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ure(s )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는 1946년 영국의 Leicester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자로 일했다. 그 이후 문학 편집자와 영화 평론가,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1980년 <메트로랜드>로 서머싯 몸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전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수의 작품이 영국뿐 아니라 미국,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서 주요 문학상과 문예 훈장을 받았다.
작가는 사랑과 상실, 역사와 진실, 인간의 기억과 삶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변주해 왔고, 그가 제기한 철학적 질문들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일흔여덟에 완성한 자신의 끝을 예감하며 집필한 자전적 소설로 줄리언 반스 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은 작가가 전에 쓴 몇 권의 책에서도 시도했던 새로운 방식 -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합쳐진 - 의 하이브리드 소설이다.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철학적 탐구와 의학적 자료 분석을 통한 연구가 그의 지휘에 따라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하모니를 이룬다. 실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허구와 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자신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마치 작가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어느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어느 소도시의 한 카페 실외석에 앉아 있는 작가와 독자의 이미지”를 경험하는 듯했다.
인간의 기억과 삶 그리고 사랑과 상실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무겁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는 매우 솔직하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내 보인다. 지적인 유머를 바탕으로,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비속한 표현도 거침없이 쏟아낸다.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혈액암 진단을 받고 난 뒤 “이건 무작위적이고, 아무런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저 우주가 자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작가는 반세기에 걸쳐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일기가 그렇듯이 다른 데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 순간에 소진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불행하고 황량하고 거짓되고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편협한 시간은 일반적으로 억눌렸다가 나중에 슬픔, 격노, 자기연민과 함께 일기에서 범람한다”라고 했다. 일기에 개별적인 날이나 달을 표시하지 않고 매해 출발점만 표시한다. 일이 있을 때 타자로 쳐서 보통 192페이지짜리 A4 공책 한쪽 면에 붙여 놓는데 한 권당 96페이지가 된다. 현재 그의 일기는 18권째다. 각 페이지에 대략 450단어가 들어 있다고 하면 약 777,000단어가 된다.
작가는 인간의 기억이 과연 믿을만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쇠퇴하고 변형되는 것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방사선과 자문의로 일하는 친구 닥터 재키가 보내주는 의학 저널의 기사에서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불수의 자전적 기억 involuntary autobiographycal memory’을 불러일으키는 연구 결과가 <뉴롤로지 클리니컬 프랙티스 Neurology Clinical Practice>에 발표되었다. 연구 대상은 좌측 시상 후부 출혈성 뇌졸중을 겪은 마흔다섯 살의 남자로 “애플파이를 맛보면 자신이 그때까지 맛본 모든 파이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 기억은 정확히 시간순으로 경험되며, 마치 폭포처럼 머릿속으로 밀려온다”라고 밝혔다.
작가는 경악했다. “잊힌 기억들이 그런 식으로 고속 공격하는 그 시각적 폭포를 기억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 것일까” 또한 “그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기억이 그가 먹은 파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담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기억이라고 여기는 것은 평생에 걸쳐 자주 또는 가끔 떠오르면서 말로 옮길 때마다 조금씩 변형을 일으켜 마침내 우리가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형태로 굳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프루스트를 자주 인용한다. 주로 반박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첫 권의 서장 끝에 ‘마들렌 사건’을 기록했다. 마들렌은 가리비 모양에 세로로 골이 파인 통통하고 작은 케이크인데 차에 담가서 먹었을 때 본인도 모르게 ‘불수의 기억 involuntary memory’을 불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느긋하고 반은 수의적이고 반은 자동인 기억’이며 ‘불수의 자전적 기억’은 아니다. 작가는 “마들렌 사건은 그 자체로
삶에서 진실이었다고 해도 초월적 열쇠인 동시에 허구적 장치로 간주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뒷받침할 이론을 탐색하는 소설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뇌의 불가사의한 현상의 하나로 ‘은재隱在 기억’에 대해서도 다룬다.
“기억이 우리에게 장난을 친다” 는 이야기가 있다. 뇌의 짓궂은 책략 가운데 하나는 ‘은재 기억’으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 그것을 과거의 기억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새롭고 독창적인 생각으로 여기는 것이다. 니체의 사례가 있는데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의 텍스트 어느 부분에서 반세기 전에 출간된 책에 나온 장면을 단어 하나 안 틀리고 되풀이했다. 니체는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에 실제로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를 쓸 때는 편집증을 동반한 인지 능력 감퇴로 고생하고 있었고 이런 ‘기억의 재부상’이 니체에게는 막 떠올린 독창적인 생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설의 흐름은 친구였던 두 사람과 작가에 관한 이야기가 40년이라는 공백을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뉜다. 두 친구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절대 소설로 쓰지 않겠다고 ‘성경을 두고’ 맹세했지만,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약속을 깨고 두 친구의 이야기를 마지막 소설에 쓴 자신이 그들의 삶에 기생한 부도덕한 사람임을 고백한다. 이야기는 실화지만 그들의 이름을 바꾸었고, 배경에 관한 서술은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두 친구를 보지 못한 40년의 기간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시작과 끝만 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작가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입학해서 근대어(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했지만, 두 학기 뒤에 별로 ‘진지한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 문학은 혼자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 철학과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하지만 당시로는 너무 ‘진지하다’고 판단되어 두 학기 뒤에 다시 프랑스어 공부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소설 속 주인공인 두 친구, 스티븐과 진을 각각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열여덟 달 정도 이어지다가 졸업을 앞두고 스티븐과 진이 헤어지면서 단절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어느 날 스티븐으로부터 편지가 왔고, 작가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 진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는 스티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무대를 기획한다. 스티븐과 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는 “두 오랜 친구를 그들 서로의 삶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다시 데려온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사라진’ 40년의 세월이 채워지지 않고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꽤 자주 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예전과 같은 친밀감이나 동지애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과 진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두 사람은 각각 따로 옛 친구를 찾아와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진은 말했다.
“소설가 아저씨, 사랑은 현실에서는 당신이나 당신 족속이 묘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는 아무도 내게 한 적이 없는 질문, 그리고 나 자신도 한 적이 없는 질문의 답인 것 같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두 친구와의 약속을 깨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은 자신의 개인적 사례, 자신의 곤경, 자신이 만족스럽게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이 소설에서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두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관찰자로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자신이라면 소설에서 제대로 묘사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고 또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들 관계에 대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스티븐은 진 1부와 진 2부 사이에 보낸 40년의 삶을 이제는 귀중하게 여기기는커녕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마치 그 시간 동안 중요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혼 후 지난 30여 년 동안 상대적으로 애착 없이 살았기 때문에 1부에서 2부로 순조롭게 넘어가는 것이 간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진의 중간 시기의 삶은 성취감이 컸다. 그녀는 스티븐이 다시 자기 삶에 나타나기 전에는 이따금 정리된 마음으로 그를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에게 애착이 없는 상태는 일종의 자유로 여겨졌으며, 이 최종 직전 단계의 삶에서 진지하게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자신이 요구하거나 원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에게는 두 사람의 삶이라는 원을 완성하는 극적이고 필연적인 결말로 보이는 것이 진에게는 흥미로운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사랑에 불을 다시 당기겠다는 결심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는 이미 충분한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이미 그녀 자신의 반려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비극은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비극은 사랑을 할 수는 없는데 그녀가 주고자 하는 것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 함께했던 정도의 기간이 지나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각각 실패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남은 생을 혼자 살았다.
“행복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아”라는 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진의 마음을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 관계를 기쁘게 여겼길 바란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 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라는 말을 남긴다. 참으로 다정하고 멋진 작별 인사이다.
나는 그를 만나서 즐거웠다. 지금까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 작품에서 만난 것이 미안하고 아쉬웠다. 그러나 나 같은 독자를 위해 그는 친절하게 말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책이 아직 스무 권 이상 있으니 이게 마지막이라는 게 크게 아쉽지 않을 겁니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그의 다른 이야기 속 세상도 계속 구경하려고 한다
첫댓글 반스의 소설을 작가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인터넷 북으로 읽으려다가 이주령씨의 독후감을 보고 읽어야 겠다고 미루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독후감을 쓰라고 독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용이 삽삽하니 딴전치며 읽어서 될 일이 아니다. 위에 글을 쓴 이주령씨에게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할 터이니 아마 밤 늦도록 책상 앞에서 끙끙대며 쓰지 않았을까 눈에 선하다.
자, 대강은 이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으니 이제부터 읽기 시작해도 될 것 같다. 읽어도 아마 생각이 안 나는 소설보다는 더러 끙끙대며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다.