄엄띄엄 심어도
오래잖아 절로 조성되는 해변공원을 벤치마킹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변에 형성되는 우거진 나무그늘에는 물고기들이 모인다는 사실도 함께.
연수라는 명목으로 해외에 나가는 해당 분야의 공무원들도 그 비용이 국민의 혈세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무위한 관광에 낭비하지 않고 각성하고 실천하게 되련만.
벗어난 줄 알았으나 이름을 바꾸어 계속되는 공원.
포스(Aldoar, Foz do Douro e Nevogilde) 마을의 뻬르골라(Pergola da Foz).
(포스 두 도루는 2013년에 알도아르, 니부질지와 합병한 freguesia다)
주로, 덩굴 식물이 타고 올라가도록 정원에 설치하는 아치형 구조물을 말하는데 뽀르뚜의 포스
해변에 축조된 뻬르골라는 대형 까떼드랄의 긴 회랑을 연상케 하는 산책로다.
1930년, 지중해변 니스(France Nice)의 산책로(Promenade des Anglais)를 걸으며 그 산책로에
심취하게 된 뽀르뚜 시장(당시)의 부인.
이 산책로를 스케치하여 돌아온 그녀는 남편인 시장에게 졸랐다.
뽀르뚜해변에 쁘로므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를 닮은 산책로를 조성해 달라고.
그래서 대서양 해안에 포스의 뻬르골라(Pergola da Foz)가 탄생하게 되었다나.
전해오는 루머(rumor)란다.
어쨌거나,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대서양을 감상하기 최적의 위치에 황금색 신고전주의 스타일
구조로, 뽀르뚜의 상징적 이미지(iconic images) 중 하나라는 뻬르골라가 지어졌다.
도로명을 바꾸고(R. Cel. Raúl Peres ~ Av. de Dom Carlos l로), 백사장(beach)의 규모도 작고
뜸한 해안로(Camino costal)는 도루 강 (Rio Douro) 하구를 지난다.
방파제 끝에 등대가 있는 것은 당연하나 해상공원으로 조성하여 돋보이는 이 하구에도 요새
(Fortaleza de São João da Foz)가 있다.
1570년에 착공하여 1647년에 완성했다니까 공기(工期) 77년의 요새다.
도루(Douro)부두를 보호하기 위해서 축성했다지만, 정작 완공 후에는 군사적으로 실효적이지
못했으며 오늘날에는 각종 전시회와 예술 행사 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단다.
엑스트라 출연료?
이 지점 이후의 뽀르뚜 해안은 눈에 익었다.
전번(2011년 5월 6일)에 뽀르뚜의 다운타운에서 여기 까지 걸었던 해안이니까.
그 때, 묵시아(Muxia/Spain) ~ 리스보아(Lisboa/Portugal) 국제선 버스(ALSA) 편으로 뽀르뚜에
도착해 까떼드랄(Catedral Se/대성당)에서 순례자여권(Credential/뽀르뚜 길)을 받은 후.
산띠아고 길 도루강변의 호스텔(Pousada de Juventude)을 숙소로 하여 백팩을 두고 나온 때는,
일몰 까지는 2시간여가 남은 오후 6시경이었기 때문에 무료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붉푸른 다이아몬드라 할까.
석양 볕을 받은 도루 강 하구가 그랬다.
그 때, 나는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나폴리 항(Italia)은 뽀르뚜 항에 족탈불급이라고 평했다.
(까미노이야기54번글 참조)
무엇에 홀린 듯 배고픈 것도 잊고 하염없이 거닐다가 하마터면 저녁식사도 못할 뻔 했으니까.
도루 강안을 따라 동진하여(Av. de Dom Carlos l~R. do Passeio Alegre) 좌우의 예배당(Capela
de Nossa Senhora da Lapa과 Capela-Farol de São Miguel-o-Anjo)을 지났다.
차로(R. do Passeio Alegre ~ R. de Sobreiras ~ R. do Ouro로 이어지는)를 떠나 해안에 밀착한
2km여의 해변길을 따라서 전번의 숙소(Pousada de Juventude) 앞도 통과했다.
그 차로 이름 "후아 두 빠세이우 알레그리" (Rua do Passeio Alegre)는 즐거운 산책로(The Joy
ful stroll)라는 뜻인데도 버리고.(그 구간은 까미노 해안로가 아니기 때문에?)
조각상 '천사 가브리엘' (/Anjo Gabriel), 오브세르바또리우 지 아비스(Observatório de Aves/
조류관측소/Jardim do Cálem자르딩공원) 등도 4년 전과 여일했다.
'황금로'(黃金路/Rua do Ouro)라는 뜻인 강변길, 후아 두 오루 위로 그 길을 가로지르며 도루
강의 양쪽 지자체(Porto와 Vila Nova de Gaia)를 잇는 다리가 놓여 있다.
공기(工期) 6년 1개월(1957년5월~1963년6월)의 이 다리는 일명 아하비다 고속도로다리(A1)로
불리는 '뽄치 다 아하비다'(Ponte da Arrábida).
총길이493.2m,, 폭26.5m, 높이70m, 6차선에 보도 2개로 되어 있으며 최장 스팬(span)이 270m
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철근 콘크리트 아치형 다리(당시에는)였단다.
아하비다 다리 밑을 지난 오루 길은 긴 강안육교(Viaduto do Cais das Pedras) 이후 몽시께 길
(R. de Monchique), 노바 다 아우팡지가 길(R. Nova da Alfândega)로 이름이 바뀐다.
마또지뉴스 해변 이후 극히 일부 외의 전 구간에서 해변에 충실해 온 까미노(해안로)는 경전철
정류장(Infante) 앞에서 해변(강변)을 떠난다.
11시 방향의 까떼드랄(Catedral)을 향하여 인판치 동 엔히끄 길(R. do Infante Dom Henrique)
로 해서 복잡한 다운타운으로 들어간다.
근무 마감시간이 임박한 때 끌레리구스 교회(Igreja dos Clérigos)와 까떼드랄, 뽀르뚜대학교
간을 달리듯 뛰어다니는 큰 백팩의 늙은이가 안타까워(안쓰러워?) 보였던가.
볼런티어(volunteer)를 자청한 뽀르뚜게스(portugues)는 카를루스 안드라지(Carlos Andrade).
마이아(Maia/Camino Portugues 내륙길의 지자체)의 집으로 퇴근 중이라는 46세(당시)의 그는
내가 점찍은 숙소(Pousada de Juventude)까지 나를 태워주었다.
마이아의 알베르게가 좋다며 더 가기를 제의하였지만 나는 '까미난치'(Caminhante/스페인어
Caminata/도보순례자)라며 사양했던 그 때(2011년) 일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갔다.
그런 사연이 있음에도, 그 지역을 외면하고 전방 1km 남짓의 동 루이스1세 교(Ponte de Dom
Luis l)까지의. 강변길을 고수한 것은 까닭이 있다.
4년 만의 재회를 약속한 로저(Roger) 교수의 거주지가 뽀르뚜라고 하나 실은 도루 강 건너편
인 지자체 빌라 노바 지 가이아(Vila Nova de Gaia)다.
바렌사의 야외식당에서 최고급 비노(vino/wine)라며 나를 위해 거금(?)을 쓴 그 술의 원산지.
유명한 뽀르뚜 와인 수출의 중추 역할을 해왔으며 도루(douro)은행에는 주요 브랜드의 보데가
(bodega/양조실과 저장소)가 있다는 도시다.
수세기에 걸쳐서 도루 강의 중간 계곡 농장에서 특수 보트를 타고 도루강을 통해 이곳(Gaia)에
도착, 저장하고 병에 담았다니까.
이베리아 반도에서 3번째(1038km의 Tagus, 930km Ebro에이어)로 긴 도루 강(R. Douro/Spain
에서는 Duero 강)은 까스띠야 이 레온지방, 소리아 주(Castilla y León, Soria/Spain)의 국립공원
(fuentes del duero/해발2.160m Pico de Urbion/Duruelo de la Sierra)에서 발원한다.
총 길이 897km 중 스페인 지역 572km를 흐르다가 까스뜨로 댐(Presa de Castro)을 통과한 후
협곡 지대가 대부분인 112km에서는 양국(Spain과 Portugal)의 국경을 이룬다.
남은 213km의 강줄기는 뽀르뚜갈의 북부지방을 관통해 대서양에 닿는데, 마지막으로 뽀르뚜
시와 빌라 노바 지 가이아 시를 가르며 미려의 극치를 연출한다.
뽀르뚜 와인의 포도밭(quinta/농장)은 국경 지역을 벗어난 빌라헤알(Vila Real)과 비제우(Viseu),
양현(縣/distrito) 이후 뽀르뚜 시의 상류 사이, 도루 강 양안에 널리 퍼져 있다.
도루강을 낀 뽀르뚜의 구 시가지와 포르투갈 상류 계곡의 와인 생산지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Roger)가 나를 맞으러 뽀르뚜까지 나온다면 루이스1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 건너
첫 집이 다리 밑 강안에 자리한 바르((Bar Restaurante Ponte Pensil)다.
그래서, 추억의 반추(남은 Camino Costal)를 포기하고 강변길을 고집한 것인데, 자기의 편의를
배려한 내 마음을 그가 알려나?
5년(1881년 11월~1886년 10월)의 공사로 완성되었으며 건설 당시의 국왕인 루이스 1세(1838
~1889/재위1861~1889)의 이름을 땄다는 '동 루이스1세교'(Ponte Dom Luis l) 앞에 당도했다.
상층 395.25m(경전철, 보행자전용), 하층 172m(차로, 보행자로)의 길이와 넓이 8m, 높이 85m
인 아치형 복층 구조의 다리 앞에.
딱딱하고 거칠다는 철구조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1 50년의 세월이 간 오늘에도 규모와
미관을 자랑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다리다.
상봉 장소로 점찍은 바르에서 서빙 남의 도움으로 전화했으나 로저의 전화기는 통화중.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시끌벅적해진 다리 밑 수상(水上) 바르.
그런 와중에도 한 호의적인 중년남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자기 전화기로 로저와
통화하도록 도움을 주었다.(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한국의 가족 외에는 아무와도 통화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전화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다)
세련미를 느끼게 하는 중년남의 이미지는 극동인(韓 中 日)이지만 한국인은 아니다.
영어의 발음으로 보면 중국인도 아니다.
그 중년남이 내게 준 e-메일 주소의 이름(akymoro)으로 보아 일본계 뽀르뚜게스?
곧 알게 된 것은 그가 한 촬영팀을 이끌고 왔다는 정도였다.
돌연 바르가 소란스러워졌다.
뽀르뚜의 한 TV방송국이 이 바르에서 드라마를 촬영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중년남이 이끌고 온
팀이 그들이라는 것
하필, 극동의 늙은 뻬레그리노가 까미노 친구인 뽀르뚜게스와 재회하려는 장소와 시간에 젊은
한 쌍의 사랑 데이트 신(scene)을 찍느라 법석인지.
하긴, 우선순위로 보면 내 예정보다 그들의 일정(schedule)이 먼저일 것이다.
내 결정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지만 그들의 계획(촬영장소와일시)은 여러 날 전에 일괄해서
결정되었을 것이니까.
극소수의 엑스트라(extra) 외에는 모두 자리를 비웠는데 내게 호의적이었던 중년남이 PD?
그가, 촬영중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나를 극소수에 포함시켰으니까.
이 곳(Bar Restaurante Ponte Pensil)에서 로저와 만나기로 하는 통화를 곁에서 들었으므로 내
처지를 배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베이루(Aveiro/뽀르뚜 縣의 남쪽 끝과 접경縣이며 동명 지자체)에서 열차 편으로 귀가중이며
60분~120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으니까.
시차를 두고 도착한 젊은 남녀의 섬세한 애정 표현으로 시작한 촬영이 NG(no good) 없이 순조
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며 로저가 올 때까지의 1시간 안에 끝났다.
국내외를 통털어서 엑스트라가 된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들이 가고 평상으로 돌아온 잠시 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신 맥주값을 중년남 팀이 지불했다는 것.
엑스트라 출연료?
늙은 뻬레그리노가 1시간짜리 보조 출연자(extra) 아르바이트(Arbeit)를 했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